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Reincarnated into a Game Filled with Mods RAW novel - Chapter (75)
“다시 한 번 뵙게 되었습니다, 귀빈이시여.”
셀레네가 나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로브를 푹 뒤집어 쓴 채 얼굴만을 간신히 드러냈었던 첫만남 때와는 달리, 지금은 이단심문관의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회색과 섞인 은색의 머리카락이 등 뒤에서 작게 흔들렸다. 정수리 부근에서 하나로 묶인 포니테일의 형태를 하고 있지만, 몸을 몇 바퀴나 감고도 남을만큼 길었다.
앞머리는 일부가 입술 근처까지 내려왔고, 그 사이로 달의 교황과 똑같이 보라색을 띠는 자안이 보였다. 눈매 탓인지 전체적으로 제법 날카로운 인상이었다.
탄탄한 근육으로 꽉 들어찬 몸을 감싸고 있는 것은 본인 휘하의 전투 수녀들처럼 반투명한 타이즈였다.
양쪽 팔꿈치 밑과 무릎 밑으로는 회색과 은색이 반씩 섞인 갑옷을 착용했지만, 그 이외에는 모조리 다 몸에 찰싹 달라붙는 타이즈로 덮여 있었다.
몸의 굴곡이 무척이나 노골적으로 드러나는데다 반투명한 재질이라 그 안의 맨살이 고스란히 비치다시피 했다. 만지면 탄탄을 넘어 단단할 것 같기까지 한 근육이 한층 돋보였다.
안에 아무것도 받쳐 입지 않은 듯 속옷 라인이 없는 것은 물론이었다. 오히려 본인 휘하의 전투 수녀들보다 몸을 가리는 옷의 면적이 현저히 적었다.
그나마 에리카와 맞먹을 수준으로 빈약한 가슴 덕분인지, 딱 거기까지라는 게 다행이었다.
“쯧.”
스텔라가 대놓고 혀를 찼다. 평소와 똑같이 무덤덤한 얼굴인 셀레네와는 대조적으로, 스텔라는 평소의 생글생글한 웃음은 온데간데 없이 아주 불만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단심문관님이 여기는 어떻게 알고 오셨죠?”
“도움을 드리기 위해 왔습니다.”
동문서답이었다. 나는 무슨 수로 지금 이 순간을 정확히 알고 찾아왔는지 물어본거였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 왔다니. 설마 멀리서 나를 지켜보기라도 했던 건가.
“그쪽은 여기에 오면 안 되는 것 아닌가요, 이단심문관?”
스텔라는 심기가 굉장히 불편해보였다. 입은 웃고 있지만,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태양은 달에게 간섭하지 않는다. 그리고 달 역시 태양에게 간섭하지 않는다. 그게 전통이잖아요? 이분들을 성국까지 데려와준 건 달의 교황께서 지시하셨다니 넘어간다 치더라도, 이번에는 뭐예요? 설마 또 교황 성하께서 귀빈님을 도와주란 명령을 내리시기라도 하셨나요?”
“전통은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단심판관. 저는 태양의 영역에 간섭하려는 것이 아니라 귀빈께 도움을 드리려는 것입니다.”
내가 보기에는 그게 그거 아닌가 싶었는데, 말 속에 숨겨진 다른 뜻이 있기라도 한 건지 스텔라는 그 말을 듣고 혼자 납득해서는 기세를 한 풀 꺾었다.
스텔라를 단번에 조용히 시킨 셀레네가 허리춤에 찬 신성 촉매를 꺼내들더니 그 안에 신성력을 불어넣었다. 회색과 혼합된 백색광이 달빛처럼 반짝였다.
“그 자리에 가만히 계셔주십시오.”
셀레네가 그런 말을 하고도 체감상 거의 5초에 달하는 시간이 지난 후에야 딸랑, 하는 맑은 방울 소리가 울려퍼졌다.
신성 촉매에 떠오른 백색광이 내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빛이 피부 전체에 얇게 펴발라지고, 얇은 막 비스무리한 무언가가 나타났다.
신성력으로 감싸인 피부가 은은한 빛을 발했다. 나는 몸을 감싼 엷은 빛무리를 손으로 만져보았다. 손가락은 빛무리를 통과해 피부와 맞닿았다.
아무런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손에 잡히는 것도, 걸리는 것도 없었다. 마치 환각을 보고있는 듯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결코 환각은 아니었다.
“되었습니다. 이제 아무런 문제가 없으실겁니다.”
할 일을 끝낸 셀레네가 신성 촉매를 허리춤에 묶었다. 스텔라는 못마땅한 눈초리로 그런 셀레네를 쳐다보고 있었다.
방금 셀레네가 사용한 신성 주문.
그건 ‘달의 가호’라는 이름을 가진 신성 주문이었다.
효과는 적의 공격 대미지가 플레이어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수준일 경우, 해당 피해를 무효화시키는 것. 간단히 말해 목숨 +1이었다. 지속 시간은 기본 5분이고.
사실상 목숨을 하나 늘려주는 것과 마찬가지라서, 바닐라 브닼 4는 물론이고 닼라 모드에서도 필수적으로 채용되는 주문이었다.
쓸 수만 있다면 말이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죽음에 이르는 피해 방어라는 개사기 옵션 때문에 그런건지, 요구 스탯이 더럽게 높았다. 신앙은 30에 신성력도 60이나 필요했으니까.
1회차에선 사실상 성직자 이외의 빌드는 사용이 불가능하고, 성직자라도 1회차에 써먹으려면 다른 스탯을 제법 많이 포기해야 해서 부담이 컸다.
가뜩이나 대기만성이 컨셉이라 초반 육성이 더럽게 힘든 성직자인데, 스탯을 저따위로 신앙과 신성력에 몰빵하면 얻는 것보다 잃는 게 훨씬 더 많았다.
“그러니 다시 한 번 이단심판관에게 대련을 신청하여주시겠습니까, 귀빈이시여?”
셀레네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임무를 끝냈다는 듯 우리들과 한참 떨어진 대련장의 구석으로 걸어가더니, 바닥에 무릎을 세운 자세로 앉고선 다리를 끌어안았다.
무릎 위에 턱 얹어진 얼굴이 이쪽을 빤히 응시했다. 자색의 눈동자는 내게 못 박힌 듯 고정되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들으셨죠?”
황당한 감정이 들긴 했지만, 이렇게 찾아온 기회를 놓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스텔라는 내 요청에 온갖 세상만사가 복잡한 표정을 짓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셀레네가 나를 왜, 어떻게 도와줬는지는 대련이 끝나고 물어보면 될 것이다. 어차피 저대로 혼자 돌아갈 생각도 없어보이고.
“핑계가 없어졌네요. 알았어요. 어쩔 수 없죠.”
스텔라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오른손에 힘을 주었다. 그 손에 들린 철퇴가 가볍게 들리더니 쿵! 소리가 나도록 내리꽂혔다.
방금 그게 일종의 신호였는지, 우리 주위에 있던 전투 수녀들이 스텔라와 내 주위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땅바닥에 내려놓았던 방패를 들고, 철퇴를 단단히 움켜쥐고, 우리를 빙 둘러싸는 일종의 원을 그렸다. 교단의 문양이 그려진 방패가 안쪽을 향했다.
전투 수녀들로 둘러싸인 원의 내부가 바로 대련장이었다.
“대련장의 크기 정도는 결정할 수 있게 해드릴게요. 물론 너무 크게는 안되겠지만요. 얼마나 더 넓혀드릴까요?”
“이대로도 상관 없습니다.”
“어머, 괜찮으시겠어요? 나중에 공간이 좁아서 졌다는 핑계 대셔도 무시할거예요?”
스텔라가 놀란 표정으로 입을 가렸다. 뒤로 네다섯 걸음만 걸어가도 방패에 부딪힐 넓이였으니 그럴만 했다.
하지만 대련장의 크기 따위, 내겐 전혀 상관 없는 일이었다. 내가 스텔라 보스전을 한두 번 해본 것도 아니고, 좁든 넓든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
사실 넓은 편이 나로서도 편하기는 한데, 이단심판관의 자존심을 꺾어놓으려면 대련장의 크기를 바꿔서는 안 됐다.
게임에서도 대련장의 크기를 건드리지 않은 채로 이단심판관을 이기면 대사가 바뀐다. 그 실력에 진심으로 감탄했다나.
물론 이게 꼭 필요한 과정은 아니었다. 그냥 저번에 멋대로 찾아와서 스토리를 꼬아버린 것에 대한 작은 복수에 불과했다.
“당신의 패배 조건은 그 몸에 깃든 달의 가호가 사라지는 것. 가호가 사라지는 순간 진 거예요. 아셨죠? 그리고, 음, 제 패배 조건은…….”
“그냥 적당히 많이 맞았다 싶으면 진 걸로 하시죠.”
시스템상으로는 은빛 여명 기사단의 입단 시험과 동일하게 보스의 체력을 50%까지 깎는 것이 승리 조건이지만, 지금은 그런 구체적인 수치를 언급할 수가 없으니까.
“……만약 제가 패배를 인정 안하면 어떡하시려고요?”
“그러면 인정할때까지 싸워야지, 별 수 있겠습니까.”
피 묻은 검을 빼들었다. 태양빛을 받은 칼날이 붉게 빛났다. 스텔라는 이것 봐라? 하는 표정으로 철퇴를 집어들었다. 저 거대한 철퇴가 한 손으로 가뿐히 들렸다.
삐죽삐죽한 돌기가 솟은 무게추에 노란색과 뒤섞인 백색광이 감돌았다.
“너무 자만하는 것도 좋지 않은 행동이에요? 그러다가 한 방에 나가떨어지면 어떡하시려고요?”
무시하고 배에 검을 푹 찔러넣었다. 칼날로 피가 빠져나가는 감각과 함께, 붉은 칼날의 색이 한층 더 진해졌다. 검을 뽑자 칼날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대련에 집중하시겠다? 뭐, 좋아요. 먼저 덤비실래요? 아니면 제가 덤벼드릴까요?”
나는 말 없이 검 끝을 위아래로 까딱였다. 그걸 본 스텔라가 활짝 웃더니 천천히 걸어오기 시작했다. 철퇴에 깃든 신성력의 색이 한층 더 진해졌다.
이단심판관은 개막 패턴이라고 부를만한 것이 딱히 정해져있지 않았다. 그냥 거리가 되는대로, 플레이어가 움직이는대로 무작위 패턴을 구사할 뿐.
철퇴가 머리 위로 높이 치켜들어졌다. 무슨 패턴인지를 파악한 뒤, 튕겨낼 준비를 했다.
스텔라가 철퇴를 휘둘렀다. 그 무게추가 정확히 내 머리를 향했다. 피 묻은 검을 양손으로 잡고, 자연스럽게 반응하는 팔의 움직임을 따라 허공에 궤적을 그렸다.
챙! 소리와 함께 철퇴의 방향이 급격히 꺾였다. 팔에 찌잉ㅡ 하고 찾아온 반동도 아주 못 버틸 수준은 아니었다.
쉴 틈 없이 다음 공격이 이어졌다. 좌에서 우로 휘둘러지는 철퇴를 다시 튕겨내고, 마지막은 엇박임을 감안해 한 박자 늦게 검을 휘둘렀다.
마지막 3타까지 강렬한 쇳소리와 함께 옆으로 튕겨나가자 스텔라의 몸이 잠시 휘청였다. 그 얼굴에 어라? 하는 감정이 떠올랐다.
스텔라는 다시 공격을 이어가려는 듯 자세를 바로잡으려 했지만, 내 공격이 더 빨랐다. 선홍색 피가 모여들어 만들어진 칼날이 스텔라의 팔을 스치고 지나갔다.
“…….”
스텔라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피 묻은 검과 자신의 철퇴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하나는 칼날이 붉은 것 빼고는 특출난 게 없어보이는 평범한 롱소드에 불과하고, 다른 하나는 무게추의 크기만 인간 머리의 두 배에 달하는 철퇴였다.
상식적으로 두 무기가 부딪히자마자 칼 쪽이 박살나야 이치에 맞을 것이다. 그런데 날이 부러지지 않고 멀쩡한 걸로도 모자라, 오히려 철퇴가 튕겨나오기까지 했으니 뭔가 싶겠지.
“세상에, 방금 어떻게 한 거예요?”
“글쎄요. 저도 모릅니다.”
“알려주기 싫으면 그냥 싫다고 하셔도 되는데.”
스텔라가 방긋 웃었다. 누가 태양의 교황을 섬기는 사람 아니랄까봐, 플로레타와 똑같이 포근하고 자애로운 미소였다.
“지금부터 직접 알아낼거라서요.”
“결국 실패하셨네요. 유감입니다.”
나는 버프가 꺼진 피 묻은 검을 칼집에 집어넣었다. 온 사방에서 날 향한 시선이 피부를 콕콕 찔러왔다. 전투 수녀들에 셀레네까지 포함된 시선이었다.
스텔라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채로, 나를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