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Saved Caesar RAW novel - Chapter 210
210화 : 다가오는 붉은 혁명, 그리고 의심
“빌리!”
“니키!”
1914년 3월 16일.
로마노프 가족이 독일에 도착했다.
카이저와 차르는 오늘만큼은 승리자와 패배자라는 메꿀 수 없는 차이를 잊고 서로를 포옹하며 다시 보게 된 가족의 얼굴에 반가움을 감추지 않았다.
“알릭스, 엘리자베트 언니! 둘 다 무사해서 다행이야.”
“이레네!”
알렉산드라 황후와 새하얀 수녀복을 입고 있는 엘리자베타 대공비도 요즘 항공모함 빼앗겼다고 부루퉁해져 있는 하인리히 왕자의 아내이자 자매인 이레네 왕자비와 부둥켜안고 눈물을 터트렸다.
“오랜만입니다. 폐하.”
“한스 폰 초이, 친애하는 우리 당조카사위 아니신가! 자네가 나와 내 가족들을 구하기 위해 많은 애를 썼다는 것은 이미 들었네. 정말 고맙네.”
“하하하하…….”
니콜라이 2세가 반가운 얼굴로 내 어깨를 토닥이자 입에서 멋쩍은 웃음이 절로 나왔다.
차르가 근본은 착한 사람이란 것은 알고 있는데, 지은 죄가 죄다 보니 마냥 살갑게 대하기가 좀 그렇단 말이지.
“빌리가 사위 하난 잘 뒀어. 자네 같은 친구가 내 신하로 있었으면 러시아 제국이 무너지지도 않았을 텐데.”
스톨리핀 있었잖아. 죽었지만.
다만, 스톨리핀이 죽은 것은 수많은 불순분자를 스톨리핀의 넥타이에 목매단 스톨리핀 그 개인의 업보라 차르 탓이라고 할 순 없었다.
“그나저나 딸이 태어났다고?”
“예, 프리드리케라 합니다. 저와 같은 검은색 머리카락에 루이제처럼 푸른 눈동자를 지닌 예쁜 아이죠.”
“좋을 때지. 지금 시간을 소중히 여기게. 아무리 후회해도 흘러간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으니까.”
후회해도 이미 너무 늦어 버린 자신의 상황이 떠올랐는지 씁쓸한 미소로 대화를 마무리 지으며 가족들의 곁으로 돌아가는 마지막 차르.
그가 조금만 유능했더라면, 하다못해 러시아 제국이 절대왕정에 대한 고집을 버리고 제대로 된 입헌군주제로 전환했다면 로마노프 왕실의 비극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을 텐데 여러모로 안타까운 일이다.
“초이 후작님, 오랜만이에요.”
“올가 여대공비님. 에드워드 폐하의 장례식 이래로군요. 건강해 보여서 정말 다행입니다.”
아버지가 가니까 이번엔 딸이 왔다.
“제 가족을 구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독일 제국에게 적국의 군주였던 제 아버지를 구한다는 결정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피는 물보다 진한 법이니까요. 다만 에른스트 루트비히 대공께서도 극성이라 저로서도 여간 고생이 아니었습니다만.”
게다가 대공의 말을 무시할 수도 없었던 것이 헤센 대공국의 주인, 헤센다름슈타인 가문은 러시아 황실과 독일 황실은 물론이고, 영국 왕실의 인척이기까지 한 명문가 중의 명문가다.
당장 에른스트 루트비히 대공과 그 남매들부터가 빅토리아 여왕의 차녀이자 본의 아니게 혈우병이란 지독한 유전병을 아이들과 그 후손들에게 물려준 앨리스 공주의 자식이니까.
게다가 남매 중 장녀인 밀포드 헤이븐 후작부인 빅토리아의 경우엔 얼마 전 처칠이 쫓겨나자 다시 해군으로 복귀한 루트비히 폰 바텐베르크 공자의 아내이기까지 했으니, 헤센다름슈타인 가문의 위세가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있으리라.
‘다만, 이렇게 강대했던 헤센다름슈타인 가문도 원 역사에선 하루아침에 몰락하지만.’
알렉산드라 황후는 물론, 세르게이 대공에게 시집간 엘리자베타 대공비가 러시아에 남아 수녀답게 남들을 돕다가 갱도로 끌려가 폭사 당하는 비극도 비극이었지만, 1937년에 발생한 헤센 대공가 비행기 추락사고로 인해 가문원들이 통째로 전멸해 버렸기 때문이다.
결국, 헤센다름슈타트 가문은 단절해 버렸고 그 때문에 나중에 대공위도 마르가레테 공주가 시집간 헤센다름슈타트 가문의 방계인 헤센카셀 가문에게 넘어간 거로 알고 있다.
솔직히 이 정도면 지구 작가가 헤센다름슈타트 가문에 원한이라도 있는 건 아닌지 의심이 될 정도다.
그래도 여기선 알릭스와 엘리자베트가 살아났으니, 헤센다름슈타트 가문엔 다행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말이다.
“후훗, 외삼촌은 누구보다 가족을 아끼시는 분이라 그런 것이니 이해해 주세요.”
올가 여대공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어렸을 때 형제들을 혈우병으로 잃었던 기억이 있으니, 누나와 여동생들마저 잃을 순 없었겠지.
“그럼, 이제 저희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아버님께서 전범재판을 치를 때까진 다름슈타트에서 머무르게 되실 겁니다.”
“전범……재판이요?”
“그리 심각한 표정을 지으실 것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거니까요.”
애초에 그 어떤 나라보다 수많은 군주와 대귀족이 존재하는 이 독일 땅에서 아무리 적국의 군주라 해도 황제를 재판장에서 세워 처벌하자는 프랑스인들이나 할 법한 짓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쉽게 말해 국민을 만족시키기 위한 정치쇼에 불과하단 소리다.
“그 이후엔 아버님께선 외가이신 덴마크로 가시게 될 것입니다. 아무래도 독일에 머무르시기엔 여러모로 애로 사항이 있어서요. 다만 다른 분들은 원하신다면 독일에 남아 있으셔도 됩니다.”
내 말을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올가.
다만, 올가의 경우엔 전선으로 돌아가서도 여전히 애타게 그녀만을 바라보고 있는 요아힘과 황실 차원에서 혼인이 추진될 예정이었지만.
내각과 의회에서도 크나큰 반대 없이 긍정적인 반응이었으니, 이제 남은 것은 부모들인 빌헬름 2세와 니콜라이 2세간의 이야기뿐이니라.
“이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군요. 아무쪼록 독일에 머무르시는 동안 마음 편히 지내시길 바랍니다.”
“배려에 감사드려요. 후작님.”
올가가 다시 한번 고개를 살짝 숙이며 인사하자 나 또한 방긋 미소 지으며 인사를 받아 주었다.
그래, 이걸로 된 거다.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황후가 지은 죄가 죄라지만, 아무리 그래도 죄 없는 자식들과 함께 일가족 전체가 재판도 없이 총살되는 것은 너무나도 가혹했으니까.
하다못해 자코뱅도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를 재판은 치르고 죽였다.
물론, 무능한 차르 부부 때문에 고통을 받았던 러시아인들은 이를 갈겠지만.
그리고 지금은 동부전선의 종식을 위해 이를 이용해야 했다.
“DRR과 독일의 모든 신문사에 연락하세요. 니콜라이 2세 일가가 독일로 망명했다고요,”
나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적의 고통은 곧 우리의 행복인 법이니까.
가뜩이나 전쟁이 잘 안 풀려 곤욕을 치르던 임시정부에 차르 망명이란 폭탄을 던질 시간이다.
* * *
“황제와 황후가 왜 러시아가 아니라 독일에 있는 것인가. 임시정부는 당장 해명해라!”
“인민에게 죄를 지은 차르는 여전히 잘 먹고 잘 지내는데, 왜 우리는 전쟁 속에서 계속 비참하게 살아야 하는가?!”
“차르를 아무런 처벌 없이 독일 제국에 넘긴 임시정부는 물러나라!”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젠장, 빌어먹을 크라우트 놈들이……!”
임시정부의 임시청사로 삼고 있는 겨울궁전 아래에서 혁명 때처럼 팻말과 붉은 깃발을 휘두르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시위대의 파도에 게오르기 리보프는 어지러운 듯 이마를 짚었다.
차르 일가가 독일로 도망쳤다.
그리고 독일은 이 사실을 광고라도 하듯 언론을 동원해 전 세계에 떠들고 있다.
러시아인들은 차르가 도망쳤단 소식에 이성의 끈이 끊어져 겨울궁전으로 몰려와 임시정부를 규탄하고 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차르를 죽이기 싫었던 임시정부가 독일과 거래해서 차르를 독일로 보냈다는 말도 안 되는 중상모략까지 하고 있었으니, 가뜩이나 차르의 도주에 정신이 나갈 것만 같던 리보프와 임시정부로선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차르 일가를 감시하던 자들은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거야!”
“그들은 종적을 감췄습니다. 아무래도 누군가에게 매수된 뒤, 그대로 몸을 숨긴 듯합니다.”
그들이 도망쳤다면 잡는 것은 요원했다.
누군가를 찾기엔 이 러시아 땅은 너무나도 넓었고, 숨을 곳도 많았으니까.
“이건 독일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내부에 배신자가 있습니다. 그 배신자들이 임시정부를 무너트리기 위해 이런 짓을 꾸민 게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 배신자는 뻔했다.
“레닌의 짓입니다.”
“케렌스키 장관?”
“지금 밖에서 가장 큰 목소리로 사람들을 선동하며 임시정부를 적극적으로 비판하고 다니는 게 누구입니까? 누가 이번 일로 가장 큰 수혜를 입겠습니까? 바로 블라디미르 레닌입니다.”
그뿐만 아니다.
로마노프 왕가 망명 사건을 처음 공론화한 것도 레닌이었고, 임시정부가 독일과 뒤에서 몰래 차르를 주고받았다는 중상모략을 떠드는 것도 레닌이었다.
“그리고 레닌과 독일과의 관계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지요.”
“이 쓰레기 같은 매국노 자식이……!”
권력 하나 잡겠다고 적국과 붙어먹다니.
입으론 혁명을 떠들지만, 속은 결국 권력에 미친 많고 많은 독재자와 다른 없는 작자다.
“레닌과 볼셰비키를 최대한 빨리 처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임시정부가 무너지고, 붉은 차르가 왕좌에 오를 것입니다.”
레닌이 만들어 낸 소련이 어떤 면에선 러시아 제국 시절과 아니, 제국 시절보다 인민들에 대한 압제와 통제가 심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 스타트를 끊은 것은 틀림없는 레닌이었다.
당장 독재와 가혹한 통치로 레닌의 이상을 더럽혔단 비판이 많은 스탈린이지만, 일각에선 스탈린이야말로 레닌의 가장 충실한 후계자란 주장도 있을 정도였으니까.
“케렌스키 그대의 말이 맞소. 레닌 그 빨갱이 놈은 빨리 처리해야 해. 이 러시아를 위해서라도 말이야.”
그리고 임시정부의 존속을 위해서라도 말이다.
하지만 리보프는 그 일을 할 수가 없다.
이번 일의 여파를 잠재우기 위해서라도 그가 임시정부 수반에서 물러나고, 부르주아 정권이 무너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앞일은 케렌스키 장관, 아니 새로운 수반에게 맡기겠소. 무거운 짐이지만, 자유로운 러시아를 위해서라도 임시정부를 반드시 지켜 주시오.”
리보프의 차기 임시정부 수반 지명에 케렌스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 * *
“임시정부가 무너지고 있소. 동무들. 드디어 무장봉기의 때가 온 것이오!”
“레닌! 레닌! 레닌!”
한편 한스에게서 받은 정보로 로마노프 왕가의 비밀 망명이란 폭탄을 터트려 임시정부를 크게 흔드는 데 성공한 레닌 또한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임시정부를 치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방식이란 무장봉기.
즉, 폭력을 통해 임시정부를 뒤엎는 거였다.
“부르주아와 반동을 끌어내리고,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완수하자!”
“역시 레닌 동지야! 우리가 못하는 일을 태연하게 하고 있어! 그 점이 짜릿해! 동경하게 돼!”
볼셰비키들이 열렬한 박수와 함께 레닌의 거침없는 행보에 환호를 보냈다.
“저, 레닌 동지. 정말 이런 방법이 옮겠습니까?”
“카메네프 동무. 그 무슨 말이오?”
그러나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반드시 존재하는 것처럼 레닌의 거침없는 행보에 대한 우려도 존재했다.
“무장봉기라니 말은 좋지만, 결국은 반란 아닙니까.”
“이 모든 게 혁명을 위해서, 그리고 러시아를 위해서요. 임시정부의 무능한 행보가 계속되면 대혁명이 그랬고, 파리 코뮌이 그랬던 것처럼 기껏 찾아온 러시아의 봄 또한 끝나고 말 것이오.”
물론, 레닌이야말로 그 러시아의 봄을 끝낸 장본인이었지만.
하지만 레닌은 그럴 리가 없다고 믿은 채 그 어느 때보다 확신으로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기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최대한 빨리 임시정부를 끌어내리고 불완전한 혁명을 완전한 혁명으로 바꿔야 하는 거요. 마르크스주의에 의한 새로운 사회주의 조국을 건설하기 위해서라도 말이오.”
“독일의 금과 독일의 무기로 말입니까?”
말발로 레닌의 상대도 안 되는 레프 카메네프가 입을 다물자 이번엔 뚱한 표정의 트로츠키가 말했다.
그는 보았다.
로마노프 가족이 비행기에 오를 때 독일에서 온 이들이 요긴하게 쓰라며 건네준 금과 무기가 실린 상자들을.
레닌은 차르 망명을 도운 대가로 받은 것이라고 했지만, 과연 그것뿐일까?
게다가 저 프로이센 군국주의자들의 힘을 빌려 이뤄 낸 혁명이, 과연 진정한 혁명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들의 힘을 빌린 대가로 치러야 할 대가는?
트로츠키로선 도저히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일들.
그러나 자꾸만 생각하게 되는 일들이었다.
“차르를 망명시킬 때도 말했지만, 나는 어디까지나 임시정부를 무너트리기 위해서 잠시 적과 손을 잡은 것뿐이오. 세계혁명을 성공시키기 위해선 기반부터 필요한 법이니까. 아니면 트로츠키 동무는 나를, 이 레닌이 정말 독일의 개가 되었다고 의심하는 것이오?”
트로츠키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 것일까?
레닌의 서슬 퍼런 압박이 담긴 시선이 트로츠키에게 쏟아졌다.
트로츠키는 그런 의미로 한 말은 아니란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의심만으로 분란을 일으키기엔 때가 때였으니까.
“물론 아닙니다. 제가 다른 누구도 아닌 레닌 동지를 어떻게 의심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우려되고 걱정스러울 뿐입니다.”
“하하, 걱정 마시오. 트로츠키 동무를 비롯한 모두의 우려는 알지만, 지금은 적극적으로 또 빠르게 행동해야 할 때요. 그러니 모두 날 믿고 따라와 주길 바라오.”
“예, 레닌 동지.”
볼셰비키들은 레닌을 향해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그러나 레닌에 대한 의심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계속 그들의 마음 한구석을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