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Saved Caesar RAW novel - Chapter 289
289화 : 사랑과 전쟁 (2)
조지 5세는 요즘 마음이 심란했다.
아일랜드의 반란이 끝날 기미가 안 보이며 그레이트 브리튼 및 아일랜드 연합왕국에서 아일랜드가 빠지려고 하는 것도 그랬지만, 무엇보다 웬수보다 더 웬수 같은 장남 놈이 기껏 가져온 혼담을 망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부러 저러는게 분명해.’
자신에 대한 알량한 반항심 때문일까, 아니면 결혼할 사람은 자신이 고르겠다는 것일까.
어느 쪽이든 왕세자가 가져야 할 책임감과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
평소의 조지 5세 같았으면 당장이라도 불호령을 내렸겠지만, 이번만큼은 조지 5세는 참았다.
아들을 최대한 타이르며 어떻게든 혼담을 이어 가려고 했다.
“조지 아저씨, 죄송하지만 더는 못하겠어요.”
그러나 결국 조지 5세가 우려하던 사태가 일어나고 말았다.
OTMA에서 가장 착하기로 소문난 타티야나의 인내심이 끈이 끊어져 버린 것이다.
물론 오히려 지금까지 참아 온 것이 용할 정도긴 했다.
장남이 타티야나를 대하는 태도는 에드워드가 아무리 감싸 주려고 해도 무례 그 자체였으니.
“타티야나, 네가 왜 이러는지는 이해한단다.”
조지 5세는 다시 한번 치밀어 오르는 아들에 대한 분노를 삭이며 타티야나를 향해 부드러운 어조로 이야기했다.
아마 자식들에게도 이렇게 다정했던 적이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왕실 간의 혼담은 쉽게 깰 수 있는 게 아니란다.”
아니, 깨서는 안 됐다.
이는 조지 5세의 실수 때문이기도 했는데, 급한 마음에 에드워드가 타티야나와 결혼한다는 것이 거의 확정 났다는 듯 행동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망국의 황녀란 타이틀에 더해 미모와 성품을 갖춘 차기 왕세자비에 국민이 환영을 보내고 있는 판국이니…….’
처음엔 잘됐다고 생각했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니 그야말로 자충수를 둔 격이나 다름없다.
물론, 자신이라고 장남의 혼담이 이딴 꼴이 날 거라고 상상이나 했겠느냐마는…….
하여튼, 이런 상황에 왕세자 때문에 혼담이 이딴 식으로 끝났다는 것이 알려지면 영국 왕실의 위신은 바닥으로 처박힐 것이다.
에드워드에 대한 평판도 마찬가지다.
가뜩이나 에드워드 녀석도 결혼할 마음이 전혀 없는 판국에 왕세자비와 왕세손을 보는 날이 더 멀어질 것이다.
게다가 영국 국내의 사정 또한 아일랜드 독립 전쟁으로 인해 그 어느 때보다 민감한 시기다.
왕실에 대한 비난이 나올 만한 일은 최대한 삼가야만 했다. 했지만…….
“저도 알고 있어요, 조지 아저씨. 하지만 에드워드랑 결혼만큼은 도저히 못 하겠어요. 혼담에 관심이 없는 것까진 이해할 수 있겠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껏 해야죠!”
에드워드 때문에 평생 연이 없을 것 같은 독기가 생겨 버린 타티야나는 다른 사람은 다 참아도 에드워드만큼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하아…….”
그녀의 울분으로 가득 찬 얼굴에 조지 5세는 도저히 할 말이 없다는 듯 한숨과 함께 고개를 푹 숙였다.
아마 니키가 이 꼴을 봤으면 이러려고 타티야나와 에드워드의 혼담을 허락해 달라고 했냐며 갓 짠 우유를 자기 얼굴에 뿌렸을 것이다.
‘신이시여, 이놈을 대체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차라리 차남이나 삼남이면 저랬으면 그냥 화만 내고 끝냈을 것이다.
하지만 녀석은 하필이면 장남이었고, 하필이면 왕세자였으며 하필이면 자신의 뒤를 이어 장차 영국의 새로운 국왕이 될 사람이었다.
“차라리 평생 혼자 사는 한이 있어도 에드워드와는 결혼 못 해요. 에드워드랑 결혼할 바엔 차라리 앨버트랑 결혼하는 게 백배 천배 나을 거예요.”
조지 5세가 영국 왕실의 미래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사이 타티야나가 쐐기를 박듯 말했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조지 5세의 머릿속에 벼락이 내리쳤다.
그래, 덴마크까지 찾아가서 니키에게 사정사정해서 만든 혼담이다.
참으로 짜증 나는 사실이지만 영국 왕실을 위해서, 그리고 왕세자의 앞날을 위해서라도 혼담은 계속되어야만 했다.
혼담 대상을 바꿔서라도 말이다.
조지 5세는 결심을 굳힌 듯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타티야나를 향해 말했다.
“타티야나, 네 뜻은 잘 알겠다. 나 또한 네가 불행한 결혼을 하긴 원하지 않는단다. 그렇지만 잠시만, 잠깐이라도 좋으니 내 말을 들어 주겠니?”
“네?”
타티야나의 혼담이 그녀조차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순간이었다.
* * *
“저기 안 가 봐도 돼? 국왕 폐하께서 화가 잔뜩 나신 것 같은데.”
“그 망할 노친네는 신경 쓰지 마. 생각만 나도 짜증이 나니까.”
런던 어딘가의 고급 호텔에서 알몸이나 다름없는 여자와 누워 있는 웨일스 공 에드워드는 입에 담배를 문 채 얼굴을 찌푸렸다.
그만큼 에드워드는 조지 5세가 그를 못마땅해하는 것만큼이나 엄격한 아버지에게 신물이 난 상태였다.
타티야나와의 혼담도 마찬가지다.
빅토리아 할머니가 살아 있을 때도 아니고, 요즘 시대에 정략결혼은 무슨 정략결혼인가.
물론, 자신도 처음엔 결혼 적령기가 된 육촌 동생과의 결혼에 관심이 있긴 있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타티야나는 미인이었고, 에드워드란 남자는 미인을 좋아했으니까.
그렇기에 자신을 삶을 좌지우지하려는 아버지의 계략인 것을 알면서도 한번 참아 보자며 오랜만에 타티야나를 만났지만, 에드워드의 기대는 역시나 실망으로 돌아왔다.
어린 시절 이후 오랜만에 만난 타티야나는 얼굴만 예뻤지, 그가 제일 싫어하는 재미없는 여자였다.
게다가 요즘 니키 아저씨가 소를 친다더니 시골 여자처럼 촌스럽고, 또 수수했다.
사실 에드워드로선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 타티야나를 비롯한 니콜라이 2세의 딸들이 부모님의 교육 방침 덕에 사치와는 거리가 먼 검소하고 소박한 생활을 보낸 데다가 구중궁궐에서 세상 물정을 모른 채 자라 왔다.
그 덕에 귀족 사회에 적응을 영 못해서 화려한 사교 생활과는 연이 거의 없었고, 영국 사교계의 찬란한 아폴로인 에드워드가 보기엔 타티야나가 너무나도 따분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왕세자 시절부터 검소하고 조용한 삶을 즐긴 탓에 재미없는 사람으로 유명했던 조지 5세는 이런 타티야나의 모습에 매우 흡족해했지만, 에드워드와는 맞으려야 맞을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의 어릴 적 모습만을 생각한 조지 5세의 실책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도 괜찮겠어? 상대는 잘나신 러시아의 황녀님이잖아?”
“망한 나라의 황녀지. 남은 건 혈통밖에 안 남은 여자가 뭘 할 수 있겠어. 울면서 농장으로 돌아가겠지.”
“풋, 그래. 촌스러운 황녀님께 딱 어울리는 곳이네.”
폐허가 된 파리를 떠나 런던으로 온 매춘부이자 에드워드가 최근 만나고 다니는 애인인 마르그리트 알리버트(Marguerite Marie Alibert)의 말에 에드워드는 피식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빨갱이에게 쫓겨나 몰락할 대로 몰락한 로마노프에겐 가축이나 치고 우유나 짜는 일이 더 어울린다.
물론, 조지 5세가 들었으면 너는 그럼 뭐가 그렇게 잘났냐고 당장이라도 귀싸대기를 올려붙일 소리였지만.
“어쨌든 이대로 시간을 끌어야지. 이 웃기지도 않는 혼담이 끝날 때까지 말이야.”
물론, 그때까진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이미 타티야나도 혼담을 더는 이어 나갈 생각은 없어 보였고, 아버지도 포기하기 일보 직전이었으니까.
“마르그리트, 어때? 한 판 더 뛸…….”
똑똑! 똑똑!
일이 잘 풀린다는 만족감에 기분이 좋아진 에드워드가 마르그리트에게 시선을 돌렸을 때 호텔의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좋은 시간을 방해받는 것을 누구보다 싫어하는 에드워드는 얼굴을 찌푸리며 문을 향해 다가갔다.
“씨발, 래슬스잖아!”
그리고 왕세자의 얼굴은 문에 난 작은 창을 통해 비치는 깐깐 그 자체인 남자를 발견하고 더욱 구겨졌다.
그의 이름은 앨런 래슬스(Alan Frederick “Tommy” Lascelles).
영국 왕실을 다룬 왕관 드라마를 봤으면 익숙할 이름인 ‘토미 래슬스’란 별명으로 더 잘 알려진 영국 왕실 보좌관 중 한 사람으로 조지 5세부터 엘리자베스 여왕까지 4명에 달하는 영국 군주를 개인 보좌관으로서 보필한 인물이다.
참고로 그는 1920년에 왕세자의 개인 보좌관이 되기도 했는데 ‘성격 차이’를 이유로 10년을 못 채우고 물러났을 정도로 에드워드와 전혀 안 맞았다.
에드워드가 그의 등장에 질색한 이유였다.
-전하, 순순히 문을 열어 주시겠습니까? 아니면 제가 직접 문을 부수고 들어가야겠습니까?
“젠장, 마르그리트 옷 입어!”
언제 들어도 짜증이 치미는 딱딱한 목소리에 에드워드가 바닥에 굴러다니는 옷을 집어 들고 어이없어하는 표정을 짓는 마르그리트를 향해 던졌다.
그리고 자신도 서둘러 옷을 주섬주섬 주워 입었다.
아까 타티야나를 비웃은 것이 무색해질 정도로 추레한 행동이었다.
“후우…. 전하, 또 저 프랑스 창…… 여자를 만나고 계셨습니까? 폐하께서 아시면 경을 치실 겁니다.”
몇 분 후 문이 열리자 래슬스의 한숨 소리와 함께 못마땅함이 가득 담긴 질책의 시선이 에드워드를 향해 쏟아졌다.
뭐, 에드워드에겐 익숙한 일이었다.
“그대가 입을 놀리지 않고 조용히 있으면 그럴 일 없소, 래슬스.”
“쯧, 오늘은 더 시급한 일이 있으니 넘어가겠습니다.”
“시급한 일?”
“타티야나 여대공 전하와의 혼담 문제로 폐하께서 전하를 부르셨습니다.”
혼담이란 말에 에드워드가 잠시 눈을 끔벅거렸다.
그러곤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드디어 아버지께서 육촌 여동생과의 혼담을 포기하려는 모양이다.
그 말은 곧 다시 자유를 얻을 시간이 왔다는 소리였다.
“크흠, 그렇다면 서둘러야겠군. 바로 가겠네, 래슬스.”
“이럴 땐 참으로 빠르시군요.”
래슬스의 빈정거리는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에드워드는 서둘러 버킹엄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상상조차 하지 못한 채.
* * *
“늦었구나, 아들아. 언제나처럼 말이다.”
“런던에서 꽤 먼 곳에 있었거든요.”
“흥, 또 그 프랑스 창녀랑 놀아난 것이겠지.”
에드워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조지 5세는 벌써부터 화를 주체하지 못하겠다는 듯 혼담 중에 매춘부랑 놀아나는 못난 아들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대체 언제까지 그렇게 정신 못 차리고 살 거냐? 가뜩이나 아일랜드 문제 때문에 시끄러운 거 몰라?!”
“제 앞가림은 제가 알아서 합니다, 아버지. 그러니 잔소리는 그만하시고 어서 본론이나 말씀하시죠.”
반성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 에드워드의 행동에 조지 5세는 다시 한번 혈압이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계속 화를 내 봤자 이 반항아는 귓등으로조차 듣지 않겠지.
결국, 조지 5세는 포기하고 아들이 원하는 대로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그래, 네가 원하는 대로 타티야나와의 혼담은 없던 일로 하기로 했다.”
조지 5세의 말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승리의 미소를 짓는 에드워드.
“그 대신 타티야나는 알버트랑 혼담을 진행하는 것으로 할 거다.”
“……예?”
그러나 이어진 아버지의 말에 왕세자의 미소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얼빠진 표정이 그 자리를 대체했다.
지금 타티야나를 자신 말고, 누구와 결혼시킨다고? 버티? 자신의 동생인 말더듬이 버티?
“푸핫…… 푸하하하하하하!!”
국왕의 집무실에 왕세자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야 웃음을 참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아버지에게 이런 유머 감각이 있다는 것은 처음 알았네요. 진심이세요?”
“지금 내가 누구 때문에 이런 결정을 내렸다고 생각하는 거냐! 나라가 어지러운 상황에 너 때문에 혼담이 없던 일이 된다면 왕실의 위신이 어떻게 될 것 같으냐, 국민의 생각은!”
“흥, 국민도 어차피 외국인 왕비를 들이는 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을걸요? 마리 앙투아네트가 어떻게 되셨는지는 아시죠? 어쨌든 잘됐네요. 두 사람은 잘 어울릴 거예요.”
재미없고, 수수한 육촌 여동생과 소심한 말더듬이 남동생.
아, 머릿속에서 떠올리기만 해도 폭소가 절로 나올 것만 같은 조합이다.
그야말로 천생연분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못난 놈, 이러니 타티야나가 너보다 버티가 훨씬 낫다고 그러는 거다.”
“하. 뭐라고요?”
그러나 킥킥거리던 에드워드의 얼굴은 이어진 아버지의 말에 곧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내가 누구보다 못하다고? 그 버티보다?
“하…….”
에드워드는 덜떨어진 동생보다 못하단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에드워드로선 처음 느껴 보는 감정이 그의 머릿속을 헤집었다.
이름은 모르겠지만, 무척이나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 감정이.
* * *
“타티야나의 혼담 대상이 에드워드에서 알버트로 바뀌었다는군.”
“뭐?”
“그게 정말입니까?”
빌헬름 왕세자 부부의 새로운 집이자 포츠담 회담이 열린 장소이기도 했던 체칠리엔호프 궁전(Schloss Cecilienhof)가 완공된 것을 기념해 루이제와 함께 집들이 겸 찾아온 나는 뜬금없는 소식에 입을 떡 벌렸다.
“난 그냥 혼담이 취소될 줄 알았는데.”
루이제도 믿지 못하겠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에드워드 왕세자와 타티야나 여대공의 사이가 악화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만큼 당황스러운 이야기였다.
“나도 이야기 듣고 깜짝 놀랐어. 아무래도 조지 아저씨는 이대로 혼담을 포기하고 싶지 않나 봐.”
“아무래도 영국 왕실의 위신과 왕세자의 평판이 깎일 것을 우려한 것일까요?”
빌헬름 황태자 부부의 말에 나는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건너건너 들은 거라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영국 왕실이 혼담이 파토 날 위기에 처한 것은 어디까지나 에드워드 왕세자 때문이라고 들었다.
조지 5세로선 이번 혼담 파기가 왕세자의 평판에 끼칠 영향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아일랜드 독립 전쟁 때문에 영국의 분위기도 그 어느 때보다 안 좋은 상황이니까.
‘어쨌든, 이런 건 그쪽이 알아서 할 문제지만, 이러면 엘리자베트 2세는 태어나지 않을 수도 있겠네.’
물론, 버티가 과연 이번에도 조지 6세로 진화할 수 있을지 없을지부터가 미지수이지만.
“타티야나의 혼담이 이번엔 잘됐으면 좋겠네.”
“적어도 에드워드 왕세자 때보단 나을걸.”
내 말에 루이제가 알 것 같다는 듯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나저나 16인치 전함이 거의 완성되었다며?”
“예, 봄에 완공 예정입니다. 폐하께서 벌써 어떤 이름을 붙일지 고민하시더군요.”
“아버지야 언제나 전함에 진심이셨지.”
나는 빌헬름 황태자의 말에 킥킥 웃으며 커피(물론 언제나처럼 카페 초이였다)를 들이켰다.
슬슬 해군 군축 회의를 막을 열 때다.
물론 우리 독일이 주도할 생각은 없었다.
‘그야 우리가 열면 내 일이 많아지잖아.’
그러니 얼마 전에 대통령에 취임한 휴즈에게 대통령 취임 인사 겸 편지를 보내자.
그도 환영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