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Saved Caesar RAW novel - Chapter 307
307화 : 빅토리아 시크릿 (2)
1881년, 불가리아 공국의 초대 공작 알렉산더르 1세(Александър I)가 독일 제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는 젊고 매력적인 미남이었고, 당시 15세였던 빅토리아 고모님은 알렉산더르 1세에게 한눈에 반했다.
줍코프도 그렇고, 고모님이 은근히 얼빠 기질이 있는 것 같다.
하여튼, 빅토리아 고모님은 알렉산더르 1세와 결혼하고 싶었지만, 황실의 과거 이야기가 언제나 그렇듯 당시엔 황태자였던 우리 장인어른의 반대가 거셌다.
왜냐하면 알렉산더르 1세는 아버지 쪽이 바텐베르크 가문의 시조인 헤센의 알렉산더였지만, 어머니 쪽이 독일계 폴란드인 귀족이자 백작의 딸이었던 율리아 하우케, 즉 귀천상혼으로 태어난 사람이라 빅토리아 고모님과는 급이 안 맞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큰오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빅토리아 고모님은 알렉산더르 1세와 어떻게든 결혼하고 싶어 했고, 어머니 빅토리아 아델레이드와 외할머니 빅토리아 여왕의 지지에 힘입어 몰래 알렉산더르 1세와 비밀 약혼까지 하려 했다.
‘하지만 여전히 반대가 너무 심했고, 결국엔 알렉산더르 1세가 빅토리아 고모님과 결혼을 포기하고 다른 여자, 그것도 신분 낮은 연극배우와 결혼해 버리는 최악의 형태로 파국을 맞이했지.’
다만, 이건 오로지 우리 장인어른만의 탓이라고 하긴 좀 그랬다.
내가 변명해 주는 것 같지만, 실제로 그랬다.
왜냐하면 당시 빅토리아 고모님과 알렉산더르 1세의 혼담에 강경하게 반대한 것은 빌헬름 2세뿐만이 아닌, 황제였던 빌헬름 1세와 비스마르크 또한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아버지인 프리드리히 3세도 아내 때문에 겉으로 내색만 안 했을 뿐, 고모님의 혼담에 굉장히 미온적이었다.
이는 알렉산더르 1세는 세르비아-불가리아 전쟁을 일으키는 등 지나친 확장 행보를 보인 탓에 사촌이자 니콜라이 2세의 아버지인 알렉산드르 3세에게 제대로 밉보인 탓이었다.
이 때문에 알렉산더르 1세와 고모님의 결혼은 독일과 러시아의 마찰을 일으킬 여지가 많았고, 러시아와 척을 지는 것을 피하려던(정작 본인이 베를린 회의로 러시아의 뒤통수를 쳤지만) 비스마르크로선 반드시 막아야만 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본래라면 진즉에 혼사가 무산되었어야 했는데…… 빅토리아 아델레이드가 이상할 정도로 알렉산더르 1세와 빅토리아 고모님의 결혼에 집착하는 바람에 일이 꼬여 버렸다.
심지어 빅토리아 여왕조차 ‘이건 답 없는 듯?’이라며 손을 뗐는데도 그랬다.
‘결국엔 하염없이 시간만 흘렀지.’
그사이 알렉산더르 1세는 친러파의 쿠데타로 인해 불가리아 공작 자리에서 내쫓겼다.
그러나 빅토리아 고모님은 이젠 군주도 아닌 알렉산더르 1세와의 결혼을 포기하지 않았고, 빅토리아 아델레이드 또한 죽기 일보 직전이었던 프리드리히 3세의 설득해 유언장에 빅토리아 고모님과 알렉산더르 1세의 결혼을 반드시 이행하라는 조항까지 집어넣는다.
그러나 막 카이저가 된 빌헬름 2세는 물론, 프리드리히 3세에게 이 결혼 허락하면 내가 그만둘 거라고까지 협박까지 한 비스마르크의 반대는 너무나도 거셌다.
독일 정부의 압박과 빅토리아 아델레이드 황태후의 집착 사이에서 돌아버리기 일보 직전이었던 알렉산더르 1세는 결국, 빅토리아 고모님과의 결혼을 포기하고 1888년에 오스트리아 출신의 연극 배우인 요한나 로이싱거와 결혼해 버렸다.
빅토리아 고모님은 당연히 이에 충격을 받아 심각한 우울증에 걸렸고.
‘차라리 알렉산더르 1세가 불가리아의 공작이 아니었다면 차라리 나았을 텐데.’
물론, 여전히 귀천상혼이란 사실은 변치 않으니, 우리 장인어른을 비롯한 독일 황실에선 좋게 보진 않았겠지만, 그래도 원 역사보단 혼인이 성사될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을 것이다.
어차피 왕위 계승권도 없는 딸이고, 현 핀란드 왕비인 마르가레테 공주 또한 여러 번 언급되었듯이 급이 안 맞는단 이유로 빌헬름 2세가 처음엔 결혼 반대했다가 ‘어차피 여동생이니 상관없나?’라는 식으로 결혼을 허락해 주었으니까.
정치 이야기와 외교 이야기가 들어갈 수밖에 없는 유럽 왕실에서 태어난 불행이라고 할 수 있었다.
* * *
“그러면 어떤 식으로 줍코프를 고모님 곁에서 떼어 낼까요.”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이지.”
역사 이야기를 뒤로하고 현실로 돌아온 내 말에 가장 먼저 의견을 낸 것은 빌헬름 황태자였다.
그것도 참으로 흉흉한 의견이었다.
물론, 그게 확실히 제일 빠르고 쉬운 방법이긴 하다만.
“그래도 암살은 사람들의 이목을 너무 끌지 않을까요? 차라리 러시아인이고 하니, 소련의 첩자로 몰죠. 이슈는 더 큰 이슈로 묻는 법이지 않습니까.”
“흠, 나쁘진 않군. 마침 RND를 총괄하는 게 한스 너니까 적당히 사건을 꾸미면…….”
“잠깐만! 아무리 그래도 그건 고모님에게 너무 하잖아!”
“그래요, 고모님이 받을 상처도 신경 써야죠. 또 그런 방식으론 가족 간에 불화만 일으킬 거예요.”
빌헬름 황태자와 머리를 맞대고 음모를 꾸미고 있을 때, 루이제와 체칠리에 황태자비가 차례대로 볼멘소리를 내었다.
“게다가 오히려 일이 더 커질지도 몰라. 고모님이 줍코프에게 상당히 집착하고 있단 말이야.”
루이제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줍코프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면 고모님은 분명 그놈을 찾겠다고 독일을 이 잡듯이 뒤질 거야. 간첩으로 체포되면 구명 운동을 펼쳐서라도 구해 내려고 하겠지.”
“아니, 그 정도라고?”
“사랑의 빠진 여자는 무서운 법이야.”
그, 그런가?
“Mist(젠장)! 아버지 몰래 일을 조용히 처리하는 것도 모자라 고모님이 받을 상처까지 신경을 써야 한다라. 차라리 적진에 몰래 잠입하는 게 더 쉽겠군.”
“으음, 줍코프를 스스로 떠나게 만들 순 없을까요?”
“황태자비님,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너무 순진한 소리 같긴 하지만, 줍코프 스스로가 고모님과 헤어지는 것이 가장 좋잖아요. 빅토리아 고모님이야 슬퍼하시겠지만, 적어도 애인이 사기꾼이었다는 것을 아는 것보단 나을 테고요.”
“체칠리에, 그 망할 놈은 황족을 속인 간땡이가 부어도 제대로 부은 놈이야. 그런 미친놈이 우리가 헤어지라고 해서 헤어지겠어?”
“줍코프 그자도 죽고 싶진 않을 것 아니에요. 사기꾼들이 늘 그렇듯 겁을 주면 알아서 도망칠지도 모르는 일이죠.”
“그러면 좋겠지만…….”
내가 줍코프라는 인물에 대해 당연하지만, 그리 잘 아는 것도 아니라서 장담을 못 하겠네.
“내 생각에도 지금으로선 그게 최선 같아. 물론 그래도 줍코프가 고모님 옆에서 안 떨어지면…… 뭐, 그땐 두 사람 말대로 하자. 나보다 어린 고모부가 생기는 것을 두고 보느니, 차라리 우리가 욕먹고 끝나는 게 나을 테니까.”
루이제의 말에 방에 있는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 가능성이 아예 없다곤 말할 순 없으니, 일단 시도해 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어쩌면 줍코프도 빅토리아 고모님이 황족인 줄 모르고 사고를 친 것일지도 모르잖아.
샤를로테 큰고모님과 달리, 워낙 조용하게 지내신 분이라 잘 안 알려져 있으니까.
‘물론, 줍코프가 그 정도로 병신일 것 같진 않지만.’
* * *
“나는 병신이야! 그것도 상병신!”
한편, 그 시각.
한스와 빌헬름 황태자의 정의와 가정을 지키기 위한 음모가 꽃피우고 있을 때 빅토리아 공자비의 성에선 줍코프의 절규 어린 비명이 울려 퍼졌다.
한스가 설마 그러겠냐고 생각한 일이 정말이었기 때문이다.
“젠장, 처음엔 기둥서방 노릇이나 하려고 접근한 건데……!”
그냥 돈 많아 보이는 귀부인이라고 생각한 여자가 하필이면 카이저의 여동생이었다.
세상에 이런 억까가 어디 있단 말인가?
이는 멋모르고 한탕 하려던 줍코프의 자업자득이었지만, 그로선 억울해서 미칠 노릇이었다.
“루이제 공주도 나에 대해서 알아 버렸고…… 이제 난 끝장이야!”
특히 루이제 공주는 러시아에선 악명이 자자한 한스 폰 초이의 아내였다.
러시아에서 그에 대해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괴담을 자주 들어온 줍코프로선 눈앞에 벌써부터 단두대가 아른거리는 기분이었다.
‘당장 여기를 떠야 해. 떠야 하는데…….’
“사샤, 어디 있어요~?”
빅토리아가 자신을 놓아주지 않았다.
황족이라는 걸 듣자마자 그가 삼십육계 줄행랑을 치지 못한 이유기도 했다.
줍코프가 빅토리아의 정체에 대해 알았을 땐 빅토리아는 이미 줍코프가 공포를 느낄 정도로 그에게 푹 빠진 뒤였기 때문이다.
사랑이란 것은 마치 마약과도 같아서 한번 빠지면 헤어나 오기 어려운 것.
이미 알렉산더르 1세에게 공작이 아니어도 좋으니, 몸만 오라고 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집착을 보였던 빅토리아의 공주의 경우엔 오랜만에 가슴을 따뜻하게 뛰게 만든 사랑에 지나칠 정도로 심취하고 있었다.
“여기 있었네요, 사샤.”
“하, 하하. 미안해요. 내 사랑, 잠시 물건을 정리하고 있었어요.”
“물건을 정리해요? 왜요? 설마 당신도 나를 떠날 생각인가요? 알렉산더르처럼?!”
“그, 그럴 리가요. 전 언제나 당신 곁에 있을 것이랍니다.”
죽은 눈으로 자기 팔을 꽉 붙잡는 빅토리아의 모습에 공교롭게도 그녀의 첫사랑이었던 알렉산더르 1세와 이름이 같은 ‘알렉산드르’ 줍코프가 얼굴에 힘겹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에 빅토리아 또한 안심했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어머, 내가 착각했나 보네요. 죄송해요, 알렉산드르.”
“아닙니다. 이런 사소한 일로 사과할 필요 없어요, 내 사랑.”
줍코프의 말에 얼굴을 붉히는 빅토리아.
‘앞으론 착하게 살게. 제발 누가 나 좀 도와줘!’
줍코프의 속마음은 그의 새하얀 이빨만큼이나 눈부신 미소와 달리 새까맣게 썩어 들어갔다.
이러다가 비밀리에 결혼식까지 올리게 생겼다.
그 말인즉슨, 곧 자신이 카이저의 도끼에 찍혀 죽을 날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소리였다.
“좋아. 그럼, 이대로 최대한 빨리 시행하도록 하지.”
“네, 전하.”
그러나 줍코프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순간은 의외로 빨리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이 그에게 있어 불행인지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
* * *
“읍! 읍읍!”
다음 날.
불안 속에 잠든 줍코프에게 운명이 날이 도래했다.
정체불명의 괴한들에 의해 눈이 가려지고, 입에는 재갈이 물렸으며 사지는 밧줄로 꽁꽁 묶인 줍코프는 짐짝처럼 트럭에 실려 어딘가를 향해 떠났고, 줍코프는 드디어 독일 황실이 자신을 쓱싹하려 한다고 생각해 절망 어린 표정으로 버둥거렸다.
“풀어 줘.”
며칠과도 같았던 시간이 지난 후.
눈을 가리고 있는 천과 재갈이 사라지며 나타난 눈 부신 빛에 줍코프는 일순 눈을 찌푸렸다.
그리고 눈이 빛에 점점 익숙해지자 그의 두 눈동자에 복면 쓴 우락부락한 남자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알렉산드르 아나톨리예비치 줍코프.”
무거운 침묵이 흐르고 한 남자가 천천히, 그리고 위협을 가득 담아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친 채 벌벌 떨고 있는 줍코프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이에 줍코프가 말했다.
“날, 날 죽일 거요?”
“하,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 있긴 했나 보군.”
“난 몰랐소! 그녀가 누군지 몰랐소! 그녀가 카이저의 여동생이란 것을 알았더라면 애초에 접근도 안 했을 거요!”
“시끄러워! 폐하를 그 더러운 입에 담지 마라!”
퍼억!
“크허억!!”
줍코프가 목숨이 아까워 추한 변명을 한다고 했는지, 남자가 발로 줍코프를 걷어찼다.
줍코프는 고통과 억울함에 몸부림쳤지만, 불행히도 그는 사기꾼이었고, 사기꾼의 말을 믿는 사람들은 없었다.
“으으…… 으으으……. 살려 주십시오. 제발 살려만 주십시오.”
“흥, 거절한다고 말하고 싶지만…… 하지만 고귀하신 분들께선 너 같은 쓰레기에도 자비를 베푸시더군.”
툭!
고통으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줍코프 앞에 두툼한 봉투 하나가 던져졌다.
“처음이자 마지막 경고다. 이걸 받고 독일을 떠나라. 빅토리아 공자비님이 상처받지 않도록 최대한 좋게 작별을 고하고 다신 돌아오지 마.”
“나도 제발 그러고 싶소! 하지만 그, 그녀가 날 가만히 안 둘 거요.”
빅토리아 공자비와 헤어지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애초에 줍코프는 오로지 돈만 보고 접근했을 뿐, 빅토리아를 단 한 번도 사랑한 적 없었으니까.
하지만 점점 심해지는 그녀의 집착을 보고 있으면 헤어지자고 말하는 순간, 칼에 찔릴 것만 같았다.
“변명이 많군.”
그러나 남자는 자신에게 고민할 시간은 물론 선택지조차 주지 않았다.
“요즘 라인강 물고기들이 배가 많이 고픈 모양이던데. 아, 물이 싫으면 빨갱이들에게 돌아가는 방법도 있고. 체키스트 놈들에게 반동이라 고문받고 굴라그로 가거나 쥐도 새도 모르게 죽고 싶다면 이쪽을 택해도 우린 상관없다. 그걸 원하나?”
“아, 아니오. 시키는 대로 하겠소.”
“좋아. 지켜보고 있겠다. 다시 씌워.”
“읍? 읍읍?!”
남자의 협박에 굴복한 줍코프가 우울한 얼굴로 머리를 조아리자 줍코프의 눈에 다시 안대가 씌워졌다.
시키는 대로 하겠다고 말했는데, 처음 끌려왔을 때와 변하지 않은 상황에 당황한 줍코프가 버둥거렸지만, 그는 곧 충격과 함께 정신을 잃었다.
“으으……음?”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 줍코프는 다시 집으로 돌아와 있었다.
“설마 꿈이었던 건…… 아니겠지?”
줍코프는 몸을 만지작거리며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자신의 바로 옆에 살며시 놓여 있던 돈 봉투를 발견하자 그의 얼굴에 우중충함이 감돌았다.
짐이나 싸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