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Saved Caesar RAW novel - Chapter 204
204화 : 2월의 여명
“차라리 별거하면 별거했지, 이혼은 허락 못 한다. 적어도 전쟁 중엔 안 돼!”
황실을 덮친 막장 드라마를 정리한 것은 아들들의 가정 붕괴에 몸져누웠다가 겨우 정신을 차린 빌헬름 2세였다.
전쟁 중에 황족의 이혼 스캔들이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터졌다간 황실의 위신과 지지도에 타격이 올 수가 있다.
그나마 아이텔 왕자 쪽은 평범한(?) 불륜 사건이니 전쟁이 끝나고 나면 가문 간의 합의를 통해 끝을 볼 수 있겠지만, 아우구스트 왕자의 경우엔 아니었으니까.
이쪽은 소문만 돌아도 스캔들이 터질 확률이 100%였던 만큼 조용히 덮는 것이 지금으로선 최선이었다.
독일 제국은 동성애 금지법이 있을 정도로 동성애에 매우 부정적이고, 빌헬름 2세부터가 독일 제국 버전 오스카 와일드 사건이자 군부를 뒤집어 놓은 동성애 스캔들인 오일렌부르크 스캔들 때문에 몸살을 앓았던 과거가 있었으니까.
“전선에서 돌아오니 난장판도 이런 난장판이 없네.”
형제 중 유일하게 아직 독신 타이틀을 달고 있는 요아힘이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휴가를 즐길 생각에 즐거운 마음으로 집에 돌아왔는데, 집이 활활 타고 있으니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후, 나는 저러지 말아야지.”
“결혼은커녕 아직 상대도 없는 사람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요.”
“러시아에 혁명이 터지기 일보 직전이라며? 올가가 곧 독일로 올 테니, 나도 내 마음을 전할 준비를 해야지.”
“하아……. 그 이야기는 아직 논의 중이라고 몇 번을 말합니까. 그렇게 쉽게 결정할 일이 아니라니까요?”
“한스야, 난 너만 믿는다.”
사람 속도 모르고 싱글벙글 웃으며 내 어깨를 토닥이니 요아힘.
요아힘아, 요아힘아. 가뜩이나 머리 어지러운데, 너까지 왜 그러니.
이러다가 황녀들 죽게 내버려 뒀다간 나에게 결투 신청이라도 하겠네.
물론, 레닌과 이미 이야기를 나눈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차르 일가를 죽게 내버려 둘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당장 로마노프 가족을 죽게 내버려 두었다간 요아힘 왕자가 날뛰기 전에 독일 제국을 구성하는 제후국이자 알렉산드라 황후의 친정인 헤센 대공국부터가 피눈물을 흘리며 미쳐 날뛸 테니까.
결국, 힘없는 관료인 나만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신세.
아직 한창 일해야 할 나이인데, 벌써부터 은퇴가 마려워지는 기분이다.
그런데, 내가 없으면 이놈의 제국이 잘 굴러갈 리가 없잖아.
안 될 거야, 아마.
“……독일 제국도 여러모로 일이 많은 모양이군요. 뭐, 힘내십시오.”
내가 회상을 끝내고, 구겨진 얼굴로 한숨을 내쉬자 로이드 조지 총리가 위로를 전했다.
볼이 패인 게 한눈에 보일 정도로 핼쑥해진 그레이 장관도 남 일 같지 않은지 마찬가지로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튼, 이게 다 전쟁 때문이다.
* * *
그로부터 며칠 뒤.
앞으로의 전쟁을 논하기 위한 프라하 회담이 끝났다.
영국 측은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 독일의 주도로 회담이 끝나서인지 아쉬워하는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우리가 식민지 쪽엔 관심이 없던 탓에 주워 먹을 것은 많아서인지 나름 만족한 얼굴로 돌아갔다.
솔직히 우리 독일 제국으로선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발행되는 식민지 기념 메달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나는 반란과 소요 때문에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은 식민지를 늘리는 것보다는 동유럽과 오스만&중동 쪽에 집중하는 편이 나았으니까.
당장 세계대전으로 인해 어느 열강이건 식민지를 유지할 역량이 줄고 있는 바람에 사양산업이 되어 버린 식민지 건설이다.
그러니 인제 와서 식민제국을 꿈꾸며 식민지를 늘리는 것보다는 유럽 패권을 얻는 것에 집중하는 편이 독일 제국으로선 더 이득이었다.
어쨌든 회담을 마무리 지은 후 협상국은 동맹국을 무너트리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하나로 단결할 것을 천명했고, 프라하 회담 소식을 들은 동맹국은 이를 갈며 결국 승리의 여신은 자신들에게 미소 지을 것이라며 정신 승리를 시전했다.
또한, 공식적으로 연합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팔켄하인은 곧 크나큰 변화가 있을 서부전선에 집중하기 시작했고, 그간의 공로로 드디어 참모총장이 된 루덴도르프는 카이저의 얘를 꼭 써야 하냐는 불퉁한 얼굴에도 불구하고 싱글벙글 웃으며 베를린에 입성했다.
그로부터 시간이 좀 더 흐른 1914년 2월 5일.
나는 드디어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는 순간을 맞이했다.
“들어간 지 벌써 2시간은 지난 것 같은데, 아직 멀었습니까?”
“침착하거라. 한스. 원래 아이를 낳기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법이란다. 그러니 조급해하지 말고 가만히 앉아 있으렴. 폐하께서도 조용히 있으시잖니.”
저건 조용히 있는 게 아니라 공포와 긴장감으로 몸이 완전히 굳은 것에 가까운 것 같은데.
그러나 아우구스테 황후의 말도 틀리진 않았다.
이렇게 밖에서 내가 정신이 나간 상태로 복도를 서성거려 봤자 안에서 고생 중인 루이제에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
그러나 아무리 진정하려고 해도 마음이 도저히 가라앉지 않는다.
첫 아이고 첫 출산이다.
19세기 초중반처럼 마취 없이 거대한 톱으로 다리를 수 분 내에 신속하게 자르는 것이 최선이었던 수준은 아니라지만, 의학 기술은 여전히 내가 보기엔 아직도 갈 길이 너무 멀었다.
덕분에 내 머릿속은 루이제와 아이가 잘못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으로 가득한 상태였고, 덕분에 일곱 아이를 낳은 아우구스테 황후의 조언에도 내 발은 여전히 가만히 있질 못하고 있었다.
대체 처남들은 이 순간을 어떻게 버틴 것일까?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조언이라도 들을 것을 그랬다.
벌컥─
긴장감과 두려움으로 가득한, 그 어떤 때보다도 길게 느껴졌던 시간이 지나고 마침내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
그리고 의사와 산파가 보는 내가 속이 터질 정도로 천천히 안에서 걸어 나왔다.
“루이제는! 루이제는 무사한가?!”
내가 어떻게 되었는지 물으려는 찰나 그동안 어떻게 가만히 있었는지 의문일 정도로 흥분한 빌헬름 2세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큰 목소리로 외쳤다.
이에 의사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방긋 웃었다.
“공주님과 아이 모두 건강합니다. 자, 직접 들어오셔서 확인해 보시죠.”
의사의 말에 나와 카이저는 누구 먼저랄 것 없이 분만실 안으로 들어갔다.
“아…….”
우리 두 사람의 발은 가쁘게 숨을 내쉬면서도 배시시 웃고 있는 루이제와 그녀가 안고 있는 자그마한 아이를 보자마자 똑같이 멈추었다.
“정말이지 장인이랑 사위가 똑같다니까.”
뒤에서 못 말리겠다는 듯한 아우구스테 황후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내 아이.
내 아이가 내 아내의 품에 안겨서 꼬무락거리고 있다.
지금 온몸 깊숙한 곳에서 솟아오르는 듯한 이 감정을 대체 무어라 설명해야 할까?
기쁨? 환희? 행복?
도저히 단어 하나와 말 한마디론 설명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이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오직 지금, 이 순간뿐이니라.
“후후, 한스. 뭘 그렇게 멍청한 얼굴로 서 있는 거야? 어서 이리에 와서 안아 줘. 우리 딸이 기다리고 있잖아?”
딸, 딸이구나.
아이가 놀랄까 봐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아 가며 조심스럽게 나와 루이제의 첫 아이, 작은 공주님을 안아 들었다.
아직 눈도 못 뜬 작은 아기지만, 따뜻한 체온이 그대로 전해져 온다.
나는 우리 딸을 아우구스테 황후에게 넘겨준 뒤 루이제의 손을 꼭 잡았다.
“고마워. 루이제. 내 아이의 엄마가 되어 줘서.”
“응. 아버지랑 어머니 앞에서 듣기엔 좀 부끄러운 말이지만 말이야. 뭐, 두 분은 지금 우리는 안중에 없는 것 같지만.”
그 말에 루이제와 내가 동시에 시선을 돌렸다.
“하하하하! 아우구스테, 보고 있소? 내 첫 손녀요. 루이제가 아기였을 때랑 꼭 빼닮았어!”
그리고 그곳엔 딸바보에서 손녀 바보로 진화한 카이저가 있었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 결혼한 왕자 중에서 자식이 있는 것은 빌헬름 황태자랑 아우구스트 빌헬름 왕자뿐인데 죄다 아들만 낳았기 때문이다.
즉, 현시점에서 빌헬름 2세는 손자밖에 없었는데, 여기서 가장 사랑하는 고명딸이 낳은 유일한 손녀가 태어났다?
딸바보가 손녀 바보가 되는 것은 그야말로 시간문제였다.
물론 예전엔 이런 장인어른의 행동이 조금 오버스럽게 느껴졌지만, 이제는 내가 딸 가진 부모가 되다 보니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것 같다.
와, 그러고 보니 루이제를 훔쳐 간 나는 완전히 개자식이었네.
“딸바보들이 둘로 늘었어…….”
“후훗, 남자들은 다 똑같은 법이지. 그나저나 아이의 이름은 정했니?”
“네, 어머니. 한스랑 미리 정했어요.”
남자 이름과 여자 이름 둘 다 말이다.
물론, 남자 이름은 다음을 기약해야 하겠지만.
“프리데리케.”
프리데리케 루이제 빌헬미나 아우구스테 마리 폰 초이.
그것이 우리 작은 공주님의 이름이었다.
프리데리케란 이름은 나와 루이제가 함께 정한 것이고, 두 번째 이름은 루이제가 자신의 이름을 따서 정한 것이었다.
그리고 빌헬미나와 아우구스테는 각각 루이제의 부모님이자 나의 부모님이나 마찬가지인 빌헬름 2세와 아우구스테 황후의 이름을 따온 것이다.
마지막으로 마리는 내가 정한 것인데, 나름 한국식으로 불러도 어색하지 않을 이름을 넣은 것이다.
그러니까 독일인으로선 프리데리케 폰 초이 여후작이겠지만, 한국인으로선 최마리가 되겠다.
음, 왠지 악역 영애 같은 이름을 지은 기분인데, 아무렴 어떤가.
나는 루이제와 함께 손을 맞잡고 프리데리케가 행복하게 건강하게 자라기를 기도했다.
부디 이 암울한 시대에 지지 않고 밝게 살아갈 수 있도록.
* * *
[……전쟁 중임에도 불구하고 독일 전역에서 황실의 새로운 일원이자 황제 폐하의 첫 손녀의 탄생을 축하하고 있습니다. 또 한 명의 작은 친척을 얻게 된 영국 왕실을 비롯한 유럽 왕실에서도 축하 전보가──뚝!]“오늘 같은 날에 황족이 하나 늘어났단 소식을 들을 필요는 없겠지.”
그것이 ‘나와 계약해서 러시아를 무너트려 줘!’라며 실실 웃으며 노예계약서를 들이민 가증스러운 한스 폰 초이의 딸이라면 더더욱.
“그리고리, 트로츠키나 다른 이들의 소식은 아직인가?”
“트로츠키는 아직 스페인에 있고, 카메네프 또한 시베리아 한가운데에 있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다들 페트로그라드로 돌아오려면 시간이 꽤 걸릴 것으로 보입니다.”
“안타깝게 되었군.”
자신과 함께 스위스에서 독일 열차를 타고 러시아로 돌아온 그리고리 지노비예프(Григо́рий Евсе́евич Зино́вьев)의 말에 레닌이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한 일을 앞둔 상황에 볼셰비키의 중진들은 죄다 페트로그라드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으니.
물론, 이는 레닌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러시아 인민들이 이리 빨리 들고일어날 줄은 그들의 분노를 부추긴 레닌조차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으니까.
만약 독일과의 거래가 조금이라도 늦었더라면 자신조차 일이 터지고 난 뒤에야 돌아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을 기다릴 시간은 없네. 푸틸로프 공장의 노동자들까지 총파업에 동참했어. 혁명은 시작되었고, 더는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네.”
푸틸로프 공장은 러시아 제국 최대의 금속 공장.
덕분에 어제 갑자기 시작된 파업 참가자는 이제 십만 단위를 넘어가기 시작했고, 레닌의 경쟁자인 멘셰비키와 자유주의자들도 서둘러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니 우리도 나가세나, 그리고리. 동지들이 이 광경을 보지 못하는 것은 아쉽지만, 우리라도 역할을 다해야 하지 않겠나?”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레닌 동지.”
레닌과 지노비예프는 서로를 향해 미소 지으며 건물 밖으로 나갔다.
“우리에게 빵을 달라!”
“전쟁 반대, 전제 타도! 전쟁 반대, 전제 타도!”
“페트로그라드를 피로 물들인 차르에게 복수를! 라스푸틴에게 딸들을 바친 독일인 황후에게 죽음을!”
페트로그라드의 중심부를 관통하는 넵스키 대로를 포함한 모든 거리가 무능한 차르와 패배로만 가득한 전쟁에 지친 노동자들과 민중들로 가득 찼다.
곳곳에서 인터내셔널가와 노동자 마르세예즈가 울려 퍼지고, 팻말과 붉은 깃발이 나부꼈다.
저 앞에 장교들이 병사들을 이끌고 분노한 인민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추운 겨울바람에도 불구하고 땀을 연신 흘리고 있었지만, 병사들은 물론 카자크들조차 더는 못하겠다는 듯 시위대에 합류하거나 역으로 장교들을 향해 총을 겨누었다.
이 얼마나 고대하고 고대하던 광경인가.
이 얼마나 감미롭고 아름다운 소리인가.
“기립하시오. 기립하시오. 이것이 인터내셔널이니.”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전제의 쇠사슬을 끊어 내고 온 세상의 주인이 되어라.
레닌은 작게 중얼거리며 붉은 물결이 뒤덮은 페트로그라드를 응시했다.
1914년 2월 10일.
율리우스력을 사용하는 러시아 달력으론 1월 28일.
러시아 혁명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