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Saved Caesar RAW novel - Chapter 306
306화 : 빅토리아 시크릿 (1)
몇 시간 전.
초이-크론베르크 공작부인 빅토리아 루이제는 둘째 고모 빅토리아를 만나기 위해 그녀의 성이 있는 본으로 향했다.
고모부(그렇게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지만)인 아돌프 공자가 죽은 이후 외로워할 고모를 위로하기 위해 달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행하는 방문이었다.
“어서 오렴, 루이제. 오늘은 아이들을 데려오지 않았구나.”
“네, 다들 아침부터 공놀이에 삼매경이네요. 그래서 오늘은 유모에게 맡겨 두고 왔어요.”
“후후, 아이들은 원래 놀면서 자라는 법이지. 후회하지 않게 놀 수 있을 때 실컷 놀게 해 주려무나.”
빅토리아는 자신의 그리운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는 듯 회상에 잠긴 눈으로 중얼거렸다.
그땐 참으로 좋았다.
언제나 사이좋았던 여동생들인 조피, 마르가레테와 함께 지내며 승마와 댄스를 즐기던 나날들.
가슴 뜨거웠지만, 너무나도 비참하게 끝났던 첫사랑.
이제는 시간 저편 과거가 되어 버린 추억들이었다.
“아직 고모님에겐 시간이 많아요. 할머니도 돌아가시기 전에 고모님께 자유롭게 살라고 말씀하셨잖아요.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그냥 해 버리세요.”
“후후, 말이라도 고맙구나. 루이제 네가 있어서 참으로 다행이야.”
빅토리아는 기특한 조카를 향해 고마움을 가득 담아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최근엔 꽤 즐겁단다. 새로운 친구도 사귀었고.”
“친구요? 그거 잘됐네요!”
“그래, 정말 꿈만 같아. 아, 마침 잘됐구나. 내가 말한 친구가 오늘 잠깐 성에 들리기로 했거든. 너에게도 소개해 주마.”
루이제는 좋다는 듯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루이제는 고모가 말하는 친구가 비슷한 신분의 귀부인, 그것이 아니더라도 최소 성별이 여성인 줄 알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공작부인. 알렉산드르 줍코프 남작이라고 합니다.”
“어어…… 반, 반갑습니다?”
그러나 루이제가 자신의 판단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화기애애하리라 생각한 분위기가 예상 못 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 * *
“알렉산드르는 얼마 전 큰 오라버니의 생일 연회에서 만난 친구란다. 러시아에서 망명해 온 귀족이지.”
“네, 볼셰비키를 피해 독일로 도망쳐 왔죠. 그리 유쾌한 기억은 아니지만, 적어도 아이들과 친구들에게 들려 줄 모험담 정도는 된답니다.”
“호호, 재미있는 친구지 않니? 정말이지 처음 만난 사람과 그렇게 잘 통할 줄이라곤 정말 상상치도 못했어.”
빅토리아가 따스한 눈으로 줍코프를 바라보며 말했다.
루이제로선 태어나서 처음 보는 모습에 무척이나 낯선 모습이었다.
“하하, 그거 잘되었네요.”
그러나 루이제는 황실의 여성.
본심을 숨기는 것엔 익숙했고, 그렇기에 당황한 얼굴 대신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다만, 그 이면엔 루이제의 현실 부정 또한 한몫했다.
‘에이, 아닐 거야. 정말 친구겠지. 중세 시대도 아니고, 남자 사람 친구 있는 게 뭐 대수겠어?’
게다가 줍코프라는 정체불명의 러시아 귀족(?)은 한눈에 딱 보기에도 고모와 나이 차이가 크게, 아주 많이 나 보였다.
아마 자신과 한스보다 더 어릴 것이다.
그러니 루이제는 자신의 마음 한구석에서 불안하게 피어오르는 의심처럼 ‘그런 것’은 절대 아니리라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게 그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물론, 세계는 넓은 곳이니 말이 되는 곳이 있을 순 있겠지만, 못해도 유럽 귀족 사회에선 용납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냥 아들처럼 여기는 것이겠지.’
빅토리아 고모에겐 다른 고모들과 달리, 자식이 없으니까.
그러니 말이 잘 통하는 젊은 청년을 보고 모성애가 솟아올라서 자식처럼 여길 뿐일 것이다.
귀부인들이 젊고 재능 있는 청년들을 아끼고 후원하는 것은 자주 있는 일이었으니.
루이제는 의심을 떨쳐 내기 위해서라도 계속 마음속으로 그리 되뇄다. 되뇄지만…….
“오늘은 한층 더 아름다우시군요. 머리 장식을 바꾸셨습니까?”
“후후, 알아보겠어? 남편은 머리 장식이 아니라 머리 스타일을 바꿔도 전혀 알아보지 못하던데.”
두 사람의 사이가 너무 다정했다.
루이제의 불안이 점점 커질 정도로 너무 다정했다.
마치 한스와 자신이 한창 연애할 때(물론 지금도 알콩달콩하지만)처럼 말이다.
‘한스, 이 상황에서 난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루이제는 언제나 해결사 역할을 했던 남편에게 물었다.
그녀의 머릿속에 있는 한스는 답을 구하는 아내를 향해 이렇게 대답했다.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니니, 일단 사실 확인부터 하렴.’
그래, 상상 속 남편의 말이 옳다.
아직 모르는 일이다.
정확한 상황 판단을 위해서라도 진실을 알아야만 했다.
달그락─
“그나저나 두 분 사이가 참으로 좋아 보이시네요.”
“후후, 루이제. 네가 보기에도 그렇게 보이니?”
“네, 누가 보면 연인인 줄 착각하겠어요.”
찻잔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루이제가 떠보듯이 말했다.
이제 고모가 ‘에이, 연인은 무슨 연인이니?’라며 호들갑을 떨어 주면 최상이다.
“그게 착각이 아니라면?”
그러나 빅토리아에게서 속닥이듯이 돌아온 대답은 최악이었다.
“고, 고모님? 지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루이제, 이건 너니까 하는 말이지만, 나는 알렉산드르와 진지하게…… ‘애정 어린 교류’를 하고 있단다.”
즉, 진짜 사귀고 있다는 소리였다.
루이제로선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소리였다.
물론, 그만큼 빅토리아가 루이제를 믿고 있다는 뜻도 되겠지만, 루이제로선 지금만큼은 그 믿음이 참으로 원망스러웠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지!’
자신 홀로 감당하기 너무 버거운 진실에 루이제가 식은땀을 흘리며 속으로 외쳤다.
이럴 때 방법은 하나뿐.
‘한스, 한스에게 빨리 알리자.’
남편이라면 어떻게든 해 줄 거다.
언제나 그랬으니까.
* * *
루이제의 말을 전부 들은 나는 생각했다.
아, 이건 X 됐다고. X 됐다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귀찮은 일이라고.
그리고 동시에 내가 그동안 새까맣게 잊고 있던 사건 하나가 기억의 잡동사니 속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빅토리아 고모님의 애인인 알렉산더 줍코프.
그는 사기꾼이었다.
원 역사에서 빅토리아 고모님을 홀려 결혼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보낸 끝에 고모님을 생활고에 빠트려 행복했다고 말하긴 어려운 삶을 완전히 파멸시킨 제비였다.
‘심지어 귀족이라는 것도 거짓말일 확률이 높다고 했던가?’
즉, 알렉산더 줍코프라는 러시아인은 귀족 사칭범이자 사기꾼이며 제비란 소리였다.
와우, 당장이라도 체포해서 감옥으로 보내야 하는 범죄자 그 자체다.
심지어 그 대상이 출가외인이라고는 하지만 엄연한 호엔촐레른이었으니, 판사도 일말의 고민 없이 황실 기만죄로 단두대형을 때려도 모자를 범죄자였다.
‘진작에 기억해 냈으면 일이 터지기 전에 막아 낼 수도 있었을 텐데…….’
하지만 나도 변명이 있었다.
그야 빅토리아 고모님이 알렉산더 줍코프에게 속은 것은 어디까지나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망하고 독일 제국도, 호엔촐레른 왕가도 망했을 때다.
그러니 줍코프 같은 사기꾼이 명색이 왕족인 빅토리아 고모님에게 접근할 수 있었던 것이지.
그런데 보다시피 현재 독일 제국은 멀쩡하고, 황실의 권위는 그 어느 때보다도 드높았다.
세상에 그 어떤 미친놈이 자살하고 싶은 것이 아니고서야 황족을, 그것도 카이저의 여동생을 건드릴 거라고 어떻게 알겠는가?
과연, 이 한스 폰 초이의 눈으로도 보지 못했다.
“한스, 어떻게 하지? 역시 아빠에게 알리는 게 좋을까?”
“안 돼, 안 돼, 루이제. 절대 그러지 마. 장인어른 성격 알잖아. 분명 역정을 내시는 것을 넘어 뒷목을 잡고 쓰러지고 말 거야!”
“그건 그렇지.”
내 다급한 목소리에 초조해진 나머지 고모에게 생긴 자신보다 어린 애인의 존재를 그 빌헬름 2세에게 알린다는 최악의 결정을 할 뻔한 루이제가 실수할 뻔했다는 듯 아차 표정을 지었다.
그 말대로 빌헬름 2세의 귀에 이 소식이 들어가서 좋을 것 따윈 없다.
게다가 장인어른이 이 사실을 알았다간 순식간에 황실 전체로 소문이 퍼져 나갈 테고, 입이 가벼워도 너무 가벼운 샤를로트 큰고모님을 통해 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것이다.
물론, 줍코프는 100% 죽거나 의문의 실종을 당하겠지만, 그 상황까지 오면 그 사기꾼 놈이 죽든 말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기껏 상승세를 타고 있던 황실의 이미지에도 금이 갈 수도 있는 것은 물론, 장인어른과 빅토리아 고모님의 사이가 완전히 박살이 날 것이다.
어쩌면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아 신체에 무리가 올 수도 있다.
나 또한 황실의 인척으로서 황실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서라도 그것만은 반드시 막아야만 했다.
“이번 일은 장인어른이 아시기 전에 우리 선에서 처리하는 게 최선이야.”
“하지만 우리만으로 충분할까?”
충분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난 어이없는 사태를 우리 부부 혼자 독박 쓰고 싶지 않았다.
“황태자님이랑 황태자비님에게 상황을 알리고 도움을 구하자.”
“큰오빠네에게?”
“장인어른에게 알리지 못하는 이상, 그 두 사람이 우리에게 있어 최선이야. 집사님! 당장 자동차를 준비해 주세요.”
시간이 촉박하다.
아직까진 조용하지만, 얼마 안 가 귀족 사회 전체에 빅토리아 고모님과 알렉산더 줍코프에 대한 의심 어린 소문이 퍼질 것이고, 덩달아 장인어른과 장모님에게도 소문이 닿을 것이다.
그러니 그 전에 어떻게든 알렉산더 줍코프, 사기꾼 놈을 빅토리아 고모님에게서 떼어 내야만 한다.
다른 일을 전부 제쳐 두고서라도 최대한 빨리.
* * *
“그러니까 빅토리아 고모님이 지금 20살짜리 러시아 남작 나부랭이랑 연애하고 있다고?”
“예, 황태자님. 게다가 전 그자가 귀족이라는 것 자체도 의심스럽습니다. 줍코프라는 가문은 들어 본 적도 없고, 망한 나라의 귀족을 사칭하는 것 정도는 누구나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오, 씨발.”
베를린의 쇤하우젠 궁전에서 포츠담에 있는 체칠리엔호프 궁전까지 쏜살같이 달려온 나와 루이제가 전한 소식에 빌헬름 황태자가 어지러운 듯 머리를 붙잡았다.
“세상이 변했다고 해도 그렇지. 이젠 하다하다 이젠 같잖은 지골로(Gigolo, 제비족 또는 기둥서방) 따위가 황실을 능멸하는 꼴을 보는군.”
“엄마, 지골로가 뭐예요?”
“너희는 아직 알 필요가 없는 단어란다. 엄마랑 아빠는 루이제 고모랑 한스 고모부랑 긴히 할 이야기가 있으니, 너희는 방으로 돌아가 있으렴.”
언제나 현숙한 모습을 보여 주던 체칠리에 황태자비 또한 이번만큼은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리는 것을 참을 수 없다는 듯 아이들을 방 밖으로 내몰며 서둘러 문을 닫았다.
응접실 안에 나와 루이제, 빌헬름 황태자와 체칠리에 황태자비 단 네 사람만이 남자 빌헬름 황태자가 무거운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아직 아버지는 이 사실에 대해서 모르지?”
“예, 아직 알리지 않았습니다.”
“잘했다. 아버지가 아셨다면 난리가 나도 제대로 났을 거야.”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진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떠는 빌헬름 황태자.
최근엔 손주들이 너무 좋은 호호 할아버지가 되었다지만, 원래 빌헬름 2세는 황실의 권위나 혈통에 관련된 부분에 있어선 그 어떤 양보도 보이지 않는 인물이다.
나도, 빌헬름 황태자도 잠들어 있는 카이저의 분노를 다시 꺼내고 싶진 않았다.
“그나저나 정말 고모님께서 줍코프란 사람과 그…… 사귀는 것은 확실한가요?”
“네, 언니. 제 귀로 직접 들었어요. 아주 눈에서 꿀방울이 뚝뚝 떨어지더라고요. 그것도 저랑 한스보다 훨씬 어린 이제 갓 스물 된 남자에게 말이에요.”
“허, 배짱 하나는 인정해 줘야겠군. 한스, 너보다 맛이 간 사람이 있을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어.”
“전 정상입니다만?”
“퍽이나 그렇겠지. 하여튼 그 알렉산더 줍코프인지, 주코프인지가 사기꾼이든 아니든 고모님 곁에서 신속히 제거해야 해. 나이 든 황실 여성이 조카보다 어린 남자와 사귄다? 이건 독일 전역이 안 좋은 의미로 불탈 수밖에 없는 이야기야.”
당장 21세기에도 좋은 소리 듣기 어려운 일이다.
20세기 초인 지금은 더하면 더 했다.
“고모님에게 줍코프랑 남자가 질이 안 좋으니 헤어지라고 말하는 것은 어떨까요?”
“그게 가장 깔끔한 방법이겠지만, 안 들으실 거예요. 제가 돌려서 말해 봤는데, 세간의 신경 따위는 쓰지 않고 자유롭게 살고 싶데요. 빅토리아 아델레이드 할머니의 유언처럼요.”
빅토리아 황태후님은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닐 텐데 말이지.
그분의 성격을 생각하면 오히려 실망을 감추지 못하셨을 거다.
“게다가 루이제나 한스가 태어나기 전에 일이지만, 고모님은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 때문에 큰 상처를 입으셨던 분이야. 아마 쉽게 포기하지 않으실 거다.”
빌헬름 황태자가 가물가물한 어린 시절 기억을 떠올리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빅토리아 공주의 첫사랑.
그것은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40년 전인 1881년. 그녀가 15살이었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