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Reincarnated into a Game Filled with Mods RAW novel - Chapter (6)
바로 눈앞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 펼쳐지자 머리가 덜컥 굳어버렸다.
내가 기억하는 튜토리얼 지역의 기사 NPC는, 얼굴 곳곳에 주름살이 패어 있고 회색빛 수염이 무성한 중년의 남성이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있는 기사는 성별부터가 달랐다.
찬란한 달빛을 머금은 은발이 목 뒤편으로 등을 따라 길게 늘어졌고, 그 끝은 허벅지 중간에 걸쳤다. 앞머리는 이마를 반쯤 덮으며 세 갈래로 반듯이 나뉘었다.
그 밑으로는 머리카락과 똑같이 달빛을 머금은 듯 은색으로 빛나는 눈동자가 보였다. 객관적으로나 주관적으로나 엄청난 미모를 지닌 얼굴이었다.
충격이 워낙에 커서인지는 몰라도 머리가 전혀 돌아가질 않았다. 이런 내 시선을 느꼈는지 부식된 투구를 발로 툭툭 건드리던 여기사가 나를 돌아보았다. 은색 눈동자가 이쪽을 향했다.
“왜 그러지? 뭔가 할 말이라도 있나?”
“어, 그게, 그러니까. 여자, 셨……?”
“설마 이 얼굴로 남자일거라고 생각하는건가? 이상한 질문을 하는군.”
여기사는 그러면서 살짝 웃었다. 그런 옅은 미소마저도 더럽게 예뻤다. 아무래도 내가 농담을 하는 중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정작 나한테는 농담이 아니라 진심이 담긴 물음이었지만.
‘아니, 이게 대체 뭔…….’
충격을 가라앉히려 애써 노력하면서, 이게 대체 어떻게 되어먹은 상황인지를 이해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눈앞의 여기사는 튜토리얼 지역의 그 NPC가 아닌건가?
하지만 성별과 외모를 제외한다면 다른 모든 요소들은 내 기억 속의 NPC와 일치했다. 그 말인 즉, 저 여기사의 정체에 대해서는 딱히 의심할 여지가 없다는 소리였다.
닼라 모드에서도 딱히 성별을 바꾸지는 않았ㅡ
‘잠깐, 모드?’
문득 하나의 가능성이 스쳐지나갔다.
혹여라도 무례하다거나 흑심을 담았다고 느껴지지 않도록, 최대한 심혈을 기울이며 여기사의 얼굴을 곁눈질했다. 허리까지 내려올 정도로 길게 뻗은 은발과, 머리카락처럼 은색인 눈.
기억 속에 어렴풋이 들어있는 외형이었다.
‘저거, 외형 변경 모드에서 나오는 그 모습 같은데.’
브라이티스트 다크니스 시리즈의 세계관이 워낙 암울하고 꿈도 희망도 없는 세계관이다보니, 제법 비중이 있다 싶은 NPC들의 자리는 거의 다 남자가 꿰차고 있었다.
제국의 황제, 기사들, 성국의 교황, 성직자들, 마탑주, 마법사들, 그리고 대부분의 중간 보스급 적과 길거리의 잡몹까지 전부 다.
여자 NPC가 있긴 했지만, 게임 전체를 통틀어보아도 한 손에 꼽을 수 있을만큼 적었다.
처음에는 자연히 그 여자 NPC들을 더 예쁘고, 더 아름답게 리터칭하는 모드가 주류였다. 이미 있는 여캐들을 놔두고 굳이 남캐를 건드리지는 않았으니까.
하지만 날이 갈수록 모더들의 외형 리터칭 솜씨가 정교해지더니, 결국엔 백을 넘어가는 주요 남자 NPC들의 외형을 모조리 여자로 바꿔버리는 모드까지 나타난 것이다.
나 역시 호기심을 못 이겨 그걸 한 번 깔아봤었다.
정말로 잘 만든 모드이긴 했다. NPC들의 외형이 예쁠 뿐 아니라 자연스러웠고, 다른 모드랑 크래시도 잘 안 일어났고, 보스전 패턴을 보고 피하는데도 무리가 없었고.
딱 한가지 문제가 있다면, 외형은 예쁘고 몸매 좋은 여자인데 목소리가 남자의 것 그대로였다는 점 정도일까. 목소리까지 건드리는 건 더 이상 모더의 영역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외형과 목소리의 괴리감을 대충 무시하고 즐기는 사람도 많기는 했는데, 나는 도저히 적응을 못 하겠던데다 마침 닼라 모드가 나오기도 했기에 적당히 하다가 그냥 지워버렸었다.
‘……설마 그게?’
바로 그 외형 변경 모드, 혹은 NPC 리터칭 모드가 적용되어 있다고밖에는 지금 이 상황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이건 더 못 쓰겠군.”
내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대는 사이, 갑옷에 묻은 피를 닦아내던 기사가 눈살을 찌푸리고선 작게 혀를 찼다. 검은 피가 지워진 자리는 잔뜩 부식되고 녹이 슬어 있었다.
여기사는 망설임 없이 자신의 갑옷을 벗어던졌다.
“……?”
그리고, 갑옷을 벗은 맨몸이 드러나자마자 나는 눈을 의심했다.
군살 하나 없는 팔과 매끈한 겨드랑이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흰 민소매. 여기사가 갑옷 안에 받쳐입은 의상이었다. 피부는 그 옷차림에 꿇리지 않을 정도로 뽀얬다.
보는 사람이 갑갑할 수준으로 몸에 딱 달라붙는 사이즈인 탓에 몸매와 체형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끄트머리로 얼핏얼핏 보이는 복부와 옆구리의 맨살은 덤이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하반신에는 은색 돌핀팬츠를 입고 있었다. 철그럭거리며 떨어지는 갑옷 너머로 늘씬한 허벅지와 종아리가 보였다.
‘아니, 뭐지? 진짜로 뭔데?’
처음 기사의 성별을 확인했을 때보다 머리가 더 혼란해졌다. 돌핀팬츠에 민소매라고? 그것도 풀 플레이트 아머 밑에?
기억을 더듬었다. 내 기억상으론 외형 변경 모드와 NPC 리터칭 모드는 정직하게 외형만 바꿨던 걸로 기억했다. 그런데 뜬금없이 옷까지 같이 바뀌어 있었다. 그것도 엄청나게 야한 옷으로.
내가 혼란에 빠져있든 말든, 여기사는 정강이 보호대와 건틀릿까지 벗어던지더니 달랑 민소매와 돌핀팬츠만을 입은 채로 허리춤의 벨트에 검을 고정시켰다.
‘……미친.’
극도로 선정적인 광경이었다. 땀에 살짝 젖어 몸에 찰싹 달라붙은 흰색 민소매라든가, 은색의 돌핀팬츠 밑에서 씰룩이는 엉덩이라든가, 무척이나 부드러워보이는 허벅지라든가.
그 모습을 의식하지 않기 위해 애써 눈을 돌렸다.
이번에는 앞의 두 경우보다 상황 파악이 빨랐다. NPC의 외형을 바꾸는 모드와 더불어 의복을 바꾸는 모드도 같이 넘어온 게 분명했다.
이미 다키스트 라이트 모드가 적용되어 있고, 외형 변경 모드도 적용되어 있는데 의복 변경 모드가 같이 있지 말라는 법은 또 어디 있겠는가.
정작 당사자인 내가 그런 모드를 깔았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했지만, 아마 통합팩 같은거에 곁다리로 낑겨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거기, 죄수?”
머릿속으로 지금껏 깔아왔던 모드의 목록을 떠올리다가, 여기사가 날 부르는 목소리를 듣고 제풀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네, 네?”
“이제 갈 곳은 있나?”
익숙한 대화문이 들려오니 정신이 약간 돌아오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래, 혼란스러운건 혼란스러운거고, 지금은 살아남으려면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했다.
“아니요. 없습니다.”
“그래, 그렇겠지. 여기서 갈 곳이래봐야 도망자 신세가 되거나, 다른 감옥으로 이송되거나 둘 중 하나일테니까. 그래서 하는 제안이다. 혹시 날 따라와서 기사단에 입단해 볼 의향은 없나? 그 실력이면 조금만 갈고닦아도 충분히 제 몫을 할 수 있을거다. 내가 보증하지.”
‘됐다.’
게임에서랑 똑같은 선택지가 제시되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인간 도살자를 첫 만남에서 때려잡으면, 이렇게 NPC를 따라 바로 기사단에 가입할 수 있는 이벤트가 발생한다. 이게 초반부 구간을 제일 쉽게 넘길 수 있는 루트였다.
목숨은 하나뿐이니, 최대한 쉽게쉽게 가는 편이 맞다.
“변변찮은 무기나 기술도 없이 저 괴물을 혼자 쓰러뜨린 걸 보면 실력은 검증됐고, 저런 괴물과 정면으로 대치하는 상황에서도 겁먹지 않았던 걸 보면 담력도 충분하지. 나는 네 능력을 이대로 썩히기엔 아깝다고 생각한다. 아, 신분은 걱정하지 말도록. 네가 죄수였든 말든, 기사단에 입단하겠다고 한다면 전혀 신경쓰지 않을테니. 눈을 보면 그 인간의 성향을 대충 파악할 수 있다. 너는 믿어도 되는 사람이야.”
인터넷에서 밈이 된 바로 그 대사를 눈앞에서 직접 듣고 있자니 기분이 묘했다.
저건 입단 권유 이벤트를 진행하면서 여기사의 원본이 되는 NPC가 고정적으로 내뱉는 대사였다. 눈을 보면 성향을 알 수 있고, 그래서 주인공을 믿는다고 말이다.
얼핏 보면 평범해보이는 저 대사가 밈이 된 이유는, 일단 이벤트를 진행하기만 한다면 캐릭터의 외형에 관계없이 무조건 등장하기 때문이었다.
심지어는 플레이어가 캐릭터를 도저히 인간같지 않은 외형으로 커스터마이징 해놓는다고 해도 저런 표현을 사용하기에, 2차창작에서는 시력에 심각한 문제가 있거나 아예 장님으로 그려지곤 했다.
그렇다고 지금의 내 외형이 보라색 피부에 입보다 더 큰 눈을 갖고 잔뜩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있냐면 그건 또 아니지만.
“어때, 관심 있나?”
게임이었다면 여기서 선택지가 떴을 것이다. ‘네’ 혹은 ‘아니오’ 로.
물론 내가 고를 선택지는 정해져 있었다.
“네. 그러겠습니다.”
“좋아. 그러면 지금 바로 출발한다. 여기서 밍기적거려봐야 좋을 게 없을테지? 특히 너한테는 더.”
그 말을 끝으로 여기사는 몸을 돌려 출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걸음에 맞춰 돌핀팬츠로 덮인 엉덩이가 음란하게 씰룩였고, 늘씬한 허리와 척추 라인을 따라 움푹 들어간 작은 골짜기가 보였다.
몇 번을 봐도 적응 안 되는 복장이었다. 저 바로 위에 풀 플레이트 아머를 걸치고 있었던 것도 그렇고, 자기 복장에 아무런 위화감도 못 느끼는 듯한 표정도 그렇고.
“아, 그 전에 잠시.”
여기사는 걸음을 멈추더니 나와 다시금 눈을 마주했다.
“생각해보니 통성명도 안하고 그냥 넘어갈뻔 했군. 내 이름은 아이리스다.”
‘아이리스?’
게임에서는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었다. 성별이 바뀌었으니 이름까지도 남성 이름에서 여성 이름으로 바뀐건가.
“네 이름은 뭐지? 계속 너라고 부르거나 죄수라고 부를수도 없는 노릇이니.”
그러고보니 내 이름을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게임에서야 그냥 아무렇게나 활자 조합물로 이름을 지어도 다 알아먹었지만 여기서까지 그러지는 못할테고, 현실 이름을 사용하기에도 뭔가 조금 그런데.
잠시 대답을 고민하다가, 좋은 생각을 떠올리고 입을 열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