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Reincarnated into a Game Filled with Mods RAW novel - Chapter (83)
‘……됐다.’
나는 손등 위에 새롭게 나타난 문신을 살살 어루만졌다. 이걸로 신에게 버림받은 피조물 보스전을 치르기 위한 조건은 모두 충족시켰다. 남은 건 스토리를 진행하는 일 뿐.
‘위쪽도 정리가 끝났겠지?’
제 할 일을 마쳤기에 빛을 잃어 바스라지는 룬 비석을 뒤로 하고, 던전 입구로 통하는 마법진이 열리기를 기다리며 보스룸의 천장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룬을 얻어 희희낙락하게 지상으로 돌아간 플레이어들을 엿먹이는 요소로, 던전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중간 보스 하나가 덤벼든다. 그것도 플레이어의 뒤에서 말이다.
초회차 유저들은 악전고투 끝에 루치아를 때려잡고 룬을 습득한 뒤, 좋아라 마법진을 타고 지상으로 올라갔다가 그 놈에게 뒤통수를 처맞고선 어이없이 죽어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걱정을 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걔들이 질 수가 있어야 말이지.’
저 위에 있는 전력만 해도 한때 황제를 모셨던 은빛 여명 기사단의 기사단장 4명에, 성국 무력의 쌍두마차 중 하나인 이단심문관, 그리고 두 자릿수에 달하는 전투 수녀들이다.
고작해야 중간 보스 한 마리 따위에 지는 것이 더 이상했다. 당장 기사단장들이 1대1로 덤빈다 해도 30초 내로 가뿐히 쳐바르고 남은 시간은 유유자적하게 쉴 수 있을테니까.
얼마 안 가 룬 비석이 놓여있던 자리에 초록색의 마법진이 그려졌다. 지상으로 곧장 이어지는 마법진이었다. 나는 그 마법진 위에 올라탔고, 이내 어디론가로 전송되기 시작했다.
시야가 잠시 암전되었다 돌아왔을 땐, 내 몸은 던전의 입구에서 밑으로 조금 내려간 다리 위에 올라와 있었다. 휘청거리는 다리에 힘을 불어넣어 중심을 잡았다.
훨씬 맑고 따스해진 햇빛이 나를 맞이해주었다. 룬 던전으로 처음 진입할 당시에, 우중충하기 짝이 없던 시커먼 색깔의 햇빛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그대로 다리 중간까지 걸어나갔다. 최대한 미끄러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위쪽의 다리까지 훌쩍 도약해 끄트머리를 붙잡고 올라섰다.
“아, 델타!”
던전 바깥쪽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던 리제와 눈이 마주쳤다. 리제는 날 보고선 활짝 웃으며 팔을 붕붕 흔들었다. 그 탓에 흰 민소매에 감싸인 거유가 좌우로 출렁거렸다.
갑옷을 입지 않고 있는걸로 미루어보아 중간 보스는 진작에 토벌한 모양이었다. 나올 마물이라곤 그놈 하나밖에 없으니까 잡고 나면 갑옷은 벗어둬도 괜찮다고 설명했었지.
다리 중간까지 단숨에 건너온 리제는 아래에서 버둥거리던 나를 한 팔만으로 끌어올리고선 이리저리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정리해주었다.
“잘 처리하고 왔어?”
나는 말 없이 왼손 손등을 들어보였다.
저번에 같이 습득했던 활력 강화 룬에, 이번 던전에서 얻은 ‘심연 속 안식’ 룬이 추가되어 더 복잡해진 문신을 본 리제가 방긋 미소지었다.
그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었다. 흐으으, 하는 기분 좋은 숨소리가 앵둣빛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쓰다듬기를 끝마친 내가 앞으로 걸어가자 리제도 내 뒤를 쫄레쫄레 따라왔다.
드디어 제대로 된 땅에 발을 디디니 마음이 편안해지는 기분이었다. 던전 밑바닥은 검은 액체로 된 진창 투성이고, 다리 위는 대체 뭘 발라놓은건지 더럽게 미끌거리는 곳이니까.
전투 수녀들은 멍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고, 셀레네는 언뜻 보기엔 무표정했지만 그 보석과도 같은 자안이 놀라움으로 연신 떨려대고 있었다.
“……무사히 복귀하셔서 다행입니다, 귀빈이시여.”
“많이 놀란 눈치네요?”
“당연히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저희 성국이 수많은 희생을 치르면서도 몇 번이나 토벌에 실패한 장소를, 한 시간도 채 되지 않는 동안에 혼자서 무너뜨리셨는데 어떻게 놀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겠다고 말했잖습니까. 한 말을 지킨 것 뿐입니다. 위쪽은 별일 없었죠?”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처음 들어올 당시의 거무스름하고 칙칙한 풍경은 온데간데 없이, 맑고 깨끗한 하늘과 푸르른 초목만이 드넓게 펼쳐져 있었다.
문득 시야 한구석에 처참하다는 말로도 모자랄만큼 철저히 박살난 마물의 시체가 들어왔다. 속으로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내가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예. 저 마물이 나타났던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이제 여기서 할 일은 끝났으니 돌아가도록 하죠. 너희도 뭐 할 거 없지?”
“우리는 델타 너 따라온거잖아. 여기서 따로 할 게 뭐가 있겠어?”
리제의 말에 다른 기사단장들도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사실 갑옷을 벗고 있다는 것 자체가 여기선 더 할 일이 없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행동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제 돌아갈테니 무구를 챙겨 주십시오. 전원, 복귀한다.”
셀레네가 전투 수녀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전투 수녀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우리를 감싸듯이 사방에서 둘러쌌다. 어차피 더 나올 마물도 없긴 하지만.
기사단장들이 갑옷을 주섬주섬 몸에 걸쳤다. 원래 풀 플레이트 아머는 입고 벗기가 상당히 불편한 물건인데, 기사단장들은 무슨 평상복을 입듯이 척척 착용했다.
제일 선두에 선 셀레네가 먼저 이동하고, 우리들이 그 뒤를 따랐다. 전투 수녀들은 우리를 둘러싼 채로 일정 거리를 두고 움직였다.
“응? 델타, 허리춤에 그건 뭐야?”
내 허리춤 뒤편에 묶여있는 신성 촉매를 본 리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말에 셀레네의 눈이 흘끗 이쪽을 향했으나, 내 몸에 가려 정확히 뭘 말하는지 알 수 없는 각도였다.
리제가 본 것은 루치아가 쓰던 신성 촉매였다. 이걸 이단심판관에게 전해줘야 비로소 루치아 이벤트가 끝이 난다.
검에 축복 인챈트를 바를 때 사용한 촉매는 그냥 버려두고 왔다. 그건 어차피 이벤트 아이템도 아니었을뿐더러, 나중에 교황에게서 상위호환이나 다름없는 신성 주문을 얻을 수 있었다.
교황에게서 얻는 그 축복 인챈트 때문에라도 성국에는 언젠가 한 번 들릴 생각이었다. 갑자기 들이닥친 스텔라 때문에 순서가 대차게 꼬여버려서 그렇지.
“신성 촉매인데, 저 밑에서 주웠어.”
“그래?”
짤막한 대답이었지만 리제는 순순히 물러났다. 어떻게 주웠는지, 왜 주웠는지는 물어볼 낌새조차 없었다. 셀레네도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이내 고개를 돌렸다.
나는 이단심문관이 루치아의 신성 촉매를 본다면 어떤 반응을 나타낼지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게임에서도 이단심문관에게 신성 촉매를 보여준다는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고.
이건 이단심판관과 연관된 이벤트였지 이단심문관과 연관된 이벤트가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주위를 경계할 필요가 없어졌으니 걷는 속도 역시 훨씬 더 빨랐다. 자연스레 결계의 균열에 도착하는 시간도 짧아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황금빛 빛무리가 보였다.
“귀빈이시여, 결계를 벗어난 후에 잠시 시간을 내어주실 수 있으십니까?”
“어차피 남는 게 시간일테니 상관 없긴 합니다만, 이유는요?”
“룬 던전 안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그리고 룬의 효과에 대해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그런거라면 당연히 해줘야죠. 알았습니다. 나가서 바로 따라가면 될까요?”
나는 순순히 알았다는 대답을 내놓았다. 원래는 이단심판관에게 말해주는거긴 하지만, 셀레네한테 털어놓는다 한들 그리 큰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 것이다.
당장 룬 던전에 들어올 수 있도록 허가를 내준 인물부터가 바뀌었으니까.
“예.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감사의 표시로 내게 고개를 살짝 숙여보인 셀레네가 전투 수녀들을 이끌고 균열의 양 옆에 자리를 잡았다.
“먼저 나가십시오. 뒤따르겠습니다.”
바깥에서는 균열의 안쪽이 보였던 것과 다르게, 안쪽에서는 균열의 바깥이 보이지 않았다. 오직 황금색의 빛무리만 보일 뿐이었다. 그래서 결계인건가, 하는 실없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셀레네의 말에 따라 균열 안에 몸을 들이밀었고.
“왜 귀빈님들이 룬 던전을 틀어막은 결계 안에서 나오시는거죠?”
밖으로 나오자마자 뚱한 표정으로 가슴 밑에서 팔짱을 낀 채 우리를 쳐다보고 있는 스텔라를 발견했다.
그 뒤로 전투 수녀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원래 이곳을 지키고 있던 성기사들은 어디로 갔나 안 보였다.
이단심판관도, 그리고 전투 수녀들도 손에 무기를 들고 있지는 않았다. 스텔라의 표정 역시 분노가 아니라 가벼운 불만에 가까웠다. 일단 여기서 한바탕 해댈 일은 없을 듯 했다.
“뭐, 보는대로가 아닐까요?”
“……룬 던전에 들어가셨다고요?”
“정답입니다.”
스텔라가 이마를 감싸쥐었다. 푹 내쉬어진 한숨에는 진심어린 한탄이 듬뿍 섞여 있었다.
“귀빈님. 교황 성하께서 당신들을 귀중한 손님으로 맞이하시겠다고 선언하셨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허락도 없이 제멋대로 룬 던전에 들어가시는 건ㅡ”
“제가 허락하였습니다.”
그 순간, 셀레네가 균열 너머에서 걸어나왔다.
“제가 룬 던전의 출입 허가를 내주었으니, 귀빈들께서는 결코 무단으로 침입하신 것이 아니십니다.”
“……이단심문관, 당신이요?”
“예, 그렇습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거에요? 저분들이 크게 다치거나 죽기라도 했으면ㅡ”
“귀빈께서 지니신 실력은 이단심판관 당신이 더 잘 알지 않습니까?”
정곡을 찔린 스텔라의 얼굴이 약간 붉어지더니, 화제를 돌리려는 듯 작게 헛기침을 했다. 대련에서 나를 한 대도 때리지 못하고 처참히 박살났던 일을 떠올린 모양이었다.
그런 스텔라가 척 보기에도 이상했는지 옆에서 기사단장들의 시선이 푹푹 꽂혔다. 투구를 쓰고 있는지라 얼굴이 보이는 건 아니었지만,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는 뻔했다.
“크흠, 큼. 알았어요. 실력은 그렇다 치죠. 그래서, 결과는 어떻게 됐는데요? 토벌은 포기하고 그냥 돌아온거에요?”
“이제 결계를 해제하여도 됩니다.”
“……어? 정말로요?”
“이런 것으로 거짓말을 하지는 않습니다, 이단심판관. 나중에 성기사들을 다시 부르겠습니다. 혹시 몰라 멀찍이 물러나 있으라고 명령하였으니.”
“아니, 거짓말이라는 뜻이 아니라……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도 않은 것 같은데, 벌써 던전을 토벌했다니까 놀라서 그랬죠.”
스텔라의 시선이 내 쪽을 향했다. 나는 이 틈을 타 재빨리 입을 열었다.
“그러고보니, 이단심판관님께 전해드릴 물건이 하나 있습니다만.”
“네? 저한테요?”
“네. 이단심판관님한테요.”
날 향한 초록색 눈이 어리둥절하게 떠졌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었다는 얼굴이었다.
“뭔데요? 설마 룬 던전에 있던 마물의 목 같은건 아니죠?”
스텔라가 깔깔 웃었다. 나는 조용히 허리춤에 묶어두었던 신성 촉매를 집어들어 스텔라에게 내밀었다.
“…….”
그 신성 촉매를 본 스텔라가 웃음을 뚝 그쳤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