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Saved Caesar RAW novel - Chapter 274
274화 : 붉은 피와 하얀 눈 (2)
“이젠 하다 하다 코르닐로프와도 타협하겠다고? 이 망할 대머리 놈은 혁명의 대의를 대체 뭐로 아는 거야!”
시간을 돌려 나데즈다 알릴루예바가 연인인 스탈린에게 레닌의 말을 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트로츠키의 귀에도 레닌의 말이 전해졌다.
다만, 순수한 원본이 아닌, 스탈린이 상당히 편집한 버전이었지만.
이제 레닌은 서방의 개입을 두려워해 볼셰비키의 불구대천 원수라고 할 수 있는 코르닐로프와의 협상을 생각하는 겁쟁이가 되었다.
트로츠키는 당연히 혁명가라 부르는 것조차 부끄러운 존재가 되어 버린 그런 레닌을 더는 동지라 부르지 않을 정도로 분노했다.
더는 레닌을 제거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동지들, 더는 안 됩니다. 우리의 이상과 신념은 물론, 수많은 인민이 피를 흘린 끝에 이뤄 낸 혁명이 손도 쓸 수 없이 망가지기 전에 레닌을 끌어내려야 합니다!”
이상은 타협하는 순간 더럽혀진다.
혁명가는 타협하는 순간 타락한다.
그리고 블라디미르 레닌은 그것을 너무나도 잘 증명했다.
“레닌이 독일과 타협했을 때부터 그를 막아야 했습니다. 우리는 혁명을 위해 인민의 이름으로 마땅히 처단되었어야 할 차르 일가를 살려 주고, 우리의 막대한 영토를 폴란드와 우크라이나에 넘겼습니다.”
모두 레닌의 뜻이었다.
트로츠키를 비롯한 볼셰비키들은 레닌을 믿고 그의 뜻을 따랐다.
“그런데 이게 뭡니까? 인민들이, 다른 나라의 혁명 동지를 우리를 보고 대체 뭐라고 하겠냔 말입니다!”
“트로츠키 동지의 말대로입니다. 이젠 레닌 동지의 멋대로인 행동을 지켜볼 수만은 없습니다.”
“부하린 동무…….”
아직 현실주의로 돌아서기 전이라 유럽을 침공해서 적화시켜야 한다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고 다니던 부하린까지 마음을 굳히고 트로츠키에 동조하고 나서자 망설이던 볼셰비키들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전히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자들도 있었고, 이들은 한 가지를 걱정했다.
“하, 하지만 어떻게 레닌 동…… 아니, 레닌을 몰아낼 것입니까?”
소비에트 내부엔 아직 그를 지지하는 이들이 적잖이 있었다.
만약 그들이 공개적으로 레닌을 비난하고 나선다면 소비에트는 적을 앞에 두고 둘로 분열하고 말 것이다.
아니, 오히려 역으로 레닌에게 공격당해 이 자리에 있는 전원 숙청당할 가능성도 있었다.
권력자란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들이었으니.
그것은 블라디미르 레닌이라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레닌을 죽이는 것은 좀…….’
동지의 목숨을 정치적인 이유로 빼앗지 않는 것은 혁명가의 불문율이다.
물론 몇 년 안 가 사장되는 규칙이었지만, 혁명의 순수함이 남아 있기에 아직까지는 철저하게 지켜지고 있었고, 그 때문에 이 자리에 모여 있는 볼셰비키들로선 레닌을 죽인다는 선택지에 거부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당장 얼마 전까지 트로츠키도 망설였는데, 다른 볼세비키들이라도 다를 것은 없을 테니까.
“우리가 굳이 직접 손을 더럽힐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자리엔 그런 허상뿐인 규칙을 지키는 것보단 현실적인 권력을 손에 쥐는 것이 더 중요한 차가운 그루지야 강철남이 있었다.
“스탈린 동무, 그게 무슨 뜻입니까?”
침을 꿀꺽 삼키는 부하린의 물음에 스탈린이 파이프 담배 연기와 함께 미소를 지었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가 직접 나설 필요가 없다는 소리입니다. 그야 이 러시아 내엔 레닌을 죽이고 싶어 하는 이들이 흘러넘치지 않습니까?”
멘셰비키, 임시정부, 트루도비키, 백군 등등 너무 많아서 세지도 못할 정도다.
“우리는 그저 그들의 뒤를 살짝 밀어 주면 될 뿐입니다.”
동양에는 차도살인 즉, 남의 칼로 사람을 해친다는 말이 있다.
그것이야말로 이 자리에 모인 ‘진정한’ 혁명가들에게 필요한 것이었다.
“……방식은 알아서 맡기겠네, 코바.”
“예, 트로츠키 동지.”
음모의 막이 올랐다.
* * *
“와아아아!”
“레닌! 레닌!”
“레닌 동지, 여기 좀 봐 주세요!”
그로부터 몇 달 후인 1915년 9월 30일.
찬 바람이 일찍 불어오는 러시아 아니랄까 봐 벌써부터 쌀쌀한 날씨 속에서 레닌은 평소처럼 자신에게 환호성과 박수를 보내는 인민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며 연설을 위해 연단으로 향했다.
“…….”
트로츠키와 스탈린, 부하린을 비롯한 소비에트 위원회의 인민위원들도 레닌의 뒤를 따랐다.
그들은 하나같이 굳은 얼굴을 짓고 있었지만, 이를 눈치채는 이들은 없었다.
사람들의 시선은 하나같이 레닌에게 향해 있었고, 레닌의 얼굴은 인민들을 향해 있었으니까.
레닌의 들러리나 마찬가지인 인민위원들에게 굳이 시선을 주는 사람들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동지들이여(Товарищ)!”
인민위원들이 각자 의자에 앉은 가운데 레닌 특유의 힘차고, 카리스마 넘치는 목소리와 함께 레닌의 연설이 시작되었다.
“또 한 번의 겨울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또 한 번의 힘든 시기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버텨 내야 합니다. 버텨 내지 않으면 지난 4월에 쟁취한 자유도, 토지도 다시 빼앗길 것이기 때문입니다.”
연설의 내용은 언제나 그렇듯 ‘지금은 조금 힘들어도 참자’라는 내용이었다.
가뜩이나 전시 공산주의의 폐해로 인해 러시아 전체가 볼셰비키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한 상황이다.
소비에트 러시아의 근간인 노동자들의 마음을 다독이기 위해서라도 필요한 연설이었고, 그렇기에 레닌은 쌀쌀한 추위에도 지지 않으며 열정적으로 연설을 이어 갔고, 레닌에게 쏟아지는 시선들 또한 덩달아 뜨거워졌다.
“우리는 이미 반란군을 제압하고 모스크바와 페트로그라드를 비롯한 우리의 도시를 지켜 냈습니다. 그리고 소비에트의 병사와 노동자들은 이 기세를 유지하며 코르닐로프 일당을 무찌를 것입니다.”
그러나 우상 숭배자와 다를 바 없는 열광적이어도 너무 열광적인 대부분 시선 사이에 섞여 있는 단 하나의 시선은 살기와 긴장으로 차갑게 식어 있었다.
핏발 선 눈으로 레닌을 노려보며 단 한 번의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다.
“우리에겐 결함이 있습니다. 부정할 것은 없습니다. 이것 때문에 우리는 무언가를 잃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 결함들은 제거할 수 있습니다. 일꾼과 농부들은 여전히 겁을 내고 있지만…….”
스윽──
그리고 그 기회는 머지않아 찾아왔다.
연설이 점점 고조되고, 레닌을 비롯한 사람들 또한 덩달아 분위기에 도취했을 때 사람들 사이에서 검은 총신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 끝엔 레닌이 있었다.
“노동자 동지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우리 뒤에 대다수 민중이! 우리 뒤에 전 세계의 억압받는 사람들과 노동자들이! 우리 뒤에 정의 실현이 있습니다! 우리의 승리는 보장되어 있습니다!”
“우라아아!!!”
타앙─!
땀을 흘리며 연설을 마친 레닌을 향한 커다란 함성 속에서 불꽃과 함께 한 발의 총성이 울려 퍼졌다.
레닌은 총을 피할 새도 없이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가슴을 부여잡고 바닥으로 쓰러졌고, 레닌에 열광하던 사람들은 비명을 지를 생각조차 하진 못한 채 주저앉았다.
“암, 암살자다!”
“뭣들 하고 있나. 레닌 동지를 해친 암살자를 붙잡아라!”
트로츠키와 의미심장한 시선을 주고받은 스탈린의 외침에 얼이 나가 있던 레닌의 경호원들이 정신을 차리고 총을 쏜 암살범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경호원들이 도망치려는 암살범을 제압하는 사이, 트로츠키와 스탈린은 무릎을 꿇고 레닌에게 다가갔다.
“레닌 동지, 괜찮으십니까?”
“트로……츠키…… 쿨럭쿨럭!”
레닌이 입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자신은 괜찮다는 듯 트로츠키와 스탈린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런 레닌을 향해 두 사람은 혀를 찼지만, 이내 표정을 싹 바꾸고 레닌의 손을 붙잡았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곧 모든 게 다 괜찮아질 겁니다.”
“그게 무슨…… 으윽!”
레닌이 트로츠키의 말이 무슨 뜻인지 묻기 전에 레닌이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끝내 기절했다.
이에 레닌의 상처를 살피는 척하던 스탈린이 외쳤다.
“빨리 구급차를! 레닌 동지를 서둘러 병원으로 이송해야 한다!”
“알, 알겠습니다!”
스탈린의 외침에 사람들이 기절한 레닌을 서둘러 들것에 싣고 서둘러 병원으로 옮겼다.
트로츠키와 스탈린은 다시 한번 시선을 주고받으며 멀어지는 레닌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비보가 전해졌다.
* * *
“레닌 동지가 사망했소, 나데즈다.”
“뭐, 뭐라고요? 그게 사실인가요?”
“…….”
“레프, 코바! 지금 내 남편이 죽은 게 사실이냐고 물었잖아요!”
레닌이 총에 맞았다는 소리를 듣고 서둘러 병원으로 달려온 레닌의 아내, 그리고 동지였던 나데즈다 크룹스카야(Надежда Константиновна Крупская)의 절망 어린 외침에 트로츠키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안 돼, 안 돼……!”
털썩─
충격을 이기지 못한 크룹스카야가 바닥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이에 원 역사와 달리 레닌의 후계 문제로 크룹스카야에게 전화로 욕을 날릴 필요가 없어서 사이가 나쁘지 않았던 스탈린이 그녀를 부축했다.
“이,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죠? 수술은 분명 잘 끝났다면서요!”
“패혈증이라더군. 수술 뒤에 가끔 생기는 일이지. 의사들이 서둘러 달려갔지만, 그들이 도착했을 땐 이미 늦은 뒤였소.”
“아아…. 아아아아……!!”
크룹스카야가 부부로서도, 혁명 동지로서도 평생의 동반자였던 레닌을 한순간에 잃은 슬픔을 참지 못하고 비통하게 울부짖었다.
그리고 레닌을 잃은 슬픔은 곧 레닌을 죽인 자에 대한 분노로 바뀌었다.
“대체 누가, 대체 누가 이런 끔찍한 일을 벌인 건가요? 설마 코르닐로프의 짓인가요?”
“그런 것 같소. 우리의 힘을, 레닌 동지를 두려워해 결국, 이런 일을 벌인 것이겠지.”
“이런 치졸하고 비겁한……!”
크룹스카야가 피가 나올 정도로 입술을 강하게 깨물었다.
그녀의 두 눈동자엔 레닌을 죽인 극악무도한 반동, 코르닐로프에 대한 어마어마한 증오가 담겨 있었다.
물론 코르닐로프로선 아닌 밤중에 홍두깨와 같은 일이었지만, 이를 해명하기엔 그는 모스크바에서 너무 멀리 떨어진 곳으로 있었다.
“알릴루예바 동무, 크룹스카야 동무를 데리고 나가시오. 그녀에겐 안정이 필요하오.”
“……예. 트로츠키 동지.”
크룹스카야의 모습이 안타깝다는 듯한 트로츠키의 목소리에 레닌의 비서이자 스탈린의 애인인 알릴루예바가 창백한 얼굴의 크룹스카야를 부축하고 병원 밖으로 나갔다.
스탈린과 부하린 등 인민위원들은 그녀의 뒷모습을 애통하다는 얼굴로 바라봤다.
겉으로만 보면 그야말로 리더를 잃은 모범적인 부하들의 모습이다.
“후, 연기도 못 해 먹겠군.”
그러나 크룹스카야가 사라지자마자 그들의 얼굴은 곧바로 충직한 부하에서 음모자로 변했다.
“제르진스키 동무, 암살범은 어떻게 되었소?”
“그 사회혁명당 출신 애송이라면 이미 처리했습니다, 트로츠키 동지. 표면적으론 고문 중 혀를 깨물고 자살한 것으로 발표될 것입니다.”
“의사와 간호사는?”
“그들도 머지않아 처리할 것입니다.”
레닌이 러시아 내부의 반혁명세력 척결을 위해 만든 ‘반혁명 사보타지 분쇄를 위한 전러시아 위원회’, 줄여서 체카(ЧК)의 수장인 펠릭스 제르진스키(Фе́ликс Эдму́ндович Дзержи́нский)의 말에 트로츠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르진스키는 그 스톨리핀이 자비로워 보일 정도로 반혁명 세력을 러시아 땅에서 청소(심지어 하룻밤 사이에 1,500명을 처형한 적도 있다)하는 것에만 관심 있는 기계 같은 인간이지만, 그만큼 일 처리 하나는 철저했다.
괜히 그에게 ‘철의 펠릭스’란 별명이 붙은 것이 아니다.
“어쨌든, 일은 잘 풀렸으니 다행이군요.”
부하린이 한시름 놓았다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의 본래 계획대로라면 레닌은 총에 맞은 즉시 죽었어야 했다.
하지만 그의 목숨줄은 애석하게도 상당히 질겼고, 살아남아 병원에 이송되었다.
스탈린이 미리 레닌이 죽지 않을 것을 대비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일이 복잡해질 뻔했다.
“레닌의 시대도 이걸로 끝이군요.”
“아니, 이제 시작일세. 부하린 동무.”
타락한 레닌은 혁명의 이름으로 처단했다.
그러나 여기 있는 이들을 제외한 러시아의 인민들은 그가 타락했다는 사실을 모를 것이다.
레닌은 소비에트 러시아와의 전면전에 겁을 먹은 코르닐로프에게 암살당한 순교자가 될 것이다.
영원토록 계속 소비에트의 상징이자 혁명의 상징으로 남을 것이다.
“레닌은 살았으며, 레닌은 살아 있으며, 레닌은 살아 있으리라.”
레프 트로츠키가 이끌어 갈 새로운 시대를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