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Reincarnated into a Game Filled with Mods RAW novel - Chapter (88)
그 다음으로 찾아간 장소는 당연히 기사단장들이 있는 숙소였다. 일단 상황 설명을 해줘야 했으니까. 이번에는 나 혼자만 움직여야 한다는 것 역시 전달해줘야 했고.
기사단장들은 같이 가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심연 속 안식 룬이 없으니까 말이다.
내가 지금껏 셀레네와 같이 룬 이야기를 하고 온 줄로만 알았던 기사단장들은, 내 말을 듣자마자 황당하기 짝이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충분히 그럴만 했다.
고작 몇 시간 전에 혼자서 룬 던전을 처리하고 돌아온 녀석이, 잠깐 눈을 뗐더니 성국 지하의 괴물을 토벌하고 오겠다 말하는데 황당하지 않을 리가 있나.
특히 리제의 표정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 리제에게는 마음의 빚이 있기까지 한지라, 나는 시선조차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슬쩍 피했다.
“델타.”
리제가 나를 불렀다. 나는 움찔거리며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올렸다. 푸른 눈동자가 평소보다 훨씬 더 시리게 빛나고 있었다. 화를 내는 표정은 아니었지만, 그래서 더 긴장됐다.
“우리들은 너를 끝까지 믿을거야. 너라면 분명 멀쩡히 돌아오겠지. 그토록 꽁꽁 숨겨대는 비밀이라는 게 대체 얼마나 잘난건지는 몰라도, 여태껏 계속 그래왔으니까.”
하지만.
그 뒤에 말이 덧붙여졌다.
“뭐든지 너 혼자 짊어지려고 하지는 마. 우리가 그런 걸 원하는 건 절대로 아니니까. 나도, 에리카도, 아이리스도, 클라우디아도 마찬가지야. 네가 하려는 일은 얼마든지 도와줄 수 있고, 언제든지 거들어줄 수 있어. 가끔은 우리한테도 의지해달라는 얘기야. 알았지?”
이제껏 저질러온 일들이 있기에,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기사단장들에게 저질렀던 행적을 되짚어본다면 입이 열 개가 아니라 백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온갖 기행을 벌여대고선 비밀이라는 말 한마디로 넘겨왔으니까. 성국 지하의 괴물을 어떻게 알았는지 역시 당연하게도 비밀이었다. 그러니 양심이 콕콕 찔려댈 수밖에.
게다가 기사단장들은 단순히 나를 질책하거나 힐난하려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걱정돼서 저런 말을 하는거였다. 내가 걱정돼서 그런다는데 거기에 대고 무슨 말을 하겠는가.
“숨기고 있는 것이 정말 많으신 듯 합니다.”
“…….”
셀레네는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칭찬인지 욕인지 모를 말을 내뱉었다. 언뜻 보기엔 비꼬는 것처럼 들리는데, 성격이 성격이다보니 정말로 칭찬의 의미일수도 있었다.
기사단장들 나름의 인사를 뒤로 하고, 태양의 대성당으로 향했다. 그 앞은 여전히 태양의 교황에게 기도를 드리는 사람으로 즐비했다.
개중에는 셀레네를 알아보고 인사를 건네는 사람도 간간이 있었다. 물론 셀레네는 그 인사를 모조리 다 무시하고 지나쳤다. 무시당한 사람도 전혀 신경쓰지 않는 듯 했다.
“여기에요, 귀빈님.”
대성당 뒤편으로 돌아가자, 화려한 태양빛을 발산하는 문 옆에서 우리를 기다리던 스텔라가 이쪽으로 걸어왔다.
“교황 성하께는 단순히 귀빈님이 하실 말씀이 있다고만 언질을 드려놨어요. 교황 성하를 설득하는 건 귀빈님의 몫이에요.”
“그거면 충분하죠. 감사합니다, 이단심판관님.”
“감사 인사는 됐어요. 저도 그만큼 절박한 처지니까요. 드디어 희망이라고 부를만한 동앗줄이 나타났는데 전력으로 매달려보기라도 해야죠.”
그 말을 하는 스텔라의 얼굴에는 언제나처럼 생글생글한 웃음이 걸려 있었으나, 한편으론 쓴맛이 잔뜩 느껴졌다. 전체적으로는 무척이나 씁쓸한 웃음이었다.
스텔라도 그동안 마음 고생이 심했을 것이다. 태양의 교황은 언니를 살릴 방법을 찾느라 힘들어하고, 달의 교황이 희생해야 하는 시간은 점점 다가오는데 그 방법은 오리무중이었으니까.
“다녀오세요, 귀빈님. 기다리고 있을게요.”
“좋은 결과를 기원하겠습니다.”
스텔라와 셀레네의 인사를 받으며 빛나는 문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눈을 감았다 뜨자, 저번처럼 황금색의 스테인드글라스 너머로 내리쬐는 태양빛과 드높은 계단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한 명의 여인이 보였다.
여인의 등 뒤편에서 태양빛이 들어오는지라, 풍성하기 짝이 없는 황금색의 머리카락과 겹쳐 말 그대로 후광이 비치는 것만 같았다.
“어서오십시오, 귀빈이시여.”
싱긋, 자애로운 미소를 지어보인 플로레타가 계단을 한 발짝씩 내려오기 시작했다.
여전히 노출도가 어마어마한 옷이었다. 고작 끈 하나로 가려진 은밀한 부위는 절대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노출도가 너무 높아서 실질적인 의미는 거의 없었다.
흔들릴 때 마다 푸릉푸릉 소리를 낼 것만 같이 커다란 가슴도 여전했다. 나는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지 않기 위해 최대한 필사적으로 플로레타와 시선을 마주쳤다.
그러고도 시야 한 구석에서 흔들려대는 가슴은 어쩔 수가 없었다. 얇디 얇은 시스루에 불투명한 끈 한 장이 가슴을 고정하는 전부이다 보니, 리제보다도 출렁임이 훨씬 더 컸다.
계단을 다 내려온 태양의 교황이 내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키가 나보다 작았기에, 자연스레 플로레타가 나를 올려다보고 내가 플로레타를 내려다보는 모양새가 되었다.
“제게 하실 말씀이 있으신줄로 압니다.”
“네. 교황 성하께 드릴 부탁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부탁이라…… 어떤 부탁이신지요?”
“제게, ‘일식’을 가르쳐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
항상 자애롭고 자비로운 웃음만이 떠올라 있던 그 얼굴에, 작은 균열이 생겨났다. 플로레타는 곧 얼굴에 떠오른 균열을 수습하고선 다시 자애로운 미소를 띄웠다.
“대체 어디서 일식의 정보를 들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역시 대단하신 분이시군요.”
후훗, 플로레타가 작게 웃었다. 아주 짧은 시간동안 흘려진 웃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슴이 위아래로 또다시 출렁이며 스스로의 존재감을 한껏 과시해댔다.
“귀빈께서 원하신다면 가르쳐주지 못할 것도 없습니다. 허나, 한가지 조건을 달아도 괜찮을런지요?”
“어떤 조건 말이죠?”
“무엇을 위해 사용하려 하십니까?”
또각, 하이힐 소리가 들렸다. 그렇지 않아도 바싹 붙은 것이나 다름없던 우리 둘 사이의 거리가 한층 더 줄어드는 소리였다.
“일식이란, 그 존재를 안다는 행위조차 극히 드물게 허락되는 신성 주문입니다. 헌데, 그러한 주문을 어디에 쓰시려 하기에 배움을 청하시는 것인지요?”
올 것이 왔구나.
나는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단단히 먹은 다음, 플로레타의 눈을 똑바로 마주보고 입을 열었다.
“달의 교황을…… 아니, 교황 성하의 언니를 구해드리려 합니다.”
“…….”
쩌적, 플로레타의 표정에 어마어마한 균열이 생겨났다.
들어갔던 문으로 다시 나왔다.
스텔라와 셀레네가 어떻게 되었냐는 눈빛을 보냈다. 나는 말 없이 무기를 톡톡 건드렸다. 스텔라의 얼굴이 확 펴졌고, 셀레네의 분위기도 눈에 띄게 밝아졌다.
다음으로 찾아가야 할 대상은 달의 교황이었다. 이번에는 셀레네가 길을 안내했고, 스텔라와 내가 그 뒤를 따랐다. 나는 셀레네를 따라가면서 조금 전의 일을 떠올렸다.
플로레타는, 울었다.
교황으로서의 위엄도, 직위도, 명예도.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언니를 아끼는 한 명의 여동생이 되어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내 말을 들은 직후에는 그게 무슨 소리냐며 더듬거리다가, 게임에서 교황을 설득할 때 나왔던 선택지를 입에 담자마자 날 끌어안은 채로 눈물을 터뜨렸다.
계시의 해석. 그게 바로 플로레타를 위한 설득이었다.
교황이라면, 신에게 누구보다 가까이 닿아 있는 태양의 교황이라면 본능적으로 그 해석의 진위 여부를 파악할 수 있을테니 거짓말이라고 몰아세워질 염려도 없었다.
태양의 교황 혼자서는 완벽한 해석이 불가능하더라도, 플레이어는 가능하다. 애초에 플레이어가 계시의 내용을 해석해주는 것이 DLC 스토리 중 하나였다.
원래는 조금 더 복잡한 퀘스트들을 거쳐야 하지만 그냥 다 스킵해버렸다. 계시의 바리에이션 따위는 이미 다 외워버린지 오래였기에.
내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플로레타는, 정말 언니를 살릴 수 있는거냐며, 자기 손으로 언니를 죽이지 않아도 되는거냐며 내 품에 얼굴을 파묻고 한참을 흐느꼈다.
나중에는 너무 크게 울어서 반쯤 쉬어버리다시피 한 목소리로 일식을 가르쳐주었을 정도였다. 그러고도 다녀오겠다는 내 말에 또 울음을 터뜨렸던 건 덤이었다.
“이곳입니다.”
셀레네는 어느 커다란 성당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태양의 대성당처럼 엄청나게 커다란 건물이었지만, 그 색감은 정반대였다.
태양의 대성당이 황금과 보석으로 장식된 건물이었다면, 달의 대성당은 은과 백금으로 장식된 건물이었다. 재료가 재료인지라 전체적으로 훨씬 더 어스름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 이외의 다른 것들은 동일했다. 무지막지한 크기라든가, 하늘을 찌르기라도 할 것처럼 높이 솟아있는 첨탑이라든가.
아직 달이 뜰 시간은 아니라서 그런건지, 태양의 대성당과는 다르게 주위에 기도하는 사람은 커녕 지나다니는 사람조차도 없었다.
셀레네가 우리를 이끌고 대성당의 뒤쪽으로 향했다. 마치 달빛을 내뿜듯 은색으로 빛나는 문이 보였다. 스텔라와 셀레네는 각각 문의 양쪽 옆에 멈춰섰다.
“들어가십시오. 귀빈이시여.”
“달의 교황께는 언질을 드리지 않아도…….”
“이미 존재를 파악하셨을겁니다. 무의미한 행동에 불과합니다.”
알아서 납득한 나는 은색의 문 앞에 섰다. 하긴, 달의 교황씩이나 되는 사람이 자기 대성당에 들어오려는 누군가를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리고, 아무런 방해를 하지 않는 시점에서 이미 들어와도 좋다는 허락을 내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정말로 날 거부할 심산이었다면, 진작 막아세웠을테니까.
“귀빈이시여, 부디 무탈하시기를.”
셀레네의 걱정과 함께 은회색 달빛을 내뿜는 문 안으로 발을 내딛었다. 환한 빛이 눈꺼풀을 찔러댔다. 눈을 감고 계속해서 걸어갔다.
그러다, 어느 순간 눈앞의 빛이 사그라든 다음에야 천천히 눈을 떴다.
은색이 가득한 공간이었다.
태양의 교황이 있던 곳과는 정반대로, 대리석과 은, 백금을 사용해 치장된 어스름하고 싸늘한 방. 분명 바깥은 아직 낮일텐데, 스테인드글라스로는 달빛이 비쳐들고 있었다.
“이곳에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그 정중앙의 높이 솟아있는 계단 위에서, 나를 등지고 스테인드글라스를 쳐다보던 여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플로레타만큼은 아니었지만, 역시 머리카락이 상당히 풍성했다.
왠지 모르게 사람을 압도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날 향한 적대감을 숨길 기색이 없는 듯 했기에 더욱 그랬다. 내가 주춤거리고 있으려니, 달의 교황이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이곳에는 무슨 일로 오셨냐고 물었습니다.”
또각거리는 하이힐 소리와 함께, 그 몸이 천천히 회전했다. 머리 뒤로 늘어진 은발은 마치 폭포처럼 찰랑이며 달빛을 받아 더욱 선명한 은색으로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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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보석과도 같다고 여겨지는 보라색 눈동자가, 오롯이 나를 향했다.
“정녕 대답을 거부하시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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