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Reincarnated into a Game Filled with Mods RAW novel - Chapter (70)
‘이걸로 됐다.’
스탯 포인트로 내구를 7까지 찍은 다음, 능력 확인 구슬에서 손을 뗐다. 푸른 빛이 사그라들자 허공에 상태창처럼 나타나던 글자와 숫자들이 자취를 감췄다.
지금껏 틈틈이 잡몹들을 정리해온 보람이 있었다. 은빛 여명 기사단에 도착한 초기, 1의 향연이던 버려진 자의 그 심각한 능력치와 비교하면 정말로 장족의 발전을 이룬 셈이었다.
앞으로는 신앙을 3이나 4 정도까지만 올려주고 힘과 마나를 적당한 비율로 찍으면 된다. 혹은 상황 따라서 지구력을 조금 찍어 스태미너를 보충하거나. 그건 내가 선택하기 나름이었다.
체력은 닼라 모드에서 전혀 의미가 없는 스탯이고, 신앙은 주문 한두 번 사용할 수준이면 충분하다. 숙련 역시 마법캐나 신앙캐가 아닌 이상에야 그렇게까지 필요한 능력치가 아니었다.
정확히는 근접캐라도 사용 무기군과 빌드에 따라 필요 스탯의 차이가 생기긴 하는데, 내가 선택한 빌드에서는 힘 냅두고 숙련을 찍을 이유가 딱히 없었다.
‘이제 남은 건 그 무기를 어떻게 구하느냐인데.’
나는 골똘히 생각에 잠긴 채로 방을 나섰다. 일단 조건은 완벽히 갖춰졌지만, 피 묻은 검 이후에 사용할 무기를 어떻게 구하느냐라는 맹점이 남아 있었다.
그걸 얻기 위해 수행해야 하는 퀘스트가 정말 개노답 퀘스트로 악명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어려워서 그런 게 아니라, 시간을 미친 듯이 잡아먹는데 지루하기까지 해서 그렇다. 똑같이 오래 걸리고 지루하다고 욕을 바가지로 처먹는 신세인 암석 지네와는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암석 지네가 ‘왜 이따위로 만들었냐?’ 하는 부류라면, 그 퀘스트는 ‘우리 엿먹으라고 이따위로 만들었구나!’ 하는 부류였으니까. 누가 봐도 목적이 뻔해서 오히려 욕을 덜 먹은 케이스였다.
게임에서조차 완전 클리어에 현실 시간으로 10시간이 훌쩍 넘게 걸리던 퀘스트다. 지금은 자칫하다간 몇 달이 걸릴 수도 있었다.
“준비 다 했어?”
내가 고민에 잠긴 채로 복도 모퉁이를 돌자, 은빛 갑옷을 입고 투구를 옆구리에 낀 리제가 나를 맞이해주었다. 갑옷을 평소보다 훨씬 더 공들여 정비했는지 표면이 반들반들했다.
“나야 진작에 다 했지. 리제 너는? 아니다. 물어볼 필요도 없겠네. 갑옷 보니까 바로 알겠는걸.”
“공들인 보람이 있어서 다행이네. 우리 델타가 바로 알아차리기까지 하고.”
“척 봐도 눈에 띄잖아. 거울로 써도 되겠다. 뭘 이정도로 닦아놨어?”
“교황씩이나 되는 사람을 만나러 가는거니까 어쩔 수 없는걸. 성국에서 교황이면 그 사람들한테는 우리 기준으로 황제 폐하나 다름없는 위치인데, 허투루 준비할 순 없지.”
‘황제라…….’
그 말을 들으니 입 안에 살짝 쓴맛이 감돌았다. 이틀 전, 셀레네에게서 황제가 나를 무척이나 신경쓰고 있다는 충격적인 발언을 들었던 날에는 정말 뜬눈으로 밤을 꼬박 세웠다.
지금이야 시간이 좀 지났으니 감정도 조금 가라앉았지만, 대체 뭐가 그렇게까지 마음에 들었길래 얼굴 한 번 마주친 게 전부인 나한테 그토록 신경을 쓰는건지는 아직도 이해가 안 갔다.
“정말 그 모습으로 갈거야? 갑옷도 안 입고? 긴장 안 돼?”
리제가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나는 평소대로 천옷과 가죽 바지에 적당한 운동화를 신고 허리춤에 피 묻은 검을 찬 상태였다.
다른 것들은 필요 없었다. 우리가 성국에서 의식주를 직접 해결해야 할 것도 아니고.
갑옷? 그거 입으면 구르기 못 한다. 긴장? 게임에서긴 하지만, 나는 이미 교황을 수백 번도 더 만나본 몸이다. 내가 할 일은 제발 성격에 큰 변화가 없어달라고 기도하는 게 끝이었다.
“갑옷은 방해라니까.”
“……그 문제가 아니잖아.”
리제가 샐쭉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델타 너, 나중에 그 비밀이라는 거 반드시 털어놔야 돼. 무조건.”
예전보다 한층 더 집요해진 반응이었지만,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셀레네가 돌아간 이후, 아라크나이네라를 토벌하며 겪었던 일들을 말하다가 내 능력치가 올라갔다는 사실을 털어놓았었다. 아마 그래서 이단심판관이 신성력을 감지했을거라고도.
변명도 미리 생각해뒀었다. 내가 과거의 기억을 점차 되찾아감에 따라, 그에 맞춰 신체 능력 역시 조금씩 되돌아온다고 말이다.
하지만 또 거짓말을 하긴 싫어서 변명은 포기했고, 그냥 비밀이라는 말로 퉁쳐버렸다. 그러자 아우로라와 기사단장들이 날 죽일 기세로 노려보던 것은 덤이었다.
‘황제한테는 절대로 들키면 안되니까 어쩔 수 없지.’
솔직히 그 다섯 명에게는 이제 진실을 털어놓아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었다. 기사단장들이야 무조건 믿어도 되는 아군이고, 아우로라도 배신은 안 할 성격이니까.
그런데 셀레네의 말을 듣고 조금 더 오래 함구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언제 어디서 나를 지켜보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황제가 내게 관심을 가지지만 않았어도 비밀을 밝히는 건 조만간이었을 것이다.
적어도 내가 그 관심을 감당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기 전까진, 내 비밀들 중 그 어떤 것도 황제의 귀에 들어가서는 안 됐다. 지금도 감당이 안되는데 빌미를 더 주면 진짜로 큰일 난다.
“당연하지. 언젠가는 말해줄게.”
“……계속 지켜볼거야.”
입술을 삐죽 내민 리제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주었다. 저 지켜본다는 말에 과연 무슨 의미가 더 들어가 있을지 예상이 가서였다. 리제는 얌전히 눈을 감고 내 손길을 받아들였다.
성 정문으로 향하자 반들반들한 은색의 갑옷을 차려입은 기사단장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제일 선두에 서 있던 아이리스가 날 보고선 입을 열었다.
“이번에도 갑옷을 착용하지 않았군. 긴장되지도 않나?”
“딱히? 아까 리제도 그렇게 묻던데, 애초에 갑옷이랑 긴장이랑 상관이 있긴 해?”
“……성국의 교황을 만나러 간다는데 그토록 태연할 수 있는 건, 황제 폐하를 제외하고는 너밖에 없을거다, 델타.”
황당한 감정을 가득 담은 대답이 되돌아왔다. 아이리스라면 나름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다 모이셨습니까?”
팟, 우리 바로 옆에 첫 만남때처럼 로브를 머리 끝까지 뒤집어 쓴 셀레네가 나타났다. 그 갑작스러운 등장에 기사단장들이 반사적으로 무기에 손을 얹었다가, 신원을 확인하고 자세를 풀었다.
“그건…… 마법인가?”
“기적이라고 불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것은 마법과는 전혀 다르므로.”
셀레네는 무덤덤하게 답하며 자신의 로브 소맷자락에서 신성 촉매를 꺼내들었다. 전체적으로 진한 은색을 띠었고, 그 중심에는 보름달이 그려진 촉매였다.
“제 근처로 모이십시오. 이동하겠습니다.”
그 말과 동시에 신성 촉매가 밝게 빛났다. 근처에 어둠이 내려앉는가 싶더니, 암흑을 헤치고 밝은 달빛이 비춰들었다. 은색과 반씩 섞인듯한 백색광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딸랑, 신성 촉매 특유의 맑고 영롱한 방울소리가 울려퍼졌다. 빛이 주변을 감쌌다.
주위를 감싼 빛이 사라졌을 땐, 우리는 영주 저택의 정원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서 아우로라가 팔짱을 낀 채 우리를 기다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영주님?”
영주의 모습을 확인한 아이리스가 어리둥절한 목소리를 냈다.
“내가 이단심문관한테 성국으로 출발하기 전에 잠시 여기 들러달라고 요청했어. 마물 토벌하러 잠시 갔다오는 것도 아니고, 교황을 만나러 간다는데 그냥 알아서 갔다오라고 할 수는 없잖아?”
아우로라는 팔짱을 풀고 이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손에 들린 묵직한 주머니를 내밀었다. 그걸 받아든 아이리스가 주머니를 열어보았다.
안에는 제국 금화가 한가득 담겨 있었다.
“이건……?”
“적당히 넣었어. 성국 화폐랑 제국 화폐랑 똑같으니까 갖고 있어서 손해 볼 일은 없겠지. 아마 필요없을 것 같긴 한데, 혹시 몰라서 챙겨주는거야.”
“예. 감사히 받아가겠습니다. 남은 돈은 나중에 반납하면 되겠습니까?”
“뭐? 그걸 왜 반납해? 그냥 너희들 가지라고 주는건데. 남은 건 나눠가지든, 기사단 공용 재산으로 쓰든 알아서 해. 예전에 있던 돼지새끼가 워낙에 많이 해처먹어서 나한테는 푼돈밖에 안되니까 부담 가지지도 말고.”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영주님.”
“…….”
할 말을 끝낸 아우로라가 특유의 황금빛 동공으로 나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약간은 부담스럽기까지 한 시선이었다. 똑같이 흑발에 금안인 황제가 떠오르기도 했고.
“……왜 그러시죠?”
“신기해서. 네가 대체 뭐라고 황제 폐하로도 모자라서 성국의 교황까지 너한테 그토록 큰 관심을 가질까…… 싶어졌거든. 일단 뭔가 이것저것 비밀이 많긴 한데 말이야.”
“그걸 제가 알았으면 진작에 피해갔을걸요.”
메인 스토리가 얼마 진행되지도 않았는데 황제나 교황이 나한테 신경을 쓰는 것은 상정 외의 일이었다. 이런 일이 생길 줄 알았으면 계획을 처음부터 다시 짰을거다.
내 대답을 들은 아우로라가 피식 웃었다.
“뭐, 그러는 나도 이런 말 할 처지가 아니긴 하지만.”
“네?”
“잘 갔다 오라는 뜻이야. 함부로 몸 굴리다가 죽지 말고.”
아우로라는 그 말을 끝으로 몸을 홱 돌려버렸다. 그리고는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저택으로 걸어들어갔다. 옆에서는 기사단장들이 다 같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투구에 가려서 표정이 보이는 건 아니었지만, 뭔가 표정을 알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인사는 끝마치셨습니까?”
오직 셀레네만이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신성 촉매에 신앙을 불어넣으며 다시 한 번 순간이동을 사용할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기사단장들이 다시 셀레네를 향해 고개를 돌렸고, 리제는 조금 더 오래 날 쳐다보다가 마지막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 듯 하군.”
“알겠습니다. 지금부터 성국으로 이동하겠습니다만, 당신들은 한 번에 이동할 수 있는 거리에 한계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몇 번에 걸쳐 나누어 이동하고, 중간에 잠시 휴식할 시간을 가질 예정입니다. 해당 사항에 대해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다들, 혹시 할 말 있나?”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 사실을 확인한 셀레네가 신성 촉매를 들었다.
“그렇다면 시작하겠습니다. 방금 전보다 훨씬 더 먼 거리를 이동해야 하기에, 살짝 어지러울 수도 있으니 주의해주십시오.”
청아한 방울소리가 또다시 울려퍼지고, 은색의 달빛이 우리들의 몸을 감쌌다. 그러자 몸이 두둥실 떠오르더니 어디론가로 빨려들어가는 감각이 들었다.
온 사방이 빙글빙글 돌았다. 어지러울 수도 있다더니 빈말이 아니었다. 방향 감각이 상실되고, 위아래의 구분이 가지 않았다. 내가 똑바로 서 있는지조차 모를 지경이었다.
“도착했습니다.”
체감상 거의 10초가 넘게 버둥거렸을까, 셀레네의 무감정한 목소리와 함께 발바닥이 다시 땅을 디뎠다. 그 상태로 잠시 비틀거리자 균형이 어느정도 잡혔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내가 살짝 어지러운 정도에서 그쳤다면, 기사단장들은 아예 멀쩡하지 않을까.
“이, 이거…… 살짝 어지러운 수준이 아닌데?”
“그런 듯, 하군…….”
“아, 잠깐만. 나 다리에 힘 풀렸어…….”
“……저도 그렇습니다, 언니.”
하지만 내 예상과는 달리, 기사단장들은 하나같이 몸을 파들파들 떨면서 바닥에 엎어져 비틀거리고 있었다. 나는 이게 어떻게 된건가 싶어 그 자리에 멍하니 굳어버렸다.
“당신이 지닌 신성한 힘으로 인해 영향을 덜 받은 것입니다. 저들은 그렇지 않으니 훨씬 더 힘든 것이 당연합니다. 이것은 육체의 강인함과는 전혀 연관이 없는 사항이므로, 저들로서도 어쩔 수 없습니다.”
어느샌가 내 옆으로 소리 없이 다가온 셀레네가 의문에 답해주었다. 나는 미리 찍어두었던 신성력 스탯 덕분에 멀쩡할 수 있었다는 뜻이었다.
이걸 노린 건 절대로 아니었지만.
“이단심문관 씨, 교황께서 계신 곳에 도착하려면 이걸 몇 번이나 더 해야하는지 알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에리카가 벌벌 떨리는 손을 들어 질문했다.
“방금과 똑같은 거리로 움직일 경우에는, 여덟 번입니다.”
“……아.”
누가 말했는지 모를 외마디 단말마가, 숲 속을 조용히 울렸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