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Reincarnated into a Game Filled with Mods RAW novel - Chapter (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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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타이밍에 황제가 직접 편지를 보낼만한 사건이 있었던가?’
스토리의 내용을 곰곰이 되짚어봤지만, 떠오르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애초에 황제가 지금 이 시점에서 내게 따로 서신을 보낼만큼 관심을 가지면 안 됐다.
그냥 적당히 재능있는 기사 정도로 생각하고 넘어갔다가 나중에 관련 스토리를 진행하면서 점차 눈독을 들이는 쪽으로 가야지.
나는 황제의 그 변덕스럽기 짝이 없는 성격과 언행을 스토리 초중반부터 감당할 자신 같은 건 있지도 않았다. 분명 잘못되긴 했는데,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를 모르겠다.
“이대로 펼쳐서 확인하면 되는건가요?”
“그래. 내용 보기 전에 혹시 우리한테 먼저 안 드러나도록 조심하고. 아, 황제의 직인은 손상시키면 안 되는거 알지?”
직인을 떼어내려던 손가락을 멈췄다. 우뚝 멈춰선 내 손가락을 본 아우로라가 잠시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다물었다가, 뜸을 한참이나 들인 다음 어처구니 없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몰랐어?”
“몰랐죠.”
“황제의 직인이 찍힌 서신은 폐하께서 모든 과정을 도맡아 하셨다는 뜻이야. 편지지를 고르는 것, 글을 쓰는 것, 편지를 봉하는 것, 그리고 직인을 찍는 과정까지 모두. 그러니까 절대로 훼손하면 안 돼. 잘 가지고 있다가 황제 폐하를 알현할 때 되돌려드리는거라고.”
“만약 잃어버리거나 하면 어떻게 되는데요?”
“듣고 싶어?”
“……안 듣는 편이 낫겠네요.”
얌전히 포기했다. 아우로라가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굳이 호기심을 충족시키겠답시고 심연을 들여다보고 싶지는 않았다.
“혹시나 해서 언질을 줬기에 망정이지, 그냥 넘어갔으면 진짜로 큰일날 뻔 했네.”
아우로라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나도 같은 심정이었다. 설마 이런 곳에 지뢰가 숨어있을줄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게다가 평범한 지뢰도 아닌 대전차 지뢰가 말이다.
황제의 직인을 손상시키면 안 된다느니, 잘 갈무리해뒀다가 나중에 황제를 알현하게 될 때 돌려드리면 된다느니 하는 세세한 내용을 내가 알 수 있을 리 없지 않은가.
나는 한층 더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황제의 직인을 살살 떼어내서 테이블에 올려두고, 양피지를 휘감고 있는 붉은색 끈의 매듭을 풀어헤쳤다.
‘이 끈도 나중에 반납해야 되나?’
손에 들린 끈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직인 옆에 내려놓았다. 혹시 모르니 챙겨두기 위해서였다. 이걸 그대로 가져가면 적어도 손해 볼 일은 없을 것이다.
양피지로 이루어진 스크롤은 척 보기에도 고급스러운 물건이었다. 손으로 만지면 살짝씩 튀어오르는 탄력 비스무리한 게 있으면서도 종이보다 훨씬 더 부드러웠다.
종이에 탄력이 웬 말인가 싶지만, 적어도 내 느낌은 그랬다.
“잠시만요. 혹시 이거 펼치거나 읽을때도 반드시 지켜야 할 예절이라거나 하는 게 있는건 아니죠?”
“아주 없진 않아.”
“어, 진짜 있다고요?”
“황제 폐하 앞에서 보여드려야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규범으로 정해져 있어. 숨 쉬는 법이나 무릎을 꿇는 자세, 눈을 어디 둬야할지 뭐 그런것들.”
“…….”
갑자기 목이 턱 막혀오는 기분이었다. 황제 앞에서는 숨 쉬는 방법이랑 눈동자를 굴리는 방법도 정해진 규칙을 따라야 한다고? 정말로?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황궁에서 직접 황제 폐하를 알현할 때나 적용되는 것들이지. 여기서는 그런거 신경 안 써도 되니까 긴장할 필요 없어. 그냥 아무렇게나 읽어도 돼. 대신 너무 막 다루지는 말고.”
“그건 그나마 다행이네요.”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둘둘 말린 양피지의 양쪽 끄트머리를 붙잡고 천천히 펼쳤다. 약간은 황토색을 띠는 종이의 표면에 검은색 잉크로 칠해진 글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ㅡ성국으로 가라. 카이킬리아 리바누스.
“……?”
순간 눈을 의심했다.
A4용지 서너장을 세로로 이어붙인 것처럼 긴 양피지에는 달랑 2문장밖에 적혀있지 않았다. 심지어 본문의 글자수보다 황제의 성과 이름을 합친 글자수가 더 많을 지경이었다.
내가 잘못 보고있는건가 싶어 양피지를 더 바싹 들여다보기도 했고, 혹시 위쪽이나 아래쪽에 글자가 더 쓰여져 있나 싶어 스크롤을 끝까지 잡아당겨보기도 했다.
그런데 정말로 저 2문장이 끝이었다. 성국으로 가라는 명령과, 카이킬리아 자신의 풀네임.
“무슨 내용이길래 그렇게 심각한 표정이야?”
아우로라가 슬쩍 질문을 던졌다. 다른 기사단장들도 궁금하긴 매한가지인 듯 했지만, 황제가 직접 발송한 서신이다보니 차마 물어볼 엄두를 내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어…… 혹시나 해서 묻는건데, 글자를 숨겼다가 특정 조건을 만족시켜야 드러나도록 만드는 마법이 있나요?”
“글쎄? 난 마법사가 아니잖아. 그런걸 알 리가 없지. 왜? 뭔 내용인데?”
나는 말없이 양피지를 건넸다. 양피지를 받은 아우로라는, 그걸 읽더니 나랑 똑같이 눈을 부릅떴다가 오묘함과 황당함이 반씩 뒤섞인 표정을 지었다.
이번에는 기사단장들이 궁금증을 해결할 차례였다. 아우로라도 복잡한 얼굴로 양피지를 넘겼고, 기사단장들 역시 그걸 한 번씩 둘러보고선 똑같은 표정을 했다.
응접실에 내려앉은 침묵은 제법 길게 이어졌다. 각자의 찻잔이 두 번씩은 비워졌다 채워졌다를 반복했을 무렵, 침묵을 깨고 제일 먼저 입을 연 것은 아우로라였다.
“뭔가 더 있지 않을까?”
아우로라는 지금 느끼고 있을법한 감정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얼굴로 양피지를 집어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껏해야 성국으로 가라는 명령 한 마디를 굳이 서신까지 직접 써가면서 전달해야 할 필요는 없어. 여기에 뭔가 더 있는게 분명해.”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영주님. 이 서신에 특정한 마법적 처리가 되어있다고 여기는 편이 더 정확할 것 같군요.”
아이리스가 그 말을 긍정했다. 나머지 기사단장들의 생각도 별반 다르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러면 일단 첫 질문은 이건데. 왜 하필 라파엘라 성국으로 가라는거지?”
이번에는 반응이 엇갈렸다.
아우로라와 아이리스는 왜 하필 성국인지 도통 모르겠다는 표정인 반면, 클라우디아와 나, 리제와 에리카는 생각나는 게 있는 표정이었다.
어차피 말을 하기는 해야 했고, 어쩌면 지금이 그 적기일지도 모른다. 결정은 빠르게 이루어졌다. 서로 한참 눈빛을 주고받은 끝에, 결국 총대를 멘 것은 에리카였다.
“어쩌면, 저희가 겪은 일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에리카는 우리가 아라크나이네라를 토벌한 직후에 있었던 사건들을 모두 털어놓았다.
중독에 걸린 클라우디아를 위해 해독제를 찾으러 출발하려다가, 라파엘라 성국의 이단심판관인 스텔라와 그 휘하의 전투 수녀들이 모습을 드러냈던 일.
스텔라가 우리를 이단이라고 선언하며 전투 수녀들로 포위했던 일.
그리고는 이단을 판별한다며 성복을 풀어헤쳐 가슴과 비부를 드러내고, 내가 이단이 아니라고 판별나자 인정할 수 없다는 말과 함께 자기 가슴을 주무르게 만들었던 일.
마지막으로 나한테 신성력이 느껴진다는 말과 함께 넋을 놓아버리고선 클라우디아를 치료해주며 태양의 교황을 만나도록 해줄테니 성국에 들리라고 했던 일까지.
설명이 끝난 다음에도, 아우로라와 아이리스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에리카 네 말을 요약하자면.”
그러다 문득, 아우로라가 이마를 감싸쥐었다.
“델타가 라파엘라 성국의 이단심판관에게 이단 판별을 받았는데, 그 판별 방법이 옷 들추고 가슴을 주무르는 거였다 이 소리지? 그 전에는 옷 들춰서 유두랑 보지를 보여줬고?”
“사용하신 단어가 조금 신경쓰이긴 하지만, 일단은 정확하게 보셨어요.”
“그 이단심판관이라는 여자, 변태야? 아니면 뭐 노출증이라도 있대?”
정작 그런 말을 하는 아우로라 본인의 옷차림도 정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드레스는 옆가슴과 쇄골에 겨드랑이까지 그대로 드러난데다, 그 안에 속옷 한 장 걸치지 않았으니까. 저런 옷차림으로 말해봤자 설득력이 하나도 없었다.
게다가 기사단장들도 연회때 드레스랍시고 맨살이 훤히 비치는 반투명한 시스루 원피스에 자기 머리 색깔이랑 똑같은 란제리를 입고 오지 않았는가.
‘그걸 성복이라 말하는 것도 그렇고.’
에리카가 어디서 바람이라도 불면 유두와 비부를 고스란히 노출시킬 것 같은 미친 복장을 성복이라 부르는 것에 대해, 아우로라는 물론 다른 기사단장들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내 입장에서는 오십보 백보였다.
“이단심판관이 우리더러 태양의 교황을 만날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약속한거라면, 성국 측에서 황제 폐하께 이미 소식을 전달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니 폐하께서도 이런 서신을 보내신거겠지.”
“그렇게 빨리요? 저희가 마물을 토벌한 장소에서 성국까지는 한참 걸릴텐데…….”
“뭔가 수를 썼을지도 모른다. 최상위 마법중에 공간 이동 마법이 있으니 신성 주문에도ㅡ”
“정확합니다.”
어디선가 제 3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대처는 빨랐다. 기사단장들이 순식간에 무기를 빼들어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해 겨누었고, 메이드들은 곧바로 아우로라에게 달라붙어선 자신의 몸으로 아우로라를 감쌌다.
내가 간신히 반응해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을 땐, 기사단장들은 이미 싸울 준비마저 끝낸 뒤였다.
“누구지? 여긴 아우로라 영주님의 저택이다. 정체를 밝히지 않는다면 적으로 간주하겠다.”
응접실의 거대한 창문 앞에는, 회색과 은색이 섞인 로브를 머리 끝까지 뒤집어 쓴 어느 여인이 서 있었다. 펑퍼짐한 로브 위로도 몸의 굴곡이 확연하게 보였다.
“무기를 내려주십시오. 저는 적이 아닙니다.”
“그것은 너 하기 나름이겠지. 긴 말은 않겠다. 모습을 보여라. 대화든 뭐든 그 이후에 진행될 일이다.”
“……알겠습니다.”
가죽 장갑을 쓴 가녀린 손이 얼굴을 감춘 로브로 향했다. 로브를 벗는 스륵 소리가 작게 들리고, 그 안에 감춰져 있던 풍성한 회색의 포니테일이 등 뒤로 쏟아져내렸다.
자색의 눈동자가 샹들리에의 빛을 받아 보라색으로 빛났다. 마치 보석과도 같은 자안이 천천히 우리들을 훑고 지나갔다. 그 시선에 적의는 없었다.
“제 이름은 셀레네.”
여인이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달의 교황 소속 이단심문관입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