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Reincarnated into a Game Filled with Mods RAW novel - Chapter (372)
에필로그 – 브라이티스트 다크니스 5
“어…….”
“이건, 뭐라고 해야 하나…….”
“……엄청나군.”
“……그러게.”
기사단장들은 말문이 턱 틀어막힌 채 멍하니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벌어진 입은 다물어질 줄은 몰랐고, 두 다리 역시 제자리에 못 박힌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런 모습 본 적 있어요, 미네르바 님?”
“한 번도 없단다. 너는 어떠하니, 아이야?”
“나 역시 마찬가지이니라.”
아우로라는 물론이고 정말 어지간한 일이 아니고서야 잘 놀라지 않는 미네르바와 카이킬리아도 눈앞의 광경에 무척이나 놀라워하는 눈치였다. 아우로라는 살짝 위축된 듯도 보였다.
“흐, 헤헤. 키히힛…… 아, 뭐야. 또 들어갔어?!”
닉스는 존댓말 닉스와 반말 닉스, 플로르의 인격이 번갈아가면서 들어갔다 나왔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플로르가 존댓말 닉스와 반말 닉스의 인격을 좀 나오라고 강제로 끄집어내면, 눈앞에서 전해져오는 위압감을 견디다 못한 두 인격이 다시 숨어버리는 식이었다.
“성자님의 결혼식이지 않습니까. 이렇게 되어야 마땅한 일이지요.”
“성국 전체가 준비를 마쳤을 것입니다.”
“성역 끝자락에까지 사람들이 들어차 있을 거예요.”
“그러지 않을 사람은 성국에 없을 터이니 안심하십시오.”
플로레타와 루나, 스텔라와 셀레네만이 지금 이런 분위기가 당연하다는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넷은 조금도 놀라지 않고, 오히려 당연하다는 듯 행동했다.
“……제 정체를 알면 큰일이 났을 테니, 다행이네요.”
이클립스는 정체를 숨기길 잘했다며 약간 애매한 미소를 짓고선 그 모습을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그런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말라고 머리를 두어번 쓰다듬어주었다.
‘큰일날 뻔 했네.’
속으로는 식은땀을 흘리면서 말이다.
하마터면 무심코 이름을 부를 뻔 했다. 그랬다간 지평선까지 뒤덮을 정도로 모인 사람들 앞에서 성대한 결혼식이 아니라 성대한 절정쇼가 펼쳐졌을 거다. 추태를 보일 일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준비 다 됐지?”
이런 내 말에, 각자의 머리색 혹은 눈동자 색에 맞춘 웨딩 드레스를 입은 여자친구들이 활짝 웃으며 내 옆으로 다가왔다. 하나같이 노출도가 굉장히 극심한 드레스였다.
그나마 건전한 축에 속하는 클라우디아의 드레스조차 가린 면적보다 드러낸 면적이 더 많았고, 이클립스쯤에 이르러서는 평소에 입던 천쪼가리와 별반 다를 게 없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여자친구들은 저걸 ‘웨딩 드레스’라고 인식하고 있기에, 나는 눈 둘 곳 없는 노출도에서 애써 눈 둘 곳을 찾았다.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여자친구들은 무척 좋아했다.
“가자.”
드디어 마지막 발자국을 내딛을 시간이었다.
종소리가 울렸다. 신성한 수녀복을 입은 수녀 열 명이 어지간한 건물만큼이나 커다란 종을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모습으로 치고 있었다.
그에 맞춰 성역을 가득 채운 성국의 시민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일반적인 종소리라면 성역 전체에 울리는 것이 불가능하였겠으나, 이것은 성자의 결혼식이다.
성자의 이름 앞에 불가능이란 존재할 수 없었다.
무릎을 꿇은 방향은 모두 한 장소를 향해 있었다. 태양과 달이 머리 위에 떠오른 장소이자, 살아계신 성자와 그분의 여인들이 성체를 의탁하실 장소.
태양과 달이 만나며, 낮과 밤이 만나며, 구름과 별이 하늘의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스쳐지나가듯 흘러가는 장소.
그 기적의 밑에서 사람들은 둘로 나뉘었다. 태양을 믿는 자들은 태양의 영역에, 달을 믿는 자들은 달의 영역에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자리를 잡았다.
성국 전체가 황금색과 은색으로 갈라져 단 하나만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마침내, 성역의 정중앙에 위치한 저택의 문이 열림과 동시에 그토록 기원하던 바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날만을 위해 한 달을 연습했다. 성국 신민들은 일제히 머리를 조아렸다.
ㅡ목도하라, 저 하늘을…… 영광이 그대에게 내리노니…….
분명 머리를 조아렸음에도 모든 사람들의 눈에 살아계신 성자의 모습이 각인되는 기적이 펼쳐짐과 동시에, 하늘 높이 떠올라 있는 성가대가 감동의 눈물을 줄줄 흘리며 찬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성가대는 찬가를 부르면서도 느꼈다. 이 찬가가 자신의 마지막이리라는 것을. 모든 음악이 끝나면, 자신은 기쁨에 심장이 터져 죽어버리리라는 것을.
하지만 그래도 좋았다. 모두 이 날만을 위해 고르고 또 고르고 또 고른 다음 마지막으로 몇십 번을 더 골라서 발탁된 여성들이었으니까. 죽음 따위는 이미 각오해뒀다.
아니, 각오라는 말도 필요 없었다.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었으니까.
살아계신 성자의 결혼식에서 하늘 높이 떠올라 찬가를 부르다 기쁨에 심장이 터져 죽는다니, 그게 영광이 아니면 뭐가 영광이겠는가. 오히려 각오보다는 준비라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
성자와 그 여인들을 위하여 이 보잘것 없는 한 목숨을 기쁘게 바칠 준비 말이다.
ㅡ태양과 만월이 굽어 살피리라…….
완벽하게 화음을 맞춘 목소리가 하늘을 향해 울려퍼졌다. 실수가 있어서도 안 되고, 그럴 생각도 없었다.
지난 한 달간 성가대의 수면 시간은 3시간이 채 안 됐다. 하루가 아니라 한 달 기준이다. 모두 이 날만을 위해 지독한 훈련과 연습을 반복해왔으니, 그 결실을 발휘할 시간이었다.
찬가는 곧 수천 겹으로 뒤덮인 신성력을 타고 성역 전체로 퍼져나갔다.
성역 중앙에서 끄트머리까지,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수많은 성국 신민들의 귀에도 찬가를 부르는 목소리가 똑똑히 들렸다.
“…….”
성국은 환희하지 않았다. 자신들은 감히 환희할 자격조차 없었다. 이 신성한 자리에서, 그런 기쁜 감정을 드러낼 자격조차 없는 하찮은 존재들이었다.
그저 조용히 머리를 조아리고 기도를 올릴 뿐이었다. 태양과 달이 살아계신 성자와 그 여인들을 축복하길 기원하면서. 그 축복이 영원토록 이어지기를 기원하면서.
성역에 모인, 셀 수 없을만큼 많은 사람들이 모두 같은 심정이었다. 모두가 무릎을 꿇었고, 모두가 머리를 조아렸고, 모두가 눈을 감았고, 모두가 기도를 올렸다.
“…….”
하지만, 눈을 감고 머리를 조아렸다 해서 그 모습마저 볼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성자의 배려인지, 아니면 태양과 달의 배려인지, 분명 눈을 감았음에도 눈앞에 행복한 표정으로 낮과 밤이 마주친 길을 걸어가는 성자와 그 여인들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심지어 태양과 만월이 성자의 머리 위를 환히 비추고, 무려 하늘 전체를 뒤덮을 정도로 커지는 모습까지 눈을 감고 있음에도 똑똑히 보았다.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지난 한 달간 감정을 죽이고 기도를 올리는 것만을 죽어라 연습했음에도, 머리로는 이 울음을 터뜨리는 행동조차 불경임을 알고 있음에도, 도저히 벅차오르는 감정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당장 눈앞에 펼쳐진 기적만 해도 두 가지나 됐으니까.
ㅡ마음껏 울어라.
그래서 사람들은.
ㅡ오늘은 기쁜 날이니.
머릿속에 성자의 목소리가 울려퍼졌을 때 더는 참아내지 못했다.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린 채, 어린아이처럼 앙앙 울음을 터뜨렸다. 성국의 그 누구 하나 예외란 존재하지 않았다.
지난 한 달간 해온 모든 준비들이, 하루에 여덟 번 몸을 씻고 그 외의 시간은 모두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리기만 했던 그 순간들이, 저 한 마디로 차고 넘치도록 보답받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울음은 얼마 가지 못하고 그쳤다. 성자와 신부들의 키스가 이어졌기 때문이었다. 그 황홀한 광경에 이 비루한 것들의 울음소리를 섞을 순 없었다. 모두가 필사적으로 눈물을 삼켰다.
그리고 마지막 순서였던 정체불명의 흑발 여자까지 성자와 입맞춤을 나누었을 땐, 성역의 지평선 너머까지 가득 메웠던 인파는 누구 하나 빠지지 않고 전원이 기절해 있었다.
차라리 기절만 했더라면 다행이었을 것이다. 성가대는 전원이 찬가의 마지막 소절을 부르자마자 심장이 파열되어 죽어버린 상태였다.
얼굴에 한 점의 미련도 후회도 없는 기쁨의 미소를 떠올린 채 말이다.
ㅡ일어나라.
그리고 두 번째로 부활을 경험한 성국 신민이 되었다.
죽음에서 돌아온 성가대는 처음엔 어떻게 된 일인지 파악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해 있다가, 곧 진실을 알고선 기쁨을 주체할 수 없어진 나머지 죽음과 부활을 서너번 정도 더 반복했다.
그런 ‘사소한’ 사건이 있긴 했어도, 아무튼 오늘은 기쁜 날이었다.
아이테르눔 제국의 결혼식 준비는 라파엘라 성국과는 전혀 달랐다.
황제의 결혼식이니만큼 국경일을 선포하고 축제 준비에 돌입하긴 했지만, 모두가 하나되어 성자를 떠받들 생각으로 가득했던 성국과는 달리 축제라는 말에 걸맞게 노는 날이라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애초에 성국처럼 행동할 사람은 진작 성국으로 넘어갔을 테니까.
제국의 국민들이 무려 2주일이나 이어지리라 선포된 국경일을 틈타 신나게 축제 분위기를 만끽하는 사이, 황궁은 그 어떤 때보다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약간의 실수에도 불호령이 떨어졌고, 황궁에 근무하던 모든 사람이 최고의 모습만을 보일 것을 요구받았다. 복도의 모두가 날이 바짝 서 있는 상태였다.
다행스럽게도, 라나는 그 날이 바짝 선 모습을 요구받는 목록에 포함되지 않았다. 아우로라가 직접 ‘다른 중요한 일’을 시켰다는 이유로 준비에서 빠졌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다른 중요한 일이란 그냥 아우로라의 옆에서 수다나 떠는 것에 불과했다. 라나를 위한 배려인 것이다. 아우로라는 웃음꽃이 핀 라나의 얼굴을 보며 몹시 만족스러워 했다.
라나도 행복해하는 아우로라의 미소를 보며 몹시 만족스러워 했고.
“……드디어 시작하는구나.”
“드디어, 라기에는 몇 시간 차이 안 납니다만, 카이킬리아.”
황궁에서의 결혼식은 성국에서의 결혼식이 끝난 바로 직후에 치러졌다.
식을 치르는 당사자 모두가 바쁘게 움직였지만, 특히 신부 쪽은 하나같이 안달이 난 듯 어쩔 줄을 몰라하는 분위기를 풍겼다. 결혼식이 시작되기 바로 전까지 시계를 몇 번이고 쳐다보았다.
델타가 첫날밤을 제국에서의 결혼식까지 모두 끝낸 다음 치르겠다고 말해서였다.
“……너무해, 델타.”
“아니, 그게 대체 왜?”
어쨌거나, 황궁에서 펼쳐진 결혼식은 성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지평선까지 사람으로 가득 찰만큼 규모가 크지는 않았지만, 화려함은 절대 뒤지지 않았다.
이번에는 신부들이 머리색이나 눈동자색과 깔맞춤한 웨딩 드레스가 아니라 황금과 보석을 퍼바르다시피 해서 치장된 제복을 입었다는 것도 차이점이었고.
성국에서 준비했던 ‘웨딩 드레스’의 노출도로 눈 둘 곳이 없어 꽤나 곤욕을 치러야 했던 델타로서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또한, 이번에도 주례는 없었다. 감히 황제와 영원의 마법사, 태양의 교황과 달의 교황, 살아계신 성자의 주례를 설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황궁에서 돈을 뿌려가며 무려 한 달을 준비한 결혼식은 꼬박 이틀을 이어졌다. 그 동안 델타에게는 꽤 뜻밖의, 아니,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던 손님들도 찾아와 축하를 건넸다.
“축하드립니다, 단장님.”
은빛 여명 기사단과 칠흑 성야 기사단이었다.
라크시아를 비롯한 칠흑 성야 기사단장들은 ‘특별히 더 신경써서 꾸민’ 칠흑 성야 기사단의 정복이랍시고 토끼귀 머리띠와 스티커 3장만을 붙인 채 찾아왔다.
마찬가지로 ‘특별히 더 신경써서 꾸민’ 일반 단원들의 정복은 유두와 음부 근처만 살짝 물들인 100% 투명 바니걸이었다. 노출도만 따지자면 역바니와 다를 게 전혀 없었다.
칠흑 성야 기사단은 정복을 입고 토끼귀 머리띠를 쫑긋거리며 기사단장에게 경례를 올려 델타의 표정을 미묘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모든 차례가 끝났을 때, 델타는 이제 아내가 된 자신의 여자들을 데리고 포탈 안으로 사라졌다. 뺨이 잔뜩 붉어진 여자들이 델타의 팔을 잡아당기며 재촉하고 있었다.
이제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를 알고 있는 라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그 뒷모습을 배웅했다.
라파엘라 성국에서 이틀, 그리고 아이테르눔 제국에서 이틀. 꼬박 나흘에 걸친 결혼식을 끝낸 우리는 미네르바가 완성시킨 수중 저택에 와 있었다.
분명 저택이 물 속에 통째로 잠겨있는데도 창문으로는 햇빛과 달빛이 비쳤다. 미네르바는 웃으며 창문을 열어젖혔고, 물이 쏟아져내리지 않는 모습에 놀라는 우리들을 보며 즐거워했다.
기사단장들과 아우로라, 닉스는 신기한 듯 창문 바로 앞에서 저택 내부로 들어오지 못하고 있는 물에 손을 넣어 찰박거렸다.
하지만 신기함은 오래 가지 못했다. 더 중요하고 자극적인 순서가 남아있었으니까.
나를 저택 맨 꼭대기층의 거대한 침실까지 끌고간 여자들은 14명이 동시에 누워서 뒹굴거려도 공간이 한참 남을 정도로 거대한 침대에 다 같이 누웠다.
그리고는 입고 있던 웨딩 드레스를 하나둘 벗어던지기 시작했다. 뽀얀 살결이 점점 더 많이 드러났다. 그렇게 남은 것이 속옷밖에 없거나 혹은 아예 없을 때쯤, 이클립스가 웃으며 속삭였다.
“이제 첫날밤만 남았네요, 당신?”
“그러게.”
첫날밤이라고 부르기엔 몸을 섞은 기억이 너무 많긴 하지만, 어차피 단어의 정의는 그게 아니니까.
나는 벌써부터 허벅지를 비비적대고 있는 아내들에게 다가갔다. 침대 근처에 도착하자마자 가녀린 손가락들이 내 몸을 감싸 끌어당겼다.
밤은 굉장히 길게 이어졌다.
몇 달, 혹은 그 이상.
어쩌면 1년 넘게.
“드디어 내일이네. 맞지? 내가 시간 잘못 본 거 아니지?”
“내일 맞아요, 당신. 정확히 보셨어요.”
이클립스가 안절부절못하는 내 어깨를 감싸안으며 자애로운 미소를 지은 채 내 바로 뒤에 서 있었고, 다른 아내들은 조금 떨어진 침대에 앉아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열세 쌍의 시선을 받으며 지금 이 순간을 위해 특별히 장만한 60인치 8k 모니터 앞에 앉아 초조하게 시선을 확인했다.
이제 앞으로 30초. 정말로 얼마 남지 않았다. 그대로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정말 영원과도 같은 30초였다.
마침내 시계 숫자의 앞자리가 바뀌고 뒷자리가 0을 가리키는 약속했던 시간이 다가왔을 때, 나는 어마어마한 속도로 바탕화면에 새롭게 추가되어 있는 바로가기 아이콘을 클릭했다.
웅장한 오케스트라 음악과 함께 화면이 잠시 어두워졌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고딕풍 폰트로 써진 글자가 떠올랐다.
The Brightest Darkness V
후일담: 계획
“그래서, 적당한 계획이 있다 이 말이지?”
“맞아.”
프리지아는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의 의심을 담은 눈초리가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숫자는 총 두 개였다. 둘 모두 칠흑색이었고.
그리고 꾸벅꾸벅 졸고 있는 칠흑색 눈동자도 하나가 있었다.
이곳에 모인 사람은 별로 많지 않았다. 프리지아를 포함해도 고작 넷이 전부였다. ‘계획’이라는 말까지 붙여가며 설명하기에는 턱없이 적은 규모다.
하지만 첫 모집 치고는 나쁘지 않은 숫자이기도 했다. 어차피 이번 계획이 멋지게 성공을 거두면 다음 번에는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프리지아 밑에 모여들 테니까 말이다.
시작은 미약하지만 끝은 창대하리라, 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아빠가 브라이티스트 다크니스 시리즈를 플레이하면서 가끔 내뱉곤 하시던 격언이었다.
첫 숫자는 아무래도 좋다. 프리지아는 각오를 다졌다.
“어떤 계획인데?”
“그냥 덮치는 거지.”
프리지아가 씨익 웃으며 내뱉은 말에 안젤라와 프리실라가 동시에 난색을 표했다.
“그냥 덮치자고?”
“설마 그걸 계획이랍시고 말하려는 건 아니지?”
“아빠는 항상 부르면 와주시잖아. 기회라면 충분해.”
비록 경쟁자가 ‘조금’ 많긴 하지만, 아빠는 그 이상으로 언제나 딸들과 같이 시간을 보내려 노력하는 분이셨다. 그러니 침실로 불러내는 것쯤은 그닥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래. 부르면 와 주시겠지. 아빠니까.”
“지금 말하려는 건 그게 아니잖아? 아빠가 오면, 그 다음은?”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아무리 딸들에게 무르다 못해 흐물흐물 녹아내릴 정도로 아껴주는 아빠라 하더라도 그 사랑스러운 딸들이 자기를 덮치려 한다면 힘으로 막아세우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델타는 여기 모인 4명이 아니라 이클립스를 제외한 모든 모녀가 동시에 달려들어도 간단히 제압할 수 있는 존재였다. 단순히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상황과는 거리가 멀었다.
“걱정 마. 그 대비책도 다 준비해뒀으니까.”
프리지아의 손가락이 옆을 가리켰다. 눈동자 두 개가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돌아보았다.
그러고보니 여기 회의실에는 한 명이 더 있었다. 키가 꽤나 작은 축에 속하는 안젤라보다 더 짜리몽땅하고, 초록색과 보라색이 섞인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
하르나 플로르였다. 하르나는 그제서야 잠이 깼는지 하아아암, 하고 턱이 빠져라 하품을 했다.
“쟤한테 맡기면 돼.”
“……어떻게?”
“내가 아빠한테 달라붙을거야.”
프리지아를 대신해 하르나가 입을 열었다. 첫 문장부터 사람의 표정을 묘하게 만드는 설명이었다. 잠시 시선을 교환한 안젤라와 레베카가 떨떠름하게 답했다.
“그리고?”
“울거야. 엄청 서럽게.”
“……뭐?”
계획이라고 주장하기엔 지나치게 황당한 발언이었지만, 하르나는 의기양양했다.
“아빠 얼굴에 달라붙어서 끌어안고 울거라고. 그럼 아빠도 나 달래느라 제대로 힘을 못 쓰시겠지. 그 틈을 노리면 돼.”
“…….”
“…….”
“못 믿겠다는 눈치네.”
아니, 당연히 못 믿어야지. 안젤라와 레베카는 다시 한번 눈빛을 교환했다. 빠질까? 하는 의견이 담긴 눈빛이었다.
“흑…… 흐윽…… 아아앙…….”
하지만 의견을 제대로 교환하기도 전에 서럽게 울기 시작한 하르나를 보고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뺨을 타고 굵은 눈물방울이 주륵주륵 떨어지고 있었다.
“진짜란 말이야…… 진짠데…… 하르나 열심히 생각했는데…… 왜…… 왜 안 믿어줘…… 흐아아앙…….”
둘은 어쩔 줄을 몰랐다.
만약 에일린이나 세그레투스였다면 질질 짜는 꼴 보기 싫으니 입 닫으라고 면전에서 쏘아붙일 수 있었겠지만, 안젤라와 레베카는 차마 자매에게 그런 말을 내뱉을 성정이 못 됐으니까.
“어때?”
그래서 하르나가 자신이 언제 울었냐는 듯 의기양양하게 가슴을 폈을때 진심으로 어이없어하는 표정을 지었다. 방금 전까지 펑펑 울어대던 게 거짓말처럼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이만하면 아빠도 속아넘어가겠지?”
“어…… 확실히…….”
“엄청 놀라실 것 같긴 한데…….”
방금 전까지 ‘울어서 아빠의 이목을 끈다’라는 말도 안 되는 설명을 듣고 있던 둘조차 깜짝 놀랐을 정도였으니 아빠한테라면 무조건 통할 것이다. 그 틈을 타 프리실라가 곧바로 말을 받았다.
“아빠가 하르나한테 정신 못 차리실 때 마법으로 인식을 개변하면 돼. 그럼 이제 우리가 아빠랑 이어질 일만 남는 거지.”
“……마법까지 동원한다니, 꽤 본격적이잖아?”
“그러게. 이거 들키면 보통 혼나는 걸로는 안 끝나겠지?”
잠시 망설이는가 싶던 안젤라와 레베카가 씨익 웃었다. 그 미소를 확인한 프리지아도 같이 웃어주었다. 대답이 훤히 보이는 미소였다.
“그거 재밌겠네.”
“당장 하자.”
시원시원한 대답. 프리지아가 작전의 초기 멤버로 이 셋을 구상한 이유가 바로 저래서였다.
프리지아 스스로도 자기 계획이 무척 조잡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기껏해야 아빠를 방으로 불러서 하르나로 정신을 쏙 빼놓은 다음 인식 개변 마법을 사용하고 덮친다는 것이 전부인, 치밀한 사전 작업도 뭣도 없는 계획에 찬성할 사람이라곤 저 셋 뿐이었다.
하르나는 겉모습이 어쨌든 속내는 음흉함 그 자체였고, 안젤라와 프리실라는 엄마를 닮다 못해 청출어람이라 불러도 무방했으므로.
뭐, 태어난 지 고작 5년밖에 되지 않은 어린 머리로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의 계획이긴 했다.
엄마들의 헌신적인 노력 덕분에 자매 모두가 지식이야 평범한 인간과는 궤를 달리할 정도로 풍부하지만, 상식은 약간 부족했기에.
아무리 외형이 성숙한 여인의 형상이라 하더라도 속내는 아직 다섯 살짜리 어린아이나 마찬가지였다.
“좋아. 그럼 지금 당장ㅡ”
“지금 당장 뭘 하는데? 키히힛.”
흠칫, 어디선가 들려온 음침한 웃음소리에 넷의 몸이 쩌적 굳었다.
음침한 목소리라서가 아니었다. 절대 지금 들려선 안 되는 목소리라서였다.
“나도 알려주면 안 될까?”
꾸물꾸물, 하르나의 그림자가 솟아오르더니 사람의 인영을 만들었다. 하르나와 비슷한 키에, 하르나와 비슷한 크기의 가슴 굴곡을 가지고, 하르나와 똑 닮은 외형을 한 사람의 인영.
딸과는 오직 단 하나, 눈동자 색깔만이 다를 뿐인 하르나 플로르의 어머니, 닉스 플로르였다. 그 모습을 본 하르나의 칠흑색 눈동자가 세차게 떨렸다.
“어, 엄마…… 여긴 어떻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잖아요, 하르나.”
닉스의 말투가 반말에서 존댓말로 바뀌었다. 하르나의 몸이 한층 더 움츠러들었다.
“우리 귀여운 딸이 지금부터 뭘 하려 했는지가 더 중요한걸요.”
“……히끅. 흐아앙…… 잘못했어요, 엄마…….”
하르나가 기어코 울음을 터뜨렸지만, 닉스는 눈하나 깜짝 하지 않고 마지막으로 인격을 바꾸었다.
“울지말고 빨리 따라와.”
그야 당연히 저게 거짓 울음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평소에는 다섯 살배기 딸을 귀여워해주기 바빠서 알면서도 속아넘어가는 척 했지만 지금만큼은 아니었다.
울음 작전이 먹히지 않자 뚝뚝 흘러내리던 굵은 눈물방울이 단번에 멈췄다. 그 대신 칠흑색 눈동자가 한층 더 깊은 절망으로 물들어갔다.
“오늘은 오랜만에 모녀의 대화를 좀 나눠야겠네?”
닉스가 하르나를 등 뒤에서 끌어안았다. 체구에 비해 가슴이 워낙 큰 탓에 자세가 많이 어정쩡하긴 했어도 딸을 그림자 속으로 잡아당기기에는 충분했다.
“히이이이익……!”
하르나가 새된 비명을 지르며 그림자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남겨진 3명 사이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분위기를 확인한 프리지아가 조심스레 해산이란 단어를 입에 담으려던 순간이었다.
“안젤라! 여기 있지!”
“레베카아아아아!”
누군가 기다렸다는 듯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한쪽은 바닥까지 닿는 푸른색의 포니테일에 푸른 눈동자를 가진 여자였고, 다른 한쪽은 어깨까지 내려오는 벚꽃색 머리카락에 벚꽃색 눈동자를 가진 여자였다.
사실 그것보다 더 간단한 설명이 있었다. 리제와 클라우디아, 즉 안젤라와 레베카의 어머니라는 간단한 설명이.
“어, 엄마?!”
“여긴 어떻게 왔어요?!”
당연히 안젤라와 레베카는 펄쩍 뛰어오를만큼 놀랐다. 벌벌 떠는 두 딸의 앞으로 두 명의 엄마가 다가갔다.
“어떻게 왔긴!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우리 딸이 남편한테 몹쓸 짓을 한다길래 말리러 왔지!”
“재미를 추구하는 건 좋은 일이지만, 아빠한테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걸 알려줘야겠네. 그렇지, 딸?”
리제와 클라우디아는 왕년의 은빛 여명 기사단장다운 속도로 순식간에 자기 딸을 어깨에 들쳐맸다. 프리지아의 눈에 보이지도 않을 움직임이었다.
이후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를 알아차린 안젤라와 레베카가 팔다리를 바동댔지만, 허리를 단단히 감싸안은 팔은 도저히 풀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두 엄마는 당돌하기 짝이 없는 두 딸을 들쳐맨 채 복도 너머로 사라졌다.
“…….”
1분도 안 되는 시간에 넷에서 하나가 되어버린 프리지아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후우, 하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 들통났으니 이번 계획은 폐기해야 할 듯했다.
머지 않아 어머니도 찾아오실 테고 말이다. 차라리 마음의 준비나 더 하고 있는 편이 낫다.
‘분명 완벽한 계획이었는데. 뭐가 잘못된 거지?’
몸과 머리는 다 컸어도 상식만은 그렇지 못한, 어린아이와 성인의 애매한 단계 사이에 걸쳐 있는 프리지아는 자신에게 주어진 약간의 유예시간 동안 열심히 머리를 굴려 계획의 잘못된 점을 찾아내려 노력했다.
‘……모르겠다.’
물론 해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어머. 이곳에 계시었습니까, 프리지아 자매여.”
“뭐야, 네가 여긴 왜 찾아왔어?”
프리지아는 자신의 예상과 전혀 다른 목소리가 들려오자 반사적으로 불쾌감을 표하며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루체 이사르. 정확히 같은 날 같은 시간에 태어난 비올라 이사르와 함께 13자매의 사실상 맏이 역할을 하는 여자이자, 프리지아의 자매였다.
네가 여긴 왜 찾아왔냐, 라는 가시가 잔뜩 돋힌 말에도 루체는 그저 조용히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 의미심장한 미소를 본 프리지아가 설마? 하는 생각을 했다.
“너야?”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나이다, 자매여.”
“너 맞구나.”
프리지아가 으르렁거렸다.
어쩐지 너무 쉽게 들켰다 했다. 아무리 딸들에게 관심이 많은 부모님이라지만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지는 않고, 그러니 회의실에서 바로 들킬 일은 없어야 했을 텐데.
하지만 루체는 프리지아의 분노를 덤덤히 받아넘겼다. 서로를 꼭 닮은 칠흑색 눈동자가 가늘게 떠졌다.
“저의 어머니께서 이런 말을 해주셨사옵니다. 태양과 달이 비치지 않는 세상이란 존재할 수 없으리라 하셨지요. 그 마경에 가깝던 독늪과 정글 또한 결국에는 아버지께 구원받지 않았나이까.”
“그래서, 하고싶은 말이 뭔데?”
“태양빛과 달빛으로부터 숨을 수는 없다는 것이나이다, 프리지아 자매여.”
정말이지, 어처구니 없을 정도의 자신감이었다.
방금 루체가 말한 독늪과 정글이 어딜 말하는지는 프리지아도 알았다. 루체와 비올라의 어머니들께서 무서운 이야기라면서 대륙 남부에서 벌어졌던 사건을 들려주곤 하셨으니까.
지금은 그냥 덥고 끈적하고 곤충이 좀 크고 바닥에 독이 잔뜩 깔린 늪지대일 뿐이지만, 옛날에는 거대한 곤충형 마물들이 득시글거리는 인외마경이라 했었다.
“독늪이랑 정글이라면, 니 다리 사이에 있는 그거 말하는거 맞지?”
물론, 프리지아에게는 알 바 아니었다.
“…….”
천박하기 짝이 없는 발언에 루체의 얼굴에서 기어코 미소가 사라졌다. 그 사실을 확인한 프리지아는 계속해서 비아냥댔다.
“나한테 말이라도 하지 그랬어. 계획에 한 명 정도는 더 끼워줄 수 있었는데. 자기 다리 사이가 독늪이랑 정글이라는 건 또 어떻게 알고 옛날 이야기랑 끼워맞춰서 자기도 아빠랑 하고싶단 비유를 만들었대?”
“이, 이런…… 천박한…….”
루체는 파들파들 떨면서도 말을 이어가려 했으나, 결국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언니 역할을 오래 해서 그런가, 몸도 같이 늙었나 봐? 난 아직 젊어서 모르겠는데 안타깝긴 하네. 그렇지, 루체 ‘언니’?”
그 말이 결정타였다. 둘은 파릇파릇한 10살 소녀답게 말이 아니라 마나와 신앙으로 싸우기 시작했고, 1초도 되지 않아 드넓은 회의실 하나를 통째로 날려버렸다.
사실 둘의 출생 시간은 한나절 정도밖에 차이나지 않았지만, 그건 이제 더는 중요하지 않았다. 루체는 플로레타와 이클립스가 달려와 말릴 때까지 자기는 깨끗하다는 주장을 반복했다.
프리지아도 알고 있었다. 예전에는 엄마를 따라 다같이 목욕탕에 들어가기도 했으니까.
그냥 받은 만큼 되갚아주고 싶었다.
“……예전에는 그런 일도 있었지요.”
“그러게.”
프리지아는 루체와 마주보고 앉아 느긋하게 차를 홀짝였다. 갑자기 왜 저런 말을 꺼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백 년도 더 전의 일이다. 앙금은 진작에 다 풀렸다.
그따위 허접한 걸 ‘완벽한 계획’이라며 자화자찬했던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과 창피함만이 있을 뿐이다.
“그 뒤로 독늪이랑 정글 비유는 한번도 안 했잖아.”
“…….”
물론, 자괴감과 창피함이 들게 만든 복수를 하는 건 잊지 않았다.
후일담: 완성
‘저게 결국 완성이 되는구나.’
나는 저 멀리 떨어진 대리석 조각상을 쳐다보며 속으로 침음을 흘렸다.
성국 최대 높이의 건물인 태양의 대성당 첨탑 창문과 눈높이를 비슷하게 맞출 수 있는 조각상은 라파엘라 성국에 하나뿐이었다.
살아계신 성자인 내 조각상. 라파엘라 성국이 사력을 다해 만들기 시작했던 그것이 어느덧 완성을 목전에 두고 있는 것이다.
내 결혼식 이후로 가장 큰 경사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기에 성국의 모든 사람이 교황 직할령의 중앙 광장에 결집한 상태였다. 중앙 광장만이 아니라 작은 골목 하나하나까지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리고 ‘태양과 달’은 중앙 광장에 모인 사람들을 위해 기적을 아낌없이 일으켜 모두가 이 마지막 순간을 볼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다.
기적이 펼쳐질수록 내 평가는 여기서 더 올라갈 곳이 있나 싶을 정도로 솟구쳤고 말이다. 무려 신앙의 대상이 날 위해 온갖 기적을 펼쳐주고 있는 거니까.
ㅡ아아아아아…….
감히 나를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며 이젠 더 이상 가사조차 존재하지 않는, 오직 수녀들의 화음으로만 이루어진 찬가가 사방에 내려앉았다.
저 노랫소리를 라파엘라 성국 전체에 울려퍼지게 만들어준 것 또한 태양과 달이 내려준 기적 중 하나였다. 수많은 성국 신민들이 그 찬가를 들으며 조각상을 향해 기도를 올렸다.
대체 얼마나 진심인 건지, 아이테르눔 제국과 라파엘라 성국의 국경선이 빛의 장막으로 틀어막혀있기까지 했다. 이 경건하고 신성한 날에 외부인을 들일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물론 내 아내와 딸들은 예외다.
“기분이 어떠세요, 당신? 감개가 무량하다거나? 아니면 말문이 막히실 정도로 감동했다거나?”
플로레타와 루나는 대리석 조각상 머리 꼭대기의 마지막 자리를 깎아내기 위해 태양빛과 달빛으로 만들어진 계단을 올라가는 중이었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내게 이클립스가 말을 걸어왔다.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일단 지금 기분이 감개무량이란 단어랑은 전혀 안 어울린다는 건 알겠네요.”
나는 이클립스 본인의 요청으로 아직까지도 존댓말을 사용하고 있었다. 이클립스도 카이킬리아나 미네르바와 비슷한 성향이었기에.
반말은 침대 위에서만 사용해달라고 하는 그런 성향 말이다.
솔직히 별로 놀랍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런 성향이 아니라고 말하는 쪽이 훨씬 더 놀라웠을 거다. 자기 입으로 아무 망설임 없이 스스로를 마조 암퇘지라고 칭하는 여자니까.
“그러신가요?”
이클립스가 쿡쿡 웃었다. 그 간단한 동작만으로 가슴과 음부를 가린 가리개가 위태롭게 흩날렸다. 제 본분을 지키는 걸 잊지는 않았지만, 그러기가 무척 힘들어보이는 옷차림이었다.
축하해야 할 날이니 특별히 신경 쓴 차림을 했다면서 가리개가 평소보다 훨씬 더 짧고 얇아진 탓이 컸다.
‘프리지아가 옷차림만큼은 엄마를 안 닮아서 다행이지.’
내 필사적인 교육이 효과가 있었다. 속으로 뿌듯해하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플로레타와 루나는 계단 한 칸을 오를 때마다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맞잡은 채로 기나긴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덕분에 꼭대기까지 올라가는데만도 한참이었다.
120m나 되는 조각상의 제일 꼭대기로 걸어서 올라가야 하는데, 계단 한 칸을 오를 때마다 기도문을 외우는 일의 반복이다. 당연히 그 속도는 상상 이상으로 느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곧 끝을 맞이하려 하고 있었다. 마지막 칸에 도착한 플로레타와 루나가 최후의 기도를 끝내고 몸을 일으켜 축복이 걸린 망치와 정을 쥐었다.
둘은 서로와 눈빛을 교환하고, 비슷한 높이에 앉아있는 나를 향해 눈웃음을 치고, 마지막 기도를 올린 다음 망치와 정을 가져가 마지막 남은 부분을 깎아냈다.
그와 동시에 하늘에 떠올라 있던 태양과 달이 조각상 양 옆에 놓인 성유물 조각상의 윗부분에 정확히 정렬됐다. 세상이 낮과 밤으로 나뉘었다.
달을 믿는 사람들의 머리 위에 달빛이, 태양을 믿는 사람들의 머리 위에 태양빛이 내렸다.
무려 163년에 걸친 라파엘라 성국의 대여정이 마침내 끝을 맺는 순간이었다. 노래를 부르는 대신 머리를 조아리는 걸 택한 수녀들을 대신해 하늘에서 찬가가 울려퍼졌다.
내 곁의 사람들을 제외한 성국의 모두가 그 찬가를 들으며 일제히 머리를 조아렸다. 나는 마치 성역이 라파엘라 성국 전체에 강림한 것만 같은 풍경을 첨탑 위에서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아직도 평범한 기분이신가요, 당신?”
그런 질문을 하는 이클립스의 얼굴에는 작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뭐…… 나쁘진 않네요.”
성국 전체가 대를 이어가며 참여하고, 무지막지한 액수의 돈이 투입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단 한번의 실수조차 없었던 결과물을 확인하는 것 치고는 평범한 감상이었지만.
이걸로 충분했다.
성국은 올해를 ‘축제의 해’로 선포했다. 몇 일, 몇 주, 한 달도 아니고 1년을 통째로 축제를 벌이겠다고 선포한 것이다.
그럴 자격은 있었다.
중간부터 일정을 약간씩 조율해서 해가 바뀌는 시간에 맞춰 조각상이 완성되도록 짜맞춰놨으니까. 아마 그때부터 축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겠지.
나는 축제의 개막을 알리며 약간의 덕담도 같이 섞어주었다. 조각상이랑 관련된 이야기도 조금 해주고.
덕담을 들은 사람들이 감동받다 못해 단체로 거품을 물며 사망하는 ‘작은’ 소란이 있긴 했지만, 내가 모두 살려냈기에 최종적으로 죽은 사람은 0명이었다.
뭐, 결론이 좋으면 된 거니까.
“저기부터 가보자!”
“앗, 치사해! 내가 먼저야!”
“야……! 천천히 가……!”
그리고 축제가 열린다는 말인 즉, 아직 어린 딸들에게는 최고의 놀이터가 펼쳐진다는 말이기도 했다. 저 멀리서 낮과 밤을 오가며 시끌벅적하게 뛰어노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물론 대부분은 저렇게 격식 없이 뛰어놀기엔 너무 많이 커버렸다. 그 너무 많이 커버린 딸들이 할 일은 하나뿐이었다.
“이런 곳에서 무얼 하고 있느냐, 아버지여.”
“아빠는 내려가서 같이 놀지 않는 것일까?”
언덕 위에서 어린 딸들과 열심히 놀아주는 아내들의 모습을 흐뭇하게 관찰하고 있으려니, 에일린과 세그레투스가 불쑥 튀어나왔다. 기척 숨기는 솜씨가 꽤 많이 늘었다.
“이기고 온 거니, 우리 딸들?”
“당연하지 않느냐. 내가 모조리 다 압도적으로 짓누르고 왔느니라.”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날에 아빠의 곁을 독차지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잖니.”
에일린과 세그레투스의 표정에 뿌듯함이 깃들었고, 발걸음은 한층 더 위풍당당해졌다.
진작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다. 뭔가 꿍꿍이가 있지 않은 이상에야 내 옆이 텅 빌 리가 없으니까. 언제나 조금이라도 더 옆을 차지하려고 북적였으면 북적였지.
저 밑에서 천진난만하고 순수하게 뛰어노는 몇몇을 제외한 나머지 딸들이 더할 나위 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한곳에 모이는 걸 보기도 했고 말이다.
내가 본 것을 설명해주자 아내들은 축제가 끝나려면 아직 1년이나 남았으니 괜찮다며 순서를 양보해줬다. 그것 역시 내 옆이 텅 비어있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혼자 이런 곳에 있으면 궁상맞게 보일 것이다.”
“안심하려무나. 우리가 아빠 곁에 있어줄 테니.”
어느새 바로 옆까지 다가온 에일린과 세그레투스가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래? 그럼 고맙다고 해야겠네. 궁상맞게 보이지 않도록 해줘서 고마워, 우리 공주님들.”
나도 똑같이 미소로 답했다. 그러자 둘 다 주춤하더니 순식간에 화끈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선 큼큼 헛기침을 하면서 내 옆에 달라붙었다.
팔과 팔이 슬그머니 얽혔다.
“아, 시작하려나 보네.”
저 밑에서 신나게 뛰어다니던 딸들이 제자리에 못 박힌 듯 멈춰섰다. 아내들이 그 어깨에 손을 얹고 다른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뭐라뭐라 말하고 있었다.
얼마 안 가 달빛과 햇빛을 듬뿍 머금은 첫 폭죽이 하늘 높이 솟아올랐고, 정확히 낮과 밤의 경계에서 터져 황금빛과 은빛으로 하늘을 수놓았다.
곧이어 수많은 폭죽들이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터지기 시작했다. 수천에 달하는 불꽃들이 몸을 불살라 별처럼 화려하게 빛나고선 천천히, 혹은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불꽃놀이.
이클립스와 내가 지구에서 가져온 것들 중 하나였다.
ㅡ지금 하겠느냐?
ㅡ해야지. 이런 기회가 또 언제 오겠니? 내가 기억한 순서대로라면 약 13초 뒤에 제법 큰 불꽃이 터질 거란다.
ㅡ그때를 노리자는 이야기로구나. 충분히 이해하였다.
양 옆에서 에일린과 세그레투스가 대화를 주고받았다. 나름대로 숨기기 위해 마나로 대화를 주고받은 건지, 아니면 대놓고 들으라고 마나로 대화를 주고받은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둘은 서로에게 속삭인대로, 척 보기에도 여태까지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만큼 거대한 불꽃이 수직으로 솟아오르는 순간을 틈타 내 귓가에 입술을 붙였다.
“사랑한다, 나의 아버지여.”
“사랑하고 있단다, 나의 아빠.”
그와 동시에 펑! 이 아니라 꽈앙! 이라고 묘사해도 될 정도의 굉음이 천지를 뒤엎었다. 황금색과 금색으로 정확히 반씩 나누어진 불꽃이 하늘을 수놓았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딸들의 고백을 듣지 못하는 일 따윈 없었다. 나는 에일린과 세그레투스의 허리에 손을 두르고 품에 끌어안으며 같이 속삭여주었다.
“그래. 나도 사랑한다.”
나를 꼭 닮은 칠흑색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너희 아빠로서.”
“윽.”
“엑.”
그리고 다시 작아졌다.
어딜 감히 분위기에 편승하려고.
후일담: 불굴의 페치
“안녕하세요, 델타 님! 오랜만에 뵙네요!”
오랜만에 뵙는다는 말마따나, 거의 40년만에 만나는 페치는 예전과 비교하면 꽤 달라져 있었다.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선명한 핫핑크색 트윈테일과 핫핑크색 눈동자, 아슬아슬한 핫핑크색 언더붑에 극도로 짧은 핫핑크색 타이즈 하의는 여전했지만, 제일 다른 점은 분위기였다.
예전의 그 비루하다고까지 느껴질만큼 설설 기던 분위기는 온데간데 없고, 그동안 아주 잘먹고 잘살았는지 동작 하나하나에 여유가 넘쳐흘렀다.
당장 지금 머물고 있는 저택만 봐도 그랬다. 원래 내것이었다가 더 쓸모가 없어져서 페치에게 넘겨줬었는데, 아주 자기 입맛대로 죄다 뜯어고쳐놓았다.
집에는 사용인이 발에 채일 정도로 많았고 말이다. 얘가 돈을 그렇게까지 많이 벌었던가.
“그래서, 무슨 일로ㅡ 꺄아아아악?!”
물론 집들이라거나 안부 인사같은 한가한 용건으로 찾아온 게 아니었기에, 싱글싱글 웃는 페치의 트윈테일을 한데 모아 붙잡고 위로 쭈우욱 들어올렸다.
“넌 대체 정체가 뭐야?”
“머리! 머리 다 뽑혀요! 살려주세요, 델타 님! 저 아직 아무 짓도 안 했어요!”
“아직?”
“꺄아악! 죄송해요! 죄송해요! 실수에요! 앞으로도 안해요!”
페치는 발 끝으로 서서 낚싯줄에 걸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렸다. 그래도 주제파악은 잘 됐는지 내 팔을 붙잡는다거나 날 향해 팔다리를 휘두르는 짓은 하지 않았다.
그랬으면 꽁꽁 묶어두고 시작했을 텐데.
“아무리 봐도 신기하단 말이지. 너 평범한 인간 맞아?”
“아야야야야야! 지, 진짜 머리 다 빠져요오오옷!”
“너 대답 안하면 빠지라고 이러는 거야. 대답 여하에 따라 다시 붙여주거나 빠진 그대로 두고 떠나려고.”
“으아아아앙! 너무해ㅡ 아팟?!”
나는 붙잡은 핫핑크색 트윈테일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예전부터 느꼈던 거지만, 페치는 아무리 봐도 평범한 인간이랑은 거리가 멀었다.
이제는 엄청난 고전 게임이 되어버린 브라이티스트 다크니스 1~3편에 나온 건 이스터에그라 치더라도, 그 원판인 세계에서조차 굉장히 오랫동안 활동했다는 증거가 있었으니까.
그리고 시리즈의 최종편에도 페치란 이름을 달고선 상인 NPC로 눈도장을 찍었다. 이쯤되니 정체가 대체 뭐길래 브닼 시리즈에 개근했는지 궁금증이 도질만도 한 것이다.
‘황금 열쇠를 찾으러 갔을때도 그랬지.’
어쩌면 천 년 넘게 살았을 가능성까지 존재했다. 내 아내들처럼 여신의 축복을 받은 것도 아닌데 말이다. 심지어는 이클립스도 페치의 정체에 대해서 언급을 피했고.
정말이지 기이한 여자였다. 나는 괜히 치밀어오르는 궁금증에 트윈테일을 쥔 손을 더 들어올렸다. 페치의 발 끝이 아슬아슬한 수준까지 떠올랐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제가 다 잘못했어요! 뭘 잘못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다 잘못했어요! 그러니까 용서해주세요! 델타 님!”
아무리 트윈테일을 쥐고 짤짤 흔들어도 페치는 비명을 지르기만 할 뿐, 교묘하게 자신의 정체에 대한 대답을 피하고 있었다. 보아하니 대답할 마음이 아예 없는 듯했다.
조금 더 강도 높은 폭력을 가하거나 머리를 백치로 만들어버리면 대답을 들을 수 있기야 하겠지만,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다. 일단 미운 정도 정이긴 하니까.
아직까지는 미운 정을 이길만큼 궁금한 건 아니었다.
“호에엑…… 으에엑…… 내 머리…….”
손을 놓아주었다. 페치는 엉망이 되어버린 핫핑크색 트윈테일을 매만지며 울상을 지었다.
“한 가닥도 안 빠졌으니까 엄살 그만 부리지?”
“훌쩍…… 네.”
페치는 입으로 훌쩍훌쩍 눈물을 삼키면서도 눈으로는 내 눈치를 살펴댔다. 저 눈물 자체가 거짓이라는 증거였다. 백 년이 훌쩍 넘게 지났는데 어째 예전이랑 바뀐게 하나도 없었다.
“그, 그래서…… 저는 갑자기 왜 찾아오셨어요……? 저 조금 있으면 그 연금술사한테도 들러야 하는데…… 약속이 잡혀 있어서…….”
저기서 말하는 연금술사란 린네가 아니라 그 후계를 의미했다. 린네는 진작 수명이 다했고, 연금술사의 전통에 따라 그 지식과 기억을 넘겨받은 다른 제자.
나도 최근에 몇 번 만나보긴 했는데, 린네가 특이한 경우였던 건지 다행히도 그 후계자들은 나한테 별 관심이 없었다. 재료도 무제한으로 공급받고 있겠다, 연금술에 몰두하느라 바빴지.
스승님의 마지막 발명품이라면서 린네의 체취가 무한히 유지되는 향수병을 건네줬을 땐 조금 식겁하긴 했지만.
“아직도 안 짤렸어?”
페치가 아직도 물품 공급을 담당하는 것으로 보아 일을 꽤나 열심히 하는 모양이었다.
“이래뵈도 믿음과 신뢰로 운영하는ㅡ”
“뭐랑 뭐?”
“죄, 죄송해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첫 만남부터 뒤통수를 치려고 했던 걸 돌이켜보면 최소한 내 앞에서는 그런 말 못한다.
“됐고. 왜 찾아왔냐고 그랬지? 별 건 아니야. 아니다, 별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아공간에서 온갖 병들을 끄집어내 허공에 둥둥 띄워놓았다. 병이 늘어갈 때마다 페치의 얼굴도 점점 더 새하얘졌다.
정확히 93개나 되는 약병들을 모두 끄집어내 일렬로 세워둔 뒤,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려대는 페치와 지그시 눈을 마주쳤다.
“이게 뭔지 알겠어?”
“그,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 호, 호호호호, 혹시 저한테 쓰시려는 건 아니죠……?”
“이게 뭔줄 알고 너한테 쓴다는 말을 꺼내?”
“…….”
페치는 아차 싶었는지 입을 다물었다. 나는 그냥 약들을 아공간에서 꺼내놓았을 뿐 아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제 발 저린 것이다.
“아, 하하하하! 하하하! 그냥 척 봐도 약병처럼 생겼잖아요! 그래서 혹시라도 저한테 먹이시려고 그러는 건가 싶어서 그랬죠!”
그래도 용케 빠져나갈 구멍을 생각해낸 듯했다. 나름대로 그럴싸한 변명에, 나는 설득되는 척 넘어가주었다.
“맞아. 척 봐도 약이긴 해. 만든 사람이 연금술사라는 것만 빼면.”
“그, 그런가요?”
“내가 이걸 누구한테서 얻었을 것 같아?”
톡, 톡. 손가락으로 허공에 뜬 약병들을 두들겼다. 청아한 소리가 방에 울려퍼졌다.
“하, 하하하…… 글쎄요. 저는 잘…….”
“내 공주님들.”
“…….”
“차 대접해준다길래 신나서 갔더니 차 안에 이걸 넣어놨더라고. 이게 뭔지 모른다고 했으니, 무슨 약인지도 모르겠네?”
“네, 네에…….”
“미약이더라. 그것도 꽤 강력한. 마나가 하나도 안 느껴져서 방심했더니 하마터면 큰일날 뻔했지.”
“…….”
내가 아공간에서 꺼낸 것들은 전부 다 누군가를 성적으로 흥분시키는데 특화된, 이른바 미약이었다. 어쩐지 차 먹자고 불러놓고선 평소보다 옷차림이 조금 많이 휑하다 했다.
“요 발칙한 계획을 꾸민 공주님들은 엄마한테 붙잡혀서 한소리 듣고 있고, 나는 이걸 누가 우리 귀여운 공주님들한테 줬을까 고민하다가 널 찾아온 거야, 페치.”
페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식은땀을 줄줄 흘리기만 할 뿐이었다.
“그렇지, 페치? 너도 이걸 누가 줬는지 궁금하지?”
“네! 엄청 궁금ㅡ”
“왜 그랬어?”
“……딸꾹.”
‘주, 죽을 뻔 했다아…….’
페치는 델타가 완전히 떠난 다음에야 참았던 길고긴 한숨을 내쉬었다. 정신력이 팍팍 깎여나가는 취조였지만 어떻게든 최소한의 피해로 견뎌낼 수 있었다.
이래서 평소 이미지가 중요했다. 델타에게 페치란 결코 좋은 관계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싫어할 수도 없는, 그런 아슬아슬한 선에 걸쳐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리고 페치는 자신의 그런 이미지를 뼛속까지 활용할 줄 아는 여자였다.
방금도 델타가 자신을 바라보는 눈이 조금만 더 안좋았다거나 반대로 조금만 더 좋았더라면 절대로 쉽게 넘어갈 순 없었을 거다.
‘너무 좋은 관계로 나가는 것도 안 돼. 거짓말이 들통났을 때 후폭풍이 너무 크니까.’
어쩌다 거짓말이 들키더라도 얼굴에 철판 깔고 당황 몇 번에 사죄 몇 번 해주면 ‘네가 그럼 그렇지’하고 한숨 쉬고 넘어갈 수 있는 수준이 적당하다. 이미지가 너무 좋으면 그게 안 됐다.
반대로 이미지가 너무 안 좋으면 거짓말이 들키는 순간 뒷감당이 불가능해질 것이다. 페치는 그 ‘좋으면서도 나쁜’ 선 위에서 절묘하게 균형을 잡고 있었다.
“그냥 넘어가줘서 다행이다. 진짜로…….”
방금은 100% 알고 온 거다. 누가 범인인지 알고 왔는데도 그냥 경고만 하고 넘어가준 거지. 페치는 그 사실을 모를 정도로 멍청이가 아니었다.
‘괜찮아. 아직 연줄은 남아 있어. 이 돈 잘되는 사업을 쉽게 포기할 순 없지.’
솔직히 처음에는 거절했었다. 그 다음에도 거절했고, 세 번째 요청도 거절했다. 델타가 딸들을 얼마나 애지중지하는지 알고 있는데 미쳤다고 그런 쪽으로 엮이겠는가.
하지만 3번이나 거절했음에도 끈질기게 부탁해오기도 했고, 감히 거절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돈을 쥐어주기도 했기에 지금은 홀라당 넘어가버린 지 오래였다.
은밀한 거래 ‘한 번’에 받는 돈만 해도 족히 백 년은 떵떵거리며 살 수 있을 정도로 기본적인 액수가 컸다. 그 덕분에 이런 초호화 생활을 누리게 됐으니 포기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말만 잘 들으면 확실하게 보호해준다고도 했으니까.’
무엇보다, 얻는 게 있는만큼 보호를 약속받기도 했다. 아무리 델타라도 딸들이 말리는 상황에 페치를 어떻게 할 수는 없으리라.
“어디, 다음 만남이…….”
페치는 다리를 살짝 벌리고 천천히 허벅지 사이를 더듬었다. 그리고 연금술이 가미된 덕분에 조금도 구겨지지 않은 종이 한 장을 꺼내들었다.
어디서 꺼냈는지는 페치만 아는 비밀이었다.
“너도 참 대단하다. 설마 모를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지?”
“아, 아니…… 그게 말이죠…… 헤헤…….”
“그래서, 이번엔 누구ㅡ 아니다. 다른 거 먼저 물어볼게. 이번엔 뭐였어?”
“……고양이 란제리요.”
“뭐?”
후일담: 질풍노도의 시기
ㅡ오직 그림자 안에 갇힌 자만이 빛을 갈구할 자격을 얻지.
ㅡ이것이 내 생명이요, 내 얀식이니.
ㅡ나는 오로지 나로서 존재한다. 하지만, 피의 과실을 탐닉할수록 인간에서 한 발짝 더 멀어지는…….
“아악! 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악!”
르네가 펄쩍 뛰며 귀를 틀어막았다. 이불이 그 몸을 둘둘 휘감았다. 르네는 어느새 이불로 돌돌 말린 애벌레처럼 변해 있었다.
침대가 쉴 새 없이 떨려댔다. 안에서 커다란 진동이 일어나고 있다는 증거였다.
“어떤가, 르네.”
르네를 그렇게 만든 당사자인 빅토리아는 태연하게 스마트폰의 화면을 터치했다. 재생되던 녹음 파일이 멈추고, 방 안을 가득 채운 르네의 목소리가 사라졌다.
“이제 참가할 마음이 들었나?”
“…….”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조금 더 기다려봐도 마찬가지였다. 빅토리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엄마를 꼭 닮은 은발이 머리 뒤편에서 찰랑였다.
“거절의 의미라고 받아들이겠다. 그러니 계속 재생해도 되겠나?”
“마음대로 해!”
이불 속에서 악을 쓰듯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어쩔 수 없지. 빅토리아는 다음 파일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
ㅡ나는 불이야. 그러니까, 한 자리에 가만 있을 수 없잖아?
ㅡ너도 언젠가는 바람이 되어 사라질 운명이겠지. 너와 나는 본질적으로 같……
“야아아악! 그만해! 그만!”
이번에는 바로 효과가 나타났다. 르네가 씩씩대며 이불을 박차고 일어섰다. 뺨은 물론이고 귀까지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본인의 머리카락과 꼭 같은 색이었다.
돌돌 말려 목 뒤에서 뭉친 뒷머리와 쇄골 근처까지 내려온 붉은색 옆머리가 찰랑찰랑 흔들렸다. 엄마가 아니라 아빠를 닮은 칠흑색 눈동자에는 눈물까지 고인 상태였다.
“야! 나한테 왜 이래! 어?! 나한테 왜 이러냐고! 원하는 게 대체 뭐길래!”
“말했지 않나. 너만 오면 된다고. 우리 모두 너를 기다리고 있다.”
“안 한다니까! 난 그냥 아빠한테 착한 딸로 남을 거라고!”
“예전에는 아빠랑 결혼하겠다고 노래를 불러댔으면서 이제 와서 그러는 건가, 르네? 착한 딸이 아니라 여우같은 아내가 될 기회다. 아니면 토끼같은 아내도 괜찮은 비유겠지.”
“그건 예전이잖아! 지금은 아니야!”
“어차피 남편감을 못 찾은 건 지금도 마찬가지 아닌가?”
“윽…….”
르네가 주춤했다. 르네 역시 남자친구, 혹은 남편감이 될만한 사람을 찾으러 지상으로 내려갔던 선발대 중 한 명이었다. 물론 다들 그랬듯이 처참하게 실패했고.
한가지 다행인 점이라면, 르네는 선발대로 참가했던 몇몇 자매와는 달리 ‘역시 내 남편감은 아빠밖에 없어’라는 생각이 한층 더 깊어지진 않았다는 사실이다.
어차피 원래부터 그 생각뿐이었으니까. 빅토리아도 그 사실을 알기에 저렇듯 싫어하는 르네에게 흑역사까지 들먹여가면서 꾸준히 권유하고 있는 것이다.
“어, 언젠가는 나오겠지!”
“계획에 동참하면 그 확신조차 못할 언젠가를 기다릴 게 아니라 지금 당장도 가능할 수 있다.”
“여태껏 다 실패해놓고선?”
“그건…….”
이번에는 빅토리아가 주춤했다. 르네의 말마따나, 계획이 성공했다면 아직도 시도를 하고 있는 게 아니라 진작 아빠의 아내가 되어 있었을 테니까.
그렇게 되니, 빅토리아 역시 할말이 궁해졌다.
“알았다. 네 의지가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다음 것도 틀겠다.”
“아아아아악!”
대화 주제도 돌릴 겸 스마트폰을 들자 르네가 비명을 지르며 귀를 틀어막았다. 아직까지 계획에 참가할 마음이 없는 듯했다. 말로는 안 될 모양이다. 세 번째 녹음 파일에 손을 가져갔다.
“…….”
하지만 그 손은 재생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
어느새 스마트폰을 쥔 르네의 손이 빅토리아보다 한 발 빠르게 어떤 동영상을 재생했기 때문이었다. 동영상을 확인한 빅토리아는 제자리에 우뚝 멈춰설 수밖에 없었다.
“무…… 뭣…….”
화면에 떠오른 것은 빅토리아였으나, 지금의 단정하고 정갈한 제복 차림의 빅토리아와는 전혀 다른 무언가였다.
다치지도 않은 오른쪽 눈을 이상한 문양이 새겨진 검은색 안대로 가리고, 입에는 해롭지 않게 만든 담배를 물고, 온갖 기하학적인 무늬와 글자가 그려진 검은색 제복을 입고, 다치지도 않은 왼손에 붕대를 칭칭 감은 채.
세상 다 산 표정을 하고선 우수에 젖은 눈빛으로 있어보이는 척 벽에 등을 기대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빅토리아가 담긴 동영상이었으니까.
ㅡ여기서 뭐 하고 있나, 빅토리아.
동영상 안에서 빅토리아의 어머니, 즉 아이리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웃음을 정말로 간신히 참는다는 듯한 목소리였다. 중간중간 끅끅대는 소리도 같이 들렸다.
빅토리아는 천천히 고개를 돌리고, 담배를 쥐고 최대한 있어보이는 척 연기를 내뿜으면서, 붕대에 휘감긴 왼손과 안대로 가려진 오른눈을 한번씩 만지작거린 다음에야 답했다.
ㅡ괴물의 봉인이 풀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 노력중이다. 내 정신이 흐트러졌다간, ‘이 녀석’의 봉인이 풀리고 말 테니까. 그러면 세계가 큰 상처를 입게 되겠지.
ㅡ푸훕…… 끅…… 그…… 그렇…… 끄읍…….
“우아아아아악!!!!!!”
본인의 흑역사가 재생되며 엄마들 사이에서 감정 표현 적기로는 세 손가락에 꼽히는 아이리스가 입을 틀어막고 웃는 소리가 흘러나오자, 빅토리아는 불에 데인 듯 펄쩍 뛰어올랐다.
얼굴 전체가 르네의 머리카락처럼 새빨간 색으로 물들었다.
“흐, 흐흐흐흐…… 나라고 비슷한 게 없는 줄 알아? 어릴 때 너랑 나랑 이러고 잘 놀았잖아…….”
동영상을 멈춘 르네가 악에 받친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 손가락이 다음 동영상 재생 버튼을 터치했다.
“같이 죽을 준비 됐지, 빅토리아?”
“빅토리아랑 르네는? 얘들 왜 이렇게 안 와?”
“루체로부터 마음의 상처를 깊게 입었으니 부득이하게 오늘의 회의에는 참가하지 못하겠다고 말해달라던 부탁을 전해들었나이다.”
“또 옛날 일로 한바탕 했나보네. 하여튼, 나중에 쪽팔릴 짓을 왜 해가지고선. 알았어. 걔들 빼고 진행하자.”
“얼마든지 그리하시지요.”
비올라가 로렐리아와 눈을 마주쳤다. 칠흑색 눈동자가 물결치듯 휘었다. 언제봐도 자신만만한, 여유가 흘러넘치는 웃음. 이상하게 마음에 안 드는 웃음이었다.
“왜 그런 눈으로 봐?”
“아무것도 아니옵니다. 그저 옛날의 귀여웠던 로렐리아 당신이 떠올랐기에.”
“아, 언니 노릇을 해보시겠다? 우리 첫째 라인은 맏이랑 막내랑 나이 차이 사흘도 안 나는 거 알지?”
“사흘이면 많은 것이 바뀌기에 충분한 시간이지요. 저희들에게는 말입니다.”
“…….”
맞긴 했다.
여신의 축복을 받아서 그런지는 몰라도 다들 성장 속도가 어마어마하게 빨랐으니까. 태어난 직후부터 부드러운 과육을 잔뜩 머금은 풍만한 육신으로 성장하기까지 1년이면 충분했을 만큼.
인정하긴 싫었지만, 비올라의 말대로 사흘이란 기간은 유의미한 차이를 보이기엔 차고 넘치는 기간이었다.
어디까지나 어릴 때 한정이어서 그렇지.
‘맞다. 저래서 마음에 안 들었지.’
아빠의 기준으로 따지면 사흘은 사실상 친구나 다름없는 나이 차이인데, 표면적으로는 친구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은근슬쩍 언니임을 과시하는 저 태도가 마음에 안 드는 거였다.
로렐리아는 새삼 그 사실을 자각하며 혀를 찼다.
“잠깐. 그럼 루체는 왜 안 와? 너랑 루체가 떨어져서 다닐 리가 없는데. 설마 그 말만 전달하고 갔어?”
“레지나와 셀레나를 붙잡아두고 있사옵니다. 그 둘이 여기를 찾아오기라도 하면 곤란하니까요.”
“아, 어쩐지.”
레지나는 아빠 한정으로 비밀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비밀이니 입조심 하라고 아무리 단단히 약속받아도 아빠가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뭘 했냐고 물어보면 곧바로 헤실헤실 웃으며 모조리 털어놓는 통에 계획이 파토난 적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덕분에 천재일우의 기회를 날려먹어야 했던 기억을 떠올린 로렐리아가 몸서리를 쳤다. 엄마를 꼭 닮은 길다란 흑발이 치렁치렁 흩날렸다.
“레지나는 안 돼.”
“그렇습니다. 레지나는 안 되지요.”
드물게 로렐리아와 비올라가 의견을 같이했다. 레지나의 악명은 그 정도로 높았다.
그나마 셀레나는 조금 덜 했지만, 더하다 덜하다의 차이뿐이지 아빠한테 사르르 녹아내리는 건 같았다.
“일단 결과부터 공유해보자. 너흰 어땠어?”
“애석하게도 모두 실패로 돌아갔나이다. 아버지께서 모두 알아차리셨기에 육탄 공세는 시도조차 하지 못하였지요. 당신들은 어떠하셨나이까.”
“우리도 그래. 처음에는 좀 져주시는가 싶더니 뭐든지 들어주는 내기를 하자고 하니까 본 실력을 발휘하시더라고. 아니, 처음 해보는 게임이라면서 퍼펙트 콤보가 나오는게 말이 돼?”
“저희 아버지이지 않사옵니까. 당연히 그러셔야 마땅하나이다.”
“뭐, 그건 그렇지. 애초에 이기는 건 기대도 안 했어.”
둘 모두 입으로는 불평하면서도 마음 한켠으로는 당연히 이런 결과가 나올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예전부터 그래왔으니까. 앞으로도 그럴 테고.
보고 자란 남자가 델타 뿐이라는 사실이 자매들의 남자 보는 눈을 하늘 끝까지 높아지게 만든 원인이었지만, 다들 그걸 알면서도 개의치 않았다.
눈이 높아졌다는 게 잘못됐다는 생각을 한번도 해본 적 없었으니 당연했다.
“전략을 바꿔야 할까?”
“무엇으로 말이옵니까.”
“……그것도 그렇네. 어지간한건 다 해봤잖아.”
“어지간하지 않은 것 또한 해 보았지요.”
로렐리아가 피식 웃었다.
“너랑 루체가 슬링샷 비키니 입고 계곡주 먹이려다 혼났던 것처럼?”
“그러는 로렐리아 당신도 에일린과 함께 시도하지 않았사옵니까.”
“…….”
“…….”
서로 한 대씩을 주고받은 오렐리아와 비올라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둘 다 입은 웃고 있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