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Reincarnated into a Game Filled with Mods RAW novel - Chapter (404)
제 404화
후일담: 불굴의 페치
“안녕하세요, 델타 님! 오랜만에 뵙네요!”
오랜만에 뵙는다는 말마따나, 거의 40년만에 만나는 페치는 예전과 비교하면 꽤 달라져 있었다.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선명한 핫핑크색 트윈테일과 핫핑크색 눈동자, 아슬아슬한 핫핑크색 언더붑에 극도로 짧은 핫핑크색 타이즈 하의는 여전했지만, 제일 다른 점은 분위기였다.
예전의 그 비루하다고까지 느껴질만큼 설설 기던 분위기는 온데간데 없고, 그동안 아주 잘먹고 잘살았는지 동작 하나하나에 여유가 넘쳐흘렀다.
당장 지금 머물고 있는 저택만 봐도 그랬다. 원래 내것이었다가 더 쓸모가 없어져서 페치에게 넘겨줬었는데, 아주 자기 입맛대로 죄다 뜯어고쳐놓았다.
집에는 사용인이 발에 채일 정도로 많았고 말이다. 얘가 돈을 그렇게까지 많이 벌었던가.
“그래서, 무슨 일로ㅡ 꺄아아아악?!”
물론 집들이라거나 안부 인사같은 한가한 용건으로 찾아온 게 아니었기에, 싱글싱글 웃는 페치의 트윈테일을 한데 모아 붙잡고 위로 쭈우욱 들어올렸다.
“넌 대체 정체가 뭐야?”
“머리! 머리 다 뽑혀요! 살려주세요, 델타 님! 저 아직 아무 짓도 안 했어요!”
“아직?”
“꺄아악! 죄송해요! 죄송해요! 실수에요! 앞으로도 안해요!”
페치는 발 끝으로 서서 낚싯줄에 걸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렸다. 그래도 주제파악은 잘 됐는지 내 팔을 붙잡는다거나 날 향해 팔다리를 휘두르는 짓은 하지 않았다.
그랬으면 꽁꽁 묶어두고 시작했을 텐데.
“아무리 봐도 신기하단 말이지. 너 평범한 인간 맞아?”
“아야야야야야! 지, 진짜 머리 다 빠져요오오옷!”
“너 대답 안하면 빠지라고 이러는 거야. 대답 여하에 따라 다시 붙여주거나 빠진 그대로 두고 떠나려고.”
“으아아아앙! 너무해ㅡ 아팟?!”
나는 붙잡은 핫핑크색 트윈테일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예전부터 느꼈던 거지만, 페치는 아무리 봐도 평범한 인간이랑은 거리가 멀었다.
이제는 엄청난 고전 게임이 되어버린 브라이티스트 다크니스 1~3편에 나온 건 이스터에그라 치더라도, 그 원판인 세계에서조차 굉장히 오랫동안 활동했다는 증거가 있었으니까.
그리고 시리즈의 최종편에도 페치란 이름을 달고선 상인 NPC로 눈도장을 찍었다. 이쯤되니 정체가 대체 뭐길래 브닼 시리즈에 개근했는지 궁금증이 도질만도 한 것이다.
‘황금 열쇠를 찾으러 갔을때도 그랬지.’
어쩌면 천 년 넘게 살았을 가능성까지 존재했다. 내 아내들처럼 여신의 축복을 받은 것도 아닌데 말이다. 심지어는 이클립스도 페치의 정체에 대해서 언급을 피했고.
정말이지 기이한 여자였다. 나는 괜히 치밀어오르는 궁금증에 트윈테일을 쥔 손을 더 들어올렸다. 페치의 발 끝이 아슬아슬한 수준까지 떠올랐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제가 다 잘못했어요! 뭘 잘못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다 잘못했어요! 그러니까 용서해주세요! 델타 님!”
아무리 트윈테일을 쥐고 짤짤 흔들어도 페치는 비명을 지르기만 할 뿐, 교묘하게 자신의 정체에 대한 대답을 피하고 있었다. 보아하니 대답할 마음이 아예 없는 듯했다.
조금 더 강도 높은 폭력을 가하거나 머리를 백치로 만들어버리면 대답을 들을 수 있기야 하겠지만,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다. 일단 미운 정도 정이긴 하니까.
아직까지는 미운 정을 이길만큼 궁금한 건 아니었다.
“호에엑…… 으에엑…… 내 머리…….”
손을 놓아주었다. 페치는 엉망이 되어버린 핫핑크색 트윈테일을 매만지며 울상을 지었다.
“한 가닥도 안 빠졌으니까 엄살 그만 부리지?”
“훌쩍…… 네.”
페치는 입으로 훌쩍훌쩍 눈물을 삼키면서도 눈으로는 내 눈치를 살펴댔다. 저 눈물 자체가 거짓이라는 증거였다. 백 년이 훌쩍 넘게 지났는데 어째 예전이랑 바뀐게 하나도 없었다.
“그, 그래서…… 저는 갑자기 왜 찾아오셨어요……? 저 조금 있으면 그 연금술사한테도 들러야 하는데…… 약속이 잡혀 있어서…….”
저기서 말하는 연금술사란 린네가 아니라 그 후계를 의미했다. 린네는 진작 수명이 다했고, 연금술사의 전통에 따라 그 지식과 기억을 넘겨받은 다른 제자.
나도 최근에 몇 번 만나보긴 했는데, 린네가 특이한 경우였던 건지 다행히도 그 후계자들은 나한테 별 관심이 없었다. 재료도 무제한으로 공급받고 있겠다, 연금술에 몰두하느라 바빴지.
스승님의 마지막 발명품이라면서 린네의 체취가 무한히 유지되는 향수병을 건네줬을 땐 조금 식겁하긴 했지만.
“아직도 안 짤렸어?”
페치가 아직도 물품 공급을 담당하는 것으로 보아 일을 꽤나 열심히 하는 모양이었다.
“이래뵈도 믿음과 신뢰로 운영하는ㅡ”
“뭐랑 뭐?”
“죄, 죄송해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첫 만남부터 뒤통수를 치려고 했던 걸 돌이켜보면 최소한 내 앞에서는 그런 말 못한다.
“됐고. 왜 찾아왔냐고 그랬지? 별 건 아니야. 아니다, 별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아공간에서 온갖 병들을 끄집어내 허공에 둥둥 띄워놓았다. 병이 늘어갈 때마다 페치의 얼굴도 점점 더 새하얘졌다.
정확히 93개나 되는 약병들을 모두 끄집어내 일렬로 세워둔 뒤,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려대는 페치와 지그시 눈을 마주쳤다.
“이게 뭔지 알겠어?”
“그,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 호, 호호호호, 혹시 저한테 쓰시려는 건 아니죠……?”
“이게 뭔줄 알고 너한테 쓴다는 말을 꺼내?”
“…….”
페치는 아차 싶었는지 입을 다물었다. 나는 그냥 약들을 아공간에서 꺼내놓았을 뿐 아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제 발 저린 것이다.
“아, 하하하하! 하하하! 그냥 척 봐도 약병처럼 생겼잖아요! 그래서 혹시라도 저한테 먹이시려고 그러는 건가 싶어서 그랬죠!”
그래도 용케 빠져나갈 구멍을 생각해낸 듯했다. 나름대로 그럴싸한 변명에, 나는 설득되는 척 넘어가주었다.
“맞아. 척 봐도 약이긴 해. 만든 사람이 연금술사라는 것만 빼면.”
“그, 그런가요?”
“내가 이걸 누구한테서 얻었을 것 같아?”
톡, 톡. 손가락으로 허공에 뜬 약병들을 두들겼다. 청아한 소리가 방에 울려퍼졌다.
“하, 하하하…… 글쎄요. 저는 잘…….”
“내 공주님들.”
“…….”
“차 대접해준다길래 신나서 갔더니 차 안에 이걸 넣어놨더라고. 이게 뭔지 모른다고 했으니, 무슨 약인지도 모르겠네?”
“네, 네에…….”
“미약이더라. 그것도 꽤 강력한. 마나가 하나도 안 느껴져서 방심했더니 하마터면 큰일날 뻔했지.”
“…….”
내가 아공간에서 꺼낸 것들은 전부 다 누군가를 성적으로 흥분시키는데 특화된, 이른바 미약이었다. 어쩐지 차 먹자고 불러놓고선 평소보다 옷차림이 조금 많이 휑하다 했다.
“요 발칙한 계획을 꾸민 공주님들은 엄마한테 붙잡혀서 한소리 듣고 있고, 나는 이걸 누가 우리 귀여운 공주님들한테 줬을까 고민하다가 널 찾아온 거야, 페치.”
페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식은땀을 줄줄 흘리기만 할 뿐이었다.
“그렇지, 페치? 너도 이걸 누가 줬는지 궁금하지?”
“네! 엄청 궁금ㅡ”
“왜 그랬어?”
“……딸꾹.”
‘주, 죽을 뻔 했다아…….’
페치는 델타가 완전히 떠난 다음에야 참았던 길고긴 한숨을 내쉬었다. 정신력이 팍팍 깎여나가는 취조였지만 어떻게든 최소한의 피해로 견뎌낼 수 있었다.
이래서 평소 이미지가 중요했다. 델타에게 페치란 결코 좋은 관계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싫어할 수도 없는, 그런 아슬아슬한 선에 걸쳐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리고 페치는 자신의 그런 이미지를 뼛속까지 활용할 줄 아는 여자였다.
방금도 델타가 자신을 바라보는 눈이 조금만 더 안좋았다거나 반대로 조금만 더 좋았더라면 절대로 쉽게 넘어갈 순 없었을 거다.
‘너무 좋은 관계로 나가는 것도 안 돼. 거짓말이 들통났을 때 후폭풍이 너무 크니까.’
어쩌다 거짓말이 들키더라도 얼굴에 철판 깔고 당황 몇 번에 사죄 몇 번 해주면 ‘네가 그럼 그렇지’하고 한숨 쉬고 넘어갈 수 있는 수준이 적당하다. 이미지가 너무 좋으면 그게 안 됐다.
반대로 이미지가 너무 안 좋으면 거짓말이 들키는 순간 뒷감당이 불가능해질 것이다. 페치는 그 ‘좋으면서도 나쁜’ 선 위에서 절묘하게 균형을 잡고 있었다.
“그냥 넘어가줘서 다행이다. 진짜로…….”
방금은 100% 알고 온 거다. 누가 범인인지 알고 왔는데도 그냥 경고만 하고 넘어가준 거지. 페치는 그 사실을 모를 정도로 멍청이가 아니었다.
‘괜찮아. 아직 연줄은 남아 있어. 이 돈 잘되는 사업을 쉽게 포기할 순 없지.’
솔직히 처음에는 거절했었다. 그 다음에도 거절했고, 세 번째 요청도 거절했다. 델타가 딸들을 얼마나 애지중지하는지 알고 있는데 미쳤다고 그런 쪽으로 엮이겠는가.
하지만 3번이나 거절했음에도 끈질기게 부탁해오기도 했고, 감히 거절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돈을 쥐어주기도 했기에 지금은 홀라당 넘어가버린 지 오래였다.
은밀한 거래 ‘한 번’에 받는 돈만 해도 족히 백 년은 떵떵거리며 살 수 있을 정도로 기본적인 액수가 컸다. 그 덕분에 이런 초호화 생활을 누리게 됐으니 포기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말만 잘 들으면 확실하게 보호해준다고도 했으니까.’
무엇보다, 얻는 게 있는만큼 보호를 약속받기도 했다. 아무리 델타라도 딸들이 말리는 상황에 페치를 어떻게 할 수는 없으리라.
“어디, 다음 만남이…….”
페치는 다리를 살짝 벌리고 천천히 허벅지 사이를 더듬었다. 그리고 연금술이 가미된 덕분에 조금도 구겨지지 않은 종이 한 장을 꺼내들었다.
어디서 꺼냈는지는 페치만 아는 비밀이었다.
“너도 참 대단하다. 설마 모를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지?”
“아, 아니…… 그게 말이죠…… 헤헤…….”
“그래서, 이번엔 누구ㅡ 아니다. 다른 거 먼저 물어볼게. 이번엔 뭐였어?”
“……고양이 란제리요.”
“뭐?”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