I Reincarnated into a Game Filled with Mods RAW novel - Chapter (358)
외전: 성역 탐방 – 4
아우로라는 같은 침대에 잠들어 있는 12명 중에서 제일 먼저 눈을 떴다. 높디 높은 천장에 달린 샹들리에가 은은한 빛을 발했다.
뒤통수를 받친 베개도 그렇고, 몸을 지탱하는 침대도 그렇고, 따스한 온기를 전해주는 이불도 그렇고. 어느 것 하나 완벽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대로 다시 누워서 확 잠들어버리고 싶었다.
‘……허리 아파.’
하지만 초인적인 인내력을 발휘해 꾸역꾸역 몸을 일으키려던 아우로라는, 허리를 조금 들자마자 느껴지는 지독한 탈력감과 아랫배의 통증에 눈살을 찌푸리며 도로 드러누웠다.
‘다들 체력도 좋지.’
여기서 나이가 제일 어린 사람이 말하기엔 어색한 표현이었지만, 그럴 사정이 있었다. 꼬박 일주일가량을 시달리는 동안 체력의 한계를 느낀 건 아우로라뿐이었으니까.
당장 아랫배의 통증도 그랬다. 다른 사람들이었다면 신체 능력이 받쳐줄 테니 이런 통증을 느낄 일도 없었을 것이다. 반대로 아우로라였기에 제일 먼저 눈을 뜰 수 있었던 것이기도 했지만.
‘……똑같이 다뤄졌으면 몸이 못 버텼겠지.’
델타는 아우로라만큼은 일정 선 이상으로 과격하게 다루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당하는 쪽이 그래달라고 부탁해서긴 해도, 선을 넘은 델타는 보는 사람이 다 오싹해질 정도였다.
특히 마조 취향까지 있는 리제나 닉스가 저러다 죽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험하게 다뤄졌던 것과 비교해보면 아우로라에게 한 행동들은 오히려 과보호라고 봐도 무방했다.
‘어떻게 그런 걸 좋아할 수가 있지? 이해가 안 가네.’
기껏해야 엉덩이 스팽킹 정도가 끝이었던 아우로라는 세상 모르고 잠들어 있는 리제와 닉스를 번갈아 쳐다보며 넌더리를 쳤다.
대체 뭘 하면 그런 지독한 짓을 당하면서도 눈에서 쾌락을 뚝뚝 흘릴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자신은 설령 신체 능력이 받쳐주더라도 그렇게 당하지는 못할 것 같았다.
‘이제 좀 낫네.’
아우로라는 미네르바가 특별히 만들어준 콜라맛 사탕을 삼켰다. 마나를 다룰 수 없게 된 아우로라를 위해 치료 마법을 각인해둔 사탕이었다.
어금니 사이에서 부서진 사탕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자 온몸의 통증이 가라앉았다. 욱신거리는 아랫배만큼은 그대로였지만, 그건 통증이 아니라 쾌락에 가까운 감각이니 상관없었다.
몸을 일으켜 나체의 여자들로 뒤덮인 침대를 빠져나왔다.
‘미네르바 님은 왜 저러신대?’
분명 시간이 제법 흘렀을 텐데, 미네르바는 절정의 여운에 몸을 떨며 혀를 쭉 빼물고 반쯤 혼절해 있었다. 생각해봤자 답이 나오지 않을 문제였기에 깔끔히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침대를 빠져나온 아우로라는 제일 먼저 샤워부터 끝냈다. 다음 순서로 욕탕에 30분 정도 몸을 담그고, 헤어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린 후 옷을 갈아입었다.
물론 황제의 드레스가 아니라 민소매와 돌핀팬츠 차림이었다.
‘일주일 내내 섹스만 해댔는데 예의는 안 차려도 되겠지.’
아우로라는 잠꼬대조차 없이 죽은 듯 잠든 교황들의 옆을 지나 방을 나섰다. 그리고 분주하게 어디론가로 향하는 전투 수녀들을 발견했다.
수녀들은 아우로라와 마주치자 발걸음을 멈추고 머리를 숙였다.
“제국의 황제를 뵙습니다.”
“인사는 됐어. 무슨 일이길래 그렇게 바빠? 어디 가는데?”
척 보기에도 다급해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안 물어볼 수가 없었다. 몸은 저리도 분주한데, 얼굴은 황홀하기 짝이 없는 표정이었으니까. 호기심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치료실로 향하는 중입니다.”
“치료실? 누구 다쳤어? 아무리 봐도 누가 다친 얼굴은 아닌데.”
수녀가 고개를 저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았습니다. 성자께서 태양과 달의 곁으로 승천하셨는데, 그 파장을 느끼고 다들 실신해버려서 돌볼 일손이 모자란 상황이라더군요. 그래서 도와주러 가고 있습니다.”
‘아, 여신님 만나러 갔나 보네.’
성국에서 태양이나 달의 곁으로 승천했다는 말은 일반적으로 당사자의 사망을 의미하는 표현이지만, 델타는 예외다. 델타가 여신을 만나러 갔다면 그건 말 그대로의 의미였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이 정도로 요란하게 떠났다고? 델타가?’
눈에 띄거나 과한 관심을 받는 걸 별로 선호하지 않는 델타 성격상 이렇게 사방팔방에 알리면서 떠났을 이유가 없었다.
“너,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해 봐. 나머지는 하던 거 계속 하고.”
일단 일손이 부족하다고 하니 한 명만을 남기고 모두 돌려보낸 아우로라가 남은 한 명을 재촉했다.
수녀는 황홀한 표정을 유지한 채 설명을 이어갔다. 온갖 미사여구와 환희와 찬양이 한가득 섞인 설명이었다.
아우로라는 끙끙대며 그 속에서 핵심을 추려냈다. 핵심만 요약하면, 승천을 직접 목격한 건 아닌데 호수 쪽에서 발현된 신성력이 퍼져나가자마자 다들 본능적으로 알아차리게 됐다는 것이다.
“……그래? 일단 알았어.”
핵심만 요약해도 대체 뭔 소리인지 이해가 안 갔다. 하지만 성국은 이해하려 들수록 손해였기에, 아우로라는 어련히 대단한 일이겠거니 하고 수녀를 돌려보냈다.
수녀는 본인의 신앙과 신성력을 한껏 드러내는 옷자락을 나풀거리며 총총총 뛰어갔다.
“저것들은 왜 아침부터 저리도 분주하단 말이냐.”
“아, 고모님. 깨셨어요?”
두 번째는 의외로 카이킬리아였다. 아우로라는 카이킬리아가 벌써 일어났다는 사실에 진심으로 놀랐다.
“몸은 좀 어떠세요? 조금 심하게 당하셨던데.”
지난 일주일간 어떤 추태를 보였었는지 모두 지켜봤으니까.
그 자존심 강한 카이킬리아가 어린아이처럼 울부짖으며 혀 꼬인 소리로 제발 그만해달라며 애원하는 모습을 말이다.
“……보면 모르겠느냐. 아직도 몸 전체가 욱신거리는 느낌이다.”
카이킬리아는 벽에 손을 짚고 허리를 살짝 숙인 채 후들거리는 다리를 억지로 움직이고 있었다. 보면 모르겠느냐, 하는 말에 정확히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괜한 부스럼을 만들기는 싫었으니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여기서 밤에 무슨 짓을 당했는지 구체적으로 언급해봐야 한 대 맞기만 할 뿐이다.
“그래서, 저것들이 왜 저리도 분주한지는 알지 못하는 것이냐?”
“델타가 여신님 만나러 갔대요. 그 파장이 퍼져나가서 다들 실신하고 있다나 뭐라나. 직접 본 것도 아니라는데 말이죠.”
“……여신을?”
그렇게 되물으며 후들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창문 밑의 소파에 몸을 던지다시피 앉은 카이킬리아는, 엉덩이가 쿠션에 닿자마자 흐읏, 하고 입을 막으며 끈적한 신음을 토해냈다.
“왜 이렇게 빨리 나오셨어요? 더 쉬고 계셔도 될 텐데.”
“너 같으면 그 나체들 사이에 끼어서 제대로 쉴 수 있겠느냐, 아우로라.”
“……죄송해요. 안 될 것 같네요.”
그러고보니 다들 알몸으로 누워 있었지. 아우로라는 머쓱하게 사과를 건넸다.
“그것들이랑 부대끼며 누워 있느니 차라리ㅡ 끄읏?!”
“왜, 왜 그러세요?!”
카이킬리아가 말을 하다 말고 몸을 비틀었다.
“……괜찮느니라. 아직 여운이 다 가시지 않아 그런 것이니.”
일부러 여운이 다 가시지 않았다며 두루뭉실하게 대답하고 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지난번의 정사를 떠올린 것만으로 아랫배가 떨렸다고는 죽어도 말할 수 없었다.
아우로라가 혹시 몰라 꺼냈던 콜라맛 사탕을 도로 집어넣었을 때였다. 담요 한 장으로 몸을 가린 플로레타와 루나, 스텔라와 셀레네가 다급히 문을 박차고 뛰쳐나왔다.
“무슨 일이냐, 교황?”
척 보기에도 심상치 않은 모양새에 카이킬리아가 자세를 바로잡았다. 교황들이 숨을 몰아쉬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무 일도 없었나요?”
“……아무 일도 없었습니까?”
“델타가 여신을 만나러 갔다는 것 외에는 없었느니라. 진정하고 왜 그러는지나 말해보아라.”
“무언가 심상치 않은 신성력이 느껴졌습니다.”
“지금도 몸 전체가 찌릿찌릿해요.”
“아직도 잠이 덜 깼느냐? 들어가서 잠이나 더 자는 것을 추천하겠노라.”
스텔라와 셀레네의 말에 코웃음을 친 카이킬리아가 손을 휘적였다. 그 순간, 복도 저 멀리서 전투 수녀 한 명이 전력을 다해 이쪽으로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처음 모습을 드러날 때까지만 해도 어렴풋하게 느껴지던 인영은 순식간에 바로 옆까지 다가왔다.
“교, 교황…… 교황 성하……!”
“무슨 일이십니까?”
“일단 진정하고 말씀하여보시지요.”
“그, 그것이…… 그것이…….”
하지만 수녀는 쉽사리 말을 잇지 못하고 헉헉대기만 했다. 카이킬리아가 창문 밖의 이변을 눈치챈 것이 그쯤이었다. 내리쬐던 햇빛이 조금 전보다 어두워진 것이다.
구름이 태양을 가려서 어두워진 느낌이 아니라, 마치 밤이 찾아온 것 같은 검은색으로. 수상함을 느낀 카이킬리아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검게 물들어가는 하늘을 발견했다.
“……아무래도 너의 말이 맞았던 듯하구나, 교황.”
카이킬리아의 중얼거림을 들은 아우로라가 창 밖을 돌아보았다가 똑같은 반응을 보였다. 아직 시간이 아침 7시밖에 되지 않았건만, 하늘이 검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그것도 칼로 자른 듯 정확히 절반만이.
“성역, 성역이…….”
한참을 헥헥대던 전투 수녀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성역의 절반이 밤으로 바뀌었습니다.”
못 참았다.
브라이티스트 다크니스 5 만드는 과정을 직접 보여준다는데 그걸 무슨 수로 참겠는가. 솔직히 여신이 어떤 방식으로 게임을 제작하는지 궁금했던 것도 사실이었고.
“여기에요. 먼저 들어가시면 돼요, 당신.”
안내받은 장소는 2층이었다. 이클립스는 문 옆에 서서 눈짓을 했다. 나는 기대감을 품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곧장 내 뒤에 따라붙은 이클립스가 문을 닫았다.
ㅡ철컥!
문이 잠기는 소리가 났다.
“……아무것도 없는데요?”
방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정확히는, 게임 제작과 관련된 장비가 아무것도 없었다. 있는 거라곤 평범한 침실에 놓여있을 법한 가구들뿐이었다.
“아니요, 확실히 있어요.”
“어디 말입니까?”
“돌아보시면 아실 거예요.”
‘…….’
나는 설마 하는 심정으로 고개를 돌렸고, 설마가 이번에도 사람을 잡았다는 걸 깨달았다. 이클립스가 나를 보며 헤실헤실 웃고 있었다.
“여기 있네요.”
“……분명 브라이티스트 다크니스 5를 만드는ㅡ”
“만드는 공간을 보여준다고 했죠. 이 공간에서 게임을 제작하니 틀린 말은 안 했는걸요.”
이거 사기 아닌가. 내가 황당해하는 사이, 이클립스가 눈웃음을 치며 한층 가까이 다가왔다.
“브라이티스트 다크니스 5를 제작하는 도구도, 방법도, 모두 저예요.”
손가락이 금색 가리개를 쥐고 들어올렸다. 움직임은 아슬아슬하게 유륜이 보이지 않을 높이에서 멈췄다. 어떤 상황에서도 묵묵히 제 역할을 수행하던 가리개가 힘을 상실하려 하고 있었다.
“어떻게 작동하는지 확인해보실 수도 있는데…….”
몸이 더 가까워졌다. 이클립스는 내 왼손을 붙잡고 슬그머니 자기 아랫배로 이끌었다.
“어떠신가요, 당신. 직접 제작해보실ㅡ”
ㅡ델타 님! 델타 님! 잠시 괜찮으시겠습니까?
머릿속에 루나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외전: 신성
성역에 태양과 달이 함께 떠올랐다. 그 말을 듣자마자 바로 앞의 여신을 쳐다보았다. 이런 상황이 벌어졌다면 대부분의 경우는 이클립스가 원인일 테니 말이다.
하지만 이클립스도 진심으로 당황한 눈치였다. 일단 이클립스 잘못으로 벌어진 일은 아니고, 그럼 남은 건…….
“…….”
내 잘못이라는 말밖에 안 된다. 성국에서 신을 상징하는 개념 그 자체인 태양과 달을 움직일 수 있는 존재는 나 아니면 이클립스뿐이니까.
그런데 난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여신님. 어떻게 된 겁니까?”
“잠시만요…… 음, 그러니까…… 무슨 일인지 알겠어요. 지금 성국의 신앙이 예전과 비교해서 상당량 증폭된 건 알고 계시죠?”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나 때문에 벌어진 일인데 모를 리가 없다.
“이유를 따져보자면 그게 원인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이클립스는 가리개를 들춰올렸던 손을 허공에 쫙 폈다. 그리고 반대쪽 엄지와 검지로 그걸 하나하나 접어나가며 설명을 시작했다.
“일단 첫 번째로, 라파엘라 성국에 거주하는 인간들의 신앙과 신성력이 일정 수치 이상으로 올라갔어요. 두 번째, 그 인간들이 모두 성역의 존재와 탄생 목적에 대해 알고 있죠. 세 번째, 당신에 대한 믿음 역시 단시간 내에 급속도로 성장했고요. 그리고 네 번째, 당신에 대한 믿음이 성장한 것과는 별개로 저에 대한 믿음 역시 조금도 사그라들지 않았죠.”
손가락 네 개를 차례대로 접은 엄지와 검지가 마지막 하나에 닿았다. 마지막 남은 새끼 손가락을 잡고 앞뒤로 조금씩 까딱였다.
“마지막 다섯 번째. 믿음은 곧 신앙과 신성력이 되죠. 신앙과 신성력이 한없이 증폭되어 작용한 결과, 해당 장소가 진정한 의미의 성역으로 변하게 된 거예요. 당연히 여기보다야 약간 떨어지지만, 신성이 담길 수 있는 장소가 됐다는 의미죠. 저와 당신을 섬기는 인간들의 신앙 때문에요.”
“……그게 가능한 일이었습니까?”
나는 경악에 차서 되물었다. 그러니까 지금 저 말을 요약하자면 성국 사람들의 신앙이 모이고 모여서 인간의 세계가 신성화되었다는 것 아닌가. 그게 가능하리라곤 상상도 못 했는데.
“일반적으로는 불가능해요. 일반적으로는.”
이클립스가 내 품에 포옥 안겨왔다.
“정말 어마어마한 양의 신앙과 신성력이 갖춰져야 하고, 그 신앙과 신성력의 순수성 역시 높아야 하고, 그 신앙의 대상 역시 막대한 양의 믿음으로 이루어진 신성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죠. 셋 중 하나만 부족해도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상황이에요.”
머리가 내 가슴팍을 응석이라도 부리듯이 톡톡 건드렸다.
“그래서 일반적으로는 불가능하다고 한 거예요. 제가 그런 조건을 갖춘 인간을 만들었을 리 없으니까요. 태양의 교황과 달의 교황이 힘을 합쳐도 수백 배는 모자랄걸요.”
다음으로는 얼굴을 부비적거리더니, 빼꼼 고개를 들어올려 나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당신은 일반적이지 않잖아요?”
“…….”
“저와 똑같이 신성한 힘, 즉 신격을 지니게 된 사람이자, 그 수많은 신앙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자, 성국 사람들의 신앙을 높여 자격을 충족시켜준 사람. 그 세 가지 유형에 모두 해당되죠.”
“…….”
“당신으로 인해 막대한 양의 신앙이 흘러들어오고, ‘성역’이라는 개념 자체에 대한 믿음이 강해지고, 당신이 저와 비슷하게 되어가고 있던 덕분에 이런 결과가 나타난 거예요. 이런 미래가 펼쳐지게 될 줄은 몰랐는데, 역시 당신이랑 있으면 지루할 틈이 없네요.”
물론 저희가 더 재미있는 짓을 하기 직전이었던 건 조금 아쉽지만요, 하고 이클립스가 혀를 빼꼼 내밀며 덧붙였다. 나는 방금 이루어진 설명을 곰곰이 되짚어보다가 질문했다.
“한마디로, 성국 사람들의 신앙과 신성력이 너무 강해져서 이렇게 됐다 이겁니까?”
“네, 맞아요. 당신이 그 힘을 버틸 수 있게 됐다거나, 당신을 향한 믿음이 커졌다거나 하는 복합적인 요인이 있긴 하지만, 핵심은 그거예요.”
연설 한번의 스노우볼이 대체 어디까지 굴러가려는지 모르겠다. 나는 손가락으로 미간을 지그시 눌렀다. 머리가 한껏 아파왔다. 일이 이런 방향으로 커질 줄은 전혀 몰랐다.
“괜찮아요, 당신.”
이클립스가 내 뺨을 붙잡고 끌어당겨 이마를 맞닿았다. 시야 한가득 이클립스의 얼굴이 들어찼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지끈거리던 머리가 차분해지는 기분이었다.
“더 좋아졌으면 좋아졌지, 당신에게 해가 될 일은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그럼 이제 어떡하면 됩니까?”
“어떡하긴요. 당신에 대한 신앙과 믿음 덕분이라 공표하고 더더욱 우러름받아야죠.”
“존경이라면 지금도 차고 넘칠 지경인데요?”
당장 성국 사람들이 날 어떻게 여기는지 생각해보면 답 나온다. 여기서 더 많은 관심을 받으라니, 그건 내쪽에서 사절이었다.
하지만 이클립스는 빙긋 웃고선 내 가슴팍에 얼굴을 부비기만 할 뿐이었다. 진짜로 해야 하는 건가. 나는 잠시 망설였다가 곧 마음을 다잡았다.
루나의 설명에 의하면 어차피 지상에서는 반쯤 나 때문이라고 결론이 내려진 상태다. 내가 하늘로 올라간 이후에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서 말이다.
그러니 이제 와서 부정해봐야 별로 도움이 되지도 않을 것이다.
“방금 가능성으로 존재했다가 사라진 미래 몇 개를 들춰보고 왔어요. 늦든 빠르든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었네요. 단지 그 순간이 지금 찾아온 거고요.”
이런 내 마음에 힘을 실어주기라도 하려는 듯 이클립스가 조곤조곤 속삭였다.
하긴, 원인을 따져보면 언젠가는 벌어졌을 일이었다. 성국 사람들의 믿음과 신앙이 쌓이고, 내 신성이 강해질수록 확률이 높아졌을 테니까. 이클립스 말대로 그 순간이 지금이었을 뿐이다.
“저, 당신…….”
이클립스가 쭈뼛쭈뼛 말을 더듬었다.
“지상에 내려갔다 다시 올라오신다면…… 하, 하던거 계속 하셔도 돼요…… 방해 받아서 못했으니까…….”
“아, 그거 말인데요.”
나는 이클립스의 어깨를 잡고 살짝 밀어냈다. 뒤로 한 발짝 밀려난 이클립스가 어라? 하는 눈으로 날 쳐다보았다.
“다른 건 몰라도 브닼 5로 거짓말을 하시면 안 되죠.”
“네……?”
“벌 받을 준비는 되셨습니까?”
그날, 성국에 새로운 전설이 아로새겨졌다. 성역이 말 그대로의 성역이 되었노라고 말이다.
성역의 탄생을 접한 라파엘라 성국은 열광하지 않았다. 광기에 잠식되어 몇날 며칠을 기도만 올리지도 않았다.
그저 성국 전체가 일주일 동안 멈췄을 뿐이었다.
존재하는 모든 인간이 의식을 잃어버렸으므로.
“이곳이…….”
바스락, 정확히 12명 분량의 발소리가 꽃밭과 풀밭 사이에 아로새겨진 흙길을 디뎠다. 다들 놀랍다는 눈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태양과 달이 공존하는 세계, 낮과 밤이 공존하는 세계, 그리고 신과 인간이 공존하게 된 세계. 그녀들이 발을 디딘 장소는 그런 세계였다.
“어째서 울지 않느냐, 교황.”
카이킬리아가 멍하니 서 있던 루나에게 질문했다. 루나만이 아니라 플로레타도, 스텔라도, 셀레네도 마찬가지였다. 넷 모두 아무런 반응 없이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너희 족속이 태양과 달의 땅에 발을 디뎠는데, 마땅히 기쁨의 눈물을 터뜨리거나 환호하고 발광해야 하는 것이 아니었느냐.”
말투만 보면 비꼬는 것 같이 들렸으나, 카이킬리아로서는 진심으로 궁금해서 하는 말이었다.
당장 플로레타와 루나의 직책이 무엇이던가, 태양의 교황과 달의 교황 아니던가. 그런 두 사람이 태양과 달의 땅에 도착했다면 당연히 좀 더 ‘격렬한’ 반응을 보여야 한다.
그런데 교황들은 감동에 벅찬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기만 할 뿐, 무척 침착했다.
“예전이었다면 그랬을 것입니다. 땅에 발을 디디는 순간 기쁨에 심장이 터져 죽어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었을 터이니.”
“예전이었다면 그랬을 것이다? 지금은 아니라는 뜻이더냐.”
“그렇습니다. 제가 달의 교황 ‘루나’이기 이전에, 인간 ‘세라피카 이사르’로서 섬겨야 할 분이 있지 않습니까.”
“…..”
그 말에 담긴 의미를 알아차린 카이킬리아가 옆을 돌아보았다. 미네르바의 옆에서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있는, 흑발 흑안의 사내.
“이해하였다.”
그리고 피식 웃었다.
카이킬리아도 다를 것 없었으니까.
“물 속이라, 그것도 나쁘진 않겠구나.”
마법으로 간단한 공간을 만들어보던 미네르바가 손을 휘저었다. 마나가 푸른 빛으로 변해 사라졌다. 날 향한 눈꼬리가 요염하게 휘어졌다. 장난기가 발동했다는 표정이었다.
“후훗, 새삼 느끼는 거지만 아이도 정말 대단한걸. 설마 이렇게 적극적일 줄은 몰랐단다.”
“뭐가 말이죠?”
“지상에서도 몸을 섞어보았고, 하늘에서도 몸을 섞어볼 것이니, 이제 물 속에서ㅡ”
“그러라고 만든 성역인 줄 아십니까?”
“어머, 아니었니?”
내가 넌더리를 치자, 미네르바는 더 참지 못하고 푸흡, 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아이를 키우려면 먼저 아이를 만들어야 한단다. 아이도 알고 있지 않니. 당장 성국의 성역에서도 일주일이나ㅡ”
“그러고보니 제가 보여드린 마법을 아직 덜 습득하신 것 같던데.”
미네르바는 자기가 언제 웃었냐는 듯이 시치미를 뚝 떼고 입을 다물었다. 그러더니 아랫배를 감싸쥐고 뒤로 조금 물러나는 게, 두 번 당하기는 싫은 모양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마법이래봐야 하나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파르나리 씨한테는 기분 좋은 거 싫어, 같은 표현까지 알려줬으면서 본인이 그렇게 되는 건 싫으십니까?”
대답할 말이 궁해졌는지 미네르바가 슬쩍 자리를 피했다. 교황들 다음으로 많이 달라붙던 미네르바가 저럴 정도라면 대체 뭐 어떤 감각인 거지.
ㅡ환영합니다, 인간들이여.
하늘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플로레타와 루나, 스텔라와 셀레네가 흠칫 무릎을 꿇었다. 나머지는 모두 멍하니 목소리가 들려온 자리를 바라보았다. 카이킬리아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드디어 왔네.’
고개를 들었다. 태양과 달 사이가 일그러지고, 그 안에서 빛이 회오리처럼 소용돌이치며 근처 공간을 밀어냈다. 공간 그 자체가 이리저리 뒤엉키며 기하학적인 무언가를 만들어냈다.
수십 갈래로 쪼개진 한 줄기 빛이 다시 수천 갈래로 쪼개지고, 그 쪼개진 갈래 하나하나가 차원을 감싸안았다. 빛에 휘감긴 차원 하나하나가 고작 계단 한 칸을 형성했다.
그 차원 위로, 누군가 발을 내딛었다.
ㅡ또각, 또각…….
하이힐 소리가 울렸다. 어느새 커다란 무도회장의 주인공이 등장하는 자리처럼 멋들어진 층계로 변한 빛무리 위를, 누군가 또각또각 밟으며 내려오고 있었다.
그나마 버티고 있던, 성국 측의 넷을 제외한 나머지 여덟 명까지 모두 버티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지금은 이클립스가 아닌 여신으로서 손님을 맞이하는 상황이었으니까.
휘몰아치듯 터져나오는 신성에 압도당해버린 것이다.
ㅡ저의 차원에 온 것을.
부르르, 교황들이 몸을 떨었다. 나를 제외하고 예외란 존재하지 않았다. 이곳에 있는 모두가 빛에 압도된 채 머리를 조아리는 중이었다.
그렇기에, 이클립스의 옷차림과 얼굴을 확인하지 못했다.
‘……왜 몸을 가렸는데 더 부끄러워하는 거지?’
발목까지 내려오는 검은색 정장 코트를 걸치고, 가슴께를 한껏 풀어헤친 흰색 와이셔츠를 입고, 검은색 란제리로 감싸인 가슴 사이의 골짜기에 검은색 넥타이를 끼우고, 몸에 딱 달라붙는 정장 바지를 입은.
그리고 고작 천쪼가리 3개를 걸쳤을 때보다 훨씬 더 부끄러워하고 있는.
‘……대체 왜?’
그런 이클립스의 얼굴을 확인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