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Saved Caesar RAW novel - Chapter 211
211화 : 깨어나는 거인 (1)
“결혼……이요?”
“그래, 올가. 호엔촐레른에서 혼담이 들어왔단다.”
로마노프 가족이 다름슈타트에서 쌓인 여독을 풀며 평온을 되찾은 지 며칠 후.
아버지 니콜라이 2세의 죄책감과 미안함으로 가득한 목소리에 올가는 눈을 크게 뜨면서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로마노프란 고귀한 혈통과 장녀라는 위치, 망국의 황녀란 타이틀, 병약한 황태자까지.
올가의 존재는 다른 나라 왕실에서 탐낼 수밖에 없는 존재였고, 나라를 잃고 쫓겨난 로마노프 가문 입장에서도 존속과 미래를 위해서라도 결코 나쁜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리고 상대가 현재 유럽 왕실에서 가장 위세가 드높은 호엔촐레른이라면 더더욱.
물론, 아버지는 딸을 전리품으로 넘기는 것 같은 기분인지 탐탁지 않은 표정이었지만.
“원하지 않는다면 거절해도 좋단다. 올가. 내가 어떻게든 해 볼 테니까.”
“괜찮아요. 아버지. 받아들일게요.”
결혼에는 그다지 흥미가 없었던 데다가 애석한 일이었으나 오래전부터 남동생 알렉세이가 언제 죽을지 몰라 살리카법 폐지까지 논의되던 상황이라 외국 왕실로 시집가는 것을 꺼렸던 올가지만, 지금은 그런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상대는 누구인가요?”
“빌리의 막내아들인 요아힘이란다.”
요아힘 왕자는 잘 안다.
전쟁 전까지는 편지로 자주 교류했던 사이니까.
물론 연애편지는 절대 아니었고, 서로에 대한 안부를 물은 게 전부였지만.
“듣자 하니, 요아힘이 오래전부터 너에게 마음이 있었다고 하는구나.”
“아.”
하지만 아무래도 그 편지들은 수줍은 왕자님의 마음이 듬뿍 담겨 있었던 모양이다.
올가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지만.
“요아힘이 마음에 안 든다면 다른 선택지도 있단다. 조지의 장남인 에드워드랑 루마니아의 카롤(카롤 2세)에게도 혼담이 들어왔거든.”
올가를 탐내는 것은 비단 호엔촐레른뿐만이 아니란 소리다.
“……에드워드랑 카롤이라고요?”
다만, 요아힘과 마찬가지로 올가와 6촌 친척인 두 사람의 이름을 듣자마자 올가의 얼굴은 형언할 수 없이 썩어 들어갔다.
그도 그럴 것이 우선 영국의 프린스 오브 웨일스 에드워드 왕세자는 특유의 사교성과 잘생긴 외모, 그리고 탁월한 패션 감각으로 영국인들의 사랑을 받는 인기스타였지만, 부왕의 잔소리를 듣지 않는 날이 없는 사고뭉치였으니까.
게다가 여자 문제도 많고, 인성도 좀 그래서 올가가 보기엔 차라리 동생인 버티가 남편감으론 더 나아 보일 지경이었다.
말을 더듬긴 해도 착하고 책임감도 있으니까.
‘거기다 카롤은 에드워드보다 더한 망나니잖아!’
현재 루마니아 왕세손인 카롤은 에드워드가 모범생으로 보일 수준의 망나니에다 바람둥이였다.
당장 원 역사에서 에드워드 8세가 미국 이혼녀와의 결혼으로 왕위를 잃어버렸다면 이쪽은 왕세자 시절에 부왕 페르디난드 1세가 장남의 탈선을 더는 두고 보지 못하고 계승권을 박탈한다는 초강수를 둔 것도 모자라 손자인 미하이 1세를 후계자로 삼을 정도였으니까.
그 후에도 카롤 2세는 아버지가 죽자 루마니아로 돌아와 아들의 왕위를 빼앗고, 루마니아를 막장으로 만들었으니, 카롤에 질색하는 올가의 안목은 나름 정확하다 할 수 있겠다.
“……요아힘 왕자로 선택할게요.”
영국 왕비나 루마니아 왕비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는 기회지만, 바람둥이를 남편으로 두느니 차라리 자신만을 바라보는 요아힘이 훨씬 나았다.
외모가 나쁜 것도 아니고, 그동안의 행동이 올가 자신에 대한 진심으로부터 나왔다고 생각하니 나름 귀엽기도 했고.
‘또 왕비 자리도 나름 잘하면 얻어 낼 수 있을지 몰라.’
독일 제국은 현재 러시아 제국에서 독립시킨 나라에 황족을 이식 중이었다.
그 말은 곧, 자신의 남편이 될(아직 예정이지만) 요아힘 왕자에게도 기회가 있다는 뜻.
그리고 한때 그녀가 사랑하는 조국의 일부였던 우크라이나는 아직 국왕이 정해지지 않았다.
“한스 폰 초이 후작님과 약속을 잡아야겠네요.”
“올가?”
망국의 황녀 주제에 조용히 살 것이지, 인제 와서 무슨 꿍꿍이냐는 소리를 들을지도 모른다.
우크라이나의 왕비가 되어 봤자 바닥에 흘린 피는 지워지지 않을 것이고, 이미 흘러가 버린 과거를 되돌릴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 혁명을 겪고 트로츠키와 대화하며 많은 것을 보고 느낀 올가는 이대로 덧없는 과거의 영화처럼 사라지는 것이 아닌 앞에 무엇이 기다릴지 모른다고 할지라도 나아가기로 스스로 결정을 내렸다.
자신은 로마노프였으니까.
아무리 죄와 피로 얼룩졌다고 한들, 결국은 로마노프였으니까.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선 독일 제국의, 유럽의 외교를 손에 쥐고 있는 한스 폰 초이와의 교섭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녀가 한스를 만나는 것은 아쉽게도 나중으로 미뤄졌다.
다음날, 독일 전역에 비보가 전해졌기 때문이다.
[DRR에서 국민 여러분께 슬픈 소식을 전해 드립니다. 독일군의 기둥이자 대전쟁의 승리에도 크게 이바지한 전 육군참모총장 알프레트 폰 슐리펜 원수가 오늘 오전 7시에 자택에서 별세했습니다. 황제 폐하께서도 크게 비통해하시며 국장으로 장례를 치를 것을 발표한 가운데…….]1914년 3월 28일.
슐리펜 원수가 사망했다.
* * *
“차렷, 조준, 발포!”
타타타타탕!
독일 전역에 조기가 휘날리는 가운데 허공에 예포의 총성이 울려 퍼지며 슐리펜의 장례식이 열렸다.
빌헬름 2세는 물론 팔켄하인, 루덴도르프, 마켄젠, 루프레히트 왕세자 등 대부분의 독일 장성들이 장례식에 참가했고, 나 또한 루이제와 함께 검은 양복을 입은 채 손을 맞잡은 채 장례식이 진행되는 모습을 지켜봤다.
“한스, 괜찮아?”
슐리펜과 내가 어렸을 때부터 깊은 관계였다는 것을 아는 루이제의 걱정 어린 물음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리히트호펜 외무장관에 이어 슐리펜 원수도 눈을 감았다.
그리고 앞으로도 눈을 감는 사람들은 계속 나오겠지.
사람의 수명은 신조차 어쩔 수 없으니까.
‘그래도 미련 없이 자택에서 편히 눈을 감았으니, 다행이네.’
세상을 떠난 슐리펜의 얼굴은 모든 것을 다 이루었다는 듯 미소를 띠고 있었다고 한다.
원 역사보다 더 오래 산 것은 물론, 평생의 염원이었던 슐리펜 계획이 성공한 것에 이어 전차의 데뷔까지 지켜보고 갔으니, 슐리펜 원수로서도 나름 행복한 삶이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다른 사람들도 군의 기둥이었던 슐리펜 원수를 떠나보내는 것을 아쉬워하긴 해도 우울한 표정까진 짓지 않았던 것이겠지.
호상에 너무 슬퍼하는 것도 예의는 아니니까.
그렇다고 ‘장례식이 아니라 축제입니다’라는 수준으로 떠들썩하게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었지만.
“나도 살날이 얼마 안 남았다는 게 피부로 느껴지는군.”
내 옆에 서 있던 뷜로 총리가 아련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도 업무 대부분을 나와 베른하르트 부총리에게 맡길 정도로 노쇠해지고 있었으니, 많은 감상이 느껴지겠지.
“나도 얼른 관에 들어가기 전에 은퇴해야겠어.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을 집무실 책상 위에서 보내곤 싶진 않으니까.”
“그러려면 전쟁이 먼저 끝나야겠지만요.”
게다가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긴 하지만, 내가 알기론 뷜로는 20년대 말까지 사는 것으로 알고 있다.
아직 그가 눈을 감기엔 이르다는 소리다.
물론, 나이가 나이인지라 은퇴를 고려할 수밖에 없는 것은 어쩔 수 없겠지만.
전시 총리 자리도 버거운데, 폐허 위에 다시 건물을 세우고 전쟁의 뒤처리를 수습해야 하는 전후 총리라고 만만한 것은 아니었다.
“은퇴하면 로마로 가고 싶군. 예전부터 꿈이었거든. 그곳에 작은 집을 짓고, 정원을 가꾸며 따뜻한 태양 아래 삶을 마무리하는 거지.”
“하하, 총리님을 위해서라도 이탈리아 공략을 서둘러야겠네요.”
“한스 폰 초이 후작?”
뷜로 총리의 은퇴 계획에 내가 그것을 이루길 바란다는 듯 미소 짓는 사이 덩치가 큰 누군가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만나는 것은 처음이었지만, 나는 이 사람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힌덴부르크 대장님.”
“허허, 고명하신 외무장관께서 이 늙은 퇴역 군인의 이름을 알고 있을 줄은 몰랐군.”
저 늙은 불독 같은 우거지상을 모를 리가 없으니까.
파울 폰 힌덴부르크.
타넨베르크의 영웅이었지만, 이후 루덴도르프와 함께 패전의 책임을 피하려고 배후중상설을 주장한 비겁자이자 지금은 현역으로 복귀하지 못한 채 퇴물로 남은 노장.
‘그리고, 히틀러와 나치가 독일을 차지하는 데 결정타를 날린 자.’
어느 쪽이든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다.
루덴도르프랑 달리 너무 늙어서 고쳐 쓸 수도 없었다.
“슐리펜 원수랑 가까웠다고 들었네. 조의를 표하지.”
“감사합니다.”
그러나 나는 그런 개인적 감상을 잠시 구석으로 밀어 넣은 채 무뚝뚝한 얼굴로 조의를 표하는 힌덴부르크의 두꺼운 손을 미소와 함께 붙잡았다.
자리가 자리였으니까.
“그나저나 사람이란 참으로 덧없는 생물이야. 그렇게 위풍당당하던 슐리펜 원수도 한순간에 가다니.”
“인간이 벗어날 수 없는 숙명이죠.”
“그래. 젊든 늙었든 앞일은 모르는 일이니까. 자네도 조심하게나.”
“어…….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힌덴부르크의 어딘가 싸한 느낌이 나는 의뭉스러운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것은 과연 걱정으로 하는 말일까?,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일까?
힌덴부르크에 대한 감상이 감상인지라 의문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그때였다.
“총리님, 장관님. 대양함대에서 긴급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조금 전 RMS 모리타니아가 프랑스 잠수함에 격침당했습니다.”
“오.”
나는 힌덴부르크에 대한 것을 잊은 채 입을 벌렸다.
프랑스야. 프랑스야. 너희도 결국 저질렀구나.
* * *
RMS 모리타니아(RMS Mauretania).
영국 해운 회사인 큐나드 라인의 여객선으로 루시타니아호 침몰 사건으로 유명한 RMS 루시타니아의 자매선으로 대서양을 오가는 여객선 중 가장 빠른 배라는 증거인 블루리본을 가장 오랫동안 유지해 온 것으로 유명한 여객선이다.
끼이이익──쿵!
“살려 줘!”
“배가 침몰한다!”
그리고 지금 그 유명한 모리타니아호는 아일랜드 인근 해역에서 사람들의 끔찍한 비명과 함께 가라앉고 있었다.
구명보트를 띄울 틈도 없었다.
프랑스 잠수함의 어뢰는 영국과 큐나드 라인이 대서양 해운을 장악한 독일 대형 여객선에 맞서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거선을 순식간에 데비 존스에게 보내기에 충분했으니까.
자매선인 루시타니아호가 원 역사에서 유보트 공격으로 침몰한 대신 모리타니아호는 살아남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균형은 유지되어야만 한다는 것인지, 이번엔 모리타니아호가 침몰한 대신 루시타니아호가 살아남은 격이었다.
물론, 차갑디차가운 바닷속으로 가라앉으며 저체온증과 익사로 사망한 모리타니아호 승조원들과 선원들에겐 무척이나 억울한 일이었겠지만.
그러나 프랑스 잠수함도 모리타니아호를 공격한 이유가 있었다.
왜냐하면, 현재 RMS 모리타니아는 자매선인 루시타니아와 함께 군에 징발돼 병력과 물자를 실어 나르는 수송선으로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여객선을 징발해서 병력 수송선, 또는 병원선으로 사용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당장 독일도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사이에 영국 해운을 위협한 장본인이자 모리타니아호 이전 블루리본 소유선이었던 SS 카이저 빌헬름 데어 그로세(SS Kaiser Wilhelm der Grosse)를 무려 순양함으로 개조해서 써먹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모리타니아호는 얼마 전까지 갈리폴리로 영국, 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 병사들을 실어 날랐고, 지금은 미국에서 무기를 잔뜩 싣고 영국으로 옮기는 중이었다.
그리고 국제법상 민간 상선이라도 군수물자나 병력을 수송하면 공격해도 무죄였다.
“프랑스가 민간 상선을 공격했다! 이건 국제법 위반이다!”
물론, 그딴 건 알 바 아닌 영국은 루시타니아 침몰 사건 때도 그랬듯이 우린 무기 따윈 안 실었다고 대놓고 오리발을 내밀며 프랑스를 맹비난하는 중이었지만.
게다가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영국이 정말 모리타니아로 무기를 옮겼나 안 옮겼나가 아니었다.
모리타니아호는 ‘미국’에서 영국으로 오는 중이었고, 당연히 상당수의 ‘미국인’들을 태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미국은 프랑스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에 이미 여러 차례 피해를 입었고, 그로 인해 강한 어조로 자국인들이 타고 있는 선박을 공격하지 말라며 프랑스에 경고한 상황이었다.
자신들의 경고를 또 무시한 프랑스의 행동에 미국 시민들이 남을 죽이는 것은 몰라도 남에게 죽는 것은 용납하지 않는 미국이 이번 일로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고, 러시아 혁명으로 정신없던 유럽 열강들의 시선 또한 대서양 건너 신대륙으로 향했다.
미합중국이란 무궁무진한 잠재력을 가진 거인이, 과연 무슨 반응을 보일지 기대와 우려를 품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