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Saved Caesar RAW novel - Chapter 298
298화 : 4월의 신부 (3)
“이거 참 오랜만에 뵙는군요. 대전쟁 이후론 처음 뵙는 것이던가요?”
“그렇습니다. 참으로 다사다난한 시간이었죠.”
그래, 다사다난하긴 했지.
내 눈앞에서 샴페인 잔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M자 탈모 하프-대머리 덕분에 한층 더.
“작년에 전쟁장관 겸 항공장관으로 임명되었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만, 요즘은 어떻게 지내십니까?”
나는 친절한 미소와 함께 처칠을 향해 물었다.
물론, 진심이라곤 0.1%도 담겨 있지 않은 정치적인 미소였다.
여기서 진심을 보인다면 대전쟁 때 겪은 스트레스를 담아 당장 내 눈앞에서 꺼지라고 일갈하는 것을 넘어 한스 펀치를 날리고 말 테니까.
‘정말이지 로이드 조지는 왜 이 양반을 다시 내각에 받아들여선.’
뭐,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로이드 조지는 자유당 최후의 총리였던 인물이고, 그가 왜 자유당이 배출한 마지막 총리가 되었는지 증명이라도 하듯 자유당의 현 상황은 지금 벼랑 끝에 몰린 것이나 다름없는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게다가 최근 영국 노동당이 독일 사민당처럼 노조 정당에서 대중 정당으로 변화를 꾀하면서 자유당의 입지를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으니.’
그런 상황에서 갈리폴리를 저질렀어도 여전히 정계 내에서 영향력을 가진 자유당 정치인인 처칠을 내칠 순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자꾸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고, 인성과 모발의 수가 반비례해서 그렇지, 능력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고.
‘정작 처칠은 자유당 망하고 보수당으로 당적을 옮기는데 말이지.’
원래 보수당 출신으로 정치를 시작해서 귀환이라 말하는 쪽이 더 정확하겠지만.
하여튼, 앞으로도 내가 좋든 싫든 처칠의 얼굴을 보게 될 일이 종종 있을 거란 뜻이니, 정말이지 짜증이 난다.
정치란 녀석이 늘 그렇듯이 말이다.
“여전히 아일랜드 문제 때문에 바쁜 나날입니다. 뭐, 늦어도 내년 안엔 끝날 것 같지만 말입니다.”
내가 속으로 툴툴거리는 사이, 처칠이 특유의 부루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내년이라. 다우닝가에서 타협을 고려 중인 모양이군요.”
“아무래도 ‘전쟁이 싫다’라고 외치는 목소리가 너무 커서요. 이뿐만 아니라 아프가니스탄에서도 물러나고, 이집트에도 양보할 생각이라니, 대영제국이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참으로 한심할 따름입니다.”
처칠이 속이 탄다는 듯 샴페인을 들이켰다.
아무래도 처칠은 아일랜드인들과 협상하는 것이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다.
하긴, 이 양반은 이 시대 영국 정치인 중에서도 아일랜드에 대해 상당한 차별 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현재 실시간으로 아일랜드에서 깽판 치며 아일랜드인들의 분노만 돋구고 있는 왕립 아일랜드 경찰대 특수예비군, 통칭 흑갈부대가 다름 아닌 처칠의 작품이기도 했고.
‘제2차 세계대전 때도 누가 처칠 아니랄까 봐 중립을 지키고 있던 아일랜드에 해군 기지로 쓰려고 하니까 땅 조차해 달라는 등 억지스러운 요구를 했지.’
21세기에도 그가 아일랜드에서 욕을 먹는 이유였고, 제2차 세계대전 전까지 정적들에게 전쟁광이라 야유받던 이유기도 했다.
아마 아일랜드가 유럽이 아닌 아시아나 아프리카에 있었으면 원 역사에서 영국의 이라크 통치에 저항하는 쿠르드족 반군에게 겨자가스를 살포하려 했던 것처럼 독가스까지 동원해서 반란을 진압하려고 했을 거다.
처칠이란 인간은 사고방식이 여전히 빅토리아 시대의 그것에 머물러 있는 정진 정명한 제국주의자니까.
“아무튼,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곧 아내가 돌아올 것 같거든요.”
“아아,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인사치레는 이만하면 되었단 생각에 대화를 끝마치려는 순간, 처칠을 나를 붙잡았다.
“모처럼 만난 김에 말씀드릴 일이 있습니다.”
처칠의 말을 듣는 순간, 내 머릿속에 ‘또 무슨 짓을 한 거야’란 문장이 척수 반사적으로 떠올랐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곤란한 일은 아국을 위해서라도 피하고 싶습니다만.”
심지어 워싱턴 해군 군축 회의가 끝난 지 몇 달 지나지도 않았다.
나도 좀 쉬자, 망할 놈들아.
“독일 제국이 우려할 만한 일은 아니니 걱정하지 마시지요. 그저 장관께서 가지고 있는 끈 중 하나를 소개받고 싶은 것뿐입니다.”
“끈이라면….”
“아브드 엘 크림.”
“!”
처칠의 입에서 나올 거라곤 생각지도 못한 이름에 내 몸이 반사적으로 멈칫했다.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이름이었기에.
* * *
아브드 엘 크림(Abd el-Krim).
풀 네임은 무함마드 이븐 아브드 엘카림 엘카타비(Muhammad Ibn ‘Abd el-Karim El-Khattabi).
스페인령 모로코 북쪽에 있는 리프(Rif) 지역 베르베르족 반군 지도자로 스페인의 식민 지배에 저항하는 독립투사이다.
한국에선 그가 활약한 리프 전쟁처럼 그다지 유명하지 않은 인물이지만, 후배들이라 할 수 있는 호찌민, 마오쩌둥, 체 게바라에게도 영향을 미친 게릴라전의 천재로서 베르베르족의 반란을 진압하려는 스페인군을 실시간으로 두들기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아브드 엘 크림에게 왜 처칠이, 영국 정부가 관심을 보이는 것일까?
이유야 뻔할 뻔 자였다.
“처칠 경께선 스페인령 모로코에 관심이 많으신 모양이군요.”
이 새끼들 그새 영국 버릇 못 참고 베를린 회의 때 차지한 프랑스령 모로코에 이어 스페인령 모로코에도 발길을 들이밀려는 거다.
식민지를 잃으면 그만큼 다시 늘리면 된다는 것일까?
그 끝을 모르는 탐욕에 절로 박수가 처질 지경이다.
“걱정하지 마시지요. 저를 포함한 영국 정부는 새로운 전쟁을 일으킬 생각이 없습니다.”
너희 손으론 일으킬 생각은 없다는 소리겠지.
말은 바로 하자.
“다만, 전쟁장관으로서 영국의 안보를 위해 쓸 만한 패를 구해 놓으려고 할 뿐이지요.”
“갈리폴리 때도 비슷한 말을 들었던 것 같은데요.”
“쿨럭! 쿨럭쿨럭!”
누가 윈스턴 갈리폴리 처칠 아니랄까 봐 갈리폴리란 말에 빛의 속도로 발작을 일으키는 처칠.
이야, 생각보다 리액션이 찰진 것이 가히 중독될 것 같은 맛이다.
처칠의 정적들이 처칠이 지랄할 때마다 갈리폴리라고 놀린 진정한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전 두 번째 갈리폴리는 원치 않습니다.”
“그건 그저 운이 안 좋았을 뿐입니다! 전략적으론 옳았어요!!”
“예, 그러시겠죠. 그런데 이게 제 도움까지 필요한 일입니까?”
아브드 엘 크림을 이용하고 싶다면 영국이 하면 되는 일이다.
어디 한두 번 해 본 일도 아니지 않은가.
“크흠, 그 점에 대해선 서로 간의 신뢰가 부족하다고만 말해 두겠습니다.”
엘 크림이 영국을 안 믿는다는 거구만.
나라도 그럴 것 같다.
그는 리프 독립에 투신하기 이전 스페인에서 교사와 저널리스트로 활동했기에 서방에 빠삭한 편이었고, 영국의 웃는 얼굴 뒤에 숨겨진 속셈을 모를 만큼 우둔한 사람도 아니었다.
게다가 원 역사라면 모를까 현재 영국은 프랑스를 쫓아내고, 자신들이 모로코에 눌러앉아 있었다.
아브드 엘 크림으로선 영국을 경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선, 영국 정부의 부탁을 들어드리는 것은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실제로 아브드 엘 크림과 제국외무청 간의 끈은 존재하기 때문이다.
잠시 시간을 돌려 대전쟁 당시 레토포어베크가 베르베르족과 협력해 리비아에서 이탈리아&프랑스를 밀어붙이고 있을 때 엘 크림이 우리 쪽에 접근해 온 적이 있다.
프랑스에 대항하기 위해 독일의 지원을 받고 싶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른바 적의 적은 친구란 것이다.
사실, 그가 우리에게 접근해 온 것은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원 역사에서도 베트남을 비롯해 프랑스의 지배를 받던 피지배민족들이 독일과 손을 잡고 독립을 시도한 사례가 상당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브드 엘 크림도 이와 비슷한 경우였다.
게다가 그는 친독 성향이 있었기에 우리로서도 그와 손을 잡는 것을 거부할 이유는 없었다.
‘다만, 그와의 협력은 얼마 안 가 흐지부지되었지만.’
전쟁이 생각보다 빨리 끝난 탓이었다.
게다가 북아프리카 전역은 리비아를 점령한 이후엔 진격을 거의 안 해서…….
결국, 아브드 엘 크림과의 협력은 소규모 무기 지원과 첩보 협력 정도에만 그쳤고, 그 이후에는 프랑스령 모로코가 영국의 것이 되어서 굳이 우리가 그를 지원해 줄 이유가 없었다.
그야 현재 엘 크림이 싸우는 것은 지금으로선 독일과 관계없는 스페인이었으니까.
“그렇기에 저로선 영국의 행동에 우려를 표할 수밖에 없군요. 모로코에서의 분란은 우리 독일 제국의 이익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데다가 스페인을 자극할 가능성도 있지 않습니까?”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앞서 말했다시피 우리 영국 쪽에서도 일을 크게 벌여 스페인을 자극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저 누군가의 뒤를 살짝 밀어 주고 싶을 뿐이지요.”
퍽이나 그렇겠지.
”독일 측에선 그저 접선이라도 해 볼 수 있도록 연결 고리만 만들어 주시면 됩니다. 게다가 이건 프랑스를 견제하기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프랑스 말입니까?”
“예, 첩보에 따르면 그 페탱이 얼마 전 스페인군의 군사고문이 되었다는 보고가 있더군요.”
아, 그러고 보니 SIS는 지금 전쟁성 휘하, 그러니까 처칠이 담당하고 있던가?
그레이도 아닌 처칠이 나에게 아브드 엘 크림 이야기를 꺼낸 이유도 이것일 것이다.
“자칫 잘못하면 프랑스가 재기를 위해 스페인과 손을 잡을 수 있습니다.”
“글쎄요……. 너무 억측에 가까운 생각이 아닌가 싶습니다만.”
바이마르 공화국이 젝트의 주도 아래 소련과 군사 협력관계를 맺어 독일제 무기를 소련에 주는 대가로 연합군의 눈을 피해 소련 땅에서 비밀리에 전차와 전투기 훈련을 한 사례가 있긴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스페인이 프랑스를 위해 그렇게까지 해 줄 이유가 없었다.
얻는 것보다 들키는 순간 잃을 것이 더 많았으니까.
게다가 내가 알기로 페탱이 스페인의 군사고문이 된 것은 그를 위험시하고 경계한 프랑스 정부가 그를 프랑스에서 멀리 떼놓으려는 것에 불과했다.
그런 상황에서 페탱이 스페인의 군사고문으로 취업했다고, 프랑스와 스페인이 뒤에서 손을 잡았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나갔다.
‘그 프랑코가 페탱의 제자이긴 한데, 뭘 해 볼 수 있는 위치는 아니고.’
물론, 주의를 안 할 수는 없겠지만.
“대영제국과 독일 제국은 전쟁과 사악한 공산주의자들로부터 유럽의 평화를 지키는 두 기둥입니다. 그러니 두 나라가 더욱 협력해…….”
내 반응이 그리 좋지 않자 입을 털기 시작하는 처칠.
그 양심 따윈 찾아볼 수 없는 뻔뻔함이 대단해야 한다고 해야 할지, 후안무치하다고 해야 할지.
솔직히 아무리 봐도 프랑스고 뭐고 스페인령 모로코를 영국의 영향권에 넣고 싶은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일단 생각은 해 보겠습니다.”
어쨌든 처칠의 연설을 잠자코 들어 줄 이유는 없었기에 대충 둘러대고 자리를 떠났다.
처칠도 당장은 일을 크게 만들지 않고 물밑으로 접근하려는 모양이지만 그래도 처칠은 처칠이다.
‘보아하니, 처칠 혼자만의 생각이 아닌 것 같고.’
로이드 조지나 그레이 장관이나 처칠의 독단을 용납할 사람들은 아니니까.
하여튼, 조만간 또 시끄럽게 생겼다.
나는 그리 속으로 중얼거리며 멀리서 날 부르는 루이제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 *
며칠 후, 알버트와 타티야나의 결혼식이 끝나고 베를린으로 돌아오자 일상이 시작되었다.
쉴 새 없이 보고를 받고 끊임없이 나타나는 서류를 결재하는 평범한 일상이다.
왜 워싱턴 해군 군축 회의가 끝났는데, 내 일은 줄지 않는 것일까?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장관님, RND에서 정기 보고서가 도착했습니다.”
“이번엔 별말 없었으면 좋겠군요.”
나는 그리 바라며 비서로부터 보고서를 받아들었다.
하지만 이 또한 헛된 꿈에 불과했다.
[소비에트 러시아가 군벌 및 반볼셰비키 세력을 상대로 우세를 점해 가고 있음.]러시아 공화국이 탄생하며 종반부를 맞이했던 러시아 내전의 완전한 끝이 다가오고 있다.
그리고 내전이 끝나면 소비에트 러시아는 높은 확률로 소비에트 연방으로 진화하겠지.
물론, 당장은 망해 가는 가게의 간판만 갈아 끼운 꼴이겠지만.
“그리고 그 상태를 최대한 오래 유지할 수 있게 힘을 써야겠지.”
그 방법이란 역시나 소비에트가 라이징 못하게 계속 방해를 넣는 것뿐이다.
영국도 좋아하는 즐거운 혐성의 시간이다.
“이 부분은 자세히 정리해서 가져다주세요. 총리님과 폐하께 보고를 드려야 하니.”
“네, 장관님.”
“다음은…… 응?”
보고서의 다음 장에 적혀 있는 내용을 보자마자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혹시라도 잘 못 본 것은 아닐까 눈을 비벼보고 끔뻑거리기도 했지만, 바뀌지 않았다.
[레프 트로츠키, 중화민국에서 쑨원과 접촉.]트로츠키 이 염소수염이 강철 콧수염맛 배신을 맛보더니 눈이 완전히 돌아갔나 보다.
자기 파벌 사람을 보내는 것도 아닌 자기가 직접 중국에 가서 쑨원을 만났단다.
‘몰락한 트로츠키가 재기를 위해 중국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원 역사에서도 있었던 일이지만…….’
실제로 라데크, 부부노프, 요페 등 제1차 국공합작에 관여한 소련 측 인물들은 죄다 트로츠키 파벌(덕분에 대숙청 때 대부분 끔살당한다)이었고, 중국 공산당의 창립자인 천두슈(陳乾生, 천첸성) 또한 30년대에 트로츠키주의자로 전향할 정도로 트로츠키의 영향을 크게 받은 인물이었다.
하지만 트로츠키가 직접 움직일 줄이야, 몸이 달아도 잔뜩 달은 모양이다.
물론, 중국과 공산주의자는 절대 함께해선 안 되는 조합이었기에 이쪽에도 방해를 잔뜩 넣어 줄 생각이다.
“하여튼 처칠도 그렇고, 다들 가만히 있지 못해 안달이네.”
그런 시대이긴 하지만.
아무것도 안 해도 일이 계속 늘어나는 현실에 한숨을 내쉰 채 다시 시선을 보고서로 돌렸다.
그렇게 바쁘게 일하며 시간을 보내는 동안, 1918년이 순식간에 지나고 1919년을 넘어 1920년이 찾아왔다.
“……하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의 성립을 선포하는 바이다!”
1920년의 첫 번째 날이 되자마자 아직은 허울뿐이긴 했지만, 예상대로 소련이 마침내 이 세상에 탄생했다.
원 역사만큼이나 광기로 얼룩질 1920년대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