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Reincarnated into a Game Filled with Mods RAW novel - Chapter (86)
“그것이, 무슨…….”
“단어 그대로입니다. 교황 성하의 희생 없이도 그 괴물을 잡을 방법이 있기에 말을 꺼낸 것이라면, 이단심문관님께서는 어떻게 하시겠냐는 의미죠.”
피 묻은 검과 맞닿은 레이피어에서 눈에 띄게 힘이 빠져나갔다. 그 칼날을 붙잡고 조심스레 밀어냈다. 셀레네는 순순히 내 행동에 따랐다.
보라색 눈동자가 방금 전보다 훨씬 더 크게 떨려오고 있었다. 도저히 믿기 힘든 말을 들은 것처럼 초첨을 제대로 잡지 못했다. 동공이 쉴 새 없이 흔들렸다.
레이피어의 끝이 바닥을 향했다. 나도 칼을 거두어들였다. 괜히 무기를 계속 겨누고 있어봐야 좋을 건 하나도 없었다.
셀레네가 고개를 푹 숙였다. 툭, 왼손에 들린 신성 촉매가 은색 카펫 위로 떨어졌다. 오른손에 들린 레이피어 역시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처럼 위태롭게 쥐어진 채였다.
저런 반응을 보니 반쯤은 성공한 듯 싶었지만, 그래도 방심은 금물이었다. 나는 칼을 내리되, 언제든 공격을 받아칠 준비를 하면서 조심스럽게 몇 발자국을 물러났다.
고개를 푹 숙여버린 셀레네는, 멍한 모습으로 제자리에 한참을 서 있었다. 나는 잠자코 회복을 기다려주었다.
그러다 문득, 입이 열렸다.
“……거짓말.”
머리가 들어올려졌다. 날 향한 두 눈동자에는, 방금 전까지 가득 들어찼던 혼란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있었다.
“허튼 소리 하지 마십시오!”
셀레네가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갑자기 확 바뀌어버린 분위기에, 나는 황급히 피 묻은 검으로 레이피어를 튕겨냈다.
그나마 혼란이 완전히 가신 것은 아닌지, 신성력은 조금도 쓰지 않고 검술만으로 덤벼든다는 점은 다행이었다.
“희생 없이 처리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까? 교황께서 희생하시지 않으셔도 된다고 하셨습니까? 교황께서 어찌하여 그런 결심을 하셨는지도 알지 못하면서! 감히 희생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는단 말입니까!”
셀레네가 무작정 거리를 좁히려 드는지라, 공격을 똑바로 튕겨내려면 나도 같이 물러서야 했다. 튕겨내기조차 제대로 못 쓸 초근접전이라면 내 쪽이 훨씬 불리하니 말이다.
푸욱! 내가 왼쪽으로 굴러 빠져나간 자리에 레이피어가 꽂혔다. 칼 끝은 조금의 저항도 없이 크로스가드까지 벽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검은 곧바로 뽑혔다. 대리석에는 레이피어가 만들어낸 자그마한 구멍을 제외하곤 그 어떤 균열이나 흠집도 보이지 않았다. 정말 소름끼치게 날카로운 검이었다.
목이 천천히 돌아갔다. 분노는 조금 가라앉은 듯 했으나, 증오는 그대로였다. 자세를 바로잡은 셀레네가 살벌한 목소리로 말했다.
“괴물의 존재를 무슨 수로 알아내셨습니까?”
‘……이런.’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실수를 직감했다.
태양의 대성당에서 벌어졌던 일로 누군가 희생해야 한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는 있어도, 그 희생의 이유가 성국 지하에 있는 괴물 때문이라는 사실만은 절대로 알아낼 수 없었다.
둘 모두 쓸모 없는 짓 혹은 불필요한 희망 같은 두루뭉술한 표현만을 사용했지, 괴물에 대해서는 조금도 언급하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그 또한 거짓말이셨습니까? 대성당의 일 때문에 눈치를 채셨다는 말 또한 거짓이셨습니까? 제게 털어놓은 그 모든 것이, 진실로부터 제 눈을 가리기 위한 기만에 불과하였던 것입니까?”
하지만 나는 너무 당당하게 그 괴물을 잡을 방법이 있다고 말해버렸다. 셀레네 정도 되는 사람이라면, 내 말 속의 모순점을 단박에 알아차려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저는 지금, 그러하였던 것이냐고 묻고 있습니다.”
지금처럼 말이다.
“대답하십시오! 당장!”
셀레네는 거의 악에 받친듯한 표정이었다. 무기를 내려놓을 것처럼 행동하다가 나를 공격한 것 역시, 내 말의 전제조건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눈치챘기 때문이 분명했다.
사실, 진위 여부를 따져보면 일단은 내가 거짓말을 한 것이 맞았기에 나로서도 그 점을 추궁당하면 할 대답이 없었다. 그걸 부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여기서 적반하장으로 같이 언성을 높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 나는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하며 대화의 주제를 돌리려 시도했다.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방법이 있다는 사실 그 자체입니다.”
“방법이 있다고 하셨습니까? 달의 교황께서 희생하지 않아도 되는 방법이 있다고 하셨습니까? 웃기지도 않습니다. 처음부터 거짓을 속삭였던 인간의 말에, 제가 왜 믿음을 주어야 하는 것입니까?”
레이피어의 칼 끝이 다시 나를 향했다. 내가 몸을 피하자, 레이피어는 푹 소리와 함께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길다란 의자를 그대로 관통해버렸다.
칼을 거칠게 뽑아든 셀레네가 이를 악물고 외쳤다.
“저희가 아무런 방법도 시도하지 않았으리라 생각하셨습니까? 다가올 운명에 순응하고, 얌전히 스스로를 불살라 하나의 목숨을 태우리라 생각하셨습니까? 정녕 그리 생각하셨습니까?”
“물론 아닙니다. 당신들이 아주 많은 걸 시도해 보셨다는 것쯤은 알고 있으니까요.”
“당신이 무얼 안다고 지껄이ㅡ”
“처음에는, 태양의 교황께서 홀로 괴물을 토벌하려 시도하셨습니다.”
그 말을 들은 셀레네가 동작을 우뚝 멈췄다. 나는 멈추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다음으로는 교황 성하들이 함께 괴물을 토벌하려 하였고, 그 다음으로는 당신들까지 힘을 합쳤고, 또 그 다음으로는 목숨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신성력만을 넘겨주어 괴물을 무찌르려 하셨죠.”
레이피어의 끝은 그대로 내 목젖을 향했지만, 척 보기에도 확연히 드러날만큼 미친 듯이 떨려대고 있었다.
“저는, 모두 알고 있습니다.”
내가 말한 ‘시도’들은 전부 게임에서 교황이 직접 언급했던 것들이었다. 그러니 여기서도 똑같이 흘러갔을 게 분명했다.
“그 외에도 수많은 방법들로 운명을 비틀어보려 했지만 모두 다 실패했을겁니다. 그러니 달의 교황께서도 운명은 절대로 바꿀 수 없다 여기고, 계시의 내용대로 희생을 자처하시려는 것이고요. 그렇지 않습니까?”
“…….”
셀레네는 이번에야말로 기가 완전히 질려버린 듯, 얼굴을 새파랗게 물들이고선 레이피어를 힘없이 떨어뜨렸다.
괴물의 존재여부 그 자체와 마찬가지로, 이단심판관과 이단심문관에 더해 성국의 교황들까지 직접 나서서 그 괴물을 토벌하려 했다는 사실 또한 극비 중의 극비 사항이었다.
물론 결과는 모조리 다 실패였다. 보스룸에는 진입조차 하지 못했을 뿐더러, 교황들이 전력으로 발휘하는 신성 장벽마저 심연에 의한 타락을 막아내는 것이 고작이었으니까.
비록 실패한 토벌이었다지만, 토벌의 당사자였던 네 명 모두는 절대로 맹세와 신앙을 배반하지 않을 성격이다. 그리고 토벌에 참가한 인원은 네 명이 전부다.
즉, 교황들이 힙을 합쳐 성국 지하의 괴물을 토벌하려 했단 사실은 넷을 제외한 그 누구도 알 수 없어야 했다.
그래야만 했었다.
“어떻게…… 어떻게 그런 것까지…….”
“그 괴물을 토벌할 방법은 분명 존재합니다, 이단심문관님.”
나는 벌벌 떨어대는 자안과 눈을 마주쳤다.
“이걸 보세요.”
그 눈앞에 왼손 손등을 들어보였다.
온갖 복잡한 감정을 담은 보라색 눈동자가 내 손등에 새겨진 룬 문신을 향했다. 활력 강화 룬을 상징하는 문신에 더해, 그것과 얽히듯 새겨진 또 다른 문신.
“이게 열쇠입니다. 룬 던전의 지하에서 얻었던 이 룬이 있다면, 아무런 저항 없이 그 심연 속으로 진입하는 게 가능해요.”
“……그것이, 정말입니까?”
“제가 이 상황에서까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있을까요?”
“하, 하지만…… 그건, 불가능한…….”
“불가능하다고요?”
“이단심판관도, 저도, 심지어 교황 성하들께서도 토벌에 실패하였던 괴물입니다. 저희들의 신조차 건드리지 못하는 괴물이란 말입니다. 그걸 어떻게 혼자서…….”
“이단심문관님이 그런 말씀을 하실 줄은 몰랐네요. 제가 여태껏 무슨 짓을 해왔는지 다 보셨을텐데.”
셀레네가 몸을 움찔거렸다. 나는 가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고작해야 제국 변방의 신입 기사 따위에게 황제 폐하가 지대한 관심을 보이셔서, 저를 성국에 초대할 때 이단심문관님이 직접 제국까지 찾아가야 했던 건, 가능하다고 생각되는 일이었나요?”
“…….”
“신앙 없이 신성력을 지닐 수 있는 건, 가능하다고 생각되는 일이었나요?”
“…….”
“성국이 몇 번이나 토벌에 실패했던 룬 던전을 저 혼자 가볍게 무너뜨리고 돌아온 건, 가능하다고 생각되는 일이었나요?”
“…….”
“십수 년 전에 던전의 지하로 추락했던 루치아 사제님이 다시 태양에게로 돌아온 건, 가능하다고 생각되는 일이었나요?”
“…….”
셀레네는 그 무엇에도 대답하지 못했다. 나는 말에 과장을 섞은 것도, 없던 일을 부풀려 말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내가 해왔던 일을 담담히 설명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가능이나 다름없는 행적들 투성이였지만, 나는 이미 그게 가능함을 증명해보였다. 그러니까 여기 이렇게 살아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가능성의 여부는 제가 판단합니다, 이단심문관님. 그리고 저는 지금, 그 괴물을 저 혼자 토벌하는 것 또한 충분히 가능하다 말하고 있습니다.”
“…….”
셀레네의 눈이 방금 전보다 훨씬 더 흐리멍텅해졌다. 내 말을 무턱대고 믿을 수도, 그렇다고 아예 믿지 않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으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것이겠지.
“그 마음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아직도 불안하시겠죠. 저도 지금 당장에 저를 믿어달라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지금껏 이어져왔던 믿음을 송두리째 뽑아버리고 바닥부터 갈아엎는 과정이다. 말 몇마디로 나를 믿도록 만드는 건 애초에 기대도 안했다.
“대신, 제 말을 증명해드리겠습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셀레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나는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 괴물을 때려잡을 방법. 지금부터 그 방법을 하나하나 세세히 말씀해드리죠.”
‘부디, 신의 품 속에서 안식을 찾으시기를.’
스텔라는 꼬박 몇 시간에 달하는 기도를 드린 다음에야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기도를 드리는 내내 무릎을 꿇고 있었지만 다리가 아프지도, 저리지도 않았다.
오히려 마음이 더 아팠다. 그토록 오랜 세월을 심연 속에서 고통받았을 루치아에 대해, 그리고 루치아를 지키지 못했던 스스로에 대한 죄책감에 의해.
반면에, 감사함 역시 마음 한 켠에 굳게 자리하고 있었다.
‘고마우신 분.’
분명 첫 만남은 최악이었다. 아무 죄도 저지르지 않은 사람을 스텔라 자신이 제멋대로 이단이라 몰아넣은 것이다.
성국에서 이단이라는 존재가 어떤 취급을 받는지를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부모를 향해 쌍욕을 퍼부은 것이나 다름없는 짓이었다.
그것 때문에 이단 판별까지 당해야 했으니, 당사자가 얼마나 큰 모욕감을 느꼈을지 스텔라로서는 감히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 분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루치아에게 안식을 베풀어주었다. 스텔라에게도 작별의 기회를 주었다. 스텔라가 십수 년 동안이나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이 은혜를 대체 어떻게 갚아나가야 할지 가늠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원하시는 게 있다면, 어떤 것이라도.’
스텔라는 속으로 굳게 다짐하며, 루치아의 신성 촉매를 향해 최후의 기도를 올리고 몸을 돌렸다.
ㅡ똑똑.
타이밍 좋게 문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로 부르시나요?”
“손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손님…… 이요?”
“예. 델타라는 이름의 기사분과 셀레네 이단심문관님이십니다.”
그 이름을 듣자마자 스텔라는 자기 심장이 약간 빠르게 맥동하는 것을 느꼈다. 두근대는 심장을 애써 가라앉히며, 평탄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목적으로 방문한거라 말씀하시던가요?”
“저희에게는 알려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전투 수녀들과 사제에게는 알려줄 수 없는 것. 그게 뭔지는 몰라도 아주 중요한 일임을, 스텔라는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알았어요. 금방 나갈테니 자리를 마련하세요.”
“예.”
목소리가 멀어졌다. 스텔라는 서둘러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머리를 정리한 다음, 가벼운 발걸음으로 그 두사람이 기다리고 있을 장소를 향해 걸어갔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