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Reincarnated into a Game Filled with Mods RAW novel - Chapter (89)
서로가 서로를 마주보는 자세가 되고 나서야, 나는 달의 교황이 지닌 외모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달 그 자체라고 부르기에도 손색이 없을, 유려한 은회색의 머리카락이 목 뒤로 길게 늘어졌다. 그 끝은 바닥에 닿기 직전이었다.
눈 사이로 길게 내려온 앞머리는 거의 입술과 맞닿기 직전이었다. 보석을 그대로 박아넣었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아름다운 자색의 눈동자가 은회색 머리카락 사이에서 반짝였다.
목에는 눈동자와 똑같이 자색의 보석이 박힌 장식품을 달고 있었다. 태양의 교황이 착용하고 있는 것과 비슷하게 생긴 장식품이었다.
옷차림 역시 다를 바 없었다.
피부가 고스란히 비치는 시스루에 가까운 옷. 맨살이 드러난 부분보다 드러나지 않은 부분을 찾기가 더 힘든 옷. 사실상 태양의 교황과 마찬가지인 차림새였다.
중요부위를 가린 옷이라고는 아주 얇은 천 한 장이 전부에, 따로 걸친 것은 가터벨트와 스타킹 뿐이라는 사실 역시 동일했다. 눈 둘 곳이 전혀 없다는 것도.
그나마 소매 부분의 면적이 훨씬 더 작다는 것 정도가 차이점이었는데, 사실상 무의미한 차이에 불과했다. 몸 전체가 헐벗은 것과 다름없는 시스루로 감싸진 상황에 그게 들어오겠는가.
ㅡ또각.
대리석 바닥을 울리는 하이힐 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달의 교황이 한걸음 한걸음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풍성한 은발 뒤로 달빛이 마치 후굉처럼 비쳐들었다.
플로레타를 만나러 갔을 때와 비슷한 상황이었지만,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태양의 교황이 나를 맞이하기 위해 다가오는거라면, 달의 교황은 나를 추궁하기 위해 다가오는 쪽에 가까웠다. 표정도 무뚝뚝한 걸 넘어 살벌할 지경이었다.
‘……분명 긴장이 돼야 할텐데.’
하지만,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세차게 흔들리며 스스로의 존재감과 탄력을 과시해대는 저놈의 가슴 때문에 하나도 집중이 되질 않았다. 속으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쪽을 싸늘하게 응시하는 본인은 더없이 진지한 표정이건만, 옷차림과 가슴 탓에 컨셉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여기서 다른 반응을 보이기라도 했다간 말 그대로 대참사였다.
나는 입을 꾹 다물고 필사적으로 평정심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달의 교황은 이런 내 행동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 듯, 아랫배 앞에서 깍지를 끼고 있던 손을 풀었다.
“끝까지 입을 다물고 있으시겠다면, 그리 하십시오. 이야기는 여기서 끝입니다.”
팔이 가볍게 휘저어졌다. 그러자 내가 들어왔던 문이 한층 더 세찬 달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제법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내 발밑에 그림자가 생길 정도였다.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하지 않겠습니다. 무엇을 위해서든, 제 도움을 구하려 들지 않는 것이 현명한 선택일겁니다.”
“알고 있습니다. 저도 교황 성하께 도움을 구하러 온 것이 아니니까요.”
내 말에 루나의 눈썹이 작게 꿈틀거렸다.
“태양의 교황이 선사하는 총애에도 한계는 있을 것입니다, 이방인. 선을 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선택입니다. 다시 묻겠습니다. 이곳에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월식’에 대한 가르침을 청하기 위해 왔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허락은 절대로 불가하겠죠. 단지, 교황 성하께 드릴 말씀이 있어 찾아뵈었을 뿐입니다.”
“할 말이라…… 참으로 시건방지십니다.”
계단을 내려오는 발걸음이 미세하게 빨라졌다. 자연히 가슴의 출렁임도 같이 격해졌다.
“겨우 한 마디 대화를 위해, 교황의 처소에 함부로 발을 들였단 말입니까?”
“그럴 가치가 충분한 일이라서요.”
내 뻔뻔하다고 느껴질만큼 당당한 모습에, 달의 교황은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다물었다. 그 틈을 타서 나는 재빨리 쐐기를 박았다.
“성국 지하의 괴물. 그것과 연관된 일입니다.”
또각거리는 하이힐 소리가 멎었다. 동시에 루나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등 뒤에서 쏟아지는 달빛 덕택에 그렇지 않아도 하얬던 피부가, 지금은 생기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확인할 수 없는 수준까지 창백해져 있었다.
“……지금, 무엇이라 하셨습니까.”
“저는 교황 성하와 싸우러 온 것도, 월식을 받으러 온 것도 아닙니다. 성국 지하에 잠든 괴물을 처치하고 오겠다 말씀드리려는 것, 그것이 여기 온 목적의 전부입니다.”
“한 마디만 더 지껄인다면 신성 모독으로 간주하겠습니다. 그런 새빨간 거짓말을ㅡ”
“교황 성하께서도 이미 만월로부터 새로운 계시를 전달받으셨을텐데요?”
정곡을 찔렸는지, 달의 교황은 몸을 움찔거리며 하려던 말을 멈췄다.
계시란 어느 한 명의 교황에게만 따로 내려지는 것이 아니라 두 교황에게 같이 내려지는 것이다. 태양과 달을 서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듯, 교황들 역시 그랬다.
태양의 교황이 내가 그 괴물을 무찌르는 미래와 연관된 계시를 받았다면, 달의 교황도 똑같이 내가 그 괴물을 무찌르는 미래와 연관된 계시를 받는다.
플로레타가 보증해준 사실이니 틀림없었다.
“……하고 싶은 말이 무엇입니까. 그런 말로 제 마음을 돌릴 수 있으리라 생각하셨습니까?”
“그럴 리가요. 절대로 아닙니다.”
지금 당장 달의 교황을 설득할 필요는 없었다. 내가 어떤 방법으로 설득을 시도하든지, 이미 마음을 닫아버린 상태라 완강히 거부하기만 할거다. 사실상 밑 빠진 독에 물붓기였다.
자신을 구해주겠다는 동생에게조차 쓸모없는 짓을 한다며 손찌검을 날렸던 사람이 루나다. 저 결연한 의지를 깨부수려면 약속이 아니라 결과가 필요했다.
‘계시가 내려왔으니 희망을 완전히 내려놓은건 아닐테지만.’
루나 본인도 계시를 받고 설마 하는 생각을 품기는 했을 것이다.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는 순간에 느껴질, 지독한 좌절감을 피하기 위해 혼자서 움츠러들고 있을 뿐.
“교황 성하께서 지니신 의지를 고작 저 따위가 꺾을 수는 없겠죠.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어차피 내 목적은 처음부터 달의 교황을 설득하려던 것이 아니었다. 월식을 받는다는 건 더더욱 기대조차 안 했고. 애초에 설득을 하러 온 게 아닌데 그런 결과를 얻을 수가 있겠는가.
이건 혹시라도 달의 교황이 무력을 행사하는 걸 막기 위한 사전 조치에 불과했다.
성국 지하로 향하는 입구가 열렸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리기라도 했다간, 십중팔구 그 장소로 찾아와 이게 무슨 짓이냐며 길길이 날뛸 것이 분명하니까 말이다.
만약 보스를 때려잡고 나왔는데 바깥에서 달의 교황이 날뛰고 있다면 사후 처리가 심각하게 곤란해진다. 그런 일이 발생하기 전에 미리미리 전달해두는 게 맞았다.
“하지만, 교황 성하께서 손해를 보실 일은 절대로 없으실겁니다. 장담하지요. 제가 허세꾼이라 괴물을 토벌하러 들어갔다가 죽어버린다면 그걸로 끝, 입구를 다시 봉쇄하면 됩니다. 처치에 성공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결과일테고요.”
“…….”
“압니다. 헛소리처럼 들리시겠죠. 이단심판관님도, 이단심문관님도, 태양의 교황 성하도 처음에는 절 믿지 못하셨으니까요.”
특히 셀레네는 도저히 못 믿겠다며 내 실력을 직접 검증하기까지 했었다. 나한테 완전 박살나다시피 압도당한 다음에는 얌전히 납득했지만.
“믿어달라고도 하지 않겠습니다. 이게 그만큼 허무맹랑한 말이라는 건 제가 누구보다 잘 압니다.”
나는 덤덤히 말을 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약속드릴 수 있습니다.”
자색의 눈동자가, 아주 살짝 떨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교황 성하께서 스스로를 희생하시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으리라고요.”
“월식은…….”
대성당을 나오자, 근처에서 기다리던 셀레네가 말꼬리를 흐리며 질문했다. 나는 고개를 좌우로 살짝 흔들었다. 그 의미를 단번에 알아차렸는지 둘 모두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잘 풀린 편이지.’
최악의 경우에는 내게 덤벼드는 것 까지도 각오를 했었다. 하지만 그런 내 각오가 무색하리만치, 달의 교황은 별다른 행동 없이 나를 보내주었다.
원한다면 언제든 전투 수녀들과 이단심문관을 호출할 수 있었을테지만, 루나는 그러지 않았다. 어쩌면 교황 스스로도 마음 한켠에 나를 믿고 싶은 욕망이 있었을지 모를 일이었다.
“월식은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인 정도입니다. 신성 주문은 일식만으로도 충분해요.”
“……예전부터 느끼고 있는 거지만, 귀빈님은 정말로 자신감이 넘치시네요. 뭔가 단단히 믿는 구석이 있으시기라도 한 것처럼요.”
스텔라의 말에 나는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둘 모두, 내가 대체 뭘 믿고 저리도 자신만만한가 싶기는 할 것이다.
기사단장들이야 그놈의 ‘비밀’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셀레네와 스텔라한테는 그런 말을 안 했었으니까.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굳이 내쪽에서 먼저 말해주고 싶지도 않았고.
그 다음부터는 딱히 대화를 주고받을 분위기도 아니었기에, 나는 속으로 신에게 버림받은 피조물의 패턴을 되짚었다. 지금의 나로서는 무조건 초장기전을 바라봐야 했다.
브닼 4의 DLC들은 전체적으로 난이도가 몹시 지랄맞다는 평가를 받는데, 그 DLC의 최종보스 답게 방어력은 어이가 없는 수준에 체력까지 미쳐돌아간다.
그냥 방어력과 속성 저항 관련해서는 루치아 1페이즈의 상위호환이라고 보면 편했다. 그런데 지금의 나한테는 놈의 약점 속성을 공략할 방법이 딱 하나, 일식밖에 없었다.
초장기전은 필연적인 흐름이었다.
“도착했습니다.”
앞서가던 두 명이 발을 멈췄다. 입구 자체가 대성당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장소였기에 도착까지는 금방이었다. 일단 겉모습은 평범한 건물처럼 보였다.
괴물이 잠든 장소에 교황청이 만들어진 이유가 교황들의 신성력으로 괴물을 억누르기 위해서라던데, 애석하게도 별 소용은 없는 행동이었다.
놈은 안에서 못 나오는게 아니라 안 나오는 중이었으니까.
자기가 원한다면 언제든 교황이 펼쳐놓은 신성 결계를 박살내고 나올 수 있었다. 놈이 그러지 않는 이유는 단순히 힘을 덜 회복했기 때문에 불과했다.
전성기에 한참 못 미치는 힘조차 교황 둘을 합친 것보다 훨씬 강했으니, 괜히 신에게 버림받은 피조물이라는 거창한 이름이 붙은 게 아니었다.
정작 브닼 4의 주인공은 놈의 집이나 다름없는 장소에 단신으로 쳐들어가서 그걸 때려잡고 나오는, 훨씬 더 미친놈이지만.
“이것으로 문을 열고 들어가시면 됩니다. 저희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부디, 무사히 돌아오십시오.”
셀레네가 낡은 열쇠를 건넸다. 그걸 받아들고 나무로 된 문 앞에 다가갔다. 검으로 톡 치면 부서질 것 같이 생긴 문이었다.
당연히 겉모습만 이런거다. 그 실체는 교황들이 직접 펼쳐놓은 신성 결계였다. 괴물의 존재를 숨겨야 하니 외형은 어쩔 수 없었다.
“모쪼록 무탈하세요, 귀빈님. 무운을 빌게요.”
스텔라의 작은 응원을 들으며 열쇠 구멍에 열쇠를 집어넣었다. 달칵, 잠금이 해제되자 문이 빼꼼 열렸다. 그 문고리를 잡고 단숨에 활짝 열어젖혔다.
순간, 안에서 검은 그림자가 뻗어나와 나를 덮쳤다. 나는 저항할 새도 없이 그림자에 둘러싸였다. 등 뒤에서 스텔라와 셀레네가 헛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내 몸은 그림자에 휩싸여 순식간에 안으로 빨려들어갔다.
문이 닫혔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