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Reincarnated into a Game Filled with Mods RAW novel - Chapter (37)
소녀는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
황제께서 그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라 명하셨던 신입 기사가, 다른 기사단장과 벌인 대련에서 일방적으로 상대를 농락하는 장면을 지켜보았다.
이제 갓 입단한 신입 주제에 황제 폐하를 모시는 기사단장을 이기고도, 마치 그것이 당연하다는 듯 아무렇지도 않아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군더더기 하나 없이 깔끔한 공격 동작과, 들이닥치는 모든 공격을 튕겨내는 방어 동작과, 물 흐르듯 이어지는 연속 동작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황제께서도 그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
“……전부 확인하셨사옵니까, 폐하.”
연무장이 고스란히 내려다보이는 어느 나무 위. 상반신에 검은 후드를 뒤집어쓰고, 그 밑에 검은 가죽옷을 입은 소녀가 허공에 대고 중얼거렸다.
깜빡, 그 눈동자가 자기 의지와 상관 없이 한 번 깜빡였다. 소녀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눈꺼풀 밑에서, 황금색을 띠는 한 쌍의 날카로운 금안이 빛을 발했다.
소녀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향해 머리를 숙이며 예의를 갖추다가, 누군가 자신에게 명령을 내리기라도 한 것처럼 고개를 한층 더 깊게 조아렸다.
“예. 알겠사옵니다, 폐하. 폐하의 뜻에 따르겠나이다.”
이번에는 소녀가 자신의 의지로 눈을 깜빡였다. 그 눈이 다시 떠졌을 땐, 황금빛 눈동자가 있던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말 그대로, 눈동자가 있어야 할 자리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보는 사람을 오싹하게 만드는, 검은색의 텅 빈 눈구멍 두 개만이 뚫려있을 뿐.
소녀는 앞이 전혀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익숙한 손놀림과 발놀림으로 나뭇가지를 하나씩 밟고 붙잡으며 천천히 나무에서 내려가기 시작했다.
헛손질도, 헛발질도 없었다. 그 모습은 얼핏 평범하게 두 눈이 달린 사람보다 더욱 안정된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땅바닥에 사뿐 내려앉은 소녀가 조용히 자세를 낮췄다. 그리고 움직임을 멈춘 채 주위의 소리를 엿들었다.
바람이 나무 사이로 휘몰아치는 소리. 낙엽이 바스락거리는 소리. 나뭇가지가 이리저리 흔들려대는 소리. 소녀 본인이 숨을 들이마쉬고 내쉬는 소리.
다른 인간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이번에는 목격자를 처리할 필요가 없어서 다행이다. 소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여차하면 꺼내들 준비를 하고 손목 밑에 숨겨두었던 단검을 잘 갈무리해 허리춤에 집어넣었다.
소녀의 옷차림은 무척이나 기형적이었다. 상반신에는 검은색 후드를 머리까지 푹 뒤집어쓰고, 상의로는 몸에 착 달라붙는 검은색 가죽 갑옷을 입고 있었다.
하의로는 이게 대체 속옷인지 바지인지 구분이 안 가는, 남성의 사각팬티보다도 더 짧은 수준의 착 달라붙는 가죽 바지를 입어 골반의 라인이 고스란히 엿보였다.
분명 신발을 신지 않았음에도 그 발은 기이하리만치 깨끗했다.
‘사람은…… 여전히 없음.’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소리로 다시 한 번 확인한 소녀는 목걸이를 풀어 손에 쥐고 그걸 작동시켰다. 황제 폐하께서 건네주신 아티팩트였다.
입고 있던 옷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깔끔한 고급 옷감의 느낌이 나던 후드와 가죽 갑옷, 가죽 바지가 사라졌다. 대신 꼬질꼬질한데다 무척이나 더러운 천쪼가리가 나타났다.
후드가 사라지자 그 안에 곱게 숨겨져 있던 머리카락이 만개했다. 뽀얀 피부와 대비되는, 어깨에 간신히 걸칠 길이의 흑발이 목 근처에서 찰랑였다.
소녀는 알몸이었다.
빈약한 가슴도, 쇄골 라인도, 탄탄한 복부도, 부드러울 것 같은 옆구리도, 여성의 은밀한 부위와 늘씬하게 뻗은 허벅지도 고스란히 드러났으나, 그 얼굴에는 전혀 부끄러운 기색이 없었다.
소녀는 근처에 굴러다니는 돌로 천쪼가리를 잠시 짓눌러두고, 흙바닥에 몸을 던져 힘껏 뒹굴며 전신에 먼지를 뒤집어썼다. 흙과 모래가 덕지덕지 달라붙었다.
그렇게 한참을 뒹굴다 몸을 일으켰다. 방금 전까지 깔끔했던 소녀의 모습은 어디로 가고, 머리카락은 산발인데다 온 몸이 흙과 먼지로 범벅인 더러운 여자애 한 명밖에 보이지 않았다.
‘옷도 작업해둬야지.’
순식간에 거지꼴이 된 소녀가 돌로 짓눌러둔 천쪼가리를 들어 흙바닥에 사정없이 굴렸다. 작업을 끝냈을 땐, 천쪼가리는 누더기나 다름없는 외형이 되어 있었다.
그걸 몸에 둘렀다. 허벅지를 가리고, 허리를 가리고, 가슴과 팔과 어깨를 가렸다. 마지막 남은 부분은 머리에 빙빙 감아 얼굴과 머리카락을 감췄다.
‘완벽해.’
비록 눈으로 직접 볼 수는 없었지만, 소녀는 자신의 모습이 길거리의 거지와 다를 바 없으리라고 속으로 자신했다.
그 자신감대로, 지금 소녀의 모습은 그런 부류의 인간들과 전혀 구분이 가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최고급 가죽 옷을 입고 도저히 가려지지 않는 미모를 뽐내며 누군가를 감시했다곤 상상조차 못할 몰골이었다.
차이점이 있다면, 이런 흙먼지를 뒤집어쓴 거지꼴임에도 특유의 예쁜 이목구비만은 제대로 숨길 수 없었다는 것 정도일까.
소녀는 주변을 뒤져 적당한 굵기과 길이의 나뭇가지 하나를 뚝 꺾었다. 그리고 그걸 허공에서 붕붕 휘둘러보았다. 이 나뭇가지라면 지팡이 용도로는 충분할 듯 했다.
사실 이런 것 따윈 없어도 얼마든지 일반인처럼 걸어다닐 수 있지만, 지금부터 할 일을 위해서는 반드시 평범한 장님으로 보여야 했다.
‘폐하께서 마지막으로 내리신 명령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 정체를 들키지 않고 그 신입 기사를 가까이에서 지켜보라는 것.’
어차피 황금빛 기사는 미끼였다. 그런 머저리를 정말로 감시역에 둘 리가 없지 않은가. 제딴에는 중요한 일을 맡았다고 신나하는 모양이었는데, 폐하께선 어차피 기대조차 안 하셨었다.
딱 한 가지. 그걸 은빛 여명 기사단에 보내면 스스로의 성격을 이기지 못해 신입에게 시비를 걸리라 여기셨고, 황제의 현안은 적중했다.
덕분에 신입 기사의 실력을 한층 더 똑똑히 지켜볼 수 있었으니 제 할 일은 끝낸 셈이었다.
약간 남은 천으로 얼굴의 하관마저 가려버린 소녀는, 한 손에 작은 나무 그릇을 들고 일부러 지팡이를 짚어 더듬거리며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도시 내부의 작은 숲을 빠져나오고, 나무 위에 있으면서 미리 외워두었던 길을 따라 천천히 어느 골목길 안으로 들어섰다. 주변에서 그런 소녀를 보고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다.
물론 전혀 개의치 않았다. 저런 눈으로 바라보라고 이렇게 내려온거였으니까.
‘여기다.’
어느 골목길의 끄트머리에 멈춰 선 소녀가 벽에 등을 기대고 바닥에 주저앉아 몸을 웅크렸다. 무릎을 모아 가슴팍에 바싹 붙이고, 앞에는 나무 그릇을 내려놓았다.
누가 봐도 완벽하게 돈을 구걸하는 거지로 보일만한 모습이었지만, 당연히 진짜 구걸 목적으로 온 것은 아니었다.
‘그 기사단장들은 규칙적으로 여길 지나간다.’
이틀동안 ‘눈’을 빌려 도시 전체를 관찰하며 내린 결론이었다. 도시를 순찰하는 기사단장들은 언제나 같은 경로를 지나간다. 그리고 이 바로 옆의 길이 그 경로였다.
얼마 전에 순찰을 시작했으니, 조만간 이곳을 지나갈 것이다. 소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사람들이 걸음을 내딛을 때 마다 작게 울려대는 땅의 진동을 느꼈다.
일부러 사람들이 제일 적게 다니는 장소를 골랐다. 몇몇 거지들을 제외하고, 이 근처를 지나다니는 사람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그 둘의 보폭과 목소리는 이미 기억해두었다. 이제 남은 것은 기다리는 일 뿐.
‘…….’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땅의 진동만을 느끼며 기다린 지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저 멀리서부터 기억 속에 남아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녀는 귀를 더 쫑긋 세우며 목소리를 주의깊게 엿들었다. 차가운 목소리와 차분한 목소리였다.
‘오른쪽이 아이리스. 왼쪽이 에리카.’
마침내 특정을 끝낸 소녀가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한 손에 지팡이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텅 빈 나무 그릇을 든 채였다.
그 상태로 조용히 벽에 붙어 기사단장들이 다가오기만을 기다리던 소녀는, 아이리스와 에리카가 골목 앞을 지나치기 직전에 그 앞으로 훌쩍 뛰어들었다.
“꺄앗!”
그리고, 성대하게 에리카와 부딪히며 일부러 바닥을 굴렀다. 바닥을 구르며 지팡이를 부러뜨리고, 나무 그릇을 저 멀리 내동댕이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 어라? 방금 뭐였ㅡ”
“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용서해주세요! 죄송합니다!”
소녀는 에리카가 상황을 미처 파악하기도 전에, 자신이 최대한 불쌍해 보이도록 바닥에 납작 엎드려 고개를 조아리며 벌벌 떨어댔다.
고개를 조아린 채로 사시나무 떨 듯 떨어대는 소녀를 본 에리카는 그대로 얼어붙었고, 저만치로 굴러갔던 나무 그릇을 들고 온 아이리스도 마찬가지로 얼어붙었다.
“저기…… 그렇게 떨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어떻게 할 생각은 없어요.”
에리카가 조심스레 말했다.
소녀는 잔뜩 울상인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 휑하니 검은 구멍 두 개만 뚫려있는 얼굴을 본 에리카와 아이리스의 몸이 흠칫 떨렸다.
“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그, 며칠동안 아무것도 못 먹어서, 배가 고파서…….”
에리카와 아이리스는 난처한 듯 서로를 쳐다보았다. 눈도 안 보이는 소녀다. 당연히 에리카나 아이리스 쪽에서 먼저 인지하고 피해야 했었다. 명백한 이쪽의 실수였다.
“……어떡하죠, 아이리스?”
“나도…… 잘 모르겠군. 일단 우리 잘못이니, 우리가 도와줘야 할 것 같다만.”
“그러면 성으로 데려갈까요? 며칠동안 아무것도 못 먹었다니까 식당에서 배부터 채우라고 하죠.”
“그 편이 제일 낫겠지. 남은 구역은 내가 마저 돌아보겠다. 에리카 너는 이 소녀를 성으로 데려다주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아이리스. 어…… 소녀 씨? 일어설 수 있겠어요?”
자신을 성으로 데려갈거라는 말을 들은 소녀는, 둘에게 보이지 않도록 고개를 푹 숙이고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에리카도, 그리고 아이리스도. 겉모습에 충격을 받은데다 소녀가 너무 불쌍하고 비굴하게 사과한 나머지 소녀를 달래는 것에만 정신이 팔려 눈치채지 못한 사실이 하나 있었다.
아무리 갑자기 튀어나왔더라도, 에리카가 결코 거지 따위와 부딫힐 사람이 아니란 사실을. 평범한 거지였더라면 에리카 쪽에서 먼저 알아차리고 가볍게 옆으로 피할 수 있었을거란 사실을.
눈앞의 소녀가, 자신들의 직감마저 감지하지 못할 정도로 빠르고 은밀히 접근했기에 이번 사고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그 둘은,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