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Saved Caesar RAW novel - Chapter 54
54화 : 프리드리히 쇼크
“이건 약속이 다르잖소. 대사!”
베네수엘라 대통령 시프리아노 카스트로가 존대도 잊은 채 미국 전권대사 허버트 보웬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분명 자신에게 영국, 독일, 이탈리아 연합 함대를 압박하기 위해 듀이 제독과 미 해군을 파견해 주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작 루스벨트의 약속대로 모습을 드러낸 미국 함대는 정작 유럽 함대가 푸에르토 카베요에 나타나자 그냥 멀뚱멀뚱하게 서 있었을 뿐, 아무것도 하질 않았다.
오히려 베네수엘라 해군이 유럽인들에게 학살당하는 것을 구경이나 하질 않나, 기껏 유럽 함대와 대치하나 싶더니 대포 한 번 안 쏴보고 그대로 유럽 함대를 피해 북쪽으로 도망쳤다.
“푸에르토 카베요가 유럽 제국주의자들에게 포격당했소! 그리고 조금 전엔 마라카이보(Maracaibo)의 산 카를로스 요새(Fort San Carlos)가 파괴되었단 소식이 들어왔지! 그런데 우릴 지켜주겠다던 미국 해군은 대체 어딜 간 거요?!”
마라카이보는 마라카이보 호와 베네수엘라 만을 연결하는 베네수엘라의 중요한 항구였다.
하지만 베네수엘라는 마라카이보를 지키기 위해 건설한 산 카를로스 요새는 전함까지 동원한 유럽 함대의 포격에 속절없이 무너졌고, 마라카이보마저 봉쇄되었다.
“미국은 딱히 베네수엘라를 지켜 주겠다 공언한 적이 없습니다만.”
“보웬 대사!”
“게다가 이젠 상황이 바뀌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보웬 대사는 카스트로의 생떼와도 같은 분노에도 불구하고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지금 미국은 베네수엘라 따위가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독일인들의 신형 전함이 그렇게 대단했다니.’
듀이 제독의 보고를 받은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즉각 미국 함대를 본토로 귀환시켰다.
그도 알고 있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베네수엘라는 버려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이는 보웬 자신도 동의하는 바였다.
“이쯤에서 포기하고 그만 중재에 응하도록 하세요. 미국이 최대한 베네수엘라의 입장을 대변할 테니.”
“하! 지금 와서 유럽 제국주의자들에게 굴복하라고?!”
“달리 수가 없지 않습니까.”
유럽 함대는 이미 제해권을 장악했다.
여기서 더 버틴다 한들, 유럽인들에게 아메리카 대륙에 발을 디딜 수 있게 만드는 명분만 만들어 주는 꼴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것은, 그것만큼은 미국으로선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해양 봉쇄까지는 먼로 독트린을 침해하지 않았다고 볼 순 있었지만, 독일군과 영국군이 베네수엘라에 상륙하는 순간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졌으니까.
‘잘못하면 영·독과 전면전이다!’
특히 독일 해군이 문제였다.
본래 미국 해군은 독일 해군과의 전투가 발생할 경우, 자신들이 유리하리라 생각했다.
카리브해는 미국의 앞마당이었지만, 독일 제국에 있어선 본토와 멀리 떨어진 것도 모자라 변변찮은 거점 하나 없는 곳이었으니까.
하지만 영국인들이 드레드노트라 부르는 전함, 이젠 프리드리히급으로 더 유명해진 신형 전함의 진정한 가치가 드러난 이상 미국과 미국 해군은 생각을 달리할 수밖에 없었다.
자존심 상하는 일이긴 하지만, 해군의 계산에 따르면 지금의 미국 해군이 독일의 신형 전함을 상대하기 위해선 최소 3, 4척의 전함을 제물로 바쳐야 했다.
그리고 그것은 이제 막 대백색함대란 꿈에 도전하기 시작했던 미 해군에 있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건 배신이야. 배신이라고!”
물론 미국이 자신과 베네수엘라를 버렸다고 생각한(그리고 어느 정도 사실인) 카스트로에겐 미국의 입장 따윈 아무래도 좋았다.
“젠장, 거기 밖에 누구 있나!”
“부르셨습니까. 대통령 각하.”
카스트로는 토마토처럼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자신의 부관을 호출했다.
그리고 원 역사에서 그랬던 것처럼 기어코 최악의 무리수를 던지고 말았다.
“당장 베네수엘라 내에 있는 영국인과 독일인, 이탈리아인들을 모조리 체포해. 당장!”
“카스트로 대통령! 멍청한 짓 그만두세요. 정녕 유럽인들이 베네수엘라에 상륙하는 꼴을 볼 생각입니까?!”
“시끄러워! 이젠 우리 마음대로 하겠어!”
만류에도 불구하고 카스트로는 끝내 명령을 철회하지 않자 보웬 대사의 이마에 핏줄이 돋았다.
“좋습니다. 마음대로 하십시오. 하지만 미국은 더는 당신을 친구로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참아 줄 만큼 참아 줬다.
보웬 대사는 그리 중얼거리며 카스트로의 집무실을 박차고 나왔다.
카스트로가 먼저 선을 넘었으니, 이제 미국은 그를 협상장으로 끌고 나오기 위해서 베네수엘라에 전방위 압박을 가할 것이다.
‘한 5일이면 제발 살려 달라고 기어 나오겠지.’
베네수엘라는 지금 내전 중이었다.
비록 지금은 정부군이 우세하지만, 미국이 나선다면 이는 충분히 역전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카스트로는 별수 없이 미국의 중재에 응할 것이다.
“일단 영국과 독일 외교관들부터 만나 봐야겠군.”
영국과 독일이 미국의 중재에 응할 생각이 있어야 할 텐데.
지금은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란 변수의 등장으로 판이 너무 미국에 불리하게 기울었다.
“전함 하나 때문에 이게 무슨 일인지.”
보웬 대사는 그리 투덜거리며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 때문에 난리가 난 것은 비단 미국뿐만이 아니었다.
* * *
“난 당신을 믿었소. 커 제독. 당신과 해군의 판단을 믿었소.”
“…….”
“그런데 이게 뭐요?”
영국 총리 아서 밸푸어가 도저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는 커 제독을 향해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게 대체 뭐냐고!”
퍽!
분을 참지 못하고 커 제독의 안면에 보고서를 집어 던지는 밸푸어.
본래라면 당장이라도 장갑을 던져야 하는 엄청난 모욕이자 무례였지만, 지금 내각에서 커 제독을 옹호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기엔 커 제독의 죄가, 해군성의 죄가 너무나도 컸다.
“랜즈다운 후작. 몽고메리 제독이 보낸 보고서에 뭐라고 적혀 있는지 말해 보시오.”
“몽고메리 제독이 지켜본 바로는, 드레드노트는 20,000야드(18km)의 거리에서도 상당한 명중률을 자랑했다는군요.”
20,000야드.
밸푸어 내각의 외무장관인 랜즈다운 후작의 입에서 흘러나온 어마어마한 숫자에 이 자리에 모인 내각의 장‧차관들이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영국 해군이 보유하고 있는 전함들의 최대 사정거리가 10,000야드(약 9km)가 될까 말까 했는데 유효 사정거리가 20,000야드?
이건 해군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밸푸어와 내각 장관들에겐 불행하게도 보고서에 적힌 말은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또한 드레드노트의 속력은 최대 21노트(39km) 달하며 자신의 주포를 방어할 수 있는 수준의 중장갑을 갖춘 것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우리 영국이 보유한 전함으론 과연 드레드노트에 흠집이나 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군요.”
“들었소? 우리 전함으론 상대도 안 되는 함선이오. 그 말인즉슨, 우리 영국 해군이 보유한 그 많은 전함이 죄다 고철 덩어리가 되어 버렸다, 이 말이오.”
“허…….”
“하나님 맙소사.”
밸푸어의 자조감 어린 비아냥에 밸푸어 내각의 각료들이 허탈한 얼굴로 탄식을 내뱉었다.
영국은 세계 최강의 해군을 보유하고 있는 것에 걸맞게 그 어떤 나라보다도 많은 전함을 보유하고 있는 국가였다.
그런데 그게 모조리 구식으로 도태되어 버렸다?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게다가 첩보에 따르면 이미 열강이란 열강들은 드레드노트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다는군. 드레트노트의 위력을 코앞에서 본 미국이랑 이탈리아부터 시작해 프랑스와 러시아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오스만 제국에 스페인까지!”
심지어 일본마저 미카사를 환불하고 그 돈으로 드레트노트를 건조해 줄 순 없냐는 개소리를 넌지시 지껄여 왔다.
물론 영국 정부와 비커스사는 웃기지 말라며 이를 단호하게 거절했지만 말이다.
그나마 일본은 러시아와의 싸움이 급했기에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순순히 돌아갔을 뿐이지만 다른 열강들은 달랐다.
차라리 영국이 드레드노트를 선점했다면 모르겠지만, 지금 영국은 독일 제국이 드레드노트를 선점한 상황에서 전 세계를 상대로 건함 경쟁을 펼치게 생겼다.
원 역사에서도 독일과의 건함 경쟁만으로도 피를 토했던 영국이 이를 감당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이 일을 대체 어떻게 책임질 거요. 커 제독?”
“그, 그게…….”
“내가 당신에게 물었지. 정말 괜찮은 것 맞냐고. 그리고 당신은 이렇게 대답했지. 드레드노트는 우리 영국의 해상 패권에 그 어떠한 위협도 안 된다고!”
이 때문에 밸푸어는 드레드노트의 위협을 무시했다고 봐도 좋을 정도로 과소평가했다.
그리고 그 대가는 너무나도 컸다.
‘총리가 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미 영국 전역에서 자신을 향한 온갖 비난과 욕설이 쏟아지고 있다.
이것만으론 모자라서 시민들이 자신을 닮은 인형을 불태우고 있다는 말까지 들려왔다.
그야 대영제국이 바다를 잃게 생겼는데 누가 분노하지 않을까.
‘이대로 가다간 난 끝장이다.’
이미 자신에 대한 지지가 굳건했던 보수당 내에서조차 사임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 상황.
하지만 이대로 총리직에서 물러났다간 다신 총리 자리에 오르지 못할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밸푸어는 총리가 된 지 고작 몇 개월 만에 그런 치욕을 겪고 싶진 않았다.
“일단 커 제독 당신은 제1해군경에서 해임이오. 기껏 독일까지 가놓고 드레드노트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개소리를 지껄인 멍청이들도 마찬가지고!”
“총리님. 하, 하지만……!”
“설마하니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 자리를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소? 엉?!”
“아, 아닙니다.”
커 제독은 밸푸어의 일방적인 통보에 항의하려 했지만, 밸푸어의 으름장에 곧 다시 고개를 숙였다.
자신의 편을 들어줄 사람은 이미 아무도 없었으니까.
“그래도 제독의 명예를 위해 스스로 사임을 할 기회는 주겠소. 이것이 내가 베푸는 마지막 자비요.”
“……예.”
“그리고 제2해군경인 존 피셔 제독을 제1해군경으로 올리겠소. 피셔 제독은 드레드노트를 도입해야 한다고 이전부터 끊임없이 주장해 왔다지? 지금 내각엔 그런 인물이 필요하오.”
하필이면 피셔라니.
가뜩이나 자신과 사이가 안 좋은 피셔가 자신의 자리를 차지한다는 사실에 커 제독은 피를 토할 것 같았다.
솔직히 커 제독도 억울했다.
그 또한 독일에 파견한 해군 무관들의 보고에 따라 드레드노트가 위협이 안 된다는 판단을 내렸을 뿐이니까.
‘눈 대신 옹이구멍을 달고 다니는 그 머저리들만 아니었으면 내가 이런 모욕을 당할 일도 없었을 텐데!’
하지만 후회해 봤자 이미 늦었다.
이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집에 가서 손주 재롱이나 보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베네수엘라 문제는 최대한 빨리 끝내도록 합시다. 우리에겐 지금 남미의 소국 따위에게 신경을 쏟을 여력이 없으니까.”
마침 미국의 시어도어 루스벨트에게서 베네수엘라와의 협상을 중재해 주겠다는 제의가 들어왔다.
베네수엘라가 말을 안 들으면 억지로라도 끌고 오겠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말이다.
기어코 카리브해로 함대까지 파견한 양키들의 행동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가뜩이나 드레드노트 문제로 정신이 나갈 것 같은 아서 밸푸어에겐 가뭄의 단비가 따로 없는 제안이었다.
“하지만 총리님. 독일 제국이 미국의 중재안을 받아들일까요?”
“으음, 그건…….”
문제는 또 그놈의 독일 제국이었다.
영국이 독일과 맺은 약조에는 어느 한쪽의 동의 없이 베네수엘라와 협상하는 것을 금지하는 조항이 있었다.
만약 미국이 제시한 조건이 마음에 안 들면 독일은 이를 거부할 것이고, 그러면 영국 또한 덩달아 베네수엘라란 늪에서 빠져나가는 게 불가능했다.
“독일인들이 어디까지 원할 것 같나? 설마 기어코 베네수엘라 영토를 식민지로 삼으려고 하는 건 아니겠지?”
“떠도는 소문과 달리 독일 제국과 카이저에겐 그럴 의도는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내전에서 독일인들이 입은 재산 피해에 대한 보상금과 배상금 등 베네수엘라에 받아 내야 할 것은 전부 받아 내려 하겠죠.”
랜즈다운 후작의 말에 아서 밸푸어는 골치 아픈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미국과 영국은 지금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한시라도 이 문제에서 벗어나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지.
하지만 독일은 미영과 달리 돈이 가장 중요했고, 베네수엘라는 그 돈을 다 주지 않으려고 어떻게든 버틸 것이다.
결국 협상은 난항을 겪으며 길어질 테고, 영국은 베네수엘라 문제로 발이 묶인 신세가 될 것이다.
“독일 정부와 카이저를 어떻게든 설득해야 해.”
다행히 카이저 빌헬름 2세는 아직 가족들과 함께 샌드링엄 하우스에 머물고 있었다.
“폐하께 부탁을 드려야겠군.”
지난번에 자신이 드레드노트에 대해 공언했던 게 있어서 에드워드 7세의 힐난 섞인 시선을 감수해야 하긴 하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금 영국은 베네수엘라에서 서둘러 발을 빼야만 했다.
그래야 영국도 드레드노트 문제에 제대로 대처할 여유가 생길 테니까.
“……그런 이유로 빌리, 이만 베네수엘라 문제를 끝내는 게 어떻겠느냐?”
“외숙부. 빅토리아 할머니였다면 그런 말은 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랬듯 카이저는 영국의 기대를 배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