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Reincarnated into a Game Filled with Mods RAW novel - Chapter (81)
브닼 시리즈에서 잡기 제일 까다로운 보스를 고르라고 한다면, 페이즈마다 컨셉과 패턴이 완전히 바뀌는 보스가 1순위로 꼽힐 것이다.
1페이즈를 수십 번 죽어가면서 2페이즈로 들어가면, 2페이즈에서 확 바뀐 컨셉에 적응하지 못해 다시 수십 번을 죽고, 그러다가 2페이즈에 적응한다 싶으면 다시 1페이즈를 까먹으며 도돌이표가 되기 십상이니까.
브닼 4의 실질적 최종 보스인 세계를 먹는 자가 대표적이었다. 4페이즈까지 있는 주제에 페이즈마다 패턴과 컨셉이 바뀌는지라 완벽히 적응하기가 더럽게 빡셌다.
‘추락한 사제 루치아’, 혹은 ‘태양의 사제 루치아’ 역시 그런 부류에 속했다.
1페이즈에서는 추악하게 변이된 몸으로 이성을 잃고 괴물처럼 싸우는 반면, 2페이즈에서는 변해버린 오른팔을 자기 스스로 뜯어내고 인간처럼 싸우는 보스였다.
브닼 시리즈가 4편까지 나오면서 자연히 페이즈마다 컨셉이 바뀌는 보스들의 숫자도 늘어났지만, 그 중에서도 루치아의 인지도가 제일 큰 이유는 감동적인 스토리 때문이었다.
심연에 잠식되어 이성을 잃었던 한 명의 사제가, 신앙으로써 제정신을 되찾고 인간다운 최후를 맞이하는 과정이 바로 루치아의 보스전이다.
인간 찬가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는 과정이니, 그걸 좋아하는 사람이 많은 것도 당연했다.
물론 스토리만 감동적이고, 때려죽여도 루치아를 못 깨서 조각상으로 수십 수백 번을 사출된 사람들은 치를 떨어댔지만.
ㅡ콰앙!
수직으로 휘둘러진 빛의 검이 거대한 충격파를 만들어냈다. 성검을 이루는 황금빛은 루치아의 왼손에 들린 신성 촉매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내리꽂힌 검이 환한 빛무리로 화해 사라지고, 촉매에 다시 한번 신성력이 결집하기 시작했다. 거리를 좁힐까 하다가, 다음 패턴으로 뭐가 튀어나올지 모르니 얌전히 기다렸다.
빛무리가 거대한 창으로 바뀌었다. 루치아는 팔을 들어올려 투창 자세를 취했다. 가까이 붙어도 되는 패턴이다. 나는 잽싸게 발을 움직였다.
루치아를 기준삼아 시계 방향으로 돌다가, 치렁거리는 맑은 방울소리가 울려퍼지고 그 왼팔이 움직이며 창을 투척하는 순간 한 바퀴를 구르며 안쪽으로 깊게 파고들었다.
성창은 방금 전까지 내가 있던 자리에 정확히 꽂힌 다음 폭발했다. 이미 폭발에 휘말릴 범위는 벗어났기에 무시하고, 피가 응집되어 있는 새빨간 칼날을 루치아에게 휘둘렀다.
신성 촉매로 축복 인챈트를 걸 필요가 없어졌으니, 이제 피 묻은 검의 특수 능력인 공격력 버프를 활용할 시간이었다.
1페이즈때부터 꾸준히 포션을 써온 탓에 체력을 보충하는 것이 불가능해져서 지금 적용된 버프가 마지막이었지만.
“윽!”
피 묻은 검에 맞은 루치아가 윽, 소리를 내며 크게 휘청였다.
2페이즈의 루치아는 다른 모든 감소율이 평범한 인간 보스 수준까지 떨어지는 대신, 신성 계열의 공격에 대한 저항력이 엄청나게 높아진다. 1페이즈와는 정반대였다.
성직자 계열의 캐릭터가 1페이즈를 날로 먹을 수 있다면, 2페이즈에서는 다른 공격 수단을 준비해두지 않는 이상 골머리를 좀 앓아야 했다.
루치아는 제대로 된 반항조차 하지 못하고 내가 때리는대로 윽윽거리며 두들겨맞았다. 강인도가 무척이나 낮은 보스였기에 벌어지는 현상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죽을 때까지 때리고 있을 순 없었다. 정확히 네 대를 후려친 다음 뒤로 굴러 빠져나갔다. 그러자마자 루치아의 근처에 황금빛 신성 폭발이 일어났다.
보스의 강인도가 낮답시고 바짝 붙어서 좌클릭질만 해대는 사람들을 저격하는 패턴이었다.
바닐라에서는 그나마 선딜이 조금이라도 있는데, 닼라 모드에서는 사실상 노캐스팅 즉발형에 가까워서 보고 피하는 게 거의 불가능했다.
알아서 적당히 때리다 빠지라는 의미였다.
“태양께서 날 지켜보시니……”
루치아의 입에서 기도문이 흘러나왔다.
그 무릎이 신을 경배하듯 바닥에 꿇려지더니, 마치 무언가를 바치기라도 하는 것처럼 고개를 숙이고선 왼손 손바닥을 위로 보이게 들어올렸다.
꿇려진 무릎 앞에 놓인 신성 촉매가 환하게 빛났다. 신성력이 흘러넘치며 내 접근을 막고, 보스룸의 천장에 황금빛을 띠는 동그란 구체가 만들어졌다.
작은 태양이 가장 높은 곳에 떠올랐다. 그에 맞춰 루치아가 몸을 일으켰다. 언제 다시 집어들었는지, 왼손에 들린 신성 촉매는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었다.
빛이 철퇴의 모양으로 바뀌었다. 저벅, 루치아가 한 발을 내딛었다. 동시에 제 자신을 여러 갈래로 쪼개버린 구체가 나를 향해 내쏘아지기 시작했다.
‘……반시계 방향으로 돌기에는 이미 늦었고.’
나는 작렬하는 태양을 올려다보며 어느 방향으로 피해야 할지를 재빨리 계산했다. 튜토리얼 지역의 보스였던 인간 도살자의 마지막 발악과 비슷한 방식으로 피하면 되는 패턴이었다.
바로 앞에서 달려드는 루치아가 없을 경우에 말이다.
루치아는 순식간에 내 앞까지 도달했다. 절대로 뛰지 않는 1페이즈와는 다르게, 2페이즈에서는 도약에 순간이동에 달리기까지 거리낌없이 사용하며 플레이어를 죽이려 들었다.
오른쪽으로 떨어지는 태양은 무시하고, 나도 똑같이 냅다 달려서 루치아와 거리를 벌렸다가 작은 태양이 착탄하기 직전에 앞으로 굴렀다. 등 뒤에서 살벌한 폭발 소리가 들렸다.
빛이 두 번째로 내리꽂힘과 동시에 루치아가 신성 촉매로 만들어낸 철퇴를 휘둘렀다. 성검에, 창에, 이번에는 또 철퇴였다.
바닐라에서는 설정을 충실히 지키느라 철퇴밖에 안 썼었는데, 닼라 모드로 들어오면서 이유는 몰라도 온갖 무기를 만들어내는 웨폰 마스터가 되어 있었다.
‘게임 더럽게 하네.’
속으로 루치아에 대한 극찬을 한 번 해준 뒤, 내 머리를 으깨버릴 듯 내리쳐지는 철퇴를 튕겨냈다. 일단 철퇴를 휘두르는 무브셋 자체는 스텔라와 공유하니 크게 어려울 건 없었다.
ㅡ펑!
바로 옆에서 빛무리가 폭발을 일으켰지만, 어차피 범위 밖이었으니 무시하고 철퇴를 받아치는 것에만 집중했다.
삼연격의 마지막 공격까지 튕겨내자 주욱 밀려나는 몸을 멈춘 다음, 내리꽂히는 구체의 위치를 확인하고 반대 방향으로 굴러 빠져나갔다.
저 태양 비스무리한 구체를 폭발시키는 공격은 주문 계열이라 튕겨내기로는 제대로 방어가 안 된다. 설령 똑바로 튕겨낸다 한들 주문 피해는 고스란히 관통되어 들어오니까.
심지어 재수가 없을 경우에는 철퇴 튕겨내느라 전투 피로가 가득 차서 구르기를 못 할수도 있는데, 그 이후에는 당연히 끔살이었다.
사실 루치아가 휘둘러대는 무기도 될 수 있으면 튕겨내는 것 보다는 굴러서 피하는 편이 훨씬 더 나았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어쩔 수 없었다.
‘감화 게이지가 얼마나 쌓였을지 모르겠네. 다음 공격은 튕겨내면 안 되겠다.’
어림잡아 앞으로 한 번, 많아봐야 두 번 정도만 더 튕겨내기를 사용하면 감화에 걸릴 듯 싶었다. 상태 이상을 완벽히 막아내기 위해서는 무조건 저항력 100%인 방패를 들어야 하니까.
공격력 버프가 없는 상황에서는 감화에 걸려도 적당히 도망이나 다니면서 시간을 때우면 되겠지만, 지금은 아직 버프가 남아있으니 그래선 안 됐다.
모든 힘을 쏟아낸 작은 태양이 깜빡거리다가 서서히 잦아들었다. 보스룸에 짙은 어둠이 몰려왔다. 오직 루치아의 손에 들린 신성 촉매만이 유일한 광원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 순간, 칼날을 감싼 핏빛이 깜빡거리며 흔들리기 시작했다. 공격력 버프의 지속시간이 다 되어간다는 신호였다.
‘벌써?’
루치아를 흘끗 돌아보았다. 걸음걸이도 멀쩡했고, 크게 다친듯한 부위도 보이지 않았으니 체력이 얼마나 남았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이제 슬슬 잡힐 때도 되지 않았나?’
그놈의 HUD는 떠올릴 때마다 아쉬웠다.
공격력 버프가 지속되는 내내, 패턴이 안 도와주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정말 알뜰하게 두들겨 팼는데 체력이 얼마나 남았는지가 확인이 안 된다니.
2페이즈 루치아는 장기전으로 끌고 가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사용하는 신성 주문에 회복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체력을 퍼센트 단위로 차오르게 만드는.
경직을 줘서 회복을 끊을 수단이 없다면, 아예 실피에서 풀피가 되어버리는 경우도 흔했다. 그리고 지금의 나한테는 공격력 버프가 꺼지는 순간 루치아에게 경직을 줄 수단이 아예 없었다.
‘쓰읍. 어쩔 수 없나.’
일단 내 계산상으로는 앞으로 몇 번만 더 두들기면 그럭저럭 공격력 버프가 꺼지기 전에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냥 이번 기회가 마지막이라고 봐도 좋았다.
나는 루치아에게 달려들며 신성 촉매에 모든 의식을 집중했다. 철퇴를 튕겨내고, 성창을 회피해 정면으로 바싹 달라붙었다. 평타, 평타, 그리고 또 평타.
‘……지금.’
그리고, 신성 폭발을 일으키려는 낌새가 보인 그 즉시 옆으로 굴렀다.
사방으로 터져나온 신성력을 멀쩡한 모습으로 피해낸 나는, 다시 루치아에게 바싹 달라붙어 검을 휘둘렀다. 루치아는 공격에 맞을 때마다 윽윽거리며 휘청이기 바빴다.
위험부담이 워낙에 큰 행동이라 될 수 있으면 이런 짓은 안 하려고 했는데, 딜계산이 어디서 틀어졌는지 강제 타임어택이 시작된 꼴이라 별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이런 상황만 아니었어도 쳐다도 안 봤다, 진짜.’
나는 공격을 피하고 나서도 속으로 투덜거렸다.
‘사실상’ 노캐스팅 즉발형에 가깝다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일단 반응속도만 받쳐준다면 굴러서 피하는 것도 완전히 불가능한 것 까지는 아니긴 했다.
95% 이상이 예측에 가까운 기술이라 진짜 어지간히 고인 놈들도 함부로 시도 못 해볼만큼 회피 난이도가 지랄맞아서 그렇지.
어쨌건 일단 첫 도전을 성공하긴 했고, 이제 남은 건 내가 루치아를 클리어하기 전까지 방금 전처럼 집중력을 유지할 수 있기를 비는 것 뿐이었다.
“아아아……!”
루치아가 최후의 단말마를 내질렀다. 신성 촉매에 깃든 황금빛이 서서히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와, 두 번은 못할 짓이네.’
체력이 정말로 얼마 안 남기는 했었던 듯, 루치아는 내가 본격적으로 달려들자 얼마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다. 솔직히, 막판에 회복 패턴이 나왔을때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줄 알았다.
회복을 사용하려는 선딜 사이에 체력이 다 닳았으니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영원히 못 깰뻔 했다.
인간의 몸이 쓰러지는 철퍽 소리가 들렸다. 아니, 그건 더 이상 인간의 몸이라고 부르기에도 애매한 무언가였다. 전신이 썩어 문드러지다시피 흐물흐물하게 녹아내리고 있었으니까.
변이를 억제해주던 신성력이 완전히 사라져버린 탓에 오른쪽 어깨에서 타오르던 불꽃도 사그라들었다. 그 단면에서 무언가 이상한 게 꿈틀거렸다. 팔이 다시 자라나려는 모양이었다.
루치아는 얼굴의 모든 구멍으로 검은 액체를 내뿜으며 힘겨운 숨을 몰아쉬는 중이었다. 흐으, 흐으 하고 반쯤 흐느끼는 숨소리가 연신 새어나왔다.
이걸로 루치아 보스전은 클리어다. 나는 긴장이 한꺼번에 풀리는 것을 느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무슨 천하제일 망자대회를 벌이는 것도 아니고, 내가 왜 DLC 보스를 이 레벨대에 때려잡고 있는건지 자괴감이 들었다. 차라리 지금이 게임이었다면 또 몰라.
‘빌어먹을 성국.’
교황 걔는 대체 뭔데 사람 불안하게 이 타이밍에 DLC 스토리 대사를 말하고 앉았는지 의문이었다.
루치아를 쓰려뜨렸단 사실을 증명이라도 해주듯, 검은 진창이 씻겨내려가며 벽에 박혀있던 룬 비석이 드러났다. 비석에 새겨진 문자에서 은은한 초록빛이 흘러나왔다.
이대로 룬을 습득하고 바로 지상으로 가버릴 수도 있지만, 그 전에 여기서 할 일은 끝내야 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난 뒤, 온 몸이 녹아내린 채로 가쁜 숨을 내쉬는 루치아에게로 다가갔다.
습득한 신성 촉매를 3번 이상 사용했으니 이벤트 조건은 충족했다. 사실 진행해봤자 보상은 없긴 한데, 어차피 대가를 바라고 하는 이벤트도 아니었다.
발소리를 들었는지, 흐물흐물해지기 시작한 머리가 힘겹게 내 쪽으로 돌아갔다. 검은 액체 탓에 눈이 제대로 보이지조차 않을텐데 신기하게 방향을 똑바로 맞췄다.
“……누군가, 제 곁에 계신가요?”
입술이 달싹였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