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Reincarnated into a Game Filled with Mods RAW novel - Chapter (8)
“……누구십니까?”
누군가 옆에 왔다는 느낌이 들기는 커녕 인기척도 못 느꼈다. 아예 처음부터 저 자리에 서 있었다고 해도 믿을 지경이었다. 내가 그 사실에 전율하고 있으려니, 여자가 빙긋 미소지었다.
푸르른 청발이 목 뒤에서 하나로 묶인 채 길게 뻗어 있었다. 바닥에 아슬아슬하게 닿을 듯 말듯한 길이였다.
앞머리는 길게 늘어져선 오른쪽 눈을 완전히 가렸고, 옆머리는 뺨을 타고 쇄골 근처까지 내려왔다. 가려지지 않은 왼쪽 눈은 머리카락과 똑같이 청색이었다.
상의로는 아이리스와 마찬가지로 흰 민소매를 입고 있었으나, 거의 머리와도 맞먹을 크기의 엄청난 가슴이 밑에서 스스로의 존재감을 온 사방에 떨쳐대고 있다는 것이 차이점이었다.
그 압도적인 중량감을 지탱해야하는 신세가 된 옷이 끔찍한 비명을 질러대는 것만 같았다.
그걸로도 모자랐는지, 민소매의 끝이 위로 말려올라가선 복부와 옆구리를 아낌없이 드러냈다. 옷의 사이즈는 정확해보였지만 가슴의 크기가 워낙 커다란 탓에 벌어진 일이었다.
심지어는 돌핀팬츠의 길이도 엄청나게 짧았다. 그 밑으로 뻗은, 통통해보이는 허벅지에 비하면 무척이나 보잘것없는 길이였다.
아이리스랑 똑같은 흰 민소매에 본인 머리색깔의 돌핀팬츠 차림. 그 옷차림으로 짐작컨대, 아마 은빛 여명 기사단에 속한 기사단장인 듯 했다.
“흐음. 꽤 생겼네?”
푸른 머리의 여자는 질문을 가볍게 무시하고선 내 주변을 한바퀴 돌며 흐음, 하는 소리를 냈다. 날 쳐다보는 눈빛이 무척이나 진지했다.
“이거 의외인걸. 아이리스도 남자 외모를 신경썼던가? 음음. 기억해둘만한 가치가 있겠어.”
“아니, 누구ㅡ”
“몸도 제법 괜찮네. 걔는 어디서 이런 훌륭한 남자를 주워왔대?”
그러고는 검지를 세워 내 가슴팍을 콕콕 찔러대더니, 이번엔 팔을 더듬으며 연신 감탄사를 흘렸다. 내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고 있는게 분명했다.
“저기ㅡ”
“처음 보는 사람한테 뭐 하는 짓입니까, 언니.”
“케흑.”
바로 다음 순간, 뒤에서 갑자기 나타난 붉은 머리의 여자가 푸른 머리 여자의 뒷덜미를 붙잡고 자기 쪽으로 잡아당겼다. 이번에도 다가오는 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했음은 물론이었다.
새로 나타난 붉은 머리의 여자 역시 흰 민소매에 돌핀팬츠 차림을 하고 있었다.
마치 화염처럼 붉은 머리카락이었다. 돌돌 말린 뒷머리가 목 뒤에서 동그랗게 뭉쳐있는 것이, 꼭 만두를 닮아보이기도 했다.
옆머리는 길게 늘어져선 그 끝이 쇄골과 맞닿아 있었고, 앞머리는 이마를 거의 다 덮었다. 그 밑에는 머리카락과 똑같은 색의, 붉은 적안이 자리잡았다.
하반신에 걸친 돌핀팬츠도 붉은색이었다. 상의로는 흰 민소매를 입고 있었지만, 푸른 머리의 여자와는 달리 사이즈가 제법 헐렁헐렁해보였다.
끝자락을 돌핀팬츠 안으로 집어넣어 맨살이 드러나지 않는 것은 물론, 돌핀팬츠 자체의 길이도 거의 허벅지 중간에 못 미치는 수준으로 길었다.
무엇보다, 가슴이 극과 극으로 차이가 났다. 푸른 머리의 여자가 옷이 터지지는 않을까 걱정되는 수준의 거유였다면, 붉은 머리의 여자는 굴곡이 간신히 있는 정도였다.
청발의 여자는 뒷목을 잡혀 끌려가면서도 날 가리키며 연신 투덜거렸다.
“아니, 에리카 넌 안 궁금해? 그 아이리스가 남자를 데려왔잖아! 남자랑은 평생 손 한번 안잡고 살아갈 것 같던 걔가! 그런데도 호기심이 안 생긴다고? 너 진짜로 인간은 맞아?”
“그것은 제가 알 바 아닙니다. 언니가 알 바도 아니죠. 저희가 알아야 할 사실은 언니가 저 분에게 무례를 저지르고 있다는 것 뿐이라고요. 그리고, 언니도 평생 남자 손 한번 못 잡아봤잖아요. 뭘 혼자서 경험이 있는 척 합니까.”
에리카라는 이름으로 불린 적발의 여자는 자기 언니를 질질 끌어다가 옆에 세우고 나서야 뒷덜미를 놓아주었다. 청발의 여자는 뭔가를 궁시렁대며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언니의 무례를 대신해 사과드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붉은 머리의 여자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말려주셨으니 괜찮습니다. 그런데, 누구신가요?”
“아, 그렇죠. 원래는 인사부터 했었어야 했는데. 어디에 있는 누군가가 다짜고짜 민폐를 끼친 탓에 까먹고 있었네요.”
말투에 은근히 가시가 돋혀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싸늘한 시선에, 청발의 여자가 슬쩍 눈을 피했다.
“소개하겠습니다. 제 이름은 에리카, 은빛 여명 기사단의 제4 기사단장을 맡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쪽은…… 하아, 정상적으로 인사를 할 것 같지는 않으니 제가 대신하도록 하죠. 이름은 리제이고, 제 언니입니다. 은빛 여명 기사단의 제3 기사단장을 맡고 있고요.”
푸른 머리가 리제, 붉은 머리가 에리카인가. 아이리스처럼 게임에서는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었다. 짐작가는 NPC가 있긴 한데, 제대로 된 증거가 있기 전까진 확신은 금물이다.
성격도 다르고, 외모도 다르고, 하는 행동도 전부 다르니까. 결국 증거로 쓸만한 건 사용 마법이나 무기, 대사 뿐인데 이런 대사가 게임에서 나왔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기사단에 들어오자마자 다가와서는 플레이어 캐릭터의 몸을 만져대며 품평을 하는 NPC라니, 모드가 없었더라면 이 둘도 원래는 남자였을거라는 뜻이 아닌가.
그런 NPC가 있었으면 일단 죽이고 시작했다.
“그래서, 여긴 무슨 일로 오신거죠?”
“아이리스가 돌아왔다길래 맞이해주려고 나갔었는데, 걔가 등 뒤에 남자를 태우고 있더라? 뭔가 싶어서 몰래 따라왔지. 게다가 너, 아이리스랑 제법 편하게 말하고 있었잖아. 이 재밌는 상황을 어떻게 구경만 하고 있겠어? 이건 절대로 그냥 넘어가면 안되는 일이라고. 에리카 너도 동의하지? 그렇지?”
“그렇게 말하면 제가 언니 행동을 다 보고도 방관한 것 처럼 느껴지잖아요. 전 방금 왔습니다. 그리고 동의도 안 해요. 제가 왜 언니랑 같은 취급을 받아야 합니까?”
리제라는 이름의 여기사는 자기 동생의 살벌한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싱글싱글 웃으며 다시 한 번 내게 다가왔다. 그걸 본 에리카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언니. 제발 체통 좀 지키세요. 첫 만남부터 대체 뭐하는 짓이에요?”
“뭐 어때? 사실을 말한 건데. 그리고 에리카 너도 솔직히 궁금하잖아. 그 아이리스가 데리고 돌아온 남자를 안 궁금해 할 수가 있어?”
‘생긴 것만 보면 성격이 반대여야 맞는 게 아닌가 싶은데…….’
겉모습만 본다면, 리제는 굉장히 차분하고 조용하게 생긴 인상에 도도한 고양이같은 느낌이었다. 반대로 에리카는 활발하고 활기차보이는 인상에 애교 많은 강아지같은 느낌이었고.
머리랑 눈 색깔마저 극명하게 갈리니 더더욱 그랬다. 보통은 한색 계열이 차분하다는 인상을, 난색 계열이 활발하다는 인상을 주기 마련이니까.
그런데 정반대였다. 도도하고 차분한 고양이상 얼굴에 청색 머리인 리제가 활발한 성격이었고, 활발하고 애교넘치는 강아지상 얼굴에 적색 머리인 에리카가 차분한 성격이었다.
사람을 겉모습으로만 판단하면 안 된다고들 하는데, 이 둘이 대표적인 예시였다.
“여기서 뭐 하는거지, 리제?”
“아, 왔어? 아이리스?”
아이리스가 타이밍 좋게 마굿간 안에서 성큼성큼 걸어나왔다. 리제가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넸다.
‘……기사단 평상복이 저 차림인가?’
아이리스, 리제, 에리카 셋 모두가 상의로는 몸에 딱 달라붙는 흰 민소매에 하의로는 자기 머리색이랑 똑같은 색상의 돌핀팬츠를 입고 있었다. 도저히 눈 둘 곳을 찾기 힘든 복장이었다.
“보다시피. 네가 남자를 데려왔는데 내가 또 안 나설수는 없잖아? 한 번 살펴보고 있었지.”
“무슨 의미인지는 잘 모르겠다만, 억측이라면 자제해라. 신입이다.”
“어? 신입? 정말로?”
리제가 놀란 토끼눈을 하고 나를 쳐다보았다.
“정확히는, 입단 시험을 치르기 전이니 예비 인원이지. 그래서 지금부터 연무장으로 갈 예정이었다. 입단 시험을 치러야 하니까.”
신입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리제의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에리카도 조금 의외라는 듯한 눈으로 바뀌었다. 마치 뉴비를 보는 고인물의 시선이랑 똑같았다.
‘적응 안되네.’
나는 저런 시선을 받는 쪽이 아니라 주는 쪽이었는데.
“아이리스, 신입 입단 시험 내가 치러도 돼? 네가 그러니까 대체 뭐 하는 남자인지 더 궁금해졌어.”
“좋을대로 해라. 단, 힘 조절은 확실하게 하도록.”
“알았어, 알았어. 내가 명색이 기사단장인데 설마 그 정도도 못할까봐?”
“더 확실하게 하라는 의미다. 마녀의 저주에 걸려있으니까.”
그 말을 듣고, 나를 보는 리제와 에리카의 눈이 다시 한 번 바뀌었다. 경악과 측은함이 동시에 담긴 눈동자였다. 뭐, 배경 설정만 본다면 저런 측은한 눈을 하는것도 이해가 갔다.
‘마녀의 저주’란, 버려진 자를 과거 행적으로 선택하면 얻는 짤막한 배경 설정이었다.
마녀에게 저주를 받아 레벨과 모든 스탯이 1까지 퇴화되었다고 말이다. 왜 이 캐릭터가 레벨 1에 올스탯 1로 시작하는지에 대한 개연성을 더해주는 장치였다.
거의 일반인이나 다를 바 없는, 혹은 그보다도 더 못한 인간을 뜬금없이 기사단 예비 인원이랍시고 데려왔으니 놀랄만도 했다.
참고로 그 ‘마녀’라는 존재와는 중후반부에 정말로 만날 수 있다. 만나서 아무것도 안 하든지, 싸워서 이기고 살려주든지, 싸워서 이기고 죽이든지 셋 중 하나를 고를 수도 있고.
과거 행적을 다른 태생으로 골라도 만나는 게 가능하긴 하지만, 저런 상호작용을 하려면 무조건 버려진 자를 골라야 했다. 다른 태생으로는 대화 한 번 하고 끝이다.
그 ‘마녀의 저주’라는 것이 제법 악명 높은 모양인지, 아이리스가 이름을 물어봤을 때 그 저주 때문에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더니 단번에 납득해줬을 정도였다.
“어…… 정말로? 그런 애를 신입으로 받아도 돼?”
“당사자 눈앞에서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그런 상태라면 기사단에 들어와도 얼마 버티지 못할건데요?”
리제와 에리카가 각자 걱정과 의문을 담아 한 마디씩을 내뱉었다. 당연한 걱정이고 당연한 의문이었다.
플레이어 캐릭터가 아닌 다른 NPC들에게는 경험치를 얻어 스탯과 레벨을 올린다는 개념이 없으니까. 힘을 1 올리려면 정직하게 단련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마저도 한계가 명확한 방법일테지. 플레이어 캐릭터도 레벨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스탯 하나를 얻는데 필요한 경험치가 점점 더 많아지니까.
하지만 아이리스는 피식 웃고는 리제와 에리카의 의문을 한 마디로 일축했다.
“그런 걱정은 접어둬라. 보면 알거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