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Saved Caesar RAW novel - Chapter 97
97화 : 포츠머스 조약 (1)
1905년 1월, 미국 햄프셔주 포츠머스.
“러시아 제국의 국무위원이자 전권대사를 맡은 세르게이 율리예비치 비테입니다.”
“대일본제국 외무대신 고무라 주타로입니다.”
니콜라이 2세와 피의 화요일로 인해 10년은 더 늙어 버린 비테는 마찬가지로 그리 좋아 보이진 않는 얼굴의 고무라 주타로와 악수한 뒤 자리에 앉았다.
두 사람을 중심으로 러시아 대표단과 일본 대표단이 마주 보는 가운데 중재를 맡은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느긋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러시아 제국이나 일본 제국이나 사정이 급한 것은 마찬가지인 것 같으니, 의미 없는 서론은 관두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합시다.”
루스벨트의 뼈가 섞인 어투에 비테와 고무라는 누구라고 할 것 없이 피곤함에 절어 있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만큼 러시아는 러시아대로 일본은 일본대로 국내 상황이 매우 안 좋았다.
우선 러시아는 선하신 니콜라이 2세 폐하께서 불쌍한 신민들을 보다 못해 성 안드레이 축일에 친히 총알을 선사해 주시니 이에 감읍한 러시아 인민들이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차르의 선물에 보답하기 위해 횃불을 들고 거리로 뛰쳐나오고 있었다.
그것만 해도 충분히 비테로서는 피를 토할 일인데, 이 시대의 암세포와도 같은 혁명가 나부랭이들까지 이 기회에 러시아 제국을 무너트리겠다고 러시아 전역에서 암약하며 러시아 고위급 인사들에 대한 온갖 테러 행위를 자행했다.
당장 비테가 러시아를 떠나기 전, 니콜라이 2세의 숙부이자 노동자들에게 발포 명령을 내린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의 남동생이었던 세르게이 대공이 모스크바에서 암살당했을 정도니 말 다 했다.
러일전쟁이 벌어지기 전부터 비테가 가장 우려하던 사태가 기어코 벌어진 것이다.
한시라도 빨리 전쟁을 끝내야만 한다.
그래야 러시아 제국 내부의 혼란을 진정시키는 것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일본의 사정 또한 러시아와 그리 다를 바가 없었다.
알다시피 일본은 황해의 제해권과 대한제국을 불완전하게나마 장악한 것을 제외하곤 이번 전쟁에서 그 어떤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거기다 10년 빠른 참호전이 만들어 낸 참혹하고 비위생적인 환경으로 인해 전선에 전염병까지 돌아 사상자는 어느새 10만을 넘어 15만에 육박했다.
대일본제국 청년들의 무수한 목숨을 대가를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단 하나의 승전보도 들려오지 않자 무능한 정부와 군부에 분노한 일본인들은 거리에서 연일 시위와 폭동을 일으켰다.
원 역사에서 전쟁에서 승리하기만 하면 다들 잘 먹고 잘살 것이라는 정부의 말과 다르게 러일전쟁에서 이기고도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배상금 하나 못 받았단 사실에 분통을 터트렸던 일본인들이다.
제대로 된 성과 하나 없던 지금은 불만이 훨씬 컸으면 컸지 절대 작지 않았다.
[전장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오로지 남편과 아들들의 전사 소식뿐. 정부가 약속했던 승리는 대체 어디 있는가?] [만 일본 백성의 어버이이신 천황 폐하의 격노! 정부와 군부는 자신들의 무능함에 반드시 책임져야 할 것.] [연일 계속되는 반정부 시위. 불타오르는 히비야 공원. 이것이 국민의 뜻!]일본 열도 전체가 정부에 대한 분노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히비야 방화 사건이 일어났던 도쿄의 히비야 공원은 이미 분노한 폭도들에 의해 불살라진 지 오래였고, 가쓰라 다로 총리와 고무라 주타로를 비롯한 고관들의 집에 돌과 쓰레기가 날아오는 것은 일상다반사였다.
그러나 그들이 당한 일은 전선에서 병사들의 시체로 산을 쌓은 구로키 다메모토를 비롯한 일본군 지휘관들의 가족들이 겪고 있는 것에 비하면 약과였다.
누가 이지메 원조국 아니랄까 봐 일본인들은 무능한 장군들에 대한 분노와 증오를 그들의 가족들에게 있는 대로 풀었다.
원 역사에서 뤼순 공방전을 지휘했던 노기 마레스케의 가족들이 겪은 일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일이었다.
정작 이 세계의 노기 마레스케는 일본군이 뤼순까지 가지도 못한 탓에 후방인 조선에 배치되어 치안 유지 임무를 맡고 있었기에 이런 비판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어쨌든 전리품에 대해 독일과 영국에 미리 약속받은 것이 있었던 비테와 달리 고무라 주타로는 훨씬 초조한 얼굴이었다.
만약 이번 조약에서 그 많은 목숨을 희생해 놓고 아무것도 못 얻어 가면 그때는 배를 갈라야 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번 전쟁은 실질적으론 러시아와 일본 간의 무승부로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기에 배상금은 이미 물 건너간 상황.
‘그렇다면 땅이라도 받아 내야 한다!’
그나마 러시아 제국이 모로코에서 대사고를 친 덕에 판이 일본에 조금이나마 유리해진 상황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마이너스가 제로가 되었을 뿐이었지만, 어쨌든 고무라 주타로는 이를 발판으로 삼아 무엇이라도 얻어 가야만 했다.
“일단, 양측의 원하는 조건에 관해 이야기하도록 합시다.”
“우리 러시아 제국은 사전에 약속한 대로 북만주 일대를 병합하는 것을 인정받는 대신 포트 아르투르와 한반도에서의 영향력을 포기하겠소.”
루스벨트의 말에 비테가 아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차르와 베조브라조프만 아니었더라면 여기에 더해 몽골까지 가져올 수 있었으련만.
하지만 지금 러시아 제국은 약속대로 북만주를 가져갈 수 있는 것에 감지덕지해야 했다.
잘못했다간 그조차도 얻지 못한 채 그냥 전쟁을 끝내야 할 수도 있었으니까.
가뜩이나 러시아 내부의 혼란으로 인해 돌아 버릴 것만 같은 비테에게 있어 그것만큼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 일본 측의 요구는 어떻습니까?”
“우리 일본 제국은 러시아 제국이 포기한 뤼순과 다롄을 조차지로 할양받고 싶습니다.”
루스벨트 대통령의 질문에 고무라 주타로는 비테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현재의 일본이 가져갈 확률이 그나마 존재하는 영토이기도 했다.
“불가합니다.”
그러나 비테는 단호하게 말했다.
“애초에 우리 러시아 제국은 포트 아르투르를 다시 청에 반환할 생각입니다. 그곳은 본래 청나라의 땅이었으니까요.”
“미국 또한 러시아 제국의 의견에 동의하는 바입니다.”
미리 이야기라도 오간 것인지 루스벨트 대통령까지 비테의 손을 들어주자 고무라 주타로는 벌써 눈앞에 할복하는 자신의 목을 치기 위한 카이샤쿠(介錯)가 보이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침음성을 흘렸다.
“하지만…….”
“우리가 포트 아르투르를 청나라에 반환한 뒤, 이 지역을 일본이 어떻게 하든 우리 러시아가 신경 쓸 바는 아닙니다.”
신경 쓸 힘도 없었다.
지금 러시아 제국은 극동이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다만, 일본이 다시 랴오둥반도에 발을 들이미는 순간 다른 열강들이 이를 어떻게 생각할지는 우려가 되는군요. 부디 일본 제국이 몇 해 전의 삼국간섭을 잊지 않았기를 바랍니다.”
비테의 말에 고무라 주타로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 수모와 치욕을 어찌 잊었겠는가.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대가로 청나라로부터 뤼순과 다롄을 비롯한 랴오둥반도 일대를 할양받았다.
하지만 만주에 침을 흘리고 있던 러시아는 중국에서 일본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중국에 이권을 가지고 있던 독일과 프랑스를 끌어들여 일본에 전방위 압박을 가했다.
결국, 기껏 랴오둥반도를 할양받고도 그거 다시 도로 뱉어 내라고 압박을 가한 러시아, 독일, 프랑스의 삼국간섭으로 인해 일본은 랴오둥반도를 청나라에 돌려줘야 했다.
당시 일본은 아직 러시아에 맞설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삼국간섭을 기점으로 일본은 러시아에 대한 적의로 불타오르기 시작했고, 끝내 러시아 제국이 1898년에 자신들에게서 뺏은 뤼순과 다롄을 자국의 조차지로 삼아 버리자 폭발해 버리고 말았다.
러일전쟁으로 이어지는 도화선에 불이 붙은 순간이었다.
‘어쨌든 이번에도 그때와 다를 바 없을 거란 소리군.’
당장 루스벨트 대통령부터가 자신을 의미심장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유럽 열강들도 유럽 열강이었지만, 최근 태평양 패권에 집중하고 있는 미국 또한 일본이 중국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고무라 주타로는 여기서 꼬리를 만 채 뒤로 물러날 수 없었다.
“하지만 러시아 또한 북만주 일대를 가져가지 않습니까? 우리 일본이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했다곤 하나 그건 러시아 또한 마찬가지. 이대로 빈손으로 돌아갈 순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대로 빈손으로 돌아갔다간 자신은 확실하게 죽기 때문이다.
고무라 주타로는 분노한 민중의 불만을 가라앉히기 위한 제물이 되긴 싫었다.
“일본엔 이미 한반도가 있지 않습니까?”
비테가 말했다.
“우리 러시아 제국은 한반도에서 일본에서의 영향력을 인정하겠습니다. 그러니 카레야(Корея)를 식민지로 삼든, 자국 영토로 합병하든 일본 마음대로 하십시오.”
물론 말은 그리했지만, 비테는 일본이 조선을 병합하진 못하리라 봤다.
러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의 체급으로도 무리에 가까웠던 조선 합병을 잘 춰져 봐야 무승부를 거둔 지금의 일본이 감당할 여력이 있을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원 역사에서 열강들은 1910년에 한일합병을 보고 ‘쟤들 뭔 미친 짓이야?’ 하며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인구 2,000만의 단일민족으로 이루어진 나라를 단번에 집어삼키는 일은 당시 기준으로도 전무했던 일이었으니까.
식민지 건설이 말만 쉽지, 실제론 국가역량을 무진장 잡아먹는 일이다.
그렇기에 영국도 인도를 식민지화할 때 제각각 따로 놀던 지역을 영국식 디바이드 앤 룰(Divide and rule)을 통해 차근차근 집어삼켜야만 했고, 그 프랑스조차 조선보다 인구가 적었던 베트남을 먹기 위해 수십 년간 공을 들여 차근차근 영토를 점령해 나가야 했다.
‘그나마 한반도를 괴뢰국으로 삼는 것이 최선이겠지.’
그렇기에 친애하는 한스 폰 초이 남작도 고향의 비극적인 운명에 대해선 별말 안 했다.
아마 남작은 자신과 거래할 때부터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비테는 자기 고향조차 판돈으로 삼는 동양인 소년의 냉혹함에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물론 이는 한스로서도 피눈물을 흘리며 내린 결정이었지만, 비테가 그것을 알 리가 만무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합니다!”
한반도에서의 일본의 권리와 영향력을 인정받은 것까지는 괜찮았다.
그러나 고무라 주타로 역시 지금 상황에선 조선 병합은 힘들다고 보았고, 식민지도 아니고 괴뢰국 정도론 분노한 국민을 달래기엔 부족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이 살아남을 수 없었다.
‘쯧, 모로코에서의 그 바보짓만 아니었다면 이딴 억지는 들어주지도 않았을 텐데.’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러시아 제국 또한 지금 일본에 남 말할 처지는 아니었다.
비테는 하는 수 없이 일본을 입 다물게 할 준비한 비장의 수를 꺼내 들었다.
“대신 러시아 제국은 사할린, 사할린 남부를 일본 제국에 할양하겠소.”
“사할린이라 하셨습니까?”
당장이라도 발작을 일으킬 것 같던 고무라 외상의 얼굴이 싹 바뀌었다.
사할린(Сахалин). 일본에선 가라후토(樺太)라 부르는 홋카이도 북쪽에 있는 섬이다.
다만, 21세기와 달리 이 당시엔 러시아와 일본 양쪽에게 큰 가치는 없던 땅이기도 했다.
당장 일본은 오래전 러시아 제국의 남하를 견제하기 위해 부랴부랴 사할린에 진출한 적이 있었지만, 홋카이도를 관리하는 것만으로 힘에 부쳐서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을 통해 쿠릴 열도를 할양받는 대신 러시아에 사할린을 넘겼던 적도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 가치와 배경이 어찌 되었든 본국에 영토 하나라도 더 들고 가야 했던 고무라 주타로에게 있어선 꽤 구미가 당기는 조건이었다.
사할린은 명백한 러시아 영토였던 만큼 국민에게 러시아에 양보를 받았다고 나름 변명거리가 생기니까.
물론, 국민 대부분은 고작 사할린 반쪽을 위해 15만이나 되는 청년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냐고 분통을 터트리겠지만, 그건 가쓰라 총리가 감당해야 할 일이었다.
고무라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은 이걸로 전후 몰아칠 피바람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사실 뿐이었다.
또한 비테로서도 사할린 남부를 일본에 할양한다고 해서 딱히 아쉬운 것이 없었다.
포트 아르트루는 전략적 요충지라 영국을 뒷배 삼고 있던 일본에 넘겨 주긴 배가 아팠지만, 기후도 험한 데다가 불모지라 경작도 불가능한 사할린 정도야 반으로 뚝 잘라서 일본에 선심 쓰듯 나눠 줘도 상관없는 땅이었으니까.
‘북만주를 가져오는 대가로 사할린 정도는 충분히 싸지.’
게다가 비테는 이 회담이 알헤시라스 때처럼 무의미하게 길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럴 여유도 없었고 말이다.
“알겠습니다. 러시아 제국 측에서 그리 양보해 준다면 우리 일본 제국 또한 조약에 찬성하겠습니다.”
“이야기가 빨리 끝나서 좋군요. 벤저민 프랭클린의 말처럼 시간은 곧 돈이니, 이 이상 회담을 길게 끌 필요는 없겠죠. 바로 조약을 진행하도록 합시다.”
루스벨트 대통령의 말에 비테와 고무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로는 말 그대로 일사천리였다.
그렇게 다음 달인 1905년 2월, 러시아 제국과 대일본제국 간의 포츠머스 조약이 공식적으로 체결되었다.
전쟁이 일어난 지 정확히 1년 만에 러일전쟁이 종결되었다.
그리고 그 바뀐 결말에 따라 동아시아의 정세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