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Saved Caesar RAW novel - Chapter 282
282화 : 다가오는 1917년
“우유 맛이 참 좋군. 홍차에 넣어도 매우 잘 어울릴 것 같아. 니키, 네게 이런 재능이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어.”
“고마워, 조지. 나로선 드디어 천직을 찾은 느낌이야.”
니콜라이 2세의 여유가 느껴지는 말에 그를 찾아온 조지 5세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다행히 그의 사촌은 새로운 삶에 충분히 만족하는 모양이었다.
황제 때도 이랬으면 좋았을 테지만.
아마 역사가 바뀌었을 것이다. 역사가.
“그나저나…… 타티야나와 에드워드와의 혼담에 대해선 생각해 봤어?”
조지 5세가 어머니의 고향이기도 한 덴마크까지 니콜라이 2세를 만나러 온 이유였다.
그만큼 조지 5세는 못난 장남을 결혼시키는 것이 절실했다.
현재 영국의 프린스 오브 웨일스 에드워드는 수려한 외모와 패션 감각 덕분에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할아버지 에드워드 7세에게 물려받은 특유의 인싸 기질 덕분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문제는 에드워드 왕세자가 할아버지의 복잡한 연애 편력까지 물려받았다는 것이다.
에드워드 7세가 살아 있던 시절 아버지의 화려한 사생활에 눈을 찌푸렸던 조지 5세로선 그야말로 한숨이 나올 일이었다.
‘영국 왕실의 대를 이어야 할 왕세자란 놈이 질 낮은 여자들과 스캔들이나 벌일 뿐 결혼할 생각도 없으니…….’
에드워드와 2살 차이밖에 안 나는 5촌 조카 루이제와 한스 폰 초이 공작은 벌써 애가 둘이다.
이러다가 어디서 미국인 유부녀와 결혼하겠다고 하는 것은 아닌지 조지 5세는 진심으로 걱정이 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아들놈이 그 정도로 생각이 없진 않겠지만.
‘그런 꼴을 보느니 차라리 버티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말지.’
어쨌든 조지 5세에게는 혈통과 품위를 모두 갖춘 흠 잡을 때 없는 며느리가, 제대로 된 영국의 왕세자비가 필요했다.
그리고 또 다른 5촌 조카이자 니콜라이 2세의 차녀 타티야나는 영국 왕실에 있어 최선의 선택지였다.
에드워드와 나이대도 비슷했고, 어머니 알렉산드라 왕비와 아내인 테크의 메리를 포함한 다른 왕실 가족들도 타티야나가 왕세자비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있을 정도로 외모와 품성도 갖추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한 여자에게 정착을 못 하고 있던 장남 녀석도 미모 때문이겠지만, 어쨌든 타티야나에게 호감을 품고 있었다.
타티야나와 결혼한다면 어쩌면 장남 놈도 자신처럼 한 여자에게 지고지순한 남자로 바뀔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여자 문제가 좀…….”
다만, 연애 결혼 주의자답게 정치적 조건보다 사랑을 중시하는 니콜라이 2세는 에드워드와 타티야나의 혼담에 대해 여러모로 우려스럽다는 표정이었다.
그야 조카인 만큼 그도 에드워드가 할아버지처럼 화려한 여성 편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괜히 에드워드와 타티야나를 결혼시켰다가 딸의 눈에 눈물이 흐르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들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조지 5세로선 차마 반박할 수 없던 우려였다.
하지만 여기서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미 또 다른 왕세자비 후보였던 올가는 호엔촐레른이 채 갔다.
이번 혼담에 실패하면 에드워드 녀석은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제대로 된 여자와 결혼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놈의 여자 취향이 취향이니까.
“에드워드도 결혼하면 정신을 차릴 거야. 아니, 내가 책임지고 그렇게 만들겠어.”
그렇기에 조지 5세는 그 어느 때보다 진실하고 간절한 목소리로 자신의 사촌이자 예비 사돈을 향해 맹세했고, 니콜라이 2세는 고민에 빠졌다.
사실 에드워드 녀석의 여자 문제만 빼면 이번 혼담을 굳이 반대할 이유는 없었다.
그야 영국 왕세자비란 자리는 타티야나에게 있어서도 최고의 선택지이니까.
‘이에 비해 타티야나의 또 다른 혼담 상대인 카라조르제비치의 알렉산다르는 망국의 왕자지.’
로마노프도 같은 처지이긴 하지만, 그래도 급이 있는 법이다.
게다가 지난 대전쟁에서 세르비아를 편들어 줬다가 나라와 가문을 말아먹은 니콜라이 2세다.
세르비아라면 이젠 치가 떨려 온다.
“후우……. 타티야나가 결혼을 원한다면 나도 허락할게.”
“고마워, 니키. 그 정도면 충분해.”
사촌의 입에서 나온 한숨 섞인 대답에 조지 5세는 오랜만에 미소를 지었다.
그가 가진 오랜 고민이 해결될 날이 머지않았다.
* * *
라인하르트의 탄생으로 떠들썩했던 여름이 순식간에 지나고, 가을이 찾아왔다.
그리고 1916년도 어느덧 하반기에 접어들었다.
물론, 러시아 내전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었다.
트로츠키는 내 예상에서 단 한 치도 벗어나지 않고, 인해 전술을 앞세워 바이칼 방어선을 계속 들이박고 있었지만, 전황은 처음 적군이 공세를 시작했을 때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그에 비해 러시아의 경제와 민심은 나락을 향해 가는 중이지.’
그야말로 폭락하는 주식처럼 새빨간 급경사선을 그리며 아래를 향해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시드까지 날려 먹고 있는 트로츠키가 머리를 부여잡고 절규하는 것이 눈에 훤히 보일 정도다.
“그래도 여기서 포기하진 않겠지.”
오히려 끝을 모르고 폭주하는 열차처럼 더욱 독기를 품고 달려들리라.
그것이 트로츠키란 인종이니까.
아마 러시아 내전이 끝나려면 적어도 올해는 넘겨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때쯤 되면 소비에트 러시아도 한계에 부닥칠 것이고, 끝나지 않고 성과도 없는 내전과 전시 공산주의에 지친 인민들 아니, 볼셰비키 간부들부터가 트로츠키를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그러니 내전은 젝트에게 맡기고, 나는 그동안 쌓인 일을 하자.
1916년이 되고 이전에 언급된 여성 참정권 등 개혁안이 하나둘씩 시행되면서 독일 전체가 바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덩달아 내 책상 위의 서류 또한 점점 산과 산맥을 이루고 있던 만큼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을 때 처리를 해 둬야 한다.
특히 지금 내가 직면한 문제는 해체가 예정된 프로이센 비밀경찰을 대체할 새로운 정보기관을 창설하는 것이었다.
응? 왜 이걸 내가 신경 쓰냐고?
왜냐하면, 새로운 정보기관은 제국외무청 산하로 둘 예정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전쟁성 산하이지만, 양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외무부 산하로 소속이 바뀌는 영국의 SIS처럼 말이다.
원래 외교와 첩보는 각각 동전의 앞면과 뒷면이나 마찬가지인 법이다.
특히 앞으로 다가올 시대가 시대인지라 정보기관을 대학원생처럼 굴려야 하는 만큼 나중에 바뀔지라도 지금은 내 밑에 두는 편이 편하다.
“이름은…… 대충 독일 연방정보국(Bundesnachrichtendienst, BND)에서 따와서 독일 제국정보국(Reichnachrichtendienst, RND)으로 하면 되겠지.”
아무리 그래도 게슈타포나 슈타지같이 이름을 들을 때마다 흠칫할 것만 같은 이름들을 쓸 순 없는 노릇이니 적당한 타협, 적당한 변형이라 생각한다.
“장관님, 오후 보고가 도착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슈미트 양. 어디 보자……. 연방대법관 찰스 에반스 휴즈가 연방대법관을 사임하고 하딩을 러닝메이트 삼아 공화당 경선에 나갔다라.”
그러고 보니 올해 말에 미국 대선이 있었다.
어차피 공화당이 이기겠지만.
‘그야 윌슨이 그 지랄을 했는데, 민주당이 이길리가 있나.’
미국인들은 아직 윌슨이 저지른 짓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당장 윌슨이 반신불수가 된 이후, 백악관과 미국 정계가 어떻게 되었는지 생각해 봐라.
원래도 1916년 대선에서 민주당이 공화당보다 우세를 점했다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이런 분위기에서 민주당이 이길 가능성은 정치의 신이라도 강림하지 않는 이상 아예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럼, 역시 휴즈가 당선되겠네.”
물론, 이번 공화당 경선엔 3선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시어도어 루스벨트 등 여러 쟁쟁한 후보들이 있지만, 원 역사를 따져 봤을 때 휴즈가 대선 후보로 뽑힐 확률이 높다.
휴즈는 원 역사에서도 재선에 도전한 윌슨이 패배를 각오했을 정도로 1916년 대선의 다크호스였고, 능력과는 별개로 얼굴 하난 잘생긴 하딩까지 러닝메이트로 붙어 있었다.
얼마 전 미국도 여성참정권을 인정했는데, 여성 유권자들 다수는 중년 미남 하딩의 팬(농담이 아니라 진짜다)이었던 만큼 휴즈로선 지려야 질 수가 없는 선거였다.
“그러면 역시 해군 군축 이야기는 미국에서 나오려나?”
왜냐하면, 찰스 휴즈야말로 하딩 정부의 국무장관였던 원 역사에서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을 주도했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특히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과 일본의 호황이 일찍 찾아오면서 태평양 패권을 놓고 벌어지고 있는 미국과 일본의 건함경쟁 또한 덩달아 일찍 열이 오른 상황이다.
이대로 가다간 10년 안에 건함경쟁이 지나치게 과열되어 미국과 일본 사이에 전쟁이 터질 것이란 말이 나오고 있던 만큼, 휴즈가 만약 대통령이 된다면 어떻게든 건함경쟁부터 해결하려고 할 게 분명했다.
“그러니 우리도 미리미리 그때를 준비해야겠지.”
참고로 해군 군축을 안 한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거절할 이유도 딱히 없었고 말이다.
가뜩이나 돈 들어갈 곳도 많고, 전쟁도 끝난 마당에 건함경쟁을 계속 이어 가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니까.
게다가 우리 독일은 지난 대전쟁에서 독일 해군의 주적이라 할 수 있는 프랑스 해군, 러시아 해군 또한 몰락한 상황이라 다른 나라들보다 해군 군축으로 인한 안보에 대한 부담이 적은 편이었다.
그러니 이참에 다 함께 군축해서 허리에 가해지는 부담도 줄이는 편이 훨씬 이득이었다.
“문제는 티르피츠 제독인데…….”
우리 장인어른도 문제다.
제국을 대표하는 두 배박이는 전함들이 군축 조약으로 인해 스크랩되는 것을 절대 반기지 않을 테니까.
어쩌면 내 집무실 앞에서 시위하며 결사반대를 외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니 이에 대해선 내가 군축 조약을 대비해 준비한 계략이 부디 잘 먹히기를 바랄 뿐이다.
“다음은…… 영국 총선에서 신 페인(Sinn Féin, 아일랜드 독립을 주도한 민족주의 정당)이 북아일랜드를 제외한 아일랜드 전역의 의석을 석권 가능성 커?”
전후 영국을 뒤집어 놓은 아일랜드 독립전쟁이 머지않아 일어난단 소리였다.
원 역사를 따져 봤을 때 아마 내년 1월쯤이 되지 않을까 싶다.
물론, 보고서엔 아일랜드에서 반란이 일어나도 전력이 압도적인 강한 영국군이 이길 것이라 되어 있었지만, 내가 본 역사에선 정반대였다.
아일랜드인들은 십여 년 전 영국을 괴롭혔던 보어인들처럼 게릴라전으로 영국에 맞설 것이고, 전쟁에 지칠 대로 지친 영국 국민은 로이드 조지에게 타협을 요구할 테니까.
‘그리고 아일랜드 내전 또한 필연적으로 일어나겠지.’
반쪽짜리 독립을 두고 일어난 아일랜드인들의 동족상잔.
비참한 일이지만, 내가 딱히 해 줄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어쨌든 영국은 앞으로의 유럽 경영에 필요한 동맹국이고, 괜히 우리 독일과 상관없는 아일랜드 문제로 영국과 괜한 마찰을 빚을 순 없었으니까.
“하여튼, 로이드 조지 이 양반도 총리 자리에 있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네.”
로이드 조지가 총리 자리에서 물러난 것은 러시아 내전 개입 등 해외 파병으로 인한 국민의 불만과 아일랜드 독립으로 인해 촉발된 보수당(현재 자유당과 연립 내각을 구성하고 있었다)의 반발 때문이었다.
전자는 이미 일어나고, 후자도 곧 일어날 예정이다.
거기다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식민지에서의 소요를 생각한다면 로이드 조지 시대의 끝은 필연이라 할 수 있겠다.
“하여튼, 내년에도 바쁘게 생겼어.”
이놈의 평화는 대체 언제쯤 오는 걸까?
나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쌓여 있는 서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 * *
그로부터 시간이 흐르고 흘러 다시 차가운 겨울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한 1916년 11월 7일.
반병신이 된 우드로 윌슨을 대체할 제29대 미합중국 대통령을 선출할 시간이 다가왔다.
미국인들로선 그야말로 손꼽아 기다려 온 순간이라 할 수 있다.
공화당 측에선 예상대로 경선에서 무난하게 승리를 거둔 찰스 에번스 휴즈와 워런 G. 하딩이, 민주당 측에선 오하이오 주지사 제임스 M. 콕스(James Middleton Cox)와 미국인들에겐 예상외의 후보였던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전 해군보 차관이 각각 대통령 후보와 부통령 후보로 맞부딪혔다.
“윌슨과 민주당이 저지른 짓을 잊지 말자!”
“미국의 위신을 다시 세울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공화당뿐이다!”
“공화당에게 한 표를!”
그러나 미국의 주요 도시를 꽉 채운 공화당의 목소리에서 알 수 있듯이 이번 대선은 압도적으로 민주당에게 불리한 선거였다.
윌슨이 미국인들의 마음에 남긴 상처는 고작 1, 2년 만에 사라질 것이 아니었으니까.
“미워도 다시 한번! 민주당에 미국의 위신을 회복할 기회를 주십시오!”
“풋, 뭐라는 거야?”
“헛소리할 시간 있으면 집에 가서 잠이나 자슈!”
덕분에 민주당의 분위기와 모습은 선거 구호만큼이나 안쓰러웠다.
공화당의 기세등등한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선거 캠페인을 이어 가도 사람들의 반응은 호응보다 비아냥이 많았으니.
“후, 역시 이번 대선은 틀린 건가.”
콕스에게 러닝메이트로 지명되어 대선에 나온 젊은 루스벨트로선 한숨밖에 나오지 않는 상황이었다.
물론, 처음부터 이길 수 있으리란 기대는 품지도 않았다.
그가 부통령 후보로서 대선에 나온 목적은 어디까지나 이번 대선을 통해 자신의 이름을 조금이나마 미국인들의 머릿속에 각인시키고, 민주당 내에서의 자신의 입지를 높이기 위한 것이니까.
그렇게 머지않은 미래 미국의 거인이 될 유망주가 미래를 바라보는 사이 대선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모두의 예상대로 휴즈의 압도적인 승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