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Saved Caesar RAW novel - Chapter 38
38화 : 러시아를 향해
1902년 1월 30일.
런던, 랜즈다운 후작 저택(Lansdowne House)
“이로써 그레이트브리튼 및 아일랜드 연합왕국과 대일본제국 간의 동맹이 공식적으로 체결되었음을 선포합니다.”
짝짝짝짝짝―!
영국 외무장관, 랜즈다운 후작 헨리 페티-피츠모리스(Henry Charles Keith Petty-Fitzmaurice, 5th Marquess of Lansdowne)의 선언과 함께 열렬한 박수소리가 저택에 울려 퍼졌다.
영일동맹.
러시아 제국에 맞선 영국과 일본의 동맹이 결성되었다.
다만 양측 대표단의 반응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영국 측은 대체로 담담한 얼굴이었다.
그야 일본이란 나라는 어디까지나 영국에 있어 러시아의 확장을 저지하기 위한 체스 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일본 측은 보기만 해도 땀이 절로 흐를 정도로 뜨거운 반응이었다.
일본 측 대표였던 하야시 타다스(林董) 주영 일본 공사는 아예 눈물까지 흘리고 있었다.
아마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일본 본토 또한 비슷한 반응일 것이다.
일본이 영일동맹을 얼마나 절실하게, 또 간절하게 원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수고하셨습니다. 하야시 공사님.”
“랜즈다운 후작님.”
“대영제국과 대일본제국의 앞날에 신의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예. 저 또한 양국의 우애가 영원토록 지속되기를 기원하겠습니다.”
랜즈다운 후작은 하야시 공사와 손을 잡고 악수하며 서로 이런저런 덕담을 나누었다.
물론 덕담은 어디까지나 덕담에 불과했다.
‘그나저나 우애가 영원토록 지속되기를 바란다라···.’
랜즈다운 후작은 하야시 공사의 말에 속으로 피식 웃었다.
세상에 영원한 동맹은 없는 법.
랜즈다운 후작, 그리고 대영제국은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이 동맹은 어디까지나 극동과 태평양에서 러시아의 확장을 저지하겠다는 영국과 일본의 이해가 일치했기에 성사된 것일 뿐이다.
그리고 그 목적이 끝나면 아직 잉크도 마르지 않는 영일동맹은 한여름 밤의 꿈처럼 덧없이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것이 국제 외교란 것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얼굴에 가식적인 미소를 짓고 있는 랜즈다운 후작으로서도 이 동맹으로 인한 고민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랜즈다운 후작은 디즈레일리와 함께 대영제국의 영광을 이끌어온 솔즈베리 후작의 말을 떠올렸다.
‘일본인들은 고작 러시아의 확장을 저지하는 것으론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솔즈베리 후작은 일본과 러시아 간의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을 매우 크게 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는 연합왕국의 국왕인 에드워드 7세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것도 일본의 선제공격으로 전쟁이 터질 것이라니···.’
평소 같았으면 아무리 그래도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일축했겠지만, 문제는 그 징후가 실제로 일어나고 있었다.
일본 군부는 솔즈베리 후작과 에드워드 7세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이미 육군, 해군 할 것 없이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심지어 주러 영국 대사가 보내온 보고에 의하면 최근 러시아 내에서 일본 간첩이 검거되는 일이 부쩍 잦아졌다고 하던가.
전쟁 준비.
누가 봐도 러시아에 맞선 전쟁 준비였다.
솔즈베리 후작과 에드워드 7세가 경고한 대로 일본은 이미 작정하고 러시아를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곤란하군.’
랜즈다운 후작은 여전히 감개무량한 표정을 짓고 있는 하야시 공사를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일본이 러시아와 전쟁을 벌이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었다.
랜즈다운 후작과 대영제국의 내로라하는 외교관들은 이미 그 가능성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내심이 땅바닥에 떨어진 러시아가 일본을 먼저 공격하는 것을 상정한 것이지, 일본이 러시아 제국을 선제공격하는 것이 아니었다.
‘지난 청과의 전쟁에서도 일본은 선전포고도 없이 청나라를 선제공격했지.’
이번에도 일본은 그런 짓을 할 가능성이 있었다.
영국으로선 곤란한 일이었다.
이 시대에 선제공격은 군사적으론 유리할지 몰라도 외교적으론 매우 불리한 행동이었다.
그것이 선전포고가 없는 것이라면 더더욱 안 좋았고 말이다.
그렇기에 선제공격이란 것엔 명분이 굉장히 중요했다.
없다면 말도 안 되는 명분이라도 만들어야 했다.
그것이 남들이 보기에 눈이 찌푸려지는 일이라도 말이다.
게다가 선제공격을 해놓고 패배한다면 그 대가는 매우 비싸게 치러야 한다.
그렇기에 만일 일본이 러시아를 먼저 공격했다가 대패라도 한다면 극동의 세력 추는 저 얼어붙은 동토의 게으른 불곰들 쪽으로 완전히 기울고 말 것이다.
‘그건 절대 용납할 수 없다!’
일본이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할 거라곤 전혀 생각하지 않는 랜즈다운 후작으로서는 두려우면서도 경계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나마 독일 제국은 이번 일과 관련이 없어서 다행이군.’
독일 제국은 현 카이저의 즉위 이래 ‘세계 정책’이란 이름 아래 영국의 해상패권에 도전장을 내밀고 있었다.
병세가 나날이 심각해지는 솔즈베리 후작을 대신에 현 내각을 실질적으로 이끄는 아서 밸푸어는 이를 그다지 심각하게 여기지는 않는 모양이었지만, 독일에 대한 위기감은 영국 내에서 날이 가면 갈수록 높아져만 가고 있었다.
하지만 점점 험악해지고 있는 독일과의 관계를 개선하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영국은 옛날 프로이센 왕국 시절처럼 아예 독일과 동맹을 맺으려고 시도했다.
사나운 개는 무서운 법이지만 그 개가 우리 집 개라면 오히려 든든할테니까.
그리고 이러한 독일과의 동맹을 주도하던 것이 식민지 장관 조셉 체임벌린(Joseph Chamberlain)이었다.
체임벌린은 영국의 외교적 고립을 깨겠다고 독일 제국과의 동맹, 그리고 영국의 삼국동맹 가입을 추진했다.
하지만 이는 결국 실패로 끝났다.
오히려 체임벌린이 독일 제국의 총리인 뷜로 후작과 보어전쟁 문제로 싸웠다가 양국의 사이만 안 좋아졌을 뿐이다.
‘이번엔 프랑스와 접촉한다고 했나?’
하지만 체임벌린은 그것조차 실패했다.
애초에 프랑스는 지금 영국과의 동맹 같은 걸 논의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작년에 뜬금없이 재점화된 드레퓌스 사건과 이로 인해 발생한 극심한 좌우 갈등으로 인해 프랑스 정계가 아직도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가뜩이나 국민감정도 안 좋은 영국과의 동맹을 논한다?
정계에서 완전히 매장되고 싶은 바보가 아닌 이상, 나설 사람이 있을 리가 없다.
‘어쨌든 앞으로 할 일이 많아지겠군.’
벌써 눈앞에 서류 더미가 어른거린다.
랜즈다운 후작은 일본 외교관들과 건배를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에취!”
그러나 랜즈다운은 후작은 모르고 있었다.
“훌쩍···. 으, 추워···.”
영일동맹과 전혀 상관없어 보였던 독일이 이미 링에 뛰어들었단 사실을.
***
겨울의 발트해는 거칠고 매섭고 추웠다.
그리고 그것은 러시아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더 심해졌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나를 힘들게 하는 건 뱃멀미.
이 망할 놈의 뱃멀미였다.
전생에서도 차만 타면 멀미를 하던 나였다.
그런데 거친 파도를 타고 나가는 배?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끔찍한 울렁거림이 멈추지 않고 계속되는 통에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지가 벌써 수일이었다.
왜 내가 러시아에 간다고 했을까.
갑자기 뒤늦은 후회가 밀려오기 시작했을 때, 하인리히 왕자가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 전혀 달라지지 않는 모습으로 내 등을 팍팍 치며 말했다.
“하하, 한스! 그런 계집에 같은 모습으론 해군에 못 들어온다?”
“갈 생각도 없습니···우욱!”
“하하하! 이 정도로 멀미가 심한 녀석은 처음 보네. 하하하하!”
하인리히 왕자가 난간에 매달린 채 끊임없이 구역질하는 나와 달리, 배를 집어삼킬 것 같은 파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차가운 바닷바람을 즐기며 호탕하게 웃었다.
어떻게 이 흔들리는 배에서 저리 멀쩡할 수 있는 걸까?
역시 뱃사람은 뱃사람이다. 이건가?
“욱···. 죄송하지만, 선실로 돌아가 봐도 되겠습니까?”
“에이, 그러지 말고 같이 있자꾸나. 이레네도 선실로 들어갔는데 너까지 가면 심심하단 말이다.”
하인리히 왕자는 내 어이없단 얼굴에도 불구하고 계속 뻔뻔하게 말을 이어갔다.
역시 인싸들은 사람의 마음을 모른다.
“자, 저 하늘을 날아다니는 갈매기들을 봐라.”
“···안 보이는데요?”
하늘은 출발할 때와 마찬가지로 당장 폭풍이 몰려와도 이상하지 않아 보일 정도로 구름만 가득 낀 잿빛이었다.
아무리 봐도 새가 날아다닐 만한 날씨가 아니다.
“크흠, 어쨌든 곧 육지가 보일 거다. 정확히 말하면 크론슈타트가 말이다.”
“발트 함대의 모항이군요.”
“그래. 그리고 그곳을 지나면···.”
상트페테르부르크(Санкт-Петербург).
바다로 나가고자 하는 표트르 대제의 야망에 의해 희생된 수많은 노동자와 스웨덴 포로들의 뼈 위에 지어진 러시아 제국의 심장 21세기에도 수도 모스크바와 더불어 러시아의 중심지로 손꼽히는 곳이다.
‘또한 2년 후면 로마노프 왕조의 운명을 결정지을 피의 일요일이 일어나는 도시이기도 하지.’
그리고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 한때 미국과 세계를 양분했던 초강대국, 소비에 트 연방이 탄생하는 도시이기도 했다.
그때쯤 가면 상트페테르부르크란 이름은 사라지고 ‘레닌그라드’란 이름으로 불리게 되겠지만 말이다.
‘어쩌면 이번 여행이 상트페테르부르크가 본래의 이름을 잃기 전 마지막 방문이 될 수도 있겠군.’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생하자 적국인 독일식 이름이라 하여 러시아식인 페트로그라드로 바뀌었다.
오죽하면 장수한 러시아 노인 중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나, 페트로그라 드에서 자라고, 레닌그라드에 살았으며, 다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죽음을 맞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오래 살아도 죽기 전까지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제 이름을 찾는 것은 보지 못하겠지.’
내가 죽을 때쯤엔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아직 레닌그라드란 이름일 것이다.
역사가 변하지 않는 이상 말이다.
“하인리히 왕자님.”
“음? 무슨 일이냐. 한스.”
“니콜라이 2세 폐하는 어떤 분이신가요?”
“니키? 흐음···. 한마디로 말하면 좋은 사람이지. 동시에 훌륭한 남편이자 자상한 아버지이고 말이다.”
그리 말한 하인리히 왕자는 잠시 뜸을 들이다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나 러시아의 황제로선···이런 말 하긴 그렇지만 좀 그래.”
“그렇습니까?”
“그래. 차라리 러시아가 입헌군주국이었으면 훨씬 나았을 거다. 하지만 한스, 러시아 제국은 거대하지만 부패하고 낙후된 나라야. 아직도 중세식 사고방식과 풍습이 판을 치는 곳이지.”
“하하···.”
러시아 제국은 지나치게 큰 영토 탓에 행정력이 딸려서 유럽의 다른 나라와 달리 스노하체스트보(Снохачество) 같은 악습과 낡은 전통들이 아직도 남아있는 나라였다.
오죽하면 러시아 제국은 사실 양판소나 로판 세계관이 현실로 구현된 나라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일까.
“하지만 그런 러시아 제국을 이끌어가기엔 니키는 능력이 좀 많이 부족한 편이야. 아, 내가 이런 말 내가 했다는 거 이레네에겐 말하지 마라?”
나는 하인리히 왕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인리히 왕자가 보기에도 니콜라이 2세는 한 나라의 군주로선 영 아닌 모양이다.
‘역사의 평가 또한 마찬가지고.’
착하고 부지런하지만 무능력한 그야말로 최악의 리더.
그것이 니콜라이 2세에 대한 평가였다.
여러모로 시대와 나라를 잘못 타고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부우웅───!
“오, 슬슬 도착했나 보군.”
깊은 울림의 뱃고동 소리에 하인리히 왕자가 중얼거렸다.
나는 비틀거리는 몸을 난간에 기대된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봤다.
곧 거대한 군함들이 모여있는 항구, 그리고 그 뒤로 희미하게 거대한 도시의 전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크론슈타트와 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 제국에 도착했다.
작가의말
러시아 제국의 악습과 낡은 풍습들은 훗날 소련이 등장하고 나서야 역사속으로 사라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