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Reincarnated into a Game Filled with Mods RAW novel - Chapter (56)
“먹잇감이 제발로 찾아와주다니, 이거 고마워서 어쩌지? 내가 보답해줄만한 게 없는데.”
아라크나이네라는 오른팔로 가슴 밑을 받치고, 왼쪽 팔꿈치를 세워 오른쪽 손등 위에 얹은 자세로 턱을 괴고 우리를 내려다보았다.
자세가 자세인지라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거유가 한층 더 강조되어 보였다. 초록색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핑크빛 돌기에 대해서는 딱히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업데이트가 됐었나?’
멍하니 굳은 채로 머리를 굴렸다. 내가 예전에 NPC 리터칭 모드를 깔아봤을때는 보스들의 외형까진 건드려놓지 않은 상태였었다.
1회차를 완주한 뒤에는 목소리와 외형 사이의 위화감을 못 이겨서 지워버렸고.
이후부터는 다키스트 라이트 모드가 나와서 그걸 파고드느라 다른 것에 신경을 쓸 겨를 따위는 없었다. 그래서 내가 기억하는 건 어디까지나 첫 출시본까지였다.
아무래도 내가 닼라 모드에 빠져살던 동안 NPC 리터칭 모드 역시 제법 많은 업데이트를 거쳐온 듯 했다.
‘그래. 안 그러는게 이상하지.’
닼라 모드도 마지막 업뎃이라는 선언이 나오기 전까지 자잘한 버그 수정을 겸해서 온갖 패치를 내놓았었는데, 하물며 외형 변경 모드가 업데이트를 안 했을까.
“델타.”
바로 옆에서 들려온 싸늘하기 짝이 없는 리제의 목소리에 급히 생각을 그만두고 정신을 차렸다.
고개를 돌리자, 얼음과 냉기를 갑옷 주변에 단어 그대로 풀풀 내뿜어대는 리제가 무덤덤하게 날 쳐다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투구 때문에 표정까진 볼 수 없었지만, 오히려 표정이 안 보여서 더 오싹했다.
“어딜 보고 있어?”
어딜 보고 있냐는 말을 듣는 순간, 리제가 왜 이런 반응인지 알아차렸다.
인간 형상의 상반신을 쳐다보자마자 멍하니 굳어버린 채로 생각에 잠겼으니, 내가 저 맨가슴에 정신이 팔렸다고 착각한 것이다.
실상은 내 기억 속의 외형처럼 갑피로 덮여있는 게 아니라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모습이라서 놀란거였지만, 어쨌든 겉으로만 본다면 오해를 사기에 충분한 상황이었다.
“…….”
오해를 풀기는 해야겠는데, 대체 어디서부터 건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서 말문이 턱 막혔다. 일단 내가 왜 하필 가슴 쪽을 보면서 굳어버렸는지를 해명하면 되는건가.
‘이렇게 입을 다물고만 있으면 오해가 더 깊어질테니 뭐라도 말해야ㅡ’
“델타.”
리제가 나를 한번 더 불렀다. 나는 변명을 포기하고 얌전히 다음 말을 기다렸다. 지금 당장은 떠오르는 대답이 없었다.
“맨가슴이 그렇게 보고싶으면 나중에 내가 보여줄게. 그러니까 눈 돌려. 알았지?”
하지만, 리제의 입에서 나온 것은 내 예상을 완전히 벗어나는 말이었다.
그 말을 들은 나와 에리카가 동시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쳐들었다. 클라우디아는 왠지 투구 속의 표정이 예상 가는 모습으로 우리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이번엔 다른 의미로 멍하니 굳을 수 밖에 없었다. 방금은 진짜로 내 귀가 잘못된줄 알았다. 뭘 보여준다고?
“어, 언니. 방금 뭐라고…….”
“조용, 에리카. 집중해야지.”
에리카가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어보려 했지만, 리제는 그 말을 단칼에 싹둑 잘라냈다.
차라리 평소처럼 장난기 넘치는 말투였으면 그러려니 하고 넘기기라도 할텐데, 상당히 진지한 목소리였기에 대충 넘어가지도 못할 듯 싶었다.
‘저거 토벌하고나면 제일 먼저 리제 오해부터 풀어야겠는데.’
자칫 잘못했다간 다음날 아침에 같은 침대에서 일어날라.
그것도 둘 다 알몸으로.
“아항, 대충 알겠네.”
우리의 대화가 고스란히 들렸는지, 거미 여왕은 일부러 자기 가슴을 강조하며 키득거렸다. 머리와 비슷한 크기의 지방 덩어리가 손가락의 움직임에 따라 모양을 바꿨다.
나는 이번엔 재빨리 눈을 돌렸다. 오해는 한 번이면 충분했다.
“가운데 있는 그 남자가 너희들한테 엄청 중요한가보구나? 알았어. 그 녀석을 제일 먼저 빨아먹어줄게. 아주 천천히. 죽기 직전까지 질러댈 비명을 들으면서.”
초록색 입술 사이로 초록색 혀가 튀어나와선 입가를 핥고 들어갔다.
“그렇게는 안 될걸.”
클라우디아가 대검을 쾅! 소리가 나도록 땅에 내리쳤다. 근처에 노란색의 벼락이 감돌았다. 대검 뿐만이 아니라, 클라우디아의 몸 곳곳에도 벼락이 휘감기고 있었다.
콰르르릉! 하는 천둥 소리가 울려퍼지고, 대검 전체가 벼락으로 뒤덮이며 연신 스파크가 튀었다.
“우리 잘나신 신입 단원한테는 손끝 하나 못 건드리지. 내가 그렇게 놔둘 것 같아?”
근처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피부가 조금씩 따끔따끔했다. 온 몸의 털이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리제와 에리카도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냉기와 화염이 주변 공간을 잠식하며 극저온의 서리 안개와 극고온의 아지랑이를 만들어냈다.
“그런 반응이니까 더 궁금해지잖아. 저 남자가 비명 지르는 걸 무력하게 잡힌 채로 듣고 있어야만 할 때, 너희들이 얼마나 아름다운 표정을 지어줄지가 말이야.”
아라크나이네라가 나를 향해 눈웃음을 쳤다. 나는 그 미소를 무덤덤하게 받아넘기며 뒤로 조금 물러났다. 가까이 붙어있지도 않고, 아주 멀리 떨어져있지도 않은 거리.
미리 세워둔 작전대로였다.
암석 지네를 통해서 보스의 어그로가 공격을 받은 대상에게 튄다는 사실을 확인했으니, 첫 공략은 기사단장들에게 맡겨두고 나는 멀찍이 떨어져 있으면 된다.
그리고 새끼 거미를 소환하는 패턴때 내가 나서서 아라크나이네라와 싸우고, 기사단장들은 새끼 거미의 처리에 전념할 예정이었다.
완전한 싱글플레이 게임인 브닼 4였다면 상상도 못할 공략법이지만, 지금의 우리한테는 충분히 가능했다.
“자아, 여기까지 찾아와준 보답으로 피 한방울 안 남기고 쪽쪽 빨아먹어줄게. 이리 오렴. 귀염둥이들.”
보스룸 입장 컷신의 마지막 대사를 내뱉은 거미 여왕이 두 팔을 활짝 뻗었고, 그 모습을 신호 삼아 세 명의 기사단장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제일 먼저 공격을 개시한 것은 역시 리제였다. 순식간에 거미 여왕의 옆구리로 접근한 리제가 오른쪽 뒤꽁무니를 향해 쌍단검을 휘둘렀다.
얼음으로 뒤덮인 단검이 몸통을 몇 번이나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는 땅으로 내리찍히는 뒷다리를 피하고 한번 더 달려들려다가, 동작을 우뚝 멈췄다.
발 밑에 회색빛 거미줄이 깔려 있었다.
“거미줄 위잖니. 움직이기 힘들걸?”
아라크나이네라가 깔깔 웃고는 뒷다리를 치켜올렸다. 리제가 몸을 숙인 바로 직후에 날카로운 발톱이 갑옷의 어깨 부분을 아슬아슬하게 스쳐지나갔다.
은색의 갑주 위로 초록색 액체가 뚝뚝 떨어졌다.
그 틈을 타 클라우디아가 달려들었다. 벼락으로 뒤덮인 대검을 양손으로 잡고, 몸을 반시계 방향으로 돌리며 팔을 크게 비틀어 위에서 아래로 내려찍다시피 휘둘렀다.
골짜기 전체가 진동하는 듯한 콰앙! 소리가 울려퍼졌다. 대검이 내리찍힌 자리를 중심으로 벼락이 원을 그리며 퍼져나갔다. 노란 섬광이 보스룸 안을 가득 메웠다.
공격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클라우디아는 잠시 동작을 멈추는가 싶더니, 그대로 대검을 빼들어 위로 치켜올렸다.
이번에는 아래에서 위로 휘둘러진 대검이 칼 끝으로 천장을 가리켰다가 뒤로 넘어갔다. 자세가 뒤틀리지 않기 위해서인지, 왼손을 손잡이에서 떼고 오른손만으로 지탱하고 있었다.
클라우디아가 그 잠깐을 틈타 몸을 돌려 앞뒤를 바꿨다. 콰앙! 소리가 재차 울려퍼졌다. 한 발 늦게 내리꽂힌 벼락이 아라크나이네라의 몸에 직격했다.
“꺄아아아아악!”
샛노란 섬광이 번뜩이고, 그 입에서 새된 비명이 터져나왔다.
‘뭔 기술인지는 대충 알겠네.’
다른 기사단장들이 그렇듯, 클라우디아도 보스전에서 쓰던 기술들을 고스란히 사용하고 있었다. 방금의 공격도 보스전 패턴들 중 하나다.
대검의 크기가 크기인데다, 휘두르는 힘에 더해 벼락까지 인챈트시킨 공격이다보니 한 방 파괴력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보스가 바로 클라우디아였다.
대신 그만큼 빈틈도 많아서 일단 피하기만 하면 공격 하나하나가 딜타임이지만, 저 커다란 거미의 몸체로 그런 재빠른 몸놀림이 가능할 리가 없었다.
“이런 못돼먹은 녀석 같으니!”
클라우디아의 공격을 정타로 고스란히 얻어맞은 아라크나이네라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물론 그걸 정타로 얻어맞고도 생긴 상처라곤 옅은 칼자국이 전부였다.
이제는 에리카가 나설 차례였다. 오른발을 반쯤 위로 치켜들고, 검을 든 오른손을 왼쪽 옆구리에 붙였다가 발을 앞으로 강하게 쾅 내딛으며 수평으로 휘둘렀다.
칼날이 거미 여왕의 몸체를 베고 지나갔다.
검이 휘둘러진 궤적을 따라 불꽃으로 이루어진 파도가 넘실거렸다. 마치 쓰나미가 지상으로 밀려들어오듯, 화염의 파도가 전방의 부채꼴 범위를 모조리 휩쓸어버렸다.
“꺄아아아아악!”
한층 더 처절한 비명이 터져나왔다. 화염 장판을 처음부터 끝까지 뒤집어 쓴 아라크나이네라의 몸에서 불꽃이 피어올랐다.
상태이상 중 하나인 화상에 걸렸다는 의미였다.
화상에 걸리면 15초간 시전자의 공격력에 비례하는 지속 대미지를 받고, 화상이 지속되는 동안 전투 피로를 절대로 회복할 수 없게 된다.
거미 여왕이야 인간형 보스가 아니니 전투 피로를 회복하지 못하는 옵션은 별 의미가 없지만, 시전자의 공격력에 비례한 지속 피해는 제법 많이 아플 것이다.
그야 시전자가 에리카니까.
“이이익!”
아라크나이네라가 씩씩거리며 배를 뒤집어 근처에 초록색 체액을 흩뿌렸다. 미리 정보를 전해들어서 저게 독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던 기사단장들은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처음 리제가 달려들때만 해도 여유만만이던 얼굴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표정이 마치 악귀와도 같이 일그러져 있었다.
“얌전히 우리 아이들을 위한 양분이 되어줬으면 좋았을 것을!”
‘어? 저 패턴이 벌써 나온다고?’
방금 아라크나이네라가 내뱉은 건 새끼 거미를 소환하기 직전에 나오는 대사였다. 그 말인 즉, 벌써 보스의 체력이 40%씩이나 깎여나갔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맞은 공격이라고 해봐야 리제가 사용한 연격이랑, 벼락 인챈트 된 대검 풀차지 공격이랑, 화염 장판 풀히트ㅡ
‘벌써 나올만 했구나.’
리제의 연격을 제외한 나머지 두 개는 바닐라에서조차 정타로 처맞으면 사망이 확정된 공격들이니까. 양쪽 보스의 스펙 차이를 감안하면 충분히 그럴만 했다.
심지어 거미 여왕은 생체형 적이라 화염과 벼락에 추가 피해까지 입는다. 상성이 우리 쪽에 압도적으로 유리하니 더 볼 것도 없었다.
상황이 생각보다 쉽게 풀리고 있었다.
“아이들아! 깨어나렴!”
아라크나이네라가 목청껏 소리쳤다. 부름에 대답이라도 하듯 온 사방에서 찌직거리며 알의 껍질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기사단장들이 내 옆으로 붙었다.
“이제 시작이지, 델타?”
“네. 말씀드린대로만 해주세요. 저 거대한 건 제가 상대할테니.”
피 묻은 검을 빼들고, 배에 찔러넣어 피를 빨아들였다. 검신이 한계치까지 붉게 물든 것을 확인한 후 칼을 뽑았다. 검신에 흉흉한 붉은빛이 감돌았다.
머지 않아, 알에서 태어난 새끼 거미들이 쏟아져 내려오기 시작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