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Saved Caesar RAW novel - Chapter 267
267화 : 전쟁 그 후 (3)
1915년 4월 28일.
영국령 인도 제국, 봄베이의 한 광장에서 수많은 인도인이 모여 있는 가운데 한 인도인이 연단에 올랐다.
그의 이름은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Mohandas Karamchand Gandhi).
훗날 마하트마로 불릴 마흔여섯 살의 간디였다.
“지난날 유럽에서 전쟁이 터졌을 때 전 영국의 모병관으로서 전쟁을 지지하고, 영국을 도울 것을 목소리 높여 외쳤습니다. 인도의 젊은 피들이 영국의 징병에 응해 유럽으로 떠나는 것을 적극적으로 독려했습니다.”
이 시기 간디는 아직 이름 앞에 마하트마가 붙진 않았지만, 제2차 보어전쟁에서 명성을 쌓은 전쟁 영웅이자 남아프리카 연방의 인도인 차별에 맞서 사티아그라하, 즉 간디를 상징하는 비폭력·불복종 운동을 펼친 인권 운동가로서 이미 명성이 높았다.
그리고 그런 간디를 동경하고 존경한 인도 청년들 또한 그의 모병 운동에 앞다투어 응했다.
“그리고 그것은 제 개인적인 사욕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닌, 인도인이 영국을 도와 목숨 바쳐 싸우는 대가로 영국이 약속한 자치권, 오직 그것 하나 때문이었습니다.”
서부전선에, 페르시아 전선에, 팔레스타인 전선에 차출된 인도인들도 그 약속 하나만을 믿고 이국의 땅에서 자신들의 목숨을 바쳤다.
영국을 위해 남의 전쟁에서 피땀 흘리며 싸웠다.
“그러나 영국은 인도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베를린에서 강화 회의가 열렸으며 상수시 조약이 치러졌음에도 영국은 끝내 인도인들에게 자치권을 주지 않았다. 자치권이란 단어 자체를 입에 담지도 않았다.
물론, 영국인들도 이대로라면 인도인들의 불만이 커지리라 생각했는지 선심 쓰듯 몇 가지 개혁을 하긴 했다.
현 인도 총독인 쳄스포드 자작 프레드릭 테시거(Frederic John Napier Thesiger)와 인도 국무장관 에드윈 몬태규(Edwin Samuel Montagu)가 본국을 설득해서 만들어진 몬태규-쳄스포드 개혁안이 그것이었다.
이 개혁안을 통해 인도인들은 백인에게만 주어지던 투표권도 받았고, 백인들만 있던 인도 정부와 의회에도 인도인들의 자리가 주어졌다.
영국으로선 크나큰 양보(물론 영국만의 생각이다)였다.
하지만 이 개혁안엔 크나큰 문제가 있었다.
우선, 투표권은 인도 전체 인구의 10% 정도 되는 자산가와 유력자들에게만 해당됐고, 정부와 의회의 핵심 요직과 의석 또한 여전히 영국인들만이 전유했다.
무엇보다 영국은 인도 정부의 인도인 관료들을 인도 인구 대다수를 차지하는 힌두교도가 아닌 무슬림과 시크교도들로 채워 놓았다.
이유야 당연히 디바인드 앤 룰, 갈라치기였다.
-지금 장난하냐, 개새끼들아!
-개소리 그만하고 약속한 자치권이나 내놔라!
인도인들은 폭발했다.
자치권을 주겠단 말에 남의 전쟁에서 목숨 바쳐 싸워 주었더니, 약속을 지키기는커녕 인도의 뒤통수를 세게 내려친 영국에게 분노했다.
“인도인들이여, 영국의 지배를 용납하지 마십시오! 저들에게 더는 복종하지 마십시오! 강자가 약자에게 자비를 베풀듯 진리(사티아)를 거머쥔(그라하) 사람들답게 폭력이 아닌, 신념으로서 영국에 맞서십시오!”
“와아아아아!”
그리고 이는 영국의 약속을 믿고 있던 간디도 마찬가지였다.
만약 영국이 약속을 지켰다면 간디는 독립운동가가 아닌 자치론자로 역사에 기록되었겠지만, 영국은 그러지 않았다.
그리고 이는 간디가 마하트마로 각성해 아힘사(무상해)와 사티아그라하를 외치며 인도 독립 운동의 선봉장이 되는 나비효과를 낳고야 말았다.
“영국은 인도에서 떠나라!”
“우리는 더는 너희의 노예가 되지 않는다! 우리는 다시 이 땅의 주인이 될 것이다!”
“인도 독립 만세!”
인도 전역에서 전쟁 동안 잠잠했던 반영 운동이 인도인들의 분노와 함께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다.
식민지인들과의 약속을 밥 먹듯이 어겨 온 영국의 업보였다.
“이 하찮은 토인 놈들이 감히! 기껏 투표권도 쥐여 주고, 정부에 참여하는 것도 보장해 줬더니, 은혜를 배신으로 갚아?!”
“절대 이를 방관해선 안 됩니다!”
물론, 가슴뿐만 아니라 양심에도 털이 잔뜩 난 영국인들답게 이를 신경 쓸 로이드 조지와 영국 정부가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조차 이해하지 못한 채 영국의 은혜(?)를 걷어차고, 팍스 브리타니카를 망치려는 인도인들에게 분노를 터트릴 뿐이었다.
“조준~! 발사!”
타타타탕!
이러한 영국의 분노는 인도 내의 반영시위와 저항운동에 대한 무자비한 진압으로 표출되었다.
하지만 총칼을 앞세운 진압에도 불구하고, 인도인들의 저항은 날이 갈수록 격렬해졌고, 왕관의 보석 인도 또한 계속 흔들렸다.
“영국은 이집트의 아들들을 징병해 간 대가로 이집트를 독립시켜 주기로 한 약속을 지켜라!”
“지켜라!”
그러나 영국의 업보는 비단 인도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당장 영국은 인도와 마찬가지로 이집트인들을 오스만과의 전쟁에 동원하기 위해 보호령이었던 이집트 술탄국에 독립 약속을 했지만, 이를 지키지 않았다.
오히려 이집트를 보호령에서 식민지로 전환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는 이집트인들을 분노케 했고, 이집트에서 훗날 이집트 혁명이라 불리는 대규모 반영시위가 일어나는 결과를 낳았다.
“영국은 유럽에서의 전쟁으로 아프가니스탄에 간섭할 여력이 없어졌다. 지금이야말로 독립을 되찾을 기회다!”
“예, 아미르!”
거기다 한때 친영파였지만, 영국의 지나친 간섭에 뿔이 나 있던 아프가니스탄 바라크자이 왕조의 제13대 아미르, 하비불라 칸(Habibullah Khan) 또한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세계대전으로 영국이 피폐해진 기회를 타 독립을 노리고 있었고, 영국과의 세 번째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치를 준비에 들어갔다.
영국에는 끔찍한 소리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독립의 불꽃은 영국의 바로 코앞에서도 일렁이고 있었다.
“영국이 전쟁의 피해를 회복하기 전에 움직여야 합니다!”
“저 또한 동의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선 우리 신 페인(Sinn Féin)은 올해 총선에서 아일랜드 지역구 대부분을 차지해야만 합니다!”
“옳소! 옳소!”
바로 부활절 봉기가 영국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좌절하긴커녕 더욱 뜨겁게 불타오르며 계속 독립을 꿈꾸고 있는 아일랜드였다.
그들은 올해 11월에 치러질 총선을 이용해 독립을 선언할 계획을 짜고 있었다.
영국이 알았더라면 그야말로 입에서 피를 토할 소식이었다.
그렇게 로이드 조지가 연장을 꿈꿨던 팍스 브리타니카는 황혼 속에서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영국은 이에 대해 누군가를 탓할 수도, 탓할 자격도 없었다.
이 모든 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의 자업자득이었으니까.
* * *
“하, 조용하군. 너무나도 조용해.”
영국이 식민지에서 연달아 터져 나오는 독립 요구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을 때, 맥아더를 비롯한 미군 원정군이 드디어 본국으로 귀환했다.
그러나 그들이 기대했던 화려한 개선 행사는 물론, 환영 인파조차 없었다.
그저 의례적으로 도로를 행진하고, 의례적으로 손뼉을 치는 이들만이 존재했을 뿐이다.
조국의 명령에 따라 열심히 싸우고 온 미군 병사들로선 실망감이 들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씨발, 이게 뭔 개짓거리인지 모르겠군. 이럴 바엔 행진은 왜 하라고 한 거야?”
패튼의 거친 목소리에 장교들과 병사들이 그의 말에 동감(인정하고 싶진 않았지만)한다는 듯 높은 곳에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정치인들을 향해 못마땅한 얼굴을 지었다.
이 모든 게 윌슨 때문이었다.
윌슨의 멋대로 저지른 추태 때문에 미군 원정군에게도 진흙이 튀고 말았다.
미국인들은 이번 전쟁에 참전한 것 자체를 윌슨의 욕심이 벌인 일이라 여기기 시작했고(당장 모리타니아호 침몰도 윌슨이 꾸민 짓 아니냐는 음모론이 진지하게 논의될 정도였다) 미국 원정군 또한 이러한 부정적인 여론에 휩쓸렸기 때문이다.
정부라도 제대로 된 상태였으면 또 모르겠지만, 다들 알다시피 윌슨이 사임도 하기 전에 반병신이 되어 버리는 바람에 대통령 권한 대행이 된 토머스 R. 마셜은 자신이 살아남는 것만으로도 벅찬 상태였다.
미군 원정군은 이제 미국인들의 머릿속에 윌슨에게 이용당한 불쌍한 병신들로 각인되어 버렸다.
전쟁과 함께 잊어버리고 싶은 존재가 되었다.
막대한 희생을 내면서도 미국을 세계대전의 승리자로 만들기 위해, 미국의 이념이자 상징인 자유를 지키기 위해 싸워 온 미군 병사들에겐 기운이 빠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하, 이게 참호에서 목숨 바쳐 싸워 온 대가인가?”
그리고 누구보다 윌슨 비난에 앞장서 온 맥아더 또한 어마어마한 실망감에 얼굴을 찌푸렸다.
사실 이번 전쟁을 통해 미국이 실질적으로 손해 본 것은 없었다.
윌슨 때문에 위신이 실추되긴 했어도, 전시 물자와 채권 판매로 인해 미국은 커다란 경제적 이익을 얻었고, 유례없는 호황을 맞이했다.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마침내 유럽에만 허락되던 열강의 반열에 올라섰다.
그러나 왜 우리는 이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가?
왜 배불뚝이 정치인들과 자본가들은 미소 짓는데, 정작 이 모든 것을 이룬 군인들은 웃지를 못하고 있는가?
모두가 말하는 것처럼 이것도 전부 윌슨 때문인가?
‘아니, 아니다.’
이건 비단 윌슨 하나만 탓한다고 끝나는 문제가 아니었다.
윌슨이 멀쩡했어도 고생은 군인들이 다 하고, 달콤한 과실은 정치가들과 기업가들이 다 따먹는다는 결과는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결론은 하나뿐이다.
이 나라는, 미국은 무언가가 잘못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을 밝혀도 돌아오는 것은 외면뿐이겠지.’
펀스턴과 퍼싱은 물론, 사령부에서 자주 부딪혔던 마셜, 그리고 머리가 그냥 패튼인 패튼을 포함한 그 누구도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니까.
그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맥아더이기에 할 수 있는 생각이었으니까.
“그렇다면 더욱 높은 곳으로 올라갈 뿐이다.”
누군가를 납득시킬 필요가 없는 자리까지 올라갈 뿐이다.
그리고 언젠가 이 나라를 바꾼다.
맥아더는 그리 결심하며 주먹을 꽉 쥐었다.
* * *
“다우닝가와 백악관이 이래저래 혼란스러운 모양이군요. 가토 상.”
“예, 그리고 그 말은 곧 우리 대일본제국에 있어서 기회라는 말과 같은 뜻이지요. 오쿠마 총리님.”
한편, 미국과 마찬가지로 전시 특수로 인한 호황을 누리며 전성기를 찍고 있는 태평양 건너편 일본에선 제국을 더욱 확장하기 위한 음모가 꽃피우고 있었다.
그 주모자는 바로 내각총리대신이자 대전쟁 시기 일본을 이끌었던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와 외무대신인 가토 다카아키(加藤高明)였다.
모두가 알다시피 베를린 강화 회의에서 일본은 인도차이나 전부를 원했지만, 영국과 미국의 견제로 인해 오늘날의 베트남 지역만을 완전히 차지하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그때 일본을 방해했던 영국과 미국은 정신이 이래저래 없었다.
영국은 업보로 인해 인도를 비롯한 식민지 곳곳에서 무시하지 못할 분란과 소요가 연달아 일어나서.
미국은 윌슨이 사고를 친 끝에 반신불수가 되고, 백악관 또한 덩달아 반신불수가 되어서.
“이 천운을 놓칠 순 없습니다, 총리님. 베를린 강화 회의와 상수시 조약의 결과를 바꾸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다른 곳에서라도 이를 벌충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 또한 동의합니다만, 어디서 말입니까? 혹여 연해주를 말하는 것이라면 절대 안 됩니다.”
거긴 도이치 제국의 사이 후작, 아니 이젠 공작이 소비에트 러시아와 공산주의자들을 견제하기 위한 포석 중 하나로 눈여겨보고 있는 곳이라 손을 댔다간 큰일 난다.
물론, 연해주를 포기하고 싶어 하지 않는 육군에겐 그야말로 비통한 소식이었지만, 그건 솔직히 오쿠마가 알 바가 아니었다.
오쿠마는 육군의 실세였던 야마가타 아리토모와는 극악으로 사이가 안 좋아서 아직도 육군과는 으르렁거리는 관계였기 때문이다.
“후후, 걱정하지 마시지요. 제가 말하고 싶은 곳은 연해주가 아닙니다. 중국입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남쪽의 중화민국이었다.
“지금 중화민국은 공화파와 북양군벌 간의 정치적 갈등이 극에 달해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수세에 몰린 곳은 공화파 쪽이었다.
북양군벌은 공화파보다 무력적으로 앞섰을 뿐만 아니라 이번 베를린 강화 회의에서 공화파가 주도한 불평등조약 개정이나 프랑스령 광둥 반환 중 그 어느 것도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쑨원과 공화파로선 지금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을 심정일 겁니다.”
“그리고 가토 상은 이를 이용해 중국에 개입하자는 소리고요.”
가토는 정답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이대로 북양군벌이 공화파를 밀어내는 것은 일본에도 영 좋지 못한 결과였다.
왜냐하면 북양군벌의 실권자인 펑궈장은 지난 대전쟁 당시 일본의 방해로 물을 먹은 것 때문에 일본에 크나큰 악감정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저 또한 중국에 대한 개입이 여러모로 위험성이 크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중국과 일본은 일단은 지난 대전쟁 당시 함께 싸운 우호국이다.
그런데 전쟁이 끝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중국의 정치 갈등에 개입한다?
이건 일본 내부에서도 불만이 나올 수밖에 없었고, 외부에서도 반발의 목소리가 들려올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 일본의 행동에 가장 반발할 영국과 미국은 정신이 다른 곳에 팔려 있습니다. 이 기회를 놓칠 순 없습니다!”
“나 또한 동의합니다. 중국 진출? 이걸 포기할 순 없죠. 해군도 좋아할 겁니다.”
오쿠마의 긍정적인 반응에 가토가 환한 얼굴을 지었다.
사실 오쿠마 시게노부가 사적으로도 공적으로도 무척이나 좋아하던 영국의 참전 요청 철회에도 불구하고, 반쯤 억지로 일본을 대전쟁에 참전시켰을 정도로 확장적이고 외교면에서도 강경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뻔한 결과였다.
“가토 상, 가서 자세한 계획을 세워 오세요. 조선과 안남 합병을 마무리하는 대로 바로 행동에 나섭시다.”
“예, 총리님.”
가토는 오쿠마 총리를 향해 허리를 90도 각도로 숙이며 대답했다.
영미가 정신을 차리기 전에 빨리 움직여야 한다.
그들의 방해만 없다면 일본의 중국 진출은 이번에야말로 성공할 수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