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Reincarnated into a Game Filled with Mods RAW novel - Chapter (82)
“아아…… 누구이신지 알겠습니다. 당신께서 저를 막아주셨지요. 고통 속에서 죄를 범하며 메말라가던 저를, 인간인 채 죽을 수 있도록 해주셨지요.”
몸이 무너져내리는 속도가 조금씩 빨라지기 시작했다. 골반 밑의 두 다리는 진작에 녹아 없어졌고, 왼팔도 마찬가지인 신세였다.
오직 오른쪽 어깨만이 자신은 아직 죽지 않았다는 듯, 연신 불길하게 꿈틀거리며 절단면에서 무언가 돋아날 조짐을 보여대고 있었다.
새 오른팔이 솟아오르기 전에 안식을 찾을 수 있을테니 아마 저대로 냅두더라도 상관은 없을 것이다. 나는 잠자코 루치아의 말을 들어주었다.
“친절하신 분이시여. 부디 자비를 한 번만 더 베풀어주시어, 이 사함 받지 못할 죄인의 한탄을 잠시 들어주실 수 있으실런지요?”
루치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질문해왔다. 게임이었으면 여기서 듣는다, 혹은 듣지 않는다로 선택지가 떠올랐겠지.
듣지 않는다를 선택하면 이벤트는 그걸로 끝이고, 듣는다를 선택하면 대화가 조금 더 이어진다. 하지만, 굳이 여기까지 와서 듣지 않는다는 선택지를 고를 이유는 전혀 없었다.
“듣겠습니다. 말씀해주세요.”
“무척이나 친절하신 분. 당신의 깊은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루치아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으나, 그 미소 사이로 꾸역꾸역 검은 액체가 흘러넘쳤다. 그 탓에 오히려 웃음보다는 울음에 가까운 표정이라고 느껴졌다.
“저는 과거에, 이 던전을 토벌하기 위하여 차출된 사제였습니다. 수십 명의 신실한 사제들이 여기로 발을 디뎠지요.”
그 목소리가 한층 아련해졌다.
“하지만 이곳은 저희들의 힘만으로 무너뜨릴 수 있는 장소가 아니었고…… 수많은 희생을 낸 끝에 결국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콜록, 루치아가 작게 기침을 했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검은 액체가 왈칵 토해졌다. 목구멍 안에서 액체가 끓어오르는 그르륵 소리가 들렸다.
루치아는 그 뒤로도 검은 액체를 몇 번이나 더 토해내더니, 입 안에 든 것을 모조리 뱉고 나서야 간신히 말을 할 수 있게 된 듯 아까보다 훨씬 더 갈라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도 그 희생자들 중 하나였습니다. 룬 던전의 돌파를 포기하고 다시 지상으로 복귀하려던 때, 갑자기 마물이 덮쳐와 다리 밑으로 추락했으니까요.”
다리 밑으로 추락했던 루치아는 불행하게도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차라리 떨어진 충격으로 죽었더라면 한 명의 사제로서 순교했다고 볼 수 있었겠으나, 이런 몰골이 되어 살아남았으니 죽는 것만 못한 결말이었다.
“분명히 죽었어야 할 저는, 어째서인지 다시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눈을 떴을 땐…… 이미 모든 것이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늦어버렸지요.”
목소리에 점차 슬픔이 맺혔다. 반쯤 썩어버린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처음에는 신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제발 이 고통 속에서 저를 구원해달라고…… 당신의 신도에게 자애와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슬픔은 우울함으로 바뀌었다.
자신이 과거에 했던 일들을, 고통에 반쯤 미쳐 저질렀던 신성 모독들을. 한 명의 사제로 되돌아 온 지금은 차마 떠올리기가 힘든 것이다.
“하지만 신은 제 기도에 단 한번도 응답해주지 않으셨습니다. 무척이나 불경하게도, 저는 그런 신을 원망하기 시작했지요. 욕을 하고, 저주를 퍼붓고,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끔찍한 행동들을 저질렀습니다.”
루치아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오른쪽 어깨의 절단면이 더 격렬하게 꿈틀대기 시작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알아챈 루치아가 말을 멈추더니 후우, 후우 하며 숨을 골랐다. 그 입은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절단면의 꿈틀거림이 잦아든 이후에야 다시 열렸다.
“제 원망은 아주 오랜 시간동안 이어졌습니다. 친절하신 분께서 찾아와, 고통으로써 제가 정신을 차릴 수 있도록 해주시기 전까지 계속해서. 도저히 용서받지 못할 죄를 저지른 셈입니다.”
검은 액체로 범벅이 된 입술이 파르르 떨리는 게 보였다.
“하지만 당신께서는, 이런 제가 더 이상 신을 모욕하지 않도록 막아주셨습니다. 최후의 순간에 다시 인간으로 돌아와, 신을 섬기는 사제로 죽을 수 있도록 올바른 길로 인도하여주셨습니다. 당신께 받은 이 은혜들을, 곧 생명의 불길이 꺼져버릴 저 따위가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고개가 내 쪽으로 완전히 돌아갔다. 두 눈동자가 검은 액체로 뒤덮였기에 제대로 된 기능조차 하지 못하고 있을텐데도, 왠지 나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친절하신 분이시여, 당신은 분명 성국에서 찾아오셨겠지요. 신성 촉매를 그리도 자유롭게 사용하셨으니, 분명 무척이나 신실하신 분이시겠지요…….”
루치아는 나를 성국의 사람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이것이 보스룸 안에 놓인 신성 촉매를 3번 이상 써야만 이벤트가 진행되는 이유였다. 그래야만 플레이어를 성국의 사람으로 착각한 루치아가 다음 부탁을 말해오니까.
보스룸 안의 신성 촉매가 아닌 다른 걸 사용하면 진행이 불가능했다. 자세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아마 루치아 본인의 물건이 아니어서 그럴 것이리라는 추측만 무성할 뿐.
물론 루치아는 자신이 떨어뜨린 신성 촉매가 오염되었고, 그래서 신을 믿지 않더라도 쓸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신실하고 친절하신 분이시여.”
그 목소리가 축축히 젖어들었다. 목이 메어오는 듯 더듬더듬거리다가, 간신히 다음 말이 이어졌다.
“저는…… 다시 신께로 되돌아 갈 수 있는 것입니까?”
말에 울먹임이 잔뜩 섞였다. 만약 얼굴이 멀쩡했더라면 틀림없이 대성통곡을 하며 던졌을 질문이었다.
“신을 욕보이고, 신을 저주하고, 신을 원망했던 저라도…… 다시 한 명의 사제로 돌아가, 신의 품에 안길 수 있는 것입니까?”
그 말을 끝으로, 루치아는 내 대답을 기다리며 입을 꾹 다물었다. 이제 이벤트의 두 번째 선택지가 떠오를 시간이었다.
그렇다. 혹은 그렇지 않다.
여기서 ‘그렇지 않다’를 고를 경우에는, 당연한 일이었다며, 이깟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신성 모독을 저지른 죄인이 무슨 구원을 바라겠냐며 슬픔에 차 울부짖는다.
그리고 플레이어는 선택에 따라 루치아가 영원히 고통받도록 그냥 내버려두거나, 자신의 손으로 직접 안식을 주고 룬 던전을 떠날 수도 있었다.
각각의 경우에 따라 추가 대사도 존재했다. 내버려 둘 경우에는 자기를 이대로 버리지 말아달라 애원하고, 죽일 경우에는 안식을 찾음에 기뻐하면서도 지옥에 떨어질 것을 걱정하는 식으로.
“그렇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 선택지를 고를 생각이 없었다.
“신께서는 분명, 당신이 죄를 저질렀다는 사실보다 신의 품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더 환영해주실 것입니다.”
게임에서조차 루치아의 말을 부정하는 짓은 한 번도 안해봤었는데, 설마 여기까지 와서 그러겠는가.
참고로 루치아가 정말 신에게 돌아갔는지는 불명이다. 그건 게임의 아이템 설명들을 샅샅이 뒤져봐도 언급되지 않는 사항이었다.
그러니, 관점에 따라서는 두 개의 선택지 모두가 거짓말이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런 걸 신경쓰지 않고 루치아가 편안히 잠들 수 있도록 ‘그렇다’를 골랐다. 10주년 기념 통계에 따르면, 첫 클리어 유저의 그렇다 선택 비율이 93%랬던가.
“아아…… 다행입니다. 저 같은 죄인조차 따뜻하게 맞이해주신다니, 신께서는…… 정말로 너그로우시군요.”
입가에 떠오른 미소가 한층 더 짙어졌다. 슬픔이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무척이나 만족스러워 보이는 미소였다.
“친절하신 분…… 베풀어주신 그 호의에, 마음 깊이…… 감사드립니다. 비록 제가 드릴 수 있는 것이, 말 뿐인 감사라고는 하나…… 그 진심만은, 부디, 전해지기를…….”
단어마다 듬뿍 묻어났던 비통과 탄식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있었다. 목소리는 거의 들릴 듯 말듯한 수준까지 줄어들었으나, 숨소리는 처음보다 훨씬 더 편안했다.
루치아가 마지막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자애로운 태양이시여…… 자비로운 달이시여…… 이 죄인이…… 당신의, 곁으로…… 돌아가겠, 나이, 다…….”
그 말을 끝으로, 달싹이던 입술이 멈췄다. 숨을 쉴 때마다 오르락내리락 해야 할 가슴도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검은 액체로 뒤덮인 채 부릅떠진 눈을 두 손가락으로 살짝 감겨주었다. 게임에서는 이런 행동까진 불가능했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좋았다.
이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이었다. 게임에서 루치아를 인간으로 되돌리는 방법이 언급된 것도 아니었고, 나한테 그럴만한 힘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눈을 감겨준 다음 근처에 떨어진 루치아의 신성 촉매를 챙겼다. 이건 나중에 이단심판관에게 건네줄 아이템이었다. 이벤트는 아직 안 끝났다.
검은 액체로 변해 흐물흐물하게 녹아내리기 시작한 루치아의 시체를 뒤로 하고 룬 비석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저 위에 등장할 녀석은 기사단장들이랑 이단심문관이 알아서 잘 처리해 줄 것이다.
“당신들은 귀빈의 안위가 걱정되지도 않으십니까?”
“응? 뭐가?”
셀레네는 주위를 조금도 경계하지 않고 편안하게 서 있는 기사단장들을 보며 어이가 없다는 목소리로 질문했다. 언제 어디서 뭐가 튀어나올지 모르건만, 저렇게 태평한 모습이라니.
“귀빈께서 룬 던전으로 혼자 뛰어내리셨지 않습니까. 어떻게ㅡ”
“아, 델타 말하는거였어?”
리제가 피식 웃었다.
“처음엔 그랬는데, 생각해보니까 아침에 이미 다 설명해 준 내용이더라고. 뛰어내린다는 표현이 비유가 아니라서 조금 놀라긴 했지만…… 걔가 그런 기행 벌였던 게 어디 한두번이어야지. 이제 익숙해질 때도 됐으니까.”
“……예전에도 그런 행동을 자주 저지르셨다는 뜻으로 들립니다만.”
“엄청 많이 저질렀지. 걔 때문에 놀라느라 우리 수명이 10년은 깎였을걸? 나중에 본인한테 다 청구할거야.”
“…….”
“무슨 생각 하는지 알겠는데, 델타 걱정이라면 안 해도 돼.”
리제는 태연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델타가 스스로 내뱉은 말을 안 지켰던 적은 한 번도 없었어. 분명 듣기로는 도저히 불가능해보이고 말도 안 되는 내용 뿐인데, 어느새 태연하게 성공해서 돌아오거든. 걱정하는 쪽이 손해라니까?”
“허무맹랑한 소리로밖에 안 들려서 그렇지, 자기가 한 말을 지킬 능력은 충분히 되는 사람입니다. 이번에도 30분 안에 룬 던전을 토벌하고 오겠다 말했으니 조만간 나타나겠죠.”
에리카가 리제의 말을 보충했다. 그 설명을 들은 셀레네는 델타에 대한 평가를 조금 수정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분명 신입 기사라고 하지 않았던가. 대체 평소에 무슨 짓을 저지르고 다녔길래 그 짧은 시간에 기사단장들이 저런 반응을 보이도록 만들었는지 도통 이해가 가질 않았다.
……사실, 조금은 이해가 갈 것 같기도 했다. 대련에서 이단심판관을 압도적인 실력차로 찍어누른 사람이었으니까. 실력 하나만은 확실하겠지.
하는 행동은 제쳐두고서라도 말이다.
“우리가 너희들한테 이런 권유를 해도 될 위치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쉬어도 상관 없어. 델타가 마물이 등장하는 건 여기 풍경이 척 봐도 알 수 있게 바뀐 다음이라고ㅡ”
순간, 땅이 우르릉거리며 흔들렸다. 그 탓에 클라우디아의 말이 잠시 멈췄다.
“……그랬거든.”
온 사방을 뒤덮고 있던 검은 액체들이 어디론가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초목과 하늘이 원래의 색을 되찾았다. 내리쬐는 태양빛도 훨씬 더 찬란해졌다.
클라우디아가 땅에 내려놓았던 대검의 손잡이를 다시 움켜쥐었다. 리제와 에리카는 무기를 빼들었고, 아이리스가 롱소드의 끝을 시커먼 액체가 모여드는 장소로 겨누었다.
“이게 델타가 말한 변화겠군. 모두, 전투 태세를 갖춰라. 싸울 시간이다.”
“저 검은색 액체일까요?”
“오히려 아닌 편이 더 이상하겠지. 척 봐도 불길한 놈이지 않나.”
한 곳으로 모여든 검은색 액체가 이상한 괴물의 형상으로 변했다. 다리는 여섯 개에 머리는 두 개였고, 꼬리에는 철퇴 비스무리한 무게추가 달린 여섯 발 짐승이었다.
척추를 따라 일직선으로 돋아난 수십 개의 촉수들이 징그럽게 꾸물거렸다. 누가 봐도 나 마물이에요, 라며 생김새로 말하고 있었다.
“전원. 전투 준비.”
셀레네가 짧고 간결하게 명령했다. 전투 수녀들이 일제히 레이피어를 들어올렸다.
마물은 두 개의 머리로 각각 좌우를 살피더니 쩝쩝거리며 입맛을 다셨다. 입 밖으로 쭉 내밀어진 혀가 근처를 핥고 지나갔다.
“천국은 신실한 자들을 위한 것이니.”
제일 얇고, 제일 뾰족한 은색 레이피어에 은빛 신성력이 깃들었다. 그 보라색 눈동자가 차갑게 타올랐다.
“믿지 않는 자에게 지옥을 선사하라.”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