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Reincarnated into a Game Filled with Mods RAW novel - Chapter (42)
아이리스에게서 룬이라는 단어가 언급된 바로 그날 저녁, 우리는 말을 타고 새로 발견된 던전이 있다는 산등성이로 향했다. 일행은 아이리스와 나, 리제와 에리카. 이렇게 네 명이었다.
클라우디아는 도시를 지킬 사람이 한 명은 있어야 한다며 성에 남았다.
말을 타고 한 시간쯤 달렸을까, 우리는 무너져내린 산비탈 사이로 드러난 어느 동굴의 입구 앞에 도착해 있었다.
근처의 나무에 말을 매어두고 스크롤을 사용해 마물이 안쪽을 인식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결계를 친 아이리스가 동굴 입구로 다가가며 검을 뽑아들었다.
“룬의 파장이 발견되긴 했지만, 내부 탐사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니까. 안에 무엇이 있을지 모르니 경계를 풀지 마라.”
리제와 에리카도 각자의 무기를 꺼내들었다. 리제는 자기 눈동자 색깔처럼 파란 보석이 박힌 쌍단검이었고, 에리카는 칼에 복잡한 무늬가 새겨진 일본도였다.
모드 때문에 바뀐 게 아니라, 원본 NPC의 무기가 저거 맞다.
‘일본 회사니까 뭐.’
브닼 4의 실질적인 배경은 서양이긴 했지만, 일본 회사가 일본에서 만든 게임에 일본도가 등장한다는데 딱히 그걸로 트집을 잡아댈 유저는 없었다.
애초에 브닼 시리즈의 1편부터 4편까지를 죄다 통틀어서 ‘도’ 계열의 무기는 성능이 그닥 좋은 편이 아니었기에 논란거리조차 못 되기도 했고.
유저 제작 티어표에서는 언제나 잘 쳐줘봐야 한두개 정도가 3티어 중반쯤 걸친 수준에, 대부분은 폐급이나 다름없는 위치인 5티어에 처박혀 있었다.
“먼저 진입하겠다.”
롱소드를 한 손으로 단단히 붙들어 쥔 아이리스가 반대편 손에 든 횃불을 먼저 들이밀며 성큼 발을 내딛었다. 그 뒤를 리제가 뒤따라갔다. 세 번째가 나였고, 마지막이 에리카였다.
공과 사의 구분만큼은 확실한건지, 리제는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거짓말처럼 입을 다물었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동굴의 규모는 전체적으로 내가 게임에서 보던 것보다 더 커진 듯 했다. 하긴, 여기 있는 보스놈이 설정상으로 얼마나 컸는지를 생각하면 당연히 보스룸의 규모도 거대해야 할 것이다.
‘벌써부터 뒷골이 땡기네.’
그놈과 한참동안 실랑이질을 해야 할 걸 생각하니 벌써부터 뒷목이 아파왔다. 속으로 한숨을 푹푹 내쉬며 리제의 뒤를 따라 걸었다.
“…….”
동굴에는 철그럭 철그럭 하는 갑옷 소리만 울려퍼졌다. 아이리스와 리제, 에리카 셋 모두가 은색의 풀 플레이트 아머로 철저하게 무장을 하고 있어서였다.
이제야 좀 기사답다는 느낌이 물씬 들었다. 갑옷 밑에는 여전히 속옷조차 없이 흰 민소매에 돌핀팬츠만 입고 있는게 전부였지만, 그건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나는 당연히 평소처럼 천옷에 가죽바지 차림이었다. 혹시나 싶어 갑옷을 한 번 입어봤는데, 구르기가 불가능해져서 어쩔 수 없었다.
훨씬 더 불편하게 굴러야된다는 뜻이 아니라, 방어구의 무게가 캐릭터의 가용 중량을 초과했을 때처럼 고개만 앞으로 까딱 하고 구르기가 안 나갔다는 뜻이다.
나도 그게 말이 되는건가 싶어서 몇 번이고 시도해봤는데, 몸이 땅에 철퍽 엎어지는 것도 아니고 정말로 그냥 몸이 잠깐 휘청하고 말더라.
심지어 뛰는 것도 안됐다. 클라우디아는 내가 어기적대는 모습을 보고 체력 좀 길러야겠다며 웃었지만, 나는 이게 왜 그러는지 알고 있으니 도저히 웃음이 안 나왔다.
그래서 그냥 벗었다.
‘구르기를 포기하느니 맨몸으로 다니고 말지.’
둘 중에 우선순위가 뭐일지는 명백했다.
“잠깐 정지.”
아이리스가 걸음을 멈췄다. 그 앞에는 드넓은 동공이 펼쳐져 있었다. 나는 한눈에 이곳이 어디인지를 알아보았다. 여기가 바로 이 던전의 보스에게 향하는 통로였다.
“공간이 너무 넓다. 리제, 내 옆에 붙어라. 신입은 에리카의 옆에 서도록. 둘씩 짝지어 이동한다.”
리제가 한 발짝 앞으로 나가 아이리스의 옆에 서고, 내 옆에는 에리카가 자리잡았다. 정말로 바짝 날이 선 듯, 각자의 손에 들린 무기에서 원소가 조금씩 새어나오고 있었다.
무엇이 나올지 모르니 긴장을 풀지 않고 조심스레 걸음을 내딛는 셋에 비해, 나는 적당히 주위를 경계하는 척만 하면서 걸었다.
여기서 등장하는 잡몹들은 별 것 없었다. 게다가 굳이 내가 나서지 않더라도 기사단장들이 다 때려잡아줄테고.
내 정신력을 깎아먹는 건 여기 보스놈 하나면 충분하다.
“에리카, 룬 반응이 감지되는 위치는?”
아이리스의 질문을 들은 에리카가 목에 걸고 있던 목걸이를 잠시 내려다보았다. 초록색의 빛이 웅웅거리는 목걸이였다.
“저희 위치에서 지하로 한참 떨어진 곳입니다. 길이 꼬여있지 않고 직선 거리로 이어져있다는 전제 하에, 이 속도라면 도착까지 1시간이 조금 넘게 소요되겠네요.”
“직선 거리로 1시간? 그러면 도착까지 최소 2시간은 잡아야 한다는거잖아. 왕복하면 5시간은 그냥 지나가겠는데?”
“그리고 중간에 마물이 나온다면 시간은 더 늘어나겠지.”
그 말이 나온 것과, 아이리스가 검신에 바람을 두른 것, 리제가 쌍단검에 얼음꽃을 피워낸 것, 에리카가 무기를 화염으로 뒤덮은 것은 거의 동시에 일어났다.
검은색과 회색이 섞인 울퉁불퉁한 비늘을 가진 무언가가 저 멀리의 통로에서부터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 무언가의 모습을 본 리제와 에리카는 엑, 하며 질색을 했다.
거의 인간 크기만한 지네였다.
수십 쌍의 다리가 징그럽게 꿈틀거렸고, 전부 다 비늘로 덮여 있었다. 얼굴에 솟은 더듬이가 쉴새 없이 떨렸다. 등에 붙은 딱딱한 갑피도 온통 비늘 투성이였다.
심지어는 한 마리도 아니었다. 똑같이 생긴 놈들이 뒤에서 무려 다섯 마리나 더 다가오는 중이었다.
“으엑, 저딴 마물이 나오리라곤 상상도 못했는데. 여기 대체 뭐야?”
“……조금 징그럽기는 하네요. 아니, 조금이 아니라 많이요.”
리제와 에리카가 몸을 부르르 떨며 검에 원소를 일으켰다. 얼음이 리제의 몸을 뒤덮고, 에리카의 검에서 화염이 일어나며 주위를 밝혔다.
‘쟤들은 나중에 마법서 얻을 때 데려가면 안되겠네.’
나중에는 저런 지네 비스무리한 마물이 아니라 진짜로 인간 크기만한 곤충으로 가득 찬 던전까지 발견될텐데.
거긴 캐릭터가 아니라 플레이어에게 직접 충격을 입히는 걸로 유명했다. 오죽했으면 제작사도 앞에 NPC 한명을 놔둬서 이 뒤는 벌레가 득실대니 물러가라며 경고까지 해뒀을까.
하지만 무척이나 암울하게도, 지금의 내가 얻어야 할 마법서 하나가 그곳에 있었다. 그 마법서만 아니었더라도 거들떠조차 안 볼 곳이었건만.
“빠르게 처리하겠다. 신입, 너는 뒤에 얌전히 있도록.”
그렇게 말한 아이리스가 징그럽지도 않은지 검에 회오리를 두르고 지네에게 달려들었다. 리제와 에리카도 으으! 하는 신음을 내지르더니 각각 얼음과 불꽃을 휘감고 달려들었다.
ㅡ퍼석!
그리고 한 방에 지네의 머리를 터뜨렸다.
머리가 터져나간 지네는 몸을 이리저리 비틀며 관절을 꿈틀거리다가, 이내 다리를 축 오므리고는 죽어버렸다. 다른 놈들도 마찬가지였다. 무기가 스치기만 해도 몸이 터지고 토막났다.
“어라?”
흉측하기 짝이 없는 비주얼에 비해 너무나도 쉽게 정리되자, 리제의 입에서 어리둥절한 소리가 새어나왔다. 설마 한 방에 죽으리라고는 생각 못한 듯 했다.
원인은 근본적인 스펙 차이에 있었다. 여긴 20레벨 구간에 열리는 던전인 것에 반해, 은빛 여명 기사단장들은 중후반부의 보스다.
당연히 이곳의 잡몹 따위는 스펙으로 압살해버리는 게 가능한 것이다.
“이번에도 놀라지 않는군, 신입.”
지네들을 칼질 몇 번으로 깔끔하게 토막쳐버린 아이리스가 고개를 내 쪽으로 돌렸다. 투구 탓에 표정을 볼 수는 없었지만, 왠지 어떤 얼굴일지는 짐작이 갔다.
“이 던전에 대해 짐작가는 것이 있기라도 한건가?”
은근한 기대감이 담겨 있는 목소리였다. 나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대답했다.
“아는 게 있긴 하지.”
“진짜로?! 아니, 잠깐. 근데 왜 지금까지 말 안해줬어?!”
“너희들 도움은 나중에 필요해서. 지금 당장은 나 혼자만 있어도 충분하거든.”
주위를 둘러보며 벽에 생긴 커다란 균열을 찾았다. 그 앞으로 다가가 종유석이 바로 옆에 위치할 때까지 동공의 중심을 향해 걸었다. 그곳에서 오른쪽으로 세 걸음을 물러났다.
셋은 내가 대체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아, 너희들도 거기 있을게 아니라 저쪽에 가서 서 있어야 돼.”
“……?”
무척이나 어리둥절해보이긴 했지만, 세 명은 내가 말한대로 방금 지네 마물이 나왔던 통로까지 물러났다. 일단 내 말을 들어서 손해볼 일은 없다고 생각하는 듯 했다.
기사단장들이 안전 지대까지 물러난 걸 확인한 뒤, 나는 피 묻은 검을 배에 찔러넣었다. 이미 리제가 피 묻은 검의 특수 능력을 다 떠벌린 뒤였기에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
그 상태로 피를 한계치까지 빨아들인 다음 검을 뽑았다. 검신에 흉흉한 피 색이 감돌았다.
“신입 씨, 갑자기 그건 왜 사용하시는거죠? 그리고 저희더러 여기에 서 있으라 하신 이유는 또 뭐고요?”
“너희까지 같이 휩쓸리면 안되잖아?”
“우리까지 같이 휩쓸리면 안된다니. 신입, 그게 무슨ㅡ”
ㅡ쿠구구구궁!
아이리스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동공의 바닥이 굉음을 내며 붕괴되기 시작했다. 아이리스와 에리카, 리제가 있는 통로 쪽 바닥이 제일 먼저 좌우로 찢어지듯 가라앉았다.
세 명은 깜짝 놀라서 나를 구하려 했으나, 이미 우리들 사이에는 사람 키의 몇 배는 되어보이는 틈이 생겨난 지 오래였다. 아무리 기사단장이라 한들 그 넓이를 도움닫기도 없이 뛰어넘을 순 없었다.
게다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사이의 균열은 점점 더 그 크기를 넓혀가고 있었다. 바닥 무너지는 속도가 점차 빨라졌다. 균열이 점차 내게로 다가왔다.
아이리스가 다급히 외쳤다.
“신입! 설마 또……!”
“괜찮아, 괜찮아. 안 죽을테니까. 나 믿지?”
“믿고 자시고의 문제가 아니다! 이런 게 있었으면 미리 말을ㅡ”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간신히 버티던 나머지 부분마저 붕괴되며 내 몸이 아래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리제와 아이리스, 에리카의 은빛 갑옷이 순식간에 멀어졌다.
“그냥 길 따라서 쭉 내려오기만 하면 돼! 밑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나는 밑으로 추락하면서 위를 향해 힘껏 소리쳤다. 바닥 무너지는 소리가 워낙 시끄러워서 들렸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돌아가면 또 왜 미리 안 알려줬냐고 한소리 듣겠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번 보스는 철저하게 기믹을 수행해서 잡아야 하는 놈이라, 사람이 여럿이면 오히려 어그로가 이리저리 튀어대서 시간만 더 끌릴 가능성이 높았다. 재수없으면 중간에 사고가 일어날수도 있고.
그런 위험을 감수하는 건 사절이었다. 기사단장들의 도움을 받는건 기믹을 전부 다 클리어 한 이후인 4페이즈에 한정해도 충분하다.
‘이제 슬슬 준비해야지.’
체감상 거의 10초 이상을 아래로 떨어지고만 있었을까, 마침내 발 밑에서 물웅덩이가 보이는 걸 확인한 나는 태연하게 낙하 공격을 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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