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Reincarnated into a Game Filled with Mods RAW novel - Chapter (57)
‘실제로 보니까 장난 아니네.’
온 사방에서 내 무릎까지 오는 크기의 거미들이 드글드글하게 몰려드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왠지 몸에 벌레가 기어다니는 것만 같이 간질간질한 느낌이 들었다.
기사단장들도 별반 다르지 않은 기분인 듯 몸에서 피어오르는 전기와 얼음, 화염의 범위가 한층 더 넓어졌다.
“저것들은 우리가 맡을테니까 신경쓰지 말고 달려, 델타.”
리제가 나를 가볍게 밀었다. 그 동작을 신호삼아 거미 여왕에게 접근하는 나를 향해, 새끼 거미들이 양치기 근처의 양떼마냥 우르르 몰려들었다.
“어딜 감히!”
물론 손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고 얼음과 화염에 모조리 쓸려나갔다.
내가 달려갈 공간을 충분히 확보해 줄 만큼 넓은 범위를 휩쓸어버리면서도 정작 나까지 휩쓸리게 만들지는 않는, 무척이나 절묘한 힘조절이었다.
기사단장들 각자가 광역 공격 수단이 하나씩은 있다보니 처리 하나는 확실했다.
클라우디아는 대검을 붕붕 휘둘러대기만 해도 새끼 거미들이 퍽퍽 터져나가는데다, 검신에 벼락이 휘감겨있는 탓에 실질적인 공격 범위는 훨씬 더 거대했다.
리제도 마찬가지로, 새끼 거미들이 공격은 커녕 주변에 자욱이 깔린 서리 안개와 얼음 장판 때문에 접근하기도 전에 둔화되어 빌빌대다가 얼어붙기 일쑤였다.
에리카야 말할 것도 없었다. 단지 전신에 화염을 두르고 무기를 이리저리 휘둘러대고 있을 뿐인데도 알아서 불길이 확산되어 새끼 거미들이 죄다 불타버렸다.
“내게 먹히러 온거니?”
새끼 거미들을 소환하고 벽 쪽으로 잠시 물러나 있던 아라크나네이라는, 내가 다가오자 표정을 갈무리하고선 나름대로 매혹적인 목소리를 내며 눈웃음을 쳤다.
“아니, 죽이러 왔는데.”
“죽여? 네가? 나를?”
깔깔대는 웃음이 되돌아왔다. 나는 덤덤히 자세를 잡았다. 어차피 시간은 충분하다. 버프가 꺼지기 전에 기사단장들이 새끼 거미들을 다 정리하고 가세해줄테니까.
“할 수는 있고?”
“왜 못할거라 생각해?”
“여기 이유가 있잖니.”
물컹, 가늘고 긴 손가락이 자기 가슴을 움켜쥐고선 부드럽게 주물렀다. 그러다가 손가락으로 가슴 끄트머리의 분홍빛 돌기를 살짝 자극하기도 했다.
애교 넘치는 신음소리와 교태로운 몸짓이 더해졌다. 동작이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것이 지금껏 제법 많이 해온 행동인 듯 싶었다.
아니지, 많이 해온 행동인 듯한 게 아니라 실제로 많이 해봤을거다. 아라크나이네라는 인간을 유혹해 양분으로 삼는 보스였으니.
“뭔가 단단히 착각을 하고 있네. 내가 처음에 그런 반응이었던 건 가슴 보고 넋을 놓아서가 아닌데.”
“정말로? 그러면 어디 한 번 몸에 직접 물어볼까?”
나와 대화를 나누며 여유를 조금 되찾았는지, 자기 가슴에서 손을 뗀 거미 여왕의 얼굴에는 방금 전보다 훨씬 더 고혹적인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일단 설정상으로 사람을 유혹해서 잡아먹는 마물이긴 한데, 정작 이렇게 플레이어가 유혹을 당하는 건 처음 겪어보는 일이었다.
보스전 도중에 보스와 대화를 나눌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저쪽이 일방적으로 떠들어대는거라면 몰라도.
“그럴 수 있으면 그래보든지.”
먼저 움직인 것은 내 쪽이었다. 나는 아라크나이네라를 향해 달려들며 바닥을 곁눈질해 진한 회색빛으로 뒤덮인 곳을 피하는 동시에, 팔과 다리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거미 부분의 왼쪽 앞다리가 들어올려졌다. 맹독이 발려진 공격이었다.
리제의 공격을 튕겨내도 빙결이 축적되듯이, 아라크나이네라의 다리 공격 또한 튕겨내건 방어하건 상관없이 맹독 수치를 축적시킨다. 그러니 구르기로 피하는 게 맞았다.
나는 내리찍히는 앞다리를 굴러 피하고 옆구리로 파고들어 검을 휘둘렀다. 붉은색의 칼날이 스치고 지나간 자리에 옅은 자상이 생겼다.
“꺄앙!”
묘하게 요염한 신음소리가 터져나왔다. 조금 전에 기사단장들의 공격에 당했을 때가 명백히 고통스러워하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공격을 허용했으니 예의상 그래준다는 느낌이 강했다.
아니면 아직도 나를 유혹하려드는 중이거나.
“정말, 아프잖니.”
아라크나이네라는 색기 넘치는 목소리로 몸을 베베 꼬며 손가락을 입 가까이에 가져갔다. 그리고선 혀를 내밀어 베ㅡ 하고 손가락에 침을 떨어뜨리더니 생채기가 남은 자리를 문질렀다.
아주 여유가 넘치는 행동이었다.
고작 공격 세 번으로 자기 HP를 40% 넘게 날려버린 기사단장들에 비하면야, 내 공격은 충분히 맞아줄만 하다는 생각밖에 안 들겠지.
‘그 생각이 언제까지 가나 보자고.’
다시 거리를 좁혔다. 거미 여왕이 나를 향해 팔을 뻗었다. 잡기 공격. 재빨리 뒤로 두어 번 굴러 물러났다.
아라크나이네라의 팔은 허공을 갈랐고, 나는 그 틈을 타 검을 휘둘렀다. 이번에는 하얗고 매끈한 피부에 붉은 실선이 새겨졌다.
팔뚝에 남은 칼자국을 잠시 만지작거리던 거미 여왕이 일그러지려는 표정을 애써 가라앉히려는 듯 눈가를 씰룩이며 나를 쳐다보았다.
“반항하면 안 되지. 자꾸 그러면 벌을 줄거다?”
“말했잖아. 그럴 수 있으면 그래보라고. 아까부터 입만 살아선 뭐 하는 짓이야?”
그 말이 결정타였는지, 아라크나이네라의 표정이 기어코 기사단장들을 상대할 때처럼 흉악하게 변했다. 이제 가면을 쓰는 건 포기하려는 모양이었다.
이후로도 공방은 계속 이어졌지만, 말이 공방이지 실상은 내 일방적인 농락이라고 봐도 좋았다. 거미 여왕의 상반신에 생겨난 붉은 실선이 점차 그 숫자를 늘려나갔다.
“너는 절대로 곱게 죽여주지 않을ㅡ 커헉!”
잔뜩 화가 돋친 얼굴로 나를 노려보던 아라크나이네라가 옆구리로 날아든 푸른색 단검에 직격당하고선 숨 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가세할게, 델타! 잘 버텨줬어!”
단검은 물리법칙을 무시하다시피 하는 궤도로 되돌아가선 리제의 손에 안착했다. 기사단장들에게 달려들던 새끼 거미들은 모조리 다 정리되어 있었다.
전기에 지져기고, 냉기에 얼어버리고, 화염에 잿더미로 화한 새끼 거미들의 시체가 바닥에 즐비했다.
“아아아악! 내 귀여운 아이들이!”
그 모습을 본 아라크나이네라는 거의 절규하듯이 비명을 내질렀다. 여유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귀여운 아이들이라면서 전투에 내보내?”
“강하게 키우려고 했나보죠. 정작 상대가 너무 강해서 못버티고 죽어버렸지만.”
“……가만 보면, 에리카 너도 조용해보이는데 은근 할 말은 다 하는 성격이란 말이지.”
“그래서 언니랑 닮았다고 말하려는거라면 가만 안 둘 겁니다, 클라우디아.”
에리카와 클라우디아는 이상한 대화를 주고받으며 리제의 뒤를 따라갔다. 누가 자매 아니랄까봐 에리카도 은근 할 말을 아끼지 않는 면이 있긴 했다.
아라크나이네라가 리제 쪽으로 고개를 돌린 것을 확인한 나는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괜히 어그로가 튀면 나만 골치아파지니까 말이다.
아직 피 묻은 검의 버프 시간이 꽤나 많이 남아있긴 하지만, 버프가 꺼지더라도 포션으로 체력을 보충해서 다시 사용하면 된다.
은빛 여명 기사단 루트에서는 아이리스를 통해 하급 포션을 적당히 수급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참고로 회복량은 조금 적어도 휴식하면 무한히 사용 횟수가 재생되는 포션 역시 존재한다. 뭐든 처맞으면 한방컷이 나는 닼라 모드에서는 쓸모가 없기 때문에 안 얻었을 뿐.
“끄으으으윽!”
보스룸에 처절한 비명이 울려퍼졌다. 내가 잠시 생각에 잠긴 동안 기사단장들은 아라크나이네라를 일방적으로 밀어붙이고 있었다. 전신의 상처들이 눈에 띄게 많아진 상태였다.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아라크나이네라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저 대사를 말했다는 건 체력이 30% 이하로 내려갔다는 의미였다. 나는 허리춤에 찬 가방에서 포션을 꺼내들어 두 개를 들이켰다.
하급품이라서 이것만으로 체력을 완전히 회복할 수는 없겠지만, 없는 것보다는 낫다. 배에 검을 푹 찔러넣어 피를 흡수시키고 다시 뽑아들었다.
‘그러고보니, 고통은 왜 안 느껴지는걸까.’
아무래도 동작이 동작이다보니 이 특수 능력을 처음 시험해볼때는 진짜 한참을 망설이다 찔러넣었었는데, 신기하게 고통이 전혀 안 느껴졌었다. 심지어는 상처도 자동으로 메워지고.
지금은 그냥 커맨드 입력하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할 수 있는 이유도 다 그래서였다. 솔직히 진짜로 고통 참으면서 배를 찔러야 되는거였으면 고민 좀 많이 했을거다.
피 묻은 검만 예외인건지, 아니면 다른 자해 계열의 버프 종류도 다 그런건지는 불명이었다.
“델타 씨! 이제 델타 씨 차례ㅡ 큭?!”
나를 향해 소리치려던 에리카가 말을 미처 끝맺지 못하고 휙 끌려갔다. 아라크나이네라가 에리카를 잡아챈 것이다. 그 몸이 위로 한참을 떠올랐다.
‘장판이 아직 남아있었나?!’
급히 거미 여왕의 하반신 쪽을 확인했다. 바닥에서 넘실대던 화염이 그제서야 사라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화염 장판의 지속 시간을 역산해보면, 거미 여왕의 체력이 30% 이하로 내려간 직후에 에리카가 공격을 한 것이 분명했다.
그 막대한 대미지 탓에 패턴이 캔슬되면서 소환이 한 박자 뒤로 늦춰져버렸고, 또 하필이면 재수가 지지리도 없이 아라크나이네라가 잡기 패턴을 사용한 것이다.
‘설마 타이밍이 그렇게 꼬일까 싶었는데!’
지금 이 상황을 재현하려면 아라크나이네라의 체력이 30% 이하로 깎인 바로 직후에 공격이 들어가야 하고, 공격 한 번에 패턴이 캔슬될만큼 커다란 대미지가 들어가야 하고, 그 대미지가 들어간 이후에도 얼마간 공격 판정이 남아있어야 하고, 소환 패턴이 캔슬된 아라크나이네라가 잡기를 사용해야 한다.
조건이 4개나 달려 있으니 애초에 노리고 시도하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대미지와 관련된 조건이야 기사단장들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공격 타이밍은 정말로 맞추기가 극악에 가까웠다.
그래서 설마 했는데, 그 설마가 진짜로 일어나버릴 줄은 상상도 못했다.
“모두 나오렴! 내 아이들아!”
아라크나이네라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퍼져나가고, 곧이어 새끼 거미들이 알 껍질을 찢고 나오는 소리가 수도 없이 들려왔다.
에리카를 구출하려 달려들던 리제와 클라우디아가 과부하라도 걸린 듯 동작을 우뚝 멈췄다. 그 시선이 나와 에리카를 번갈아 향했다.
“이 짜증나는 것!”
아라크나이네라는 철제 투구를 무슨 마분지 찢듯이 뜯어내고선 에리카의 손에 들린 일본도마저 우악스럽게 빼앗아 집어던졌다.
에리카도 나름 필사적으로 발버둥을 쳤지만, 아무리 기사단장이라 한들 보스씩이나 되는 마물을 힘으로 이길 수는 없었다. 갑옷이 종잇장처럼 우그러들었다.
“델타! 일단 내 옆에 붙어! 빨리!”
리제가 나를 확 끌어당기며 서리 폭풍을 일으켰다. 내게 접근하던 새끼 거미들이 일거에 쓸려나갔다. 그러면서도 리제의 시선은 끊임없이 에리카를 향하고 있었다.
“이거, 조금…… 위험한데!”
클라우디아의 주변에 벼락이 내리꽂혔다. 열을 넘는 숫자의 새끼 거미가 벼락 한 번에 죽어나갔으나, 그 자리를 스무 마리도 넘는 새끼 거미가 채웠다.
은색 갑옷에 묻어나는 초록색의 액체가 점차 늘어났다. 저게 클라우디아와 리제의 갑옷을 녹여먹을 일은 없으리라 믿고 싶었다.
“피 한방울 안 남기고 빨아먹어주마!”
송곳니를 뾰족하게 세운 아라크나이네라가 에리카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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