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Reincarnated into a Game Filled with Mods RAW novel - Chapter (41)
사람이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금방 안다는 속담이 있긴 하지만, 이네르마가 떠났다고 해서 기사단의 분위기가 크게 가라앉지는 않았다.
아이리스나 에리카가 걱정이 담긴 말을 한두 번 정도 꺼내긴 했는데, 그게 전부였다. 본인들 말로는 자기 선택으로 성을 떠난거니 생각이 있을테고 그걸 존중해주는거라나.
내가 목 없는 철갑 기병을 혼자 토벌하러 간다고 말했을때도 존중 좀 해주지 그랬냐며 슬쩍 놀리니, 아이리스는 뺨을 확 붉혔다.
‘뭐, 나랑 이네르마는 경우가 조금 다르니까.’
나는 다시 레벨링에 집중했다. 일단 최우선 목표는 레벨 20을 찍어 룬 슬롯을 개방하는거였다.
지금도 원한다면 메인스토리를 진행하거나 보스랑 드잡이질을 할 수도 있긴 하지만, 나는 빠른 길 보다는 안전한 길을 택했다.
이건 스피드런이 아니고, 더 빨리 깨봤자 칭찬해 줄 사람도 없다. 게다가 내 목숨은 하나였다. 안전한 길이 떡하니 있는데 위험한 짓을 사서 하고싶지는 않았다.
그 뒤로 나는 잡몹들이 언제 리젠되는지를 손꼽아 기다리다가, 꼬박 하루가 더 지나고 나서야 그토록 원하던 레벨 20을 달성할 수 있었다.
[능력치] [레벨] 20 [체력] 1 [마나] 1 [신앙] 1 [지구력] 1 [숙련] 1 [힘] 1 [마력] 10 [신성력] 10 [내구] 2스탯 포인트로 마력을 10까지 찍어두고, 나머지 하나로는 내구를 올렸다. 이건 많이 찍을 필요는 없고, 나중에 내가 원하는 무기를 들기 위해 딱 7까지만 찍어두면 된다.
이제 남은건 아이리스가 룬이 있는 던전을 언급하길 기다리는 일 뿐이었다. 그 말이 나오기 전에 던전을 미리 찾아가봤자 열리지도 않은 상태니까.
이건 강제 이벤트 비스무리한거라 플레이어에게 거부권도 없었다.
애초에 은빛 여명 기사단 루트 자체가 브닼 4에 처음 입문하는 뉴비들을 위한 스토리라는걸 생각해보면, 이렇게 뭘 할지를 일일이 지정해주는 편이 더 좋기도 했고.
“언니, 신입 씨한테 귀찮게 좀 굴지 마세요. 아침부터 찰싹 달라붙어선 뭐하는겁니까?”
20레벨을 찍은 날 저녁. 식당으로 향하는 와중에 내 옆에 찰싹 달라붙은 리제를 보며 에리카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리제는 아랑곳 않고 손가락으로 내 뺨을 콕콕 찔러댔다.
“귀찮게 굴다니? 온 몸으로 서비스 해주는건데. 이거 봐. 신입도 좋아하잖아. 그렇지, 신입?”
“그래, 그래. 좋으니까 빨리 식당으로 가기나 하자.”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하던가. 참 다행스럽게도 나 역시 리제가 해오는 신체 접촉에 약간의 내성이 생겼다.
속마음이 어쨌건, 예전처럼 겉으로 당황했다는 사실이 다 티나는게 아니라 태연한 척을 하며 받아치는 경지에 이르렀으니 정말로 다행이었다.
‘아직도 외모랑 성격 차이는 적응 안되긴 하는데.’
입만 다물고 있으면 바늘로 찔러도 피 한방울 안나올 것처럼 차갑고 도도한 인상을 가진 여자가 리제다. 오히려 저런 행동은 에리카에게 더 어울리지 않을까 싶었다.
‘에리카한테 말했다간 한 대 맞겠지.’
사실 에리카가 저렇게 자기 언니를 대하듯이 날 대해주는 것 역시 우리가 제법 많이 친해졌다는 신호긴 했다.
애교와 유혹을 반씩 섞어놓은 리제의 행동은 식당으로 가는 내내 이어졌다. 에리카는 그런 자신의 언니가 부끄럽다는 듯 골머리를 앓으며 어떻게든 둘을 떼어놓으려 노력했다.
물론 씨알도 안 먹혔다.
“이야, 신입! 벌써부터 여자를 둘이나 끼고 다니네? 능력 좋은데?”
식당에 들어서자, 자기 머리보다 큰 잔에 맥주를 가득 채워 들이키고 있던 클라우디아가 우리를 보며 손을 흔들었다. 그 옆에는 이미 똑같은 크기의 텅 빈 맥주잔이 두 개나 더 있었다.
‘저런건 게임이랑 똑같네.’
클라우디아의 원본이 되는 NPC는 설정상의 키만 2미터를 훌쩍 넘어가는 무지막지한 거구였고, 뒤끝 없는 호탕한 성격에 항상 술을 달고 살았다.
외모가 수염이 덥수룩한 근육질 아저씨에서 얇은 팔다리를 가진 중성적인 미인으로 바뀌기는 했어도, 다른 기사단장들과는 다르게 성격은 바뀐 부분 없이 그대로인 듯 했다.
그런 주제에 머리카락은 귀엽게 생긴 동글동글한 단발에 색도 연분홍색이고, 눈동자도 연분홍색에 입고 있는 돌핀팬츠까지 연분홍색이었지만.
“클라우디아 기사단장님!”
졸지에 리제랑 똑같은 취급을 받은 에리카가 빼액 소리를 질렀다. 클라우디아는 농담이라며 호탕하게 웃고는 다시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다른 사람에게는 진짜 그렇게 보인다는 걸 알고 있으려나 모르겠네.’
당사자는 리제를 뜯어말리느라 전혀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지만, 옆에서 우리 셋을 본다면 정말로 내가 리제와 에리카를 동시에 끼고다니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리제는 그걸 진작 눈치챈 지 오래였는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아꼈고.
“술은 적당히 마시고 목소리도 낮춰라, 클라우디아. 그리고 리제 너도 이제 신입 옆에서 떨어지도록.”
제일 상석에서 묵묵히 빵을 우물거리던 아이리스가 한마디 했다.
상석은 원래 은빛 여명 기사단의 서열 1위인 클라우디아가 앉아야하는 자리였다. 그런데 정작 본인이 저 자리에 앉으면 불편해서 음식이 안 넘어간다고 아이리스한테 양보했댄다.
아이리스의 말까지 거부할 순 없었는지 리제가 얌전히 한 발짝 멀어졌다. 에리카가 그걸 보며 기막혀하는 표정을 지었다.
‘음식을 안 먹으면 굶어죽는데 딱히 뭘 안 먹어도 배가 고프지는 않다니. 이건 대체 무슨 조화인지 모르겠네.’
적당히 빵 한덩이와 스프 접시를 집어들고 테이블로 향했다. 리제는 빵 일곱 덩이에 스프를 세 접시나 들고와서는 진작 테이블에 앉아 그걸 오물거리는 중이었다.
나도 그 옆에 앉았다. 우리 자리는 거의 정해져있다시피 했다. 아이리스가 제일 상석이고, 나와 리제가 아이리스의 오른쪽 라인, 에리카와 클라우디아가 왼쪽 라인이었다.
딱히 이렇게 앉으라고 정해둔 것은 아니었다만, 아이리스가 상석이고 리제가 나와 항상 같이 앉았기에 어느 순간부터 당연시 여겨지는 규칙이었다.
“아, 신입. 일어나기 전에 잠시 할 말이 있으니 기다리도록.”
리제와 클라우디아 덕분에 심심하지는 않았던 식사 시간이 슬슬 마무리가 되어갈 무렵, 아이리스가 문득 입을 열었다. 뭔가 싶어 아이리스에게 눈을 돌렸다.
“혹시 룬이라는 것을 알고 있나?”
‘드디어 올게 왔네.’
나는 룬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 반응을 보니 알고 있는 모양이군.”
“어느정도는.”
“그렇다면 이야기가 빨라지겠어. 내일 던전으로 향할 예정이다. 산의 절벽이 무너지면서 그 자리에 숨겨져 있던 던전이 드러났는데, 느껴지는 마력 파장의 형태로 보아 룬이 있을 확률이 매우 높다고 여겨진다더군. 아우로라가 우리에게 조사를 요청했다.”
아이리스는 덤덤히 말을 이었다.
은빛 여명 기사단 루트에서 제일 먼저 얻게 되는 ‘활력 강화’ 룬의 스토리였다. 저렇게 산비탈이 무너져 던전이 드러나야만 안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아이리스를 기다린 것이다.
룬이란, 브닼 4의 패시브 개념이라고 보면 됐다.
한번 장착하면 교체하거나 해제하기 전까지 캐릭터에게 반영구적인 버프를 제공하는데, 룬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실로 엄청났다.
당장 전투 피로만 하더라도 게이지의 총량을 늘리거나, 타격당 쌓이는 수치를 줄이거나, 자연회복 속도를 늘리는 등 무수히 많은 강화 효과가 있었다.
특히 보스들이 온갖 불합리한 패턴으로 떡칠하고 등장하는 다키스트 라이트 모드에서는 적절한 룬의 활용이 사실상 필수적이었다.
“그래서, 만약 정말로 그곳에 룬이 있다면 네게 주자고 기사단장들끼리 미리 이야기를 끝내 놓았다.”
“나한테?”
뜻밖의 말이었다.
게임에서야 당연히 플레이어 혼자 들어가고 기사단장들은 성에서 안 움직인다.
그런데 여기서는 분명 단체로 행동할 게 뻔하니 나중에 룬의 소유권이 어떻게 될지 고민했었건만, 의외로 간단하게 해결될 일이었다. 솔직히 조금 놀랐다.
아이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번에 말했지 않나. 우리는 네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지원을 해줄 생각이라고. 이번 역시 그 지원의 일환이라고 보면 된다. 어떤 계열의 룬이 등장할지 모르니 쓸모있을거라고 장담해주지는 못하겠다만.”
‘아, 하긴. 얘들은 거기서 뭐가 나올진 모르겠구나.’
나야 그걸 다 외우고 있긴 한데, 얘네들이 회차 플레이니 뭐니 하는 개념을 알 리가 없을테니 당연히 랜덤이라 생각하고 있겠지.
“어째 하나도 안 놀란다? 설마 룬이 뭔지도 미리 다 알고 있었던거야, 신입?”
어느새 한가득 쌓여있던 빵과 스프를 모조리 먹어치운 리제가 말끔한 얼굴로 날 쳐다보았다.
잘도 그렇게 먹을 수 있구나 싶었다. 키도 조그마하고 군살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몸매인데 먹은 것들이 다 어디로 가는거지.
ㅡ출렁.
“…….”
왠지 알 것 같기도 했다. 리제가 내 시선을 눈치채기 전에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옆에서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이미 늦은 듯 했지만.
말을 끝낸 아이리스가 다 먹은 접시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혹시 궁금한 점이 있나, 신입?”
“아니, 없어.”
있을 리가 없었다. 나는 다 먹은 그릇을 들고 몸을 일으켰다.
이제부터 브닼 4에서 욕을 제일 많이 처먹었던 보스를 잡으러 갈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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