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Reincarnated into a Game Filled with Mods RAW novel - Chapter (53)
굉장히 불길해보이는 미소로 나를 지켜보는 시선을 받으며 스프 접시를 모두 비우자, 리제는 이제 응접실로 가자며 내 손을 잡고 일으켜세웠다.
“다른 사람들은?”
“자기 할 일 하고 있어. 네가 제일 마지막이야. 우린 한참 전에 일어났거든.”
하긴, 다른 사람들은 모두 진작 일어났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어제 그렇게 술을 퍼마시고도 인사불성으로 취했던 것은 결국 나 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아우로라가 멀쩡했던 것은 제법 의외였다. 기사단장들이야 워낙 튼튼한 인간들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아우로라는 그냥 일반인이었을텐데 나랑 비슷하게 마시고도 멀쩡하다니.
의문을 가득 담고 걸음을 옮겨 응접실에 도착했다. 리제가 힘차게 문을 열어젖혔다. 그 안에는 소파에 우아한 자세로 앉아 차를 홀짝이는 아우로라가 있었다.
“……?”
이른바 신도시 미시룩이라 불리는 드레스를 입은 채로.
잘못 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어제 연회에서 입었던 그 드레스가 맞았다. 몸에 찰싹 달라붙고, 가슴께와 겨드랑이를 활짝 드러내고, 속옷 라인은 여전히 안 보이고.
대체 어떻게 된 상황인가 싶어 복잡해지는 머리를 정리하고 있으려니, 아우로라가 살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늦게 일어났네. 해가 중천에 떴는데. 어젯밤에 너무 격렬했나?”
“……뭐?”
그 말에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 사고가 멈췄으나, 곧 얼굴에 떠오른 미소를 보고 농담이라는 사실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내 예상대로, 아우로라는 얼마 안 가서 농담이라는 말과 함께 찻잔을 작은 접시 위에 내려놓았다.
리제의 손에 이끌려 아우로라의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날 여기에 앉힌 당사자는 당연하다는 듯이 내 바로 옆에 찰싹 붙어 앉았다. 그걸 본 아우로라가 잠시 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나야 뭐 리제가 나한테 이러는게 한두번이 아니었으니 그러려니 했다. 그리고 지금 당장 중요한 건 리제가 내게 달라붙는다는 사실이 아니었다.
“옷은 또 왜 그걸 입고 있습니까, 영주님?”
“음?”
아우로라가 고개를 숙여 자기 옷차림을 내려다보았다.
가슴팍이 훤히 드러나다 못해 옆가슴과 밑가슴까지 보일듯한 흉부. 몸에 딱 달라붙어 배꼽 라인까지 드러내는 허리. 속옷을 입지 않았음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골반.
아무리 봐도 어제 연회용으로 입었던 그 드레스였다.
“그거 어제 입었던 드레스잖아요. 연회는 진작 끝났거 아니었나요?”
“……무슨 소리인가 했더니, 뭔가 크게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네. 옷에 대한 조예를 조금 더 키워야겠는걸.”
아우로라는 피식 웃었다.
“지금껏 입었던 드레스는 그냥 옷장에서 아무거나 꺼낸거였어. 이건 연회용 드레스랑 같이 특별히 주문제작 한거야. 그 돼지새끼가 산 옷을 그대로 입고 있을 순 없잖아? 영주로서 위엄을 보이기에는 조금 수수하기도 했고. 내가 드레스를 새로 맞췄다는 사실을 알아봐주는 건 고맙지만, 안목이 조금 부족하네.”
‘……내가 방금 뭘 들은거지?’
나는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이 얼굴에 드러나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표정 관리를 해야 했다. 내가 보기에는 여태껏 입은 드레스들이 영주의 품위와 품격에 훨씬 더 어울리는 옷이었다.
저건 그냥 모더들이 보는 사람 꼴리라고 디자인한 섹스 어필용 드레스니까.
그런데 아우로라가 느끼기에는 정반대인 듯 했다. 자칫 잘못했다간 유두마저 밖으로 튀어나올, 저 야하기 짝이 없는 드레스를 진심으로 품위와 위엄을 위한 옷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대충 왜 저러는지 이유는 알 것 같다만.’
게임에서도 아우로라가 영주 자리에 오르고 시간이 조금 지나면 옷차림이 바뀐다. 예전 옷은 멀쩡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건만, 건드린 게 이쪽이라 그랬었던 모양이었다.
연회용 드레스가 똑같이 신도시 미시룩 형태의 원피스인 이유는 그냥 모델링 돌려쓰기의 영향인거고.
“오, 정말로 일어나 있네?”
“아이리스가 말한대로네요. 어떻게 아신거죠?”
“감이다.”
내 시선을 뭐라고 생각한건지 요염하게 다리를 이리저리 꼬아대는 아우로라를 보고 황당해하고 있으려니, 문이 열리며 나머지 기사단장들이 줄줄이 들어왔다.
어제처럼 속이 다 비치는 시스루 원피스에 가터벨트와 란제리 조합이 아니라, 언제나 입고 있던 흰 민소매에 각자의 머리 색깔을 한 돌핀팬츠 차림이었다.
‘그래, 차라리 저게 낫네.’
나는 민소매에 돌핀팬츠가 다시 보니 선녀였다며, 눈 둘곳이 생겨났다는 사실에 속으로 안도했다. 연회장에서 입었던 조합은 진짜 여러모로 버티기 힘들었다.
사람이 여섯이나 모이자 조용하던 응접실이 순식간에 시끌벅적해졌다. 정확히는, 리제와 클라우디아가 시끄럽게 떠들어대서 그랬다.
저 둘이 빠지고 나와 아우로라, 에리카와 아이리스만 남아있다면 넷이나 둘이나 별만 차이가 없을 것이다.
“그러면, 잡담은 이쯤 해볼까.”
시끌벅적하던 분위기는 아우로라의 그 말을 기점으로 180도 바뀌었다.
소리가 사라진 자리를 시선이 메웠다. 다섯 쌍의 눈동자가 오롯이 나를 향했다. 약간은 섬뜩하기도 한 광경이었다.
“……다들 표정이 왜 그래?”
“네가 어제 있었던 일을 어디까지 기억하고 있을까 싶어서? 그런데 전부 다 기억하는 건 아닌 모양이네. 잘 쳐줘봐야 중간쯤?”
“…….”
나는 리제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실제로 중간쯤부터 필름이 끊겨버렸었으니 말이다.
사실, 리제는 내가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한 시점에서 이미 어젯밤의 기억을 별로 가지고 있지 않다는 걸 눈치챘을 확률이 높았다.
행동이 워낙 어린애같아서 그렇지, 실질적인 능력은 다른 기사단장들에게 전혀 꿇리지 않으니까.
“뭐, 결국 우리도 따로 얻어낸 것은 거의 없었다만.”
“……?”
아이리스의 입에서 예상치 못한 말이 튀어나왔다. 내가 필름이 끊기기까지 했는데 쟤들이 아무것도 못 건졌다고? 필름만 끊긴게 아니라 아예 잠들어버렸었나?
“반쯤은 우리 탓이고, 반쯤은 리제 탓이라고 보면 되겠군.”
“반은 리제 탓이라니?”
팔에 엉겨붙어대는 리제를 적당히 밀어내고 질문했다. 얘가 대체 뭘 했길래.
다섯 명은 딱히 뾰족한 수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신입이 워낙 굳게 입을 다물어버린데다, 그렇다고 여기서 술을 더 먹였다간 마음이 허물어지는 게 아니라 의식을 잃고 곯아떨어질 것이 뻔했기에.
지금도 혹여나 픽 잠들지는 않을까 위태위태한 실정이었다. 주기적으로 몸을 휘청여대는 꼴로 보아 잠들려고만 한다면 언제든 그럴 수 있어보였다.
결국 이 상태에서 술을 더 먹이지 않고 또 잠들게 하지 않으면서도 입을 열만한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의미인데, 그런 방법이 쉽사리 떠오를 리가 없었다.
“굉장히 의외로군, 리제.”
“응? 뭐가?”
아이리스는 신입의 양쪽 옆자리를 하나씩 차지하고 사심을 양껏 채우려는 듯 얼굴 이곳저곳을 만져대는 리제와 아우로라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한마디를 툭 던졌다.
“너라면 틀림없이 이 순간을 놓치지 않을거라고 생각했다. 신입한테 미인계라도 쓰자고 할 줄 알았다만.”
평소에는 리제의 유혹을 잘도 견뎌내던 신입이었지만, 지금만큼은 달랐다.
술에 취했다고 생각되는 순간부터는 아예 대놓고 리제의 가슴을 쳐다봤었고, 그 뿐만 아니라 다른 기사단장들과 아우로라의 드레스 차림을 흘끗흘끗 관찰하기도 했다.
신입한테 그런 시선으로 바라봐지는 것이 제법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기에 내버려둔거였지, 다른 남자가 똑같은 시선을 보냈다면 정수리에 자기 머리 크기만한 혹이 생겼을 것이다.
혹은 어디 뼈가 한 군데 작살나거나.
그런 상황이었으니, 리제가 평소처럼 신입을 자기 몸으로 유혹할거라 생각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다고 볼 수 있었다.
물론 정말로 그럴 낌새가 보이는 즉시 에리카와 아이리스가 막아세우겠지만.
“아, 그거?”
리제가 당당하게 어깨를 쭉 폈다. 바로 옆의 아우로라는 얘가 또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눈이었다.
“배덕감이 없잖아. 배덕감이. 내가 지금 신입을 유혹하면 당연히 넘어오겠지.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야? 그건 내가 원하는 모습이 아닌데.”
아이리스가 고개를 갸우뚱 했다. 그걸 본 리제는 얘가 뭘 모르네, 라며 설명을 이어갔다.
“내가 원하는 건 첫 만남때는 나보다 약하지만 잠재력은 출중했던 남자가, 어느순간 훌쩍 커버려서는 나를 모든 면에서 압도하고 밑에 깔아뭉게는거야. 그 차이에서 나오는 배덕감이 중요한거라고. 처음에는 세상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해보였던 내가, 한낱 암컷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신입이 깨달아버리는 바로 그 순간이. 이해했어?”
“…….”
“…….”
“…….”
“…….”
“…….”
연회장에 침묵이 감돌았다.
질문을 한 당사자인 아이리스는 물론이고, 바로 옆에 있던 아우로라도, 신입의 입을 열려면 어떤 방법을 사용해야 할지를 진지하게 논의하고 있던 에리카와 클라우디아마저 그자리에 굳어버릴 정도로 충격적인 취향 고백이었다.
“그런데 술에 취한 상태면 그럴 수가 없잖아? 배덕감은 없어지고, 본능만 남는걸. 그러니 당연히 한 발 물러서야지. 완벽한 때를 기다려야하니까.”
“리제 너는, 정말이지…….”
아이리스가 황당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리제의 취향이 살짝 특이하다는 사실은 예전에 조금 들어서 알고 있었다만, 설마 이렇게나 확고했을줄은 상상조차 못한 일이었다.
“제정신입니까, 언니? 그런건 그냥 혼자서만 알고 있으면 되지, 언니가 어떤 성벽을 가졌는지를 왜 저희까지 알아야되는데요? 그걸 눈앞에서 들은 저희는 무슨 죄에요?”
에리카가 속사포처럼 잔소리를 쏟아부었다. 진심으로 어이가 없다는 얼굴이었다. 바로 앞에서 자기 언니가 성적 취향을 까발리는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봤으니 그럴 만도 했다.
“아이리스가 물어봤잖아?”
“나는 설마 네가 그런식으로 취향을 다 까발려버릴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만. 이 상황을 내 탓으로 돌리는 건 너무하지 않나?”
“뭐 어때?”
리제는 싱글싱글 웃으며 신입의 뺨을 손가락으로 콕콕 찔러댔다. 나머지 사람들은 그 모습을 온갖 복잡한 감정이 담긴 눈으로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내가 왜 동료가 무슨 성벽을 가졌는지를 알아야 되는거지?”
클라우디아가 작게 중얼거렸다. 이곳에 있는 모두가 공감할 말이었다.
“…….”
“……?”
아이리스는 말을 하려다 말고 얼굴을 붉히며 부들부들 떨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에리카나 클라우디아, 아우로라도 별반 다르지 않은 반응이었다.
오직 리제만이 멀쩡하게 행동하고 있었다.
“아니, 나 잠든동안 뭔 일이 있었길래 그래?”
“……떠올리고 싶지 않다.”
‘얘는 대체 뭘 했던거야?’
일단 리제 빼고 반응이 죄다 저러니 뭔가를 저질렀다는 사실만은 확실한데, 아이리스가 말할 생각이 없어보이니 나로서는 도통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크흠, 큼. 아무튼, 시간이 끌린 사이에 네가 결국 잠들어버렸고, 자연히 비밀을 밝힐 기회도 날아갔다. 딱 하나, 네가 우리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추측한 게 전부였지.”
아이리스는 헛기침을 하며 덧붙였다. 본인은 저걸 실패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사실 저 하나만으로도 제법 큰 성과였다.
지금의 내가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점. 그리고 뭔가 숨기는 비밀이 있다는 점. 그 두 가지를 알아차렸으면 일단 절반 가량은 성공한 셈이니까.
“하지만 우리가 할 일은 여기까지다. 네가 그토록 완고하게 말하기 싫어하는 내용이라면, 우리가 그걸 더 추궁하는 것도 실례일테니까.”
“그래?”
“대신, 한 가지만 더 물어봐도 되겠나?”
아이리스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나도 덩달아 뭘 물어보려는건가 싶어 몸에 힘이 들어갔다. 약간의 뜸을 들이다가, 아이리스는 입을 열었다.
“네가 품고 있는 비밀은, 언젠가 우리들에게 털어놓을 수 있는 것들인가?”
“당연하지. 반드시 그럴거야.”
나는 아이리스의 질문을 듣자마자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을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언제가 될지 그 정확한 시기는 몰라도, 무조건 그럴 예정이었다.
“그런가. 그거면 됐다.”
내 대답에 아이리스가 입꼬리를 옅게 끌어올렸다. 아우로라와 에리카, 클라우디아도 내 대답에 나름 만족한 눈치였다.
“잠깐, 아직 할 말 남았어.”
리제가 중간에 불쑥 끼어들었다. 나는 뭘 말하려는건가 싶어 리제를 쳐다보았다.
“어제 너 방에 데려다 준 다음에 우리끼리 생각해본거야. 아무리 이름을 까먹었다 해도, 언제까지고 널 신입이라는 호칭으로 부를 수도 없는거잖아?”
생각해보니 그랬다.
저주 탓에 이름을 까먹었다고 대답한 뒤로, 나는 적당한 이름 없이 꼬박꼬박 신입이라는 호칭으로만 불리고 있었다. 워낙 익숙해지다보니 그냥 넘어갔었는데.
“그렇긴 하지. 그래서?”
“이름은 아직도 기억 안 나는거지?”
고개를 끄덕였다. 빙의되기 전에 쓰던 이름을 여기서까지 쓰고싶지는 않았다. 여기서 내 한국식 이름이 불린다고 하니까 뭔가 오글거리는 느낌이라서 거부감이 들었다.
“우리가 하나 생각해놓은게 있는데. 어때?”
우리, 라고 말하는 걸 보니 다 같이 이름을 생각한 듯 했다. 들어서 손해 볼 일은 없을 것 같았기에, 얌전히 리제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델타. 옛 고어로 ‘변화’라는 뜻이야. 네가 우리한테 변화를 가져다주고 있으니까, 딱 알맞은 이름이지?”
‘델타?’
왠지, 어딘가 바다 깊은 곳에 있는 해저 도시에서 잠수복을 입고 드릴을 든 채 돌아다니는 무언가가 생각나는 이름이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