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Reincarnated into a Game Filled with Mods RAW novel - Chapter (9)
우리가 연무장으로 이동하는 동안, 리제는 정말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내게 말을 걸어왔다. 대체 뭘 하면 사람이 저렇게까지 활발하고 기운차게 살 수 있는건지 싶었다.
특히 내가 왜 마녀의 저주에 걸렸는지를 집중적으로 파헤치려 들었는데, 나는 그 유도심문들을 전부 다 저주 탓에 기억이 안 난다거나 잘 모르겠다며 어물쩡 넘겨버렸다.
그러자 내 의도를 파악한 듯 나중에는 아예 질문 자체를 바꿔버렸고.
질문공세를 견디다 못한 내가 아이리스와 에리카에게 도와달라는 눈빛을 보내봤지만 별 소용은 없었다.
아이리스는 자신이 말린다고 해서 말릴 수 있는 인간이 아니니 그냥 받아들이라는 말과 함께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에리카는 제발 체통 좀 지키라며 언행 하나하나를 지적하다가, 나중에는 지적하기를 포기해버렸는지 미안하다며 내게 사과를 건넸다. 리제가 뿌듯한 미소를 짓는 건 덤이었다.
결국 모든 관심을 감당하는 건 오롯이 내 몫일 수 밖에 없었다.
바로 옆에 찰싹 달라붙어 쉬지 않고 조잘대는 리제에게 얼마나 시달렸을까, 아이리스가 발걸음을 멈췄다.
“여기가 연무장이다.”
‘뭐야, 왜 이렇게 커?’
내 앞에는 게임 속 연무장보다 족히 서너배는 더 넓어보이는 크기의 거대한 평지가 펼쳐져 있었다. 이것도 기사단의 숙소가 평범한 건물에서 커다란 성으로 바뀐 것의 여파인건가.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크기는 훨씬 더 넓어졌지만 전체적인 풍경이 바뀌지는 않았다. 그냥 게임 속의 장소를 좌우로 늘린 것에 가까웠다.
저 멀리 창고가 보였고, 한쪽 벽에는 목검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바닥이 딱히 정돈되어 있는 건 아니었는지 바람이 불 때마다 흙먼지가 풀풀 날렸다.
방금 전까지도 에리카에게 뭔가를 속삭이더니, 어느 순간 내 옆으로 다가온 리제가 슬쩍 입을 열었다.
“어때, 신입. 마음에 들어?”
“그냥 평범하다는 느낌밖에는ㅡ 잠깐, 신입이요?”
“그래, 신입. 왜? 뭐 문제라도 있어?”
“당연히 있죠. 전 아직 입단 시험도 안 치렀는데요.”
“아이리스가 사람을 잘못 봤을 리가 없잖아. 그리고 아까 걱정은 할 필요 없다고 자신있게 말하는거 못 들었어? 그런 말을 할 정도라면 합격은 기정사실일테니까 신입이지. 너무 걱정하지 마, 나도 살살해줄테니까. 아, 물론 너무 살살은 말고.”
리제는 그러면서 찡긋, 하고 윙크를 했다. 적 강화 모드가 안 깔려 있었다면 납득했을테지만, 그게 아니었기에 나는 간신히 입꼬리를 끌어올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시험 방식은 1대1 대련이고, 아이리스 기사단장을 제외한 나머지 기사단장들 중 과반수가 입단에 동의하면 통과입니다. 클라우디아 기사단장이 자리를 비웠으니, 저랑 언니 둘 중 한 명만 동의해도 되겠네요. 과반수는 아니지만 어쩔 수 없겠죠.”
“클라우디아가 없다고?”
에리카의 설명에 아이리스가 의문을 표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내 기억속에는 클라우디아라는 캐릭터의 이름도 없었다. 그냥 주요 NPC들은 전부 다 여자로 바뀌었다고 생각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 같았다.
이거, 어디까지가 게임이랑 일치하고 어디부터가 게임이랑 다른지도 연구를 좀 해봐야 하겠는데.
“클라우디아? 걔 마물 잡으러 갔어. 너 떠나고 얼마 안 가서 영주 명령 받고 나갔으니 모를 만 하겠네. 아마 앞으로 이틀이면 돌아올걸?”
영주 의뢰로 마물 퇴치라. 저거면 원본 NPC가 뭔지 알아차리기에 충분했다.
아이리스는 진작에 알았고, 클라우디아도 알아차렸고. 이제 남은 건 리제랑 에리카인가. 캐릭터들의 윤곽이 대강 잡히는 느낌이었다.
저 셋에게는 비밀로 해야겠지만, 클라우디아라는 이름의 기사단장은 아마 토벌에 실패하고 크게 다쳐서 돌아올거다. 게임의 스토리가 그랬거든.
당연히 플레이어가 그걸 때려잡을 수도 있다.
그 이후부터가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튜토리얼 지역은 브닼 4의 지향점과 방향성을 보여주는 장소에 불과하고, 이번 입단 시험도 게임의 시스템을 설명해주는 기초 전투의 느낌이니까.
적 강화 모드가 깔려 있으면 기초 전투가 아니라 정말로 반쯤 보스전을 치러야 한다는 게 문제일 뿐.
“그런가.”
아이리스가 짤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련 상대는ㅡ”
“나나나나나! 내가 할게! 무조건 나야!”
리제가 번쩍 손을 들었다. 그 반동으로 얇은 민소매 한 장에 감싸인 가슴이 크게 출렁였다. 아이리스는 그래도 상관없겠냐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저렇게까지 나랑 한 판 붙기를 원하는 걸 보면 나한테 선택의 여지는 없는거겠지. 고개를 끄덕였다. 리제는 내가 요청을 받아들이자마자 함박웃음을 지으며 폴짝폴짝 뛰었다.
그런 리제의 뒤로 에리카가 다가갔다.
“여기요, 언니.”
언제 가져왔는지 양 손에 쌍단검이 들려 있었다. 리제가 그걸 받아들자 주위에 싸늘한 냉기가 감돌았다. 쌍단검의 한쪽 날이 푸른색으로 바뀌고, 서리가 맺혔다.
아, 저거 원본 NPC가 하필이면 그 놈이네.
‘쓰읍.’
속으로 혀를 찼다. 역시 파란 머리라서 얼음 속성인건가.
푸른색 불꽃을 써서 머리색이 청색이라거나, 아니면 붉은색 얼음을 써서 머리색이 적색이라거나 하는 반전을 기대했는데.
“너는 그 무기를 사용하면 되니 딱히 다른 무기를 줄 필요는 없겠지? 혹여라도 다른 걸 쓰고싶다면 말해라. 빌려줄테니.”
아이리스가 내 허리춤에 매어있는 피 묻은 검을 가리켰다.
게임과 현실이 혼합되며 여자들이 현대적인 옷차림을 하는 게 당연하다고 받아들여지는 것처럼, 입단 시험을 진짜 무기로 치러야 한다는 사실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리제는 물론이고 아이리스나 에리카마저도 힘조절 제대로 하라는 말만을 할 뿐, 시합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은 전혀 하고 있지 않은 듯 했다.
그나마 체력을 끝까지 깎는게 아니라 딱 절반까지만 깎으면 클리어라는 사실이 유일한 자비였다.
‘게다가 하필이면 상대도 원본이 그놈이고 말이지.’
리제의 원형이 되는 NPC는, 브닼 4에서 제일 더럽고 치사하고 짜증나는 상태 이상을 꼽으라면 당당히 첫 손가락에 꼽힐 ‘빙결’을 거는 보스였다.
빙결 게이지가 가득 쌓이면 플레이어 캐릭터가 4초간 얼어붙어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하고, 해제된 다음에도 30초간 이동 속도, 스태미너 자연 회복량, 전투 피로 자연 회복량이 크게 줄어들 뿐 아니라 구르기의 속도와 회피 거리, 무적 지속 시간까지도 반의 반토막이 난다.
하나만 있어도 더럽기 짝이 없는 디버프들을, 빙결 혼자서 다섯 개가 넘게 덕지덕지 달고 있는 것이다. 다른 상태 이상들은 디버프가 하나 아니면 많아봐야 둘밖에 안되는데도.
아예 제작사가 작정했다고밖에는 볼 수 없었다.
더 짜증나는 것은, 저런 속성 공격은 튕겨내기로 완벽하게 커버가 안 된다는 사실이다. 속성 공격을 완벽히 튕겨내려면 그에 맞는 대방패나 특대방패가 있어야 했다.
누적치가 아주 미세하긴 하다만, 방패 없이는 공격을 완벽히 튕겨내더라도 게이지가 조금씩 쌓인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이미 스트레스였다.
“그 무기는 뭐야? 날이 붉은색이네?”
내가 피 묻은 검을 빼어들자, 단검에 냉기를 두르고선 이리저리 휘둘러대던 리제가 신기하다는 듯 물어왔다.
“감옥에 있던 마물을 처치하고 얻은 무기다.”
“응? 마물? 감옥에 마물도 있었어? 그리고 그걸 잡았다니, 누가? 아이리스 네가?”
리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생각해보니 아직 감옥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설명 안 했었구나.
“설명하자면 길다. 대련이 끝나면 말해주도록 하지. 영주놈한테 올릴 보고서도 작성해야 하니까.”
“아, 그러네. 그 돼지새끼한테 보고도 해야 했지?”
“오늘 저녁 쯤 찾아가면 될거다. 그러기는 싫지만.”
이 도시의 영주는 게임에서랑 성격이 판박이인지, 무뚝뚝하기 짝이 없는 아이리스가 대놓고 싫다는 감정을 내비치는 건 물론이고 저 붙임성 좋은 리제한테도 돼지새끼라는 말을 듣고 있었다.
하다못해 에리카마저도 그 말을 듣자마자 지친 표정으로 입술을 짓씹을 정도였다.
“이제 쓸데없는 말은 됐다. 둘 다 준비해라.”
영주에 대해서는 더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아이리스가 억지로 대련을 진행시켰다. 나와 리제는 서로를 마주보고, 대련에 참가하지 않는 둘은 뒤로 멀찍이 물러났다.
쌍단검에서 냉기가 휘몰아치며 흰 안개를 조금씩 피워내기 시작했다. 얼음과 성에로 이루어진 안개였다. 불어오는 바람에 한기가 섞여들었다.
‘저걸 눈앞에서 직접 볼 줄이야.’
모니터 안에서는 많이 봤었는데.
피 묻은 검을 양손으로 잡고, 그 끝을 오른쪽으로 살짝 기울이며 자세를 낮췄다. 숨을 들이쉬자 폐 속까지 냉기가 파고들었다. 설마 이런것까지 빙결 게이지를 쌓지는 않겠지.
온갖 잡다한 것들을 죄다 걱정해야 하는지라 잔뜩 긴장한 상태인 나와는 달리, 리제는 여유만만한 표정으로 조금씩 다가오기 시작했다.
“뭘 그렇게 긴장하고 있어, 신입? 내가 설마 널 죽이기라도 할까봐 그래? 그럴 일은 절대로 없으니까 어깨에 힘 좀 빼도 돼.”
‘게임에서는 잘만 죽이던데.’
하고싶은 말을 속으로 조용히 삼켰다. 닼라 모드를 처음 깔았을 때, 이걸 클리어하느라 무지막지하게 죽어나갔던 걸 돌이켜보면 딱히 믿음이 가는 말은 아니었다.
“그 대신…….”
주변의 냉기가 급속도로 휘몰아쳤다. 앞으로 튀어나올 준비를 하는 모양이었다. 나도 공격을 받아칠 준비를 했다.
“조금 많이 아플거야!”
쾅,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거리가 좁혀졌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