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Reincarnated into a Game Filled with Mods RAW novel - Chapter (67)
“드디어 다 왔네. 저기 성문 보인다.”
제일 선두에서 말을 몰던 클라우디아가 손을 뻗었다. 이제는 익숙해진 지 오래인, 도시로 들어가는 성문 앞 검문소의 풍경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내가 감옥을 빠져나와서 처음으로 여기 도착했을 때보다 줄이 확실히 더 길었다. 도시가 점점 더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는 증거였다.
‘대장간도 다시 열려나? 조만간 들릴 일이 생길 것 같은데.’
브닼 4에서 가장 뉴비 친화적이라는 은빛 여명 기사단 루트답게, 스토리를 정석적으로 진행한다면 이 도시 한 곳에서 앞으로의 여정에 필요한 대부분의 요소들을 구할 수 있었다.
갑옷과 무기를 강화하거나 속성을 부여하기 위한 대장간, 대부분의 중하급 물품을 취급하는 상점, 그리고 중급 이하의 마법을 배울 수 있는 마탑까지.
아우로라를 영주 자리에 앉히고 지속적으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한다면, 근접 무기를 사용하는 기사나 전사 계열의 캐릭터는 그냥 여기서 모든 강화를 해결하는 것도 가능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대부분의 요소를 구할 수 있다는거지, 최상급의 마법이나 물품, 신성 주문과 축복받은 무기는 다른 곳에서 구해야 하는건 변함없었지만.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머리가 불쑥 들이밀어졌다. 푸른 청발이 시야 한 구석을 가득 메웠다. 리제가 특유의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가슴이 말의 걸음걸이에 맞춰 리듬이라도 타는 것처럼 출렁였다. 갑옷은 아라크나이네라 보스룸에 파기하고 온지라 상의에 걸친 거라곤 흰 민소매 하나 뿐이었다.
참고로 갑옷은 무한정 보급이 가능하댄다. 성에 걸린 마법이 갑옷까지도 원래 존재하던 물품이라고 여기는지 그냥 들고 나오기만 한다면 알아서 보충이 된다나?
이쯤 되니 영주는 그 마법을 대체 무슨 저주로 착각했는지가 의문이었다.
아우로라의 설명으로는 애초에 마탑 중에서도 몇몇 최상위급의 마탑에만 적용되어 있는 마법이라고 하던데, 정말 용케도 그런걸 찾아냈구나 싶었다.
실질적으로 그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제국 최고의 마법사이자 대서고의 주인을 겸하는 단 한명 뿐이라고 했으니까. 정말 어지간히도 은빛 여명 기사단에 이를 갈았던 모양이었다.
사실 어떻게 보면 다행인 일이었다. 저런 마법을 찾아냈을만큼 은빛 여명 기사단을 미워했음에도, 명분이 없어서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가 결국 자기가 먼저 뒈져버렸으니.
아마 본인 입장에서도 제법 골치 아픈 일이었을 것이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감히 황제 직속의 기사단을 멋대로 처형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을테고.
은빛 여명 기사단을 갈가리 찢어놓은 다음 기사단장급의 네 명만 자신을 따라오게 만드는 것이 당장에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복수였겠지.
‘그러다가 훅 갔지만.’
“……설마 그 여자 가슴 떠올리고 있는 건 아니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오르느라 대답이 늦어지자, 리제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했다. 우리 사이의 거리가 더 바싹 좁혀졌다. 더 추궁당하기 전에 급히 대답했다.
“아니. 그냥 뭐 좀 생각할 게 있어서.”
“그러게 내 것도 만지라니까? 그 여자 가슴 따위는 바로 잊게 해줄 수 있는데.”
“……안 그럴거라고 몇 번을 말해?”
스텔라와의 이단 판별 사건이 있었던 이후로, 리제의 행동은 점점 더 노골적이게 변해갔다. 방금도 일부러 가슴을 강조하는 자세를 하면서 몸을 살짝 비트는 모습이 눈에 훤히 보였다.
내 인내심도 그에 맞춰 더 급격히 깎여나갔다. 이대로 저런 유혹이 이어진다면 더 버틸 자신이 없었다. 아마 최대로 잡아도 한 달 언저리가 마지노선이지 않을까.
“그래. 알아, 알아. 당연히 알지. 나도 그냥 해본 소리야.”
리제가 날 쳐다보며 히죽거렸다.
끝나고 자기 가슴을 만지라던 제안은 내가 거절했었다. 내 거절을 들은 리제는 뭐가 문제냐고 펄쩍 뛰었고, 나는 그냥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일단 시작하면 가슴만 만지는 걸로 끝낼 자신이 없다고 말이다.
리제는 그 말을 듣고선 잠시 벙쪘다가, 특유의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납득했다는 말을 남기고 순순히 물러났다. 그 뒤부터는 계속 이런 꼴이었다.
“오셨습니까, 기사단장님!”
우리가 성문으로 다가서자 행렬이 좌우로 쫘악 갈라지며 길을 텄다. 성문 앞 검문소에서 짐마차를 검사하던 경비병이 클라우디아를 보더니 군기가 바짝 든 자세로 경례를 올렸다.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토벌은 성공하셨습니까?”
“그래.”
클라우디아가 말 안장에 묶어둔 아라크나이네라의 목을 톡톡 건드렸다. 시간이 제법 지났음에도 막 목이 따였을 때와 전혀 다르지 않은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일반적인 마물이라면 몰라도, 아라크나이네라처럼 강력한 힘을 지닌 마물들은 뭔가 특수한 상황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은 부패가 거의 진행되지 않는다고 한다.
밖에 대충 던져놔도 반 년은 지나야 조금씩 썩기 시작할거라나. 토벌하자마자 전신이 녹아내리며 피 묻은 검을 드랍하던 인간 도살자는 제법 특수한 경우인 듯 했다.
“이상한 생각은 하지 마라? 이거 인간형 마물이었으니까.”
경비병들이 아라크나이네라의 머리를 보고 흠칫 하자, 이상한 말이 튀어나오기 전에 클라우디아가 선수를 쳤다.
목이 잘려나가서 혀를 쭉 빼물고 눈동자가 반쯤 뒤집힌 상태에서도 그 미모만은 여전했으니, 얼핏 보기에는 인간의 머리로 착각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긴 했다.
“예! 알겠습니다!”
경비병은 곧바로 길을 텄다. 쓸데없는 실랑이가 벌어지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바로 영주님한테 보고하러 갈거지? 다 같이 성에 들르기도 조금 그렇고.”
“그래야죠. 아이리스한테는 제가 가겠습니다. 언니랑 클라우디아, 델타 씨는 먼저 영주님의 저택에 가 계세요.”
에리카는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들어섰고, 우리는 계속 대로변을 따라 움직였다. 다른 사람들의 눈치가 보여서 그런건지, 리제도 내게 달라붙는 일 없이 얌전히 말을 몰았다.
저택에는 금방 도착했다. 정문에 서 있던 기사가 우리를 멈춰세웠다. 전 영주의 사용인들을 싸그리 물갈이 한 후에 새로 뽑은 기사였다.
덕분에 저번 놈들처럼 우리를 개무시하는 짓 따위는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은빛 여명 기사단이라는 말을 듣고 황제를 모시던 기사단 아니냐며 호들갑을 떨어대기까지 했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마물 토벌하고 왔어. 그거 관련으로 영주님한테 보고드리러.”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들어가세요.”
기사는 형식적인 대화를 몇 마디 나누고선 곧바로 비켜섰다. 저택의 정문에서는 예의 그 메이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우로라를 어릴 때부터 모셔왔기에 제일 믿을 수 있다던 메이드였다. 목부터 발끝까지 노출 하나 없이 철저하게 가린 메이드복을 입은 여자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우리가 말에서 내리자 하인 몇 명이 다가와 말을 어디론가로 데려갔다. 그러면서 안장에 묶인 아라크나이네라의 머리를 보고 잠시 움찔거렸던 건 덤이었다.
“여기서 나머지 두 명 기다렸다 들어갈건데 괜찮지?”
“예, 전혀 문제 없습니다. 오히려 저희 쪽에서 권장드리고 싶은 사항입니다. 영주님께서도 ‘준비’를 하실 시간이 필요하신지라.”
클라우디아의 말에 메이드는 나를 흘끗 쳐다보며 준비, 라는 단어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뜬금없이 리제가 내 팔에 찰싹 달라붙었다. 둘 사이에 살벌한 시선이 오갔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아이리스와 에리카가 도착했다. 무뚝뚝한 성격과 조용한 성격이 합쳐지니 둘 사이에서는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만큼 고요했다.
리제와 클라우디아는 보기만 해도 숨이 막히는 광경이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솔직히 나도 조금은 동감이었다.
“아우로라님은 이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를 응접실로 안내한 메이드가 절도있는 손놀림으로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제일 상석에 앉아서 평소대로 옆가슴과 겨드랑이, 쇄골이 훤히 드러나는 드레스를 입고 차를 홀짝이는 아우로라가 보였다. 아우로라의 황금빛 눈동자가 정확히 나를 향했다.
“토벌은 어때? 잘 끝났어?”
“전부 다 살아돌아왔잖아요. 아마도 잘 끝났겠죠.”
“흐음…… 갑옷을 다 부숴먹은 걸 보니 아닌 것 같은데?”
그 말에 뜨끔했는지 에리카와 클라우디아가 동시에 헛기침을 했다. 한 명은 중독에 걸려서 사경을 헤맸었고, 다른 한 명은 아라크나이네라에게 붙잡혀 죽을 뻔 했었으니까.
“아이리스 기사단장은 토벌에 참여하지도 않았다니 그렇다 치고, 델타 너는 애초에 갑옷을 안 입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나머지 세 명은 멀쩡히 갑옷 착용하고 갔었잖아? 그런데 갑옷 없이 돌아왔다는 건 어디서 그걸 날려먹었다는 뜻 아니겠어? 갑옷이 멀쩡했더라면 여기 착용하고 들어왔겠지.”
“정확히 짚으셨네요. 뭐, 제법 많은 일들이 있긴 했습니다.”
“꼭 들어보고 싶으니까 나중에 하나씩 얘기해 줘. 지금은 내가 먼저 얘기할 것들이 좀 있어서. 일단 앉아. 그렇게 서서 얘기할 수도 없잖아?”
아우로라가 손짓을 했다. 우리는 테이블을 둘러싼 소파에 적당히 나누어 앉았다. 그러자 메이드들이 우르르 다가와 각자의 앞에 찻잔과 작은 접시를 놓더니 차를 따라주었다.
“델타. 일단 최우선적으로 네가 들어야 할 사항이 있어.”
“저한테요? 아, 저번에 조사해달라고 했던 그거ㅡ”
“그것도 조사를 끝내긴 했지만, 지금 말하고 싶은 건 아니야. 그거였으면 내가 최우선 사항이라고 말하지도 않았겠지.”
“……?”
“지금 말하려는 건 이거.”
아우로라는 테이블에 올려져 있던 양피지를 조심스레 집어들어 바로 옆의 메이드에게 건넸다. 메이드는 허리까지 숙여가며 두 손으로 그걸 받아들고선 내게로 다가와 팔을 내밀었다.
“받아. 네 거야.”
“여기서 펼쳐봐도 되는거죠?”
“그러라고 준 거긴 한데, 다른 기사단장들은 보면 안 돼. 무조건 델타 네가 혼자서 먼저 확인하고, 같이 봐도 괜찮다는 네 허락이 떨어져야 우리도 볼 수 있어.”
“……이게 뭐길래 그러는거죠?”
“뒤집어 봐.”
아우로라의 말에 나는 둘둘 말린 양피지를 뒤집었다. 매듭이 묶인 끈과, 그 위에 찍혀있는 한 쌍의 용이 그려진 황금빛의 직인.
굉장히 익숙한 문양이었다.
“어, 이거…….”
말문이 턱 막혔다. 내 바로 옆에 앉은 리제가 대체 뭔가 싶어 고개를 내밀었다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한 채 제자리로 되돌아갔다. 양피지를 쳐다본 나머지 기사단장들도 마찬가지였다.
“맞아. 황제의 직인이지.”
아우로라가 차를 홀짝였다.
“카이킬리아 황제 폐하께서 네게 직접 서신을 보내셨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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