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Reincarnated into a Game Filled with Mods RAW novel - Chapter (38)
내가 대련에서 황금색 기사를 말 그대로 압살해버린 뒤, 의기소침해져 연무장 한구석에 처박힌 그놈을 리제와 클라우디아가 대놓고 놀려대며 그늘에 앉아 잠시 쉬고 있을 때였다.
“어라, 에리카? 왜 벌써 왔ㅡ 옆은 누구야? 눈은 또 왜 가려놨고?”
아이리스와 같이 도시 순찰을 떠났던 에리카가 돌아왔다. 그것도 옆에 왠 꼬질꼬질한 여자애 한 명을 끼고.
아직 순찰에서 복귀할 시간은 한참 남았을뿐더러, 같이 나간 아이리스는 어디로 가고 뜬금없이 처음 보는 여자애를 데려왔기에 우리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에리카를 쳐다보았다.
여자는 옷 대신 누더기나 마찬가지인 천으로 몸을 감싸고 있었다. 그 밑으로 드러난 종아리는 흙투성이였고, 심지어는 얼굴에도 천이 둘둘 감겨 하관의 일부만을 간신히 내놓았다.
‘와, 저러고도 예쁘네.’
하지만 모드로 떡칠된 세계관의 여자답게, 전신은 흙투성이에 누더기로 몸을 칭칭 감고 하관만을 간신히 드러냈음에도 코와 입가와 턱선만으로 예쁘다는 티가 확 났다.
정작 이쪽 세계 남자들은 상식이 개변당해버려서 여자가 저런 눈돌아가는 외모를 하고 노출까지 극심한 옷을 입어대도 신경조차 안 썼지만.
“제가 가린 게 아니에요. 이 애가 우릴 배려해준겁니다.”
에리카는 소녀의 손을 잡고 조심스레 한발 한발 이끌어주는 중이었다. 소녀도 얌전히 에리카가 이끄는대로 발을 내딛었다.
“그리고, 기사단에 데려온 것도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습니다. 일단 며칠동안 아무것도 못 먹었다고 해서 빵이랑 스프부터 좀 먹이려고요.”
“사정이 있었다? 며칠동안 아무것도 못 먹어? 그게 대체 뭔 소리야?”
“나중에 설명해드릴게요. 일단은 이 아이부터 식당에 데려다주겠습니다. 아니면 아이리스도 조만간 복귀할테니 아이리스에게 물어보셔도 됩니다.”
둘의 모습은 이내 성 안으로 사라졌다. 리제와 나, 클라우디아는 밖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건가 싶어 서로 어리둥절한 감정이 가득 담긴 시선을 마주했다.
물론 우리끼리 마주본다고 해답이 나오지는 않았다.
“예전에도 저렇게 기사단에 누구 데려왔던 적 있었어?”
“아니. 한 번도 없었는데. 지금이야 성에 걸린 마법이 안전하다고 확답 받았으니까 상관 없는 일이지만, 예전에는 이거 오래 먹으면 죽는거 아닌가 싶었거든. 우리도 불안한 걸 남한테 어떻게 먹여?”
“우리 앞가림 하기도 바빴으니 남을 챙겨줄 겨를은 더 없었지. 지금이야 신입 네가 그 돼지를 죽였으니까 숨통이 트였지만, 그러기 전에는 진짜로 힘들었어.”
클라우디아는 생각만 해도 짜증난다는 듯이 쯧, 하고 혀를 찼다. 하긴, 그놈 성격이 게임보다 훨씬 더 개차반으로 변했으니 그 밑에서 얼마나 고통받았을지 대충 짐작이 갔다.
“그 돼지 죽여버린거 생각하니까 갑자기 우리 신입이 또 기특해지네. 어때, 신입. 내가 또 안아줄까? 그때 에리카가 금방 떨어뜨려놔서 얼마 못 했었잖아. 응?”
리제가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팔을 벌렸다. 팔 사이로 얇디 얇은 민소매에 감싸인 거유가 탱글탱글하게 출렁였다. 슬쩍 눈을 돌렸다. 내 반응을 본 리제가 꺄르륵 웃었다.
“부끄러워하기는. 껴안기고 싶으면 언제 어디서든 말해도 돼. 아, 그리고 혹시 까먹었을까봐 말해주는건데, 뭐든지 하나 들어주겠다는 말도 아직 유효하다? 그거 말 그대로 뭐든지 가능한거야. 아무거나 다 말해줘도 돼.”
“에리카한테 체통 좀 지키라고 그렇게 잔소리를 들었는데 아직도 미련을 못 버렸냐?”
“그래서, 싫어?”
“…….”
나는 입을 다물었고, 리제는 예의 그 미소와 함께 손가락으로 내 뺨을 콕콕 찔러댔다. 클라우디아는 왠지 모를 흐뭇한 표정으로 우리를 쳐다보았다.
맞는 말이라 딱 잘라 거절할 수가 없었다. 싫냐고? 그럴 리가. 동성애자가 아니고서야, 이 세상의 그 어떤 남자가 저런 신체 접촉을 싫어하겠는가.
게다가 리제도 내가 딱 잘라 거절하지 않는데다 자기 몸에도 확실히 반응한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점점 더 대담하게 접근해오고 있었다.
조만간 뭐든간에 사건 하나는 일어나지 싶었다. 내 쪽에서 일으키든, 리제 쪽에서 일으키든.
‘……이미 스토리는 꼬이기 시작했으니 상관없을지도.’
금빛 황혼 기사단의 기사단장이 날 감시하겠답시고 찾아온 이후로는, 저런 생각이 자꾸 떠올라서 가뜩이나 흔들리고 있던 자제심이 더 크게 흔들리기도 했다.
내가 지금껏 리제의 신체 접촉을 억지로 밀어내고 있었던 건 혹여라도 스토리를 꼬아버리고 싶지 않아서가 제일 컸는데, 이미 하나가 잘못된 이상 더는 무의미한 행동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나도 바보는 아니다. 리제가 나한테 같은 기사단원 동료 이상의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쯤은 진작에 눈치챈지 오래였다. 생각해보면 첫 대련 이후부터 쭉 그랬었고.
지금이야 내가 영주도 처리하고 이것저것 저질러놓은 짓이 많으니 대충 이해가 가긴 하는데, 처음 봤을때는 왜 그랬는지가 아직까지도 의문이긴 했지만.
“신입 놀리는 건 여기까지 하고. 그래서, 아이리스 올 때까지 기다릴거야?”
“당연히 아니지.”
클라우디아와 리제가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걸 본 내가 뭐라 말을 해보기도 전에, 각자가 내 팔을 한 쪽씩 붙잡고 성 안으로 끌고들어갔다.
내가 어디로 끌려가는지 알게 된 것은 식당에 도착한 이후였다.
말 좀 미리 해주면 어디 덧나나.
에리카가 정체 모를 소녀를 성으로 데려온 지 사흘이 지났다.
소녀는 자신에 대한 내용을 모두 설명해주었다. 이름이 ‘이네르마’라는 사실부터 어쩌다 눈동자를 잃게 되었는지까지 모두.
‘저런 NPC는…… 없었던 것 같은데.’
기억을 되짚어봐도 딱히 생각나는 내용은 없었다.
아무리 모드로 외형이 바뀌더라도 그 본질까지 바뀌지는 않는다. 리제의 성격이 원본과는 180도 달라졌지만 여전히 얼음과 쌍단검을 주무기로 사용하는 것처럼.
그 말인 즉, 딱히 중요한 NPC는 아니었거나 아예 게임에서 등장하지 않는 인간이라는 뜻이었다.
“대련 고생하셨습니다! 여기, 땀 닦으실 수건이에요!”
결국 이네르마의 정체를 밝히는 건 어영부영 넘어갔다. 그 대신, 본인의 강력한 요청으로 성의 허드렛일을 도맡아하게 되었다. 은혜를 입었으니 보답하고 싶다는 이유였다.
사실 허드렛일이래봐야 뭐 있지도 않았다. 성에 걸린 원상복구 마법 탓에 성을 청소할 필요는 전혀 없었고, 물건을 보관하는 창고만 가볍게 정리하면 끝이었으니까.
기껏해야 우리가 대련을 한 직후에 물이나 수건을 가져다주는 것이 이네르마가 하는 일의 전부였다. 분명 눈이 안 보일텐데도 알아서 척척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니 무척 신기했다.
본인 말로는 첫날에 아이리스의 도움을 받아 성 내부 구조를 모두 외웠다고 했다. 보통 머리가 아니었다.
그리고, 좋은 소식이 한가지 더 있었다.
“폐하의 명령이다. 나는 이만 돌아가도록 하지.”
나를 지독하게 따라다니던 황금빛 기사놈이 황제의 명령을 받았다며 고작 닷새만에 돌아간 것이다. 정확한 이유는 불명이었지만, 어쨌든 본인이 일찍 꺼져주겠다는데 나쁠 건 전혀 없었다.
덕분에 나도 오랜만에 능력 확인 구슬을 사용할 수 있었고.
[능력치] [레벨] 16 [체력] 1 [마나] 1 [신앙] 1 [지구력] 1 [숙련] 1 [힘] 1 [마력] 7 [신성력] 10 [내구] 1나는 보유한 스탯 포인트를 마력에 몰빵하는 걸 선택했다. 마력 역시 신성력과 더불어 버프를 활용하기 위해서는 무척이나 중요한 스탯이기 때문이었다.
마력을 찍으면, 공격 마법의 피해량과 더불어 모든 버프의 증가 수치가 올라간다. 신성력은 버프의 지속 시간을 늘려주고, 마력은 버프의 증가 수치를 늘려주는 것이다.
이것 역시 신성력과 마찬가지로 초반 투자 효율이 굉장히 좋아서, 10까지 올려놓으면 대략 1.2배에 가까운 증가폭을 보여주었다.
피 묻은 검의 공격력 버프를 최대로 받으면 49.5%니, 그것이 거의 60%로 증가하는 셈이다. 10% 차이라도 절대로 무시할만한 수치가 못 됐다.
‘능력치가 올라갔다는 사실도 공개를 해야하긴 하는데. 타이밍을 못 잡겠네.’
그런 생각을 하며 능력 확인 구슬에서 손을 뗐다. 푸른 광원이 사그라들고, 주변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변명은 미리 다 준비해두었다. 이걸 언제까지고 숨길 수도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단지 적당한 기회가 안 보여서 치일피일 미뤄지고 있을 뿐.
주위를 살피며 조심스레 밖으로 걸어나왔다. 일부러 밤 늦은 시간을 고르긴 했는데, 여기서 뭐 하고 있냐는 소릴 들으면 그건 그거대로 변명에 가까운 대답을 해야 하니까.
“신입 기사님?”
‘깜짝이야.’
뒤에서 날 부르는 소리를 듣고 화들짝 놀라 몸을 돌렸다.
이네르마였다.
장님인 이네르마가 날 알아봤다는 것 자체는 이제 익숙했다. 눈이 안 보이는 대신 다른 감각이 무척이나 발달해서, 발소리만으로 누구인지를 대충 파악할 수 있댔으니까.
아이리스가 그 능력에 흥미를 가졌었지.
“이 시간까지 안 주무셨어요?”
“그건 내가 할 말인데. 너야말로 이 시간까지 안 자고 여기서 뭐 해?”
“저도 잠이 안 와서요.”
“잠이 안 와? 왜?”
“제가 이렇게 편하게 있어도 되는건가, 하는 생각이요. 몸이 편하니까 자꾸 다른 생각이 떠오르나봐요. 여기서 하는 일이래봐야 별거 있지도 않은데 하루에 3끼씩 꼬박꼬박 나오고, 밤에도 팔다리 쭉 뻗고 잘 수 있고…….”
내가 달래주거나 할 수 있는 고민도 아니었기에, 우리 사이에는 한동안 침묵이 감돌았다. 본인이 마음쓰여 불편하다는걸 내가 뭐 어떻게 하겠는가.
결국 분위기를 견디다 못한 내가 억지로 잘 자라는 인사를 건네고 방으로 향하려는데, 이네르마가 조심스레 나를 불렀다.
“저…… 신입 기사님.”
“……?”
“혹시 괜찮으시다면…… 같이 밤 산책이라도 하실래요?”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