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Reincarnated into a Game Filled with Mods RAW novel - Chapter (49)
암석 지네를 토벌하고 돌아온 그날 밤, 나는 책상 앞에 앉아 연필을 쥐었다.
천장에는 형광등이 있고, 에어컨이 돌아가고, 현대적인 책상과 의자에, 마찬가지로 현대적인 침대는 물론 종이와 연필까지. 이러니까 꼭 게임 속이 아니라 바깥의 진짜 내 집에 있는듯한 느낌이었다.
이런 필기도구가 대체 왜 있는지는 나도 모른다. 글을 쓸만한 도구가 있냐고 했더니 연필이랑 지우개를 주더라. 받고 잠깐 벙쪘었다.
아우로라는 진짜 중세에서나 쓸법하게 생긴 깃털 펜을 사용하던데.
일단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으므로, 잡생각을 떨쳐내고 다시 종이에 집중했다. 앞으로의 상황을 한 번 정리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내가 진행해야 할 메인스토리는 당연히 기사단쪽이고.’
은빛 여명 기사단, 이라는 글자를 쓰고 동그라미를 친 다음 연필 끄트머리로 톡톡 두들겼다. 브닼 4의 모든 스토리를 통틀어서 기사단 루트만큼 쉽고 편한 스토리가 없었다.
진행을 위해 필수적으로 잡아야 하는 보스의 숫자도 확연히 적고, 다른 필수 보스들과 비교해서 난도 역시 상대적으로 쉽다. 괜히 뉴비 친화적 스토리라 불리는 게 아니었다.
적들의 스펙과 호전성이 전체적으로 미쳐 날뛰는 수준인 닼라 모드에서도 그 지위는 여전했다.
실제 게임에서라면 재미가 없다는 이유로 쳐다도 안 봤을 스토리겠지만, 지금의 나는 목숨이 하나 뿐이지 않은가. 최대한 쉽고 편한 길만을 걸어야 한다.
게다가 메인 스토리를 모두 클리어하면 플레이어가 은빛 여명 기사단의 제1 기사단장이 되거나 아예 황제의 직속 호위 기사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다.
출세길이 확실히 보장되는 셈이니 미래마저 창창했다.
사이드 퀘스트가 복잡하게 꼬여있지도 않고, 스토리도 무난하고, 필수 보스의 숫자도 적을뿐더러, 난도까지 쉽고, 엔딩마저 훌륭하다. 온통 장점으로만 도배된 루트였다.
‘아마 세계를 먹는 자를 잡으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확실하게 답이 나온 것도 아니니까 대비는 해둬야지.’
내가 이 세계에서의 미래를 걱정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빙의물의 클리셰는 대체로 최종 보스를 클리어하거나 메인 스토리를 끝까지 다 본 이후에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지만, 혹시나 여기서 평생 살아야 할 가능성도 무시하지는 못한다.
그러니 미리 대비해둬서 나쁠 건 없지 않겠는가. 할 수 있는건 확실하게 하고, 불안의 싹은 전부 잘라내고, 최대한 만반의 준비를 갖춘 다음 엔딩을 보는게 맞다.
‘……그럼, 황제를 어떻게 할까.’
나는 종이의 제일 위에 써둔 ‘황제’라는 단어를 보고 잠시 손가락을 멈췄다. 게임에서도 그랬었지만 여기서는 몇 배나 더 예측하기 어려운 인간이 되어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모든 선택지들이 무쓸모로 변한다면, 나는 황제의 변화무쌍한 개막장 다지선다 선택지에서 제대로 된 정답을 고를 자신이 없었다.
성국으로 본거지를 옮기거나 아예 인간들과의 관계를 끊어버리는 스토리를 고르지 않는 이상, 제국에 그대로 남아있는다면 무조건 황제와 한 번 이상은 얽힌다고 봐야 했다.
그런데 황제는 유저들에게 여러 의미로 악명이 높았다. 보스의 난이도로서도, 스토리적인 의미로서도, 캐릭터의 성격과 연관해서도.
‘뭐, 지금 당장은 의미 없는 일이니 나중에 생각해야지.’
사실 정말로 황제의 성격이 바뀐거라면 내가 여기서 혼자 끙끙대며 대비하는 행동 자체가 무의미했다.
당장 리제의 원본이 되는 NPC와의 대화 선택지들 역시 고스란히 내 머릿속에 들어있는데, 그 지식들은 리제와의 대화에서 조금도 쓸모가 없었으니 말이다.
그나마 아이리스와 클라우디아는 원본 NPC의 느낌이 강하게 나는 성격이었지만, 리제와 에리카는 아예 다른 인물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황제라고 딱히 다를 게 있겠는가.
‘성국은 지금 안 들러도 되고.’
나는 다른 곳으로 생각을 돌렸다. 적당히 짜맞춰진 순서대로 진행한다면, 성국에 들리게 되는 것은 아마 스토리가 적당히 진행된 이후인 중반쯤이 될 예정이었다.
일단 언젠가 그 나라에 들리기는 해야 한다. 그곳의 교황에게서 얻어내야 할 마법이 있으니까. 나중에 악마 속성의 적을 때려잡으려면 그 주문으로 버프를 거는 편이 훨씬 쉬워서다.
하지만 그건 언젠가일 뿐.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이 널리고 널렸는데 성국에 관심을 돌릴 여유 따위가 존재할 리 없었다. 그러기 전에 제국에서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전투 피로 디버프 무시 룬과 관련해서도 기사단장들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하고, 메인 스토리의 필수 보스들도 때려잡아야 한다.
‘필수 보스는 총 3마리.’
거미 여왕 아라크나이네라.
불타는 골렘.
눈 먼 검은 늑대.
은빛 여명 기사단의 메인 스토리를 진행하기 위해서 초반부에 필수적으로 잡아야 하는 보스는 이 세 마리가 전부였다. 나머지는 전부 다 선택형이거나 중반부에 추가된다.
위치상으로만 분류한다면 거미 여왕 아라크나이네라를 먼저 잡고, 눈 먼 검은 늑대를 잡고, 마지막으로 불타는 골렘을 잡는 편이 동선의 낭비를 최소화 할 수 있다.
반대로 효율을 생각한다면 불타는 골렘을 제일 먼저 잡는 것이 이득이었다. 불타는 골렘을 잡고 습득할 수 있는 마법이 아라크나이네라 보스전에서 어마어마한 효율을 지녔기 때문이었다.
마나가 한참 딸려서 마법을 1~2번만 사용해도 마나통이 동나버리긴 하겠지만, 마법을 쓰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지는 않다.
아니지, 에리카가 제 역할을 해준다면 불타는 골렘을 잡고 얻는 마법은 굳이 필요 없을지도ㅡ
ㅡ똑똑.
“신입. 안에 있나?”
바깥에서 들려온 노크 소리에 생각이 끊겼다. 곧이어 아이리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란 나는 허둥지둥 종이를 숨겼다. 언젠가는 진실을 밝히더라도, 그게 지금은 아니다.
“있어. 왜?”
“전할 말이 있다.”
전할 말이 있다는 소리에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방문 앞에는 평소처럼 흰 민소매에 은색 돌핀팬츠를 입은 은빛 머리카락의 기사 한 명이 서 있었다.
툭 까놓고 말해, 아이리스였다.
“전할 말이라니?”
“아우로라 영주님과 연관된 말이다.”
“영주님이랑?”
“밀려있던 일들의 처리가 모두 끝났다고 했다. 그래서 조만간 축하연을 연다고 하더군.”
“아, 결국 그러기로 했나보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예산을 뺄 틈이 도저히 안 보인다며 시름하던 아우로라였다. 그런데 이 짧은 사이에 밀린 일을 모조리 끝내고 예산 분배까지 마쳐놓은 모양이었다.
“자는 시간도 줄여가면서 조금 무리하게 일했다고 하셨다. 이런 축하연은 기쁜 마음이 완전히 가시기 전에 벌여야 한다면서.”
이번 연회는 이유가 무려 세 가지나 있었다. 그 영주놈이 뒈진 것, 아우로라가 새 영주와 가주 자리에 오른 것, 그리고 은빛 여명 기사단이 다시 원래의 위치를 되찾은 것.
“그래서, 네게 준비하라는 말을 전달하려고 왔다.”
“참가 여부를 물어보라는 게 아니라 무조건 참가하라는 명령인거야?”
“아우로라 영주님께서 은빛 여명 기사단의 전원이 반드시 참석해야 한다고 그러시더군. 특히 이번 일에 제일 공로가 큰 신입 너는 더더욱. 어차피 참가 인원이라고 해 봤자 영주님을 포함해 우리 다섯 명이 전부이니, 한 명이라도 빠지면 안 된다고 하셨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
“어차피 빠질 생각은 없었으니 괜찮아. 그래서, 옷은 뭐 입고 가면 돼? 그냥 이대로 기사단에서 입던거 그대로 입고 가?”
이런 축하연은 게임에서 없던 이벤트이기도 하고, 중세 시대 귀족들의 파티 드레스 코드를 내가 알 리도 없으니 살짝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남자의 옷은 나름 정상적일테지만, 과연 여자들의 옷은 어떨까. 드레스랍시고 꺼내들 옷이 얼마나 막장일지 상상조차 잘 가지 않았다.
“영주님께서 다 준비해준다고 하셨다. 그러니 걱정은 접어두도록.”
저번에 대화 좀 나눠보니 아우로라도 모드 탓에 인식이 개변당한 건 매한가지던데. 걱정을 접어둬야할 게 아니라 더 해야하는거 아닌가.
저번에 흰 민소매랑 돌핀팬츠가 정말 훌륭한 정복이라면서 칭찬하는 거 보고 어이가 없었다.
“……일단 알았어. 언젠데?”
“내일이다.”
“뭐?”
“내일 저녁이라고 했다.”
“충분히 알아들었으니까 자세하게 말 안해줘도 돼. 그것보다, 연회 준비가 하루만에 되는거야?”
“일이 끝나는 시기에 맞춰 연회를 개최할 수 있도록 미리 명령을 내리셨다더군. 실질적인 준비는 몇 주 전부터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랬던거였나. 역시 아우로라다운 일처리다.
“내가 할 말은 이것으로 끝이다만. 질문이라든가, 아니면 할 말이라도 있나?”
“아니, 딱히 없어.”
“알았다.”
말을 끝낸 아이리스가 몸을 돌렸다. 그리고 문이 닫히기 전에, 잔뜩 새빨개진 얼굴과 함께 짤막한 인사가 건네졌다.
“잘 자라, 신입.”
“……? 그래, 일단 알았어.”
겨우 잘 자라는 인사 한 마디를 건넸을 뿐인데, 아이리스의 얼굴은 귀 끝까지 새빨개져 있었다. 그러고는 후다닥 복도 저만치로 사라졌다.
‘왜 저러는거야?’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내 이럴 줄 알았지.’
기사단장들이 입은 드레스를 보고, 나는 새삼스레 모드의 위력을 실감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