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Saved Caesar RAW novel - Chapter 242
242화 : 백기사의 도래 (2)
“자, 모두 주목!”
1914년 7월 16일.
좁다란 참호 안에 병사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가운데 평소와 달리 천 마스크를 쓴 독일군 장교들이 병사들을 향해 큰 목소리로 외쳤다.
베를린에서의 소동 때문에 당분간은 공세가 없을 거라며 남몰래 좋아했던 병사들은 진격 명령이 떨어진 줄 알고 긴장했지만, 그들에겐 다행히도 장교들은 돌격 호루라기를 부르러 온 것이 아니었다.
“최근 여러 부대에서 독감이 유행한다는 소문은 다들 들어서 알고 있을 것이다.”
“독감?”
“그러고 보니 요즘 많이 걸리더라. 여름치고 서늘해서 그런가?”
그들이 이 자리에 온 것은 어디까지나 전쟁의 적기사가 불러들인 역병의 백기사와 본격적으로 맞서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상층부에선 독감이 전선 전체로 전파되는 것을 막기 위해 오늘부터 서부전선 전체에 마스크를 보급하기로 했다.”
“예? 독감이라 해 봤자 고작 조금 독한 감기 아닙니까?”
“뭘 마스크까지 쓰라고…….”
“조용, 조용! 팔켄하인 총사령관님의 직속 명령이니, 다들 잔말 말고 따르도록. 또 고열이나 기침 등 독감 증세가 보이는 자들은 바로 상급자에게 보고하고.”
장교들의 말에 병사들은 투덜거리면서도 부사관들이 나눠 준 마스크로 입과 코를 감쌌다.
가뜩이나 힘든 참호 생활에 답답한 마스크를 쓰라니 좋아하려야 좋아할 수가 없었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연합군 총사령관의 명령이니 따라야지 어떡하겠나?
게다가 감염을 막기 위해선 마스크와 위생 관리가 중요하다는 것은 이미 이 시대에도 상식이었다.
더러운 참호에서 몸을 깨끗하게 유지하는 것은 어려우니, 독감에 걸리기 싫으면 마스크라도 쓸 수밖에 없었다.
“으으, 디트리히 아저씨. 마스크를 끼고 있으라니 숨쉬기 힘드네요. 추운 동부전선이 그리워져요.”
물론, 병사 상당수는 여전히 고작 독감 때문에 이게 뭔 난리인지 모르겠다는 귀찮은 얼굴이 태반이었지만.
특히 베를린 출신 디트리히와 함께 동부전선에서 러시아와 싸우다 서부전선에서 프랑스군과 싸우게 된 볼프처럼 젊은 병사 중에 그런 이들이 많았다.
“답답해도 참아, 볼프, 독감을 만만히 보면 안 돼.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독감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죽어 나가기 일쑤였다고.”
그러나 디트리히같이 나이 있는 독일군 병사들은 젊은 병사들과 달리, 그나마 독감에 경각심을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디트리히 세대는 흔히 러시아 독감(Russian flu)이라 불리는 1889-1890년 팬데믹(1889–1890 pandemic)을 겪은 세대였기 때문이다.
인플루엔자 또는 우리에겐 너무나도 익숙한 코로나바이러스가 원인으로 추정되는 러시아 독감은 추정 사망자만 100만에 달했던 역사상 최악의 전염병 중 하나.
그리고 독일에서도 포젠을 시작으로 수많은 환자가 발생했던 독감이었다.
그때의 경험이 아직 선명한 디트리히로선 아직 이름이 붙여지지 않은 서부전선의 독감이 러시아 독감의 재림이 되지 않을지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에이, 아저씨. 지금은 19세기가 아니라 20세기거든요? 마취도 없이 다리를 자르던 시대가 아니에요.”
“……나 그 정도로 안 늙었다.”
그러나 디트리히의 염려에도 불구하고 그때 태어나지도 않았던 볼프는 여전히 어떤 걱정할 것 없다는 얼굴이었다.
디트리히로선 독감의 무서움도 모르는 애송이의 방심에 한숨이 절로 나올 일이었다.
다만, 디트리히의 말에도 한가지 오류가 있었다.
스페인 독감은 러시아 독감의 재림이 아니었다.
그 이상의 재앙이었지.
당장 일반적인 계절성 독감이 팬데믹 심각도 지수 1등급, 러시아 독감이 2등급이었다면 스페인 독감은 혼자서 무려 새빨간 5단계에 달하는 괴물이었다.
러시아 독감이 수억(세계 인구 15억 명 중 최소 3억에서 최대 9억 명이 걸렸다고 추정된다) 달했던 감염자 수에 비해 치사율은 고작 0.1%~0.28%에 불과했다면 스페인 독감은 치사율이 최소 2%~3%에서 최대 10%까지 달했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는 우리가 잘 아는 COVID-19보다도 높은 수치다.
스페인 독감이 얼마나 끔찍한 전염병이었는지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아, 빨리 마스크 벗었으면 좋겠다.”
“동감이다. 얼마 전엔 내란 음모에 이젠 독감이라니. 파리까지 150km도 안 남은 상황에 이게 무슨 난리인지 모르겠어.”
그러나 볼프와 디트리히를 비롯한 독일군 병사들은 이 사실을 몰랐다.
대부분은 좀 심한 감기, 경계하는 사람들도 예전의 러시아 독감 수준이라 여겼을 뿐이다.
“방역 조치를 하라고? 굳이?”
그리고 독일 정부의 방역 조치 요청을 받은 영국과 미국의 반응 또한 전선의 반응과 다르지 않았다.
* * *
“융커들이 사고 친 것 때문에 독일 정부가 편집증에 걸린 모양이군. 이런 아무것도 아닌 일에 호들갑을 떨다니.”
“아무래도 독일 내 분위기가 어수선하지 않습니까. 국민의 불안을 이 이상 늘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사소한 일이라도 내버려 둘 순 없다는 것이겠죠.”
독일 정부의 방역 협조 요청을 받은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는 귀찮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독감이라 해 봐야 결국은 조금 더 아픈 감기다.
지금 계절이 여름이긴 하지만, 올해는 작년과 달리 추운 편이고 비도 많이 내리니 감기가 유행할 수도 있지, 뭘 이딴 시답잖은 일을 가지고 난리를 치는지 모르겠다.
“한스 폰 초이 장관은 병사들에게 마스크라도 씌워 달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만…….”
“흐으음…….”
로이드 조지 내각에서 전쟁장관을 맡은 더비 백작, 에드워드 스탠리(Edward George Villiers Stanley)의 말에 로이드 조지가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로 침음성을 흘렸다.
가뜩이나 전쟁으로 지출이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는 상황에 독감 하나 막겠다고 여기서 더 돈을 쓰기 싫었기 때문이다.
“일단, 마스크 건은 상황을 지켜보도록 하고 감염자들의 격리 조치 정도만 하도록 합시다.”
“예, 헤이그 사령관에게 그리 전하겠습니다.”
결국, 로이드 조지의 선택은 ‘우선, 돈이 안 드는 것부터 하자’였다.
마음 같아선 이런 일 말고 영국 원정군의 됭케르크 공세 준비나 부활절 봉기 이후 영국에 대한 반감이 날로 높아지고 있는 아일랜드 문제에나 집중하고 싶었지만, 독일의 말을 무시하는 것도 좀 그랬기 때문이다.
“아픈 병사가 있다면 야전병원에 보내면 그만이지, 가뜩이나 전투 때문에 바쁜 병사들의 입에 입마개를 씌우라니. 독일 정부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요청을 하는 것인지 이해를 못 하겠군요.”
미국의 우드로 윌슨의 반응도 로이드 조지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가뜩이나 얼마 전 모로코 상륙으로 시작된 북아프리카 진공에 신경을 쓰느라 바쁜데, 왜 사람을 이런 별것도 아닌 일로 번거롭게 하는지.
“아무래도 얼마 전 융커 숙청의 영향으로 평소보다 더 과민하게 반응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동시에 제국이 아직 건재하다고 밖으로 목소리를 내는 것일 수도 있고요.”
“하긴, 세계평화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융커들의 힘이 크게 꺾였다지만, 독일 제국은 여전히 독일 제국이니까요.”
윌슨은 사위 맥아두의 말에 처음부터 기대도 안 했다는 듯 중얼거렸다.
융커들이 숙청되었다고 한들 융커가 완전히 권력층에서 사라진 것도 아니고, 독일 또한 여전히 카이저가 지배하는 전제 국가였으니까.
그렇기에 윌슨은 이번 일을 그저 한스 폰 초이와 반 한스 폰 초이 파의 싸움, 그러니까 으레 있는 신흥 세력과 구세력의 충돌 정도로 평가했다.
그리고 그건 자유를 사랑하는 미합중국 대통령이 신경 쓸 가치도 없다는 뜻이었다.
“어쨌든 독일의 시어머니 같은 참견을 들어줄 생각은 없습니다. 미국의 일은 미국이 알아서 합니다.”
애초에 정말 심각한 문제가 있으면 펀스턴과 퍼싱이 자신에게 바로 보고했을 것이다.
그러니 윌슨에겐 한스 폰 초이의 설레발이 가득 담긴 요청을 들어줄 필요도 없었다.
“쿨럭쿨럭!”
“뭐야, 감기라도 걸린 거야?”
“그런가 봐. 머리에서 열까지 나네.”
그러나 우드로 윌슨은 몰랐다.
역병의 백기사는 이미 유럽 대륙에서 벗어나 신대륙에도 손을 뻗고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가 그것을 알게 되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 * *
처음 한스의 귀에 독감에 대한 소식이 당도했을 때 독일군 내 감염자는 천여 명 정도밖에 안 됐다.
“콜록, 콜록콜록!”
“으어어어…….”
“이 친구 몸이 펄펄 끓잖아. 간호사, 빨리 물 가져와!”
“선생님, 환자가 계속 몰려들고 있습니다. 병상 수가 부족합니다!”
“약도 거의 다 떨어졌어요!”
“……하느님 맙소사.”
그러나 그로부터 불과 일주일 후, 독감 환자의 수는 천여 명에서 만여 명으로 훌쩍 증가해 있었다.
“총리님, 부총리님. 이것으로 확실해졌습니다. 팬데믹입니다.”
“……베트만홀베크, 나 사임해도 되나?”
“전쟁이 끝나기 전까진 어림도 없습니다. 그러니 도망칠 생각은 접어 두시고, 얼른 긴급회의나 소집하시죠.”
“하아아아아…….”
그리고 방역 조치를 하긴 했지만, 여전히 독감의 정체에 대해 긴가민가하던 독일 정부는 드디어 확신했다.
러시아 독감 이후 24년 만에 역병의 백기사가 더욱 강해진 모습으로 유럽에 돌아왔다고.
“콜록! 콜록콜록!”
“누구야? 누가 기침 소리를 냈어?!”
“격리해! 당장 격리해!”
그나마 다행인 것은 독일은 이미 대비를 해 놨다는 것이다.
몰트케의 피를 토하는 노력으로 마스크는 물론 에탄올 같은 소독약도 충분히 갖춰 두었고, 확진자가 나오는 순간, 바로 붙잡아서 격리 구역에 처박았으니까.
하지만 한스의 경고를 듣지 않은 영국군과 미군은 아니었다.
“콜록! 콜록콜록!”
“살, 살려 줘. 머리가 너무 어지러워…….”
전선의 영국군과 미군 부대에서 독감 환자가 독일군 이상으로 대규모로 속출하기 시작했다.
이는 미흡한 방역 조치 때문이기도 했지만, 서부전선에 닥친 이상기후 때문이기도 했다.
실제로 제1차 세계대전과 겹치는 1914년에서 1919년까지의 유럽은 이상할 정도로 춥고, 습했고, 악천후도 자주 일어났다.
전선의 병사들은 하루가 멀다고 내리는 차가운 빗방울에 맨몸으로 노출되었고, 몸의 면역력 또한 덩달아 떨어졌다.
쉽게 말해 인플루엔자에 걸리기에 딱 좋은 상태라는 뜻이다.
“대통령 각하, 전선에서 서둘러 마스크를 대량으로 보내 달라는 요청이 쇄도하고 있습니다.”
“……상황이 그만큼 심각한 것입니까?”
“펀스턴 총사령관의 말에 의하면 최악의 경우 우리 병사들 전부가 적의 총알이 아니라 독감으로 전멸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신이시여.”
영국과 미국 정부는 그제야 독일의 호들갑이 호들갑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후회하고 반성할 시간은 없었다.
그들이 후회하는 순간에도 독감 환자는 계속해서 늘고 있었으니까.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는 격이긴 했지만, 지금은 어떻게든 독감 확산을 저지하는 게 우선이었다.
[DRR에서 전해드립니다. 정부가 프랑스 독감이라 공식 명명한 독감이 독일 전역은 물론, 영국과 미국에서도 대규모로 확산하고 있습니다. 독일 국민 여러분께선 전염병 확산을 막기 위해 외출 시 반드시 마스크를 착용하시고, 일상에서 손 씻기를 생활화해 주시길 당부드립니다.]그러나 병사들이 프랑스에서 걸렸다고 ‘프랑스 독감’이라 부르기 시작한 이 독감의 전염성은 모두의 상상 이상이었다.
달력의 날짜가 바뀌어 8월이 되자 독감은 이제 전선뿐만 아니라 후방에서도 독감 확진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는 비단 유럽 대륙만이 아닌 아메리카와 아시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미국에 수백만 명의 프랑스 독감 확진자가 발생. 대통령도 독감 증세 보여.] [‘볼셰비키 독감’ 폴란드까지 확산.] [블라디미르 레닌 위원장 동지가 ‘키르기스 독감’에 걸리다.] [일본이 ‘중국 독감’ 막기 위해 마스크 착용을 법으로 제정하다.] [남아프리카 연방, ‘흑인 독감’ 확진자 속출.]전 세계에 20세기 최초이자 최악의 팬데믹이 도래했다.
그 명칭은 각 나라의 외교 상황과 민족 문제에 따라 약간씩 달랐지만, 그들 모두 고통받는 것은 똑같았다.
“모두 마스크를 씁시다! 독감 방역에 적극적으로 나섭시다!”
“뭐야 당신? 어딜 마스크도 안 쓰고 버스를 타려고 해! 경찰에 신고하기 전에 당장 내려!”
그나마 한가지 다행인 점이 있다면 코로나 사태 때와 달리 20세기 사람들은 후손들과 달리 정부의 방역 지침을 잘 지켰다는 것이다.
실제로 유럽은 물론, 가장 안 지킬 것 같은 미국에서도 사람들은 마스크를 꼬박꼬박 쓰고 다녔고, 마스크를 안 쓰는 사람은 아예 대중교통 이용이 금지되었을 정도다.
그러나 이러한 엄격한 방역 조치에도 불구하고 역병의 백기사는 아직 물러갈 때가 아니라는 듯 여전히 기승을 부리며 확진자를 늘리고 계속 늘렸다.
그리고 프랑스 독감이란 프랑스인들은 절대 인정 안 할 명칭답게(실제로 프랑스인들은 독일 독감, 미국 독감 등으로 불렀다) 평등 정신을 발휘하겠다는 듯 독감은 병사와 일반 시민들뿐만 아니라 각국의 국가 지도자들과 유명 인사들에게도 엄습했다.
“콜록콜록! 한스 폰 초이의 경고를 들었어야 했는데!”
당장 후회물을 찍고 있는 영국 총리 로이드 조지부터 우드로 윌슨, 인도의 간디, 신문 기사에도 나온 레닌, 미군 병사들에게 기어코 독감이 옳은 히틀러, 건강도 안 좋은 상황에 독감까지 걸린 비오 10세 등등 무수한 인물이 독감으로 인해 기침과 고열에 시달렸다.
“콜록콜록!”
“폐하, 괜찮으십니까?”
“괜찮…… 콜록콜록!”
독일의 빌헬름 2세도 독감에 걸린 지도자 중 하나였다.
다만, 카이저는 얼마 안 가 깨끗하게 나았다.
이번 독감은 러시아 독감과 달리 이상하게 나이 든 사람들보다 젊은 사람들에게 훨씬 치명적이었기에 때문이다.
“콜록! 콜록콜록!”
“프랑스 독감입니다. 이건 100%네요.”
“하아, 아빠도 모자라 한스 너까지…….”
불행히도 우리의 주인공 한스는 젊었고, 마침 독감에 걸린 빌헬름 2세와도 같은 곳에서 살았다.
“콜록콜록! 내가 독감이라니! 내가 프랑스 독감이라니! 마스크도 꼬박꼬박 잘 쓰고 다녔는데. 대체 왜……콜록, 콜록콜록!”
물론, 한스에겐 억울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