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Reincarnated into a Game Filled with Mods RAW novel - Chapter (48)
‘역시.’
나는 제대로 된 패턴조차 몇 개 보여주지 못하고 처참하게 죽어버린 암석 지네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한때 놈의 머리였던 바위쪼가리들이 얼음에 뒤덮여 바닥을 굴러다녔다.
기사단장들에게 암석 지네의 마무리를 맡긴 것은 확실히 옳은 선택이었다. 내가 잡는 것보다 훨씬 더 빠르고, 안전하고, 신속하게 처리했으니까 말이다.
나였더라면 구르고 때리기를 한참이나 반복해야 했을텐데.
“크기만 컸지 별거 없는 놈이었네. 신입 네 말대로 느릿느릿해서 잡기 쉬웠어.”
리제가 이쪽으로 걸어오며 그렇게 말했다. 은빛 갑주를 뒤덮고 있던 얼음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투구를 벗자 푸른 머리카락이 드러났다.
“확실히 그렇습니다. 만약 혼자서 덤볐어도 손쉽게 잡을 수 있었겠는걸요.”
에리카도 투구를 벗었다. 머리 뒤에서 동그랗게 말린 묶음머리가 한층 돋보였다. 철컥, 에리카가 일본도를 검집에 다시 납도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걸로 끝인가, 신입?”
“맞아. 저 상태에서 어떻게 살아나겠어?”
“……예전에 몸이 토막나도 다시 재생할 수 있는 마물을 한 번 상대해본 적 있어서 말이지. 혹시나 싶었다.”
“저건 단순히 토막난 정도가 아니잖아?”
내가 암석 지네의 시체를 가리켰다. 머리는 얼어붙었다가 산산조각이 났고, 그 밑으로는 화염에 녹아내리고 그을렸다. 나머지 부분은 처참히 부서져 있었다.
단순히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있는 수준은 절대 아니었다.
“그렇긴 하군.”
아이리스가 작게 웃었다. 처음부터 농담에 가까운 말이었던 듯 했다.
‘뭘 말하는지는 대충 알겠는데.’
방금 언급된, 몸이 토막나도 재생할 수 있는 마물이란 중반부 보스들 중 한 놈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몸을 자기 임의대로 조각냈다가 다시 붙일 수 있는 보스인데, 그것 때문에 보스전이 질질 끌리고 술래잡기로 변하는 경우가 많아서 평가는 별로 안 좋았다.
그래봤자 암석 지네급은 아니지만.
몇 년 전에 아이리스가 그거랑 싸웠다가 결판을 내지 못한 채로 후퇴했었고, 그래서 걔 토벌 증거를 보여주면 굉장히 좋아하면서 주인공을 마구 칭찬해준다.
“신입 씨. 이제 신입 씨 차례입니다. 뭘 해야할지는 아시겠죠?”
에리카가 뒤를 흘끗 돌아보았다. 그 눈길이 닿는 곳에는 초록색으로 빛나는 룬 비석이 있었다.
룬을 제공한 비석은 사라졌다가 어딘가에 다시 나타나는데, 그 위치와 시기는 완벽하게 랜덤이었다. 며칠만에 다시 나타날수도, 혹은 재등장까지 몇십 년이 걸릴 수도 있었다.
그 무작위 등장의 규칙성을 연구해보려 평생을 바쳤다가 실패하고 절규하는 학자의 글에서 확인 가능한 사실이었다. 브닼 4에서 몇 안되는 개그 장면이기도 했고.
나는 은은한 초록색의 빛이 새어나오는 비석으로 다가갔다. 돌 위에 새겨진 의미불명의 고대 문자가 보였다. 등 뒤에서는 세 쌍의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다.
“시작한다.”
손을 얹었다. 비석 안에서 소용돌이치던 초록색 빛이 내게로 전이되기 시작했다. 몸 내부에서 혈관을 따라 바람이 힘차게 불어대는 느낌이었다.
눈을 감고 룬 문신이 새겨질 위치를 골랐다. 몸 어디에든 새기는 것이 가능했지만, 역시 제일 무난한 자리는 손등이었다.
머릿속으로 게임 속 UI를 만지듯이 정신을 집중하자 곧 전신을 내달리던 바람이 왼손 손등으로 모여들었다. 손이 잠시 제멋대로 파르르 떨리더니 뜨거운 열기가 차올랐다.
열기는 곧 사그라들었다. 눈을 뜨고 손등을 살폈다. 특이한 모양의 문신이 보였다. 활력 강화 룬을 뜻하는 문신이었다.
‘딱히 체감은 안 드네.’
지금 당장은 스태미너가 깎이지 않아서 그런 것도 있을테고, 4~5연속 구르기를 하지 않는 이상에야 딱히 스태미너 소모처가 없기도 하니까.
‘여캐를 고르고 이걸 하복부에 새기는 놈들도 있었지.’
원래 뜻은 엄한 것이라곤 전혀 없는데, 이걸 보고 있자니 자꾸 이상한 용도로 가지고 놀던 놈들이 생각났다. 예를 들어 여캐에게 자궁문신을 새긴다든가 하는 행동 말이다.
일부러 캐릭터의 성별을 여자로 고르고 섹시하게 커스터마이징 한 다음, 엄한 옷을 입히고 룬을 조합해 하트 모양과 비슷하게 음문을 만들어대는 유저들이 대표적이었다.
‘하여간 천재적인 놈들이야.’
그런 유저들은 정말 다른 사람은 생각도 못한 조합 방식으로 하트 모양이나 자궁 모양을 만들어대곤 했다. 아니면 아예 모드질로 문신의 형태 자체를 바꾸거나.
내가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동안, 룬의 전이가 끝났다. 초록색 빛이 완전히 내 몸으로 스며들었다. 내게 룬을 넘긴 비석은 빛을 잃고선 평범한 돌무더기로 변해 바스라졌다.
이제 또 세계 어딘가에 있는 던전에서 다시 나타나겠지.
물론 설정만 그런거다. 룬이 다시 나타난다고 해서 플레이어가 동일 회차에 동일 룬을 다시 습득하는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그건 어디까지나 플레이어가 왜 룬들을 모두 습득할 수 있는지에 대해 개연성을 더하는 장치일 뿐이다.
“끝난 건가, 신입?”
“여기, 룬 문신. 확실히 흡수했어.”
“룬의 효과는 뭐지?”
‘……응?’
아이리스의 질문에 잠시 머리가 굳었다. 생각해보니까 룬 효과는 어떻게 확인하는거지.
게임에서야 그냥 Esc 누르고 캐릭터 스태이터스 창을 띄우면 그곳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지금은 상태창도 없고 스탯창도 없지 않은가. 당장 룬의 효과를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활력 강화 룬의 효과 자체는 외우고 있다. 캐릭터의 스태미너 자연 회복 속도를 일정량 늘려주는 효과. 그런데 정작 그걸 텍스트든 뭐든 직접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
“……?”
멍하니 굳어있는 나를 아이리스가 왜 그러냐는듯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머릿속에 무언가 떠오르는 것이 있지 않던가? 그게 룬의 효과다.”
‘아, 그런거였나.’
여기서는 룬을 습득하면 그에 대한 정보가 머릿속에 바로 떠오르는 방식인 모양이었다. 나는 이미 활력 강화 룬을 알고 있었기에 딱히 떠오르는 게 없는거고.
기사단장이 스태미너라는 개념을 알고 있을지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능력 확인 구슬에서 스탯의 이름을 다 확인했었으니까.
“어…… 스태미너 자연 회복 속도 증가라는데?”
“제법 유용하게 쓰이는 효과로군. 그 정도면 운이 좋은 편이지. 축하한다, 신입.”
내 예상대로 아이리스는 단번에 그 뜻을 이해했다. 내게는 없어도 상관 없는 효과긴 했지만, 아무튼 있어서 나쁠 것도 없는 효과였다.
“이걸로 던전에 진입한 목적은 달성했네요. 그러면 이제 나갈 일만 남았습니다만…….”
에리카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바깥으로 이어지는 통로는 안 보이는군요. 왔던 길을 돌아가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왔던 길을 돌아가야 한다는 말에 리제가 질색을 했다. 꼬박 1시간 반 가까이를 걸어내려온 곳이다. 그걸 다시 걸어올라가야 한다면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당연했다.
괜찮다. 어차피 룬을 얻고 나면 벽 한쪽이 무너지니까.
“그래도 마물은 없을테니 시간이 제법 소요될거라는 점만 빼면 상관 없ㅡ”
쿠르릉, 아이리스가 말을 미처 끝내기도 전에 룬이 있던 자리의 바로 뒤쪽 벽이 무너져내리며 길이 나타났다.
“……지는 않겠군.”
“룬을 습득하면 벽의 일부가 무너지는 구조였던 듯 하네요. 이것도 나중에 보고서에 기록해두겠습니다.”
“그러도록. 신입, 혹시 여기서 해야 할 일이 더 있나?”
나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일단 룬을 습득하면 여기는 두 번 다시 올 필요 없었다. 따로 아이템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얻을 게 남은 것도 아니니까.
설령 올 일이 있더라도 안 올거다. 빌어먹을 암석 지네.
“알았다. 다들 나갈 채비를 해라.”
나가는 길은 금방이었다. 에리카와 아이리스는 던전의 구조가 대체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다며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고, 리제는 언제나처럼 내 옆에 찰싹 달라붙어선 재잘거렸다.
밖에는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 깔려 있었다. 몇 시간은 훌쩍 지난 느낌이었다.
보통 룬 습득용 던전이 길어봐야 20분 언저리에 클리어라는 것을 생각할 때, 정말 더럽게도 오래 걸린 셈이다. 게다가 그 시간의 대부분은 암석 지네 기믹 수행에 썼고.
게임에서보다 스케일이 더 현실적으로 변모한 것을 감안한다 치더라도, 아이리스와 에리카 역시 상당히 규모가 큰 던전이었다고 말했으니 오래 걸린 게 맞았다.
‘일단 이걸로 룬 슬롯까지는 다 풀렸네.’
이제 다른 던전에 찾아가서 전투 피로의 디버프를 무시할 수 있게 해주는 룬을 얻고, 그 다음부터는 차근차근 레벨업을 해가면서 메인 스토리를 계속 진행하면 된다.
‘……잠깐만. 그런데 그 장소까지 거리가 얼마나 되는거지?’
다음 던전의 위치를 떠올리던 나는, 생각지도 못한 사실에 잠시 사고를 멈췄다.
게임에서도 은빛 여명 기사단이 있는 도시와 전투 피로 디버프를 무시할 수 있게 해주는 룬이 있는 던전까지의 거리는 제법 떨어져 있었다.
하물며 지금은 모든 것이 실제 스케일까지 확장되었으니, 둘 사이의 거리가 어떨지는 너무나도 뻔했다.
당장 말 타고 몇 분 남짓이면 충분했던 목 없는 철갑 기병의 보스필드까지 얼마나 달려야했던가를 생각해보면 답이 나온다.
‘…….’
아무리 적게 잡아도 꼬박 3주는 걸릴 것 같은데.
“뭐하고 있지, 신입? 이제 출발할거다.”
“아, 잠시 생각할게 좀 있어서. 미안. 바로 갈게.”
어느새 말 주변의 보석을 회수하고 말에 올라탄 아이리스가 나를 재촉했다. 리제와 에리카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짧게 사과하고 말에 올라탔다.
“밤이 늦었으니 서둘러 복귀한다.”
아이리스는 그대로 말을 몰아 달려나갔다. 에리카가 뒤를 바짝 따랐다. 나와 리제는 조금 떨어져서 뒤따라갔다.
“잠시만. 할 말이 있어.”
“……?”
얼마나 달렸을까, 내 바로 옆에서 말을 몰던 리제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뭔데?”
“신입 네가 고민이 있는 눈치라서. 무슨 일인지 물어보려고.”
“잠깐, 그렇게 티가 많이 났어?”
“눈치 못 챌 수가 없는 표정이던데?”
“…….”
하긴, 제법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사항이긴 했다. 일단 주변의 지형지물이나 대략적인 위치는 아는데, 그렇다고 그것만 믿고 무작정 출발할 수는 없으니까.
며칠 수준도 아니고 무려 3주 가까이 되는 거리다. 제대로 찾아갈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다.
“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건지는 모르겠지만, 혼자서 고민하고 있어봐야 좋을 거 하나도 없어. 네가 우릴 걱정해주는 건 아는데, 우리도 그만큼 너를 걱정하고 있으니까. 너 혼자 끙끙대는것보다는 그냥 다 같이 고민하는 편이 더 나을 수도 있어.”
“……왠일로 진지한 말을 하네?”
“나도 분위기 파악은 할 줄 아니까?”
리제가 쿡 웃었다.
그러고 바로 “남자들 고민은 대체로 여자 가슴 만지면 해결된다던데. 어때, 관심 있어?” 라며 날 놀려대지만 않았더라도 완벽한 위로였을텐데.
‘하긴, 나 혼자 고민해야 할 이유는 없지.’
이제 슬슬 스탯이 올라갔다는 사실을 밝힐 시기가 됐기도 했고, 본격적으로 은빛 여명 기사단에게 도움이 되는 정보들을 풀어줄 시기가 되기도 했다.
만능의 방패를 다시 한 번 꺼내들 시간이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