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Reincarnated into a Game Filled with Mods RAW novel - Chapter (69)
“……이단심문관? 달의 교황 소속의?”
“예. 그렇습니다.”
저 회색빛 머리카락의 여인이 스스로의 정체를 이단심문관이라고 솔직하게 밝혀서 그런건지, 기사단장들에게서 흘러넘치던 살의가 조금은 누그러들었다.
태양의 교황 소속은 이단심판관이고 달의 교황 소속은 이단심문관이다. 고작해야 한 글자 차이라 많은 유저들이 대충 혼용해서 불렀지만 둘은 엄연히 다른 조직이었다.
게임에서도 이단심판관 소속 전투 사제들은 중갑에 철퇴와 대방패를 사용하는 반면, 이단심문관 소속 전투 사제들은 어두운 성복에 방패 없이 레이피어 한 자루만을 사용하는 등 확실한 차이를 뒀고.
둘 모두 대륙의 사람들에게 여러모로 유명하다는 공통점이 있긴 했다.
이단심판관과 그 휘하 전투 수녀들이 성국 최고이자 최강의 무력 집단으로 알려졌듯, 이단심문관과 그 휘하 전투 수녀는 성국 최고이자 최강의 암살 집단으로 알려졌으니까.
두 집단이 힘을 합친다면 하룻밤에 거대한 영지 하나가 통째로 사라질거란 소문도 들리는 실정이었으니 아무리 기사단장들이라 해도 모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정체가 드러났다고 해서 완전히 경계를 푼 것은 아니었다. 당장 죽이겠다, 에서 이야기는 들어본다, 정도로 바뀌었을 뿐. 칼 끝은 아직 회색 머리카락의 여인을 향하고 있었다.
특히 방금 전에 태양의 교황 소속 이단심판관이 나를 제멋대로 이단이라 칭하더니 옷을 벗어제끼고 가슴을 만지는 방법으로 순수성을 검증했단 말을 들었던 아이리스는 더더욱 그랬다.
“성국의 이단심문관이 여기엔 무슨 일이지?”
“방금 전에 본인의 입으로 성국이 황제에게 무언가 연락을 취했을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짐작가는 것이 있으시지 않으십니까?”
“……네가 그 연락수단이었다는거군.”
“이번에도 정확히 짚으셨습니다.”
스스로를 셀레네라는 이름으로 호칭한 여인은 두 손을 머리 높이까지 살짝 들어 싸울 의사가 없음을 피력했다.
“아까 말했듯이 저는 여기에 싸우러 온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무기를 내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건 우리가 결정할 일이 아니다.”
“맞아. 기사단장들이 결정할 일이 아니야. 내가 결정할 일이지.”
아우로라가 뒤에서 걸어나왔다. 에리카와 클라우디아가 혹시 모르니 가까이 다가가는 건 위험하다며 만류하려 했지만, 아우로라는 손짓으로 그 둘의 걱정을 간단히 일축시켜버렸다.
“그래. 네가 황제 폐하더러 우리 델타한테 저런 명령을 내리도록 언질을 줬다 이거지?”
“저는 단순히 교황 성하의 말씀을 전달했을 뿐입니다, 아우로라 영주. 저에게 당신들의 황제가 품은 마음을 바꾸거나 움직일 힘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하긴, 고모님이 그럴 성격은 아니긴 해. 그러면 이유가 뭔데?”
“이유라고 하심은?”
“고모님을 만나서 델타가 성국으로 간다는 말을 전한 이유. 굳이 그러지 않아도 우린 얼마든지 두 나라 사이를 오갈 수 있어. 아이테르눔 제국과 라파엘라 성국이 서로 왕래하는 것조차 허락을 맡아야 할 만큼 험악한 사이는 아니잖아? 꼭 필요한 일도 아닐텐데 왜 그런거야?”
“그렇지 않습니다. 분명히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이유가 뭐냐고. 자꾸 같은 말 반복하게 할래?”
“당신들의 황제와 태양의 교황 사이에 벌어질 분쟁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황제와 교황의 분쟁을 막기 위해서, 라는 정신나간 대답이 돌아오자, 아우로라가 잠시 말문이 막힌 듯 헛숨을 들이켰다. 다른 기사단장들과 마찬가지였다.
나는 말할 것도 없었다.
유일하게 메이드들만이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표정이었다. 정말로 놀라지 않은건지, 놀랐음에도 애써 평정심을 유지한건지, 저 말의 중요성을 알아채지 못한건지는 본인만이 알 일이었다.
“……아무래도 우리끼리만 해야 할 이야기인 것 같네. 다들 그렇지?”
자리를 비워달라는 뜻을 애둘러 표현한 말이었다. 그 속내를 알아차린 메이드들이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줄지어 응접실을 나갔다. 달칵, 제일 마지막에 선 메이드가 문을 닫았다.
메이드가 모두 자리를 비운 것을 확인한 아우로라는 이마를 짚으며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좀 더 자세히 말해봐. 분쟁이라니? 그것도 황제 폐하랑 교황 성하가?”
“모르고 계셨습니까?”
셀레네가 덤덤하게 대답했다.
“황제는 여러분의 생각보다 훨씬 더 크게 저 남자를 신경쓰고 있습니다. 그러니 교황 성하께서 저 남자를 뺏어간다는 느낌을 받지 않도록 사전에 저희들의 목적을 알릴 필요가 있었고, 그래서 제가 여기로 온 것입니다.”
덤덤하게 내뱉어진 말이었지만, 저 대답이 가져다 준 여파는 어마어마했다. 너무 큰 충격을 받은 나머지 몸이 덜컥 굳어버렸다.
‘내가 방금 뭘 들은거지?’
황제가 나를 신경쓰고 있다고?
그것도 단순히 교황을 만나기 위해 성국에 들리는 행위마저 극도로 경계해서, 이단심문관씩이나 되는 사람이 그럴 의도는 없다고 직접 언질을 주러 와야 할 만큼?
제대로 마주쳤던 기억이라곤 영주를 처리할 때 게임의 이벤트대로 공격 한 번 막아낸 것밖에 없는데 대체 왜?
황제의 직인이 찍힌 서신을 받을때부터 뭔가 심상치 않다고는 생각했었는데, 날 향한 황제의 관심이 내 생각보다 훨씬 더 크다는 게 밝혀지니 소름이 오싹 끼쳐왔다.
머리가 아팠다. 황제가 주인공에게 초반부터 이토록 막대한 관심을 가진다는 이야기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앞으로 흘러갈 메인 스토리를 생각하니 벌써부터 막막했다.
다른 사람들도 똑같은 기분인지, 저 말을 한 당사자인 셀레네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경악으로 가득 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특히 리제는 한층 더 심각해보였다.
“제가 이곳에 온 이유까지 말했으니, 이제 무기를 거둘 마음이 드셨습니까?”
“……전부, 무기 내려.”
아우로라가 입술을 짓씹으며 말했다. 기사단장들이 천천히 무기를 거두어들였다.
“일단 알았어. 이건 나중에 좀 더 생각해봐야겠네.”
생각을 해본다고 말하긴 했지만, 아무리 아우로라라고 해도 얌전히 받아들이는 것 이외에 다른 방법은 없을 것이다. 그 황제가 내게 관심을 가지겠다는데 그걸 누가 막겠는가.
“만약 네가 황제 폐하께 말을 전하러 온거라면, 우리한테는 왜 들렀는데? 설마 그냥 와봤다는 말을 하진 않겠지?”
“물론 아닙니다. 달의 교황께서 내린 명령에 따라, 당신들을 성국까지 호위하기 위하여 왔습니다.”
“호위? 감시가 아니라?”
“순수한 호위입니다. 태양과 달의 영역은 불가침. 태양이 당신들을 손님으로 맞아들인 이상, 달은 절대로 간섭하지 않을겁니다.”
“불가침이라고? 절대로 간섭하지 않아?”
아우로라가 피식 코웃음을 쳤다.
“네가 여기 왔다는 사실부터가 그걸 어긴건데? 태양의 교황이 우릴 초대했다며. 그래놓고서 왜 이단심판관이 아니라 이단심문관이 왔어? 두 교황의 영역은 서로 불가침 아니었나?”
“이번 접촉은 달의 교황께서 명하신 바, 제게 물어보신들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모두 다 뜻하는 것이 있으시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하. 결국 말해주기 싫다는 걸 잘도 돌려말하네.”
지금의 이 상황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아우로라는 한껏 비아냥거렸다. 셀레네는 그런 비아냥을 무덤덤하게 받아넘겼다.
“엄밀히 따지자면 제 의지와는 전혀 관계 없는 일입니다만, 결과적으로는 같은 상황이니 마음 가시는대로 생각하셔도 무방합니다.”
“그래, 그래. 말하기 싫다는 뜻으로 받아들일게.”
후우, 아우로라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출발은 언제야?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애들이 마물 토벌하고 돌아온 지 한 시간도 안됐거든. 어차피 고모님의 서신에도 출발 일자는 안 적혀있겠다, 최소한 이틀은 쉬게 해주고 싶은데. 아니면 그것보다 더 쉴수도 있고.”
“원하실 때 출발하시면 됩니다만, 휴식 일자는 되도록 사흘 이내를 권장드리고 싶습니다. 그대들의 황제는 인내와는 거리가 먼 분이시니.”
맞는 말이었다. 황제가 우리에게 성국으로 가라며 친히 명령까지 내린 이상, 여기서 며칠이고 뭉기적거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길어야 이틀쯤 쉬고 바로 출발하는 것이 맞았다.
그 사실을 셀레네 역시 아주 잘 알고 있었기에, 수틀리면 몇 달이고 여기서 개길수도 있다는 아우로라의 반 협박에도 태연히 대답한 것이리라.
“마지막으로, 성국에는 기사단장들 전원이 동행하셔야 합니다.”
“어째서지?”
이번에는 아이리스가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무기는 내렸어도 눈동자엔 여전히 경계심이 가득했다.
“달의 교황께서 내리신 권고이므로, 저는 알지 못합니다.”
“그럴 수는 없다. 우리중에 한 명은 반드시 남아서 영주님을 지켜야 한다.“
“걱정 마십시오.”
셀레네의 눈이 짧게 빛났다. 그러자 응접실의 곳곳에서 그림자가 꾸물거리며 솟아오르더니 인간의 형상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나는 깜짝 놀랐는데, 다른 기사단장들은 태연했다.
꾸물거리며 솟아오른 그림자가 완벽한 인간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전부 다 여자였고, 머리에 검은색의 베일을 쓰고 있었다.
그 옷차림은 다른 의미로 엄청나게 야했다.
이단심판관 소속의 전투 수녀들이 가린 곳보다 드러낸 곳이 더 많은 옷이라면, 이단심문관 휘하의 전투 수녀들은 전신을 꽁꽁 싸매서 노출도 자체는 더 적은 옷이었다.
그 몸을 꽁꽁 싸맨 게 반투명한 검은색 타이즈라서 그렇지.
타이즈는 사람을 무슨 진공 포장이라도 한 듯 빈틈없이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저걸 대체 어떻게 입고 벗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딱 달라붙은 모습이었다.
비슷한 부류인 라텍스처럼 번들거리지는 않았으나, 재질이 반투명한 탓에 그 안의 살결이 고스란히 보였다. 탄탄한 11자 복근이라거나, 그 옆의 배꼽이라거나 하는 신체 부위들 말이다.
가죽재킷을 유두 바로 밑에서 통째로 잘라낸 것처럼 보이는 상의가 아니었더라면 가슴 끝의 첨단까지 보여줬겠지. 가슴을 가리려고 입은게 아니라 강조하려고 입은 것 같았다.
그나마 아래쪽의 속옷은 챙겨입어서 다행이었다. 저것조차 없었다면 다리 사이의 비부까지 그대로 보일 뻔 했다.
대체 왜 저놈의 가터벨트는 꼬박꼬박 착용하고 있는건지 모르겠다만.
“언제 모습을 드러내나 했군. 혹시라도 네가 떠났는데 저것들이 사라지지 않았다면, 그대로 베어버릴 작정이었다.”
“눈치채셨었습니까?”
“알아차리지 못할거라고 생각했나?”
“그런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만약 그렇게 느끼셨다면 사과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셀레네와 아이리스가 대화를 주고받는 동안, 그림자에서 솟아오른 전투 수녀들이 셀레네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숫자는 총 열둘에, 모두가 회색이 섞인 짙은 은발과 보라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스텔라 휘하의 전투 수녀들은 전부 다 금발에 녹안이었던걸 감안하면 뭔가 비밀이 있는 듯 했다.
정작 지금은 황제 때문에 너무 혼란스러워서 그런걸 깊게 생각할 머리가 안 됐지만.
“제 휘하의 전투 수녀들이 보호해드리겠습니다. 모든 순간을 지켜볼테니 걱정은 접어놓으셔도 됩니다.”
셀레네가 손가락을 튕기자,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있던 전투 수녀들이 녹아 없어지듯 그림자로 변해 사라졌다. 아우로라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루종일 감시당한다고 생각하니까 기분이 영 별로인데?”
“감시하는 것은 저택 외부 뿐입니다. 특별한 일이 없다면 내부까지 들여다보지는 않을겁니다.”
“……뭐, 그러면 상관 없겠네. 여하튼 알았어.”
“예.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셀레네는 다시 로브를 머리 끝까지 뒤집어썼다. 짙은 은색의 포니테일이 로브에 집어삼켜지고, 보라색 눈동자가 자취를 감췄다.
이곳에 처음 나타났을 때와 똑같은 모습이 된 셀레네가 마지막으로 인사를 건넸다.
“편히 쉬십시오. 출발할 때 뵙겠습니다.”
곧이어, 로브를 뒤집어 쓴 형상은 마치 달빛이 부서지듯 사라졌다.
달이 없어진 자리에는 다시 태양빛이 내리쬐고 있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