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see hearts in failed idol’s eyes RAW novel - Chapter 103
103. 정신만 차리면 산다(1)
“농담. 그냥 매일 차고 다니길래. 제가 준 반지는 안 하시잖아요. 조금 섭섭하게.”
내가 잠시간 말이 없자 선배는 와인병을 내보이며 자신 반대편의 의자를 빼내고 이쪽으로 오라 손짓했다.
‘나도 아직 엄마 유품의 정체를 정확히 모르는데 주변에서 더 성화네.’
대충 감으로 눈치는 챘다.
나의 스탯 중 운 별 5개. 그리고 반지를 소중히 하라는 목소리와 사소한 모든 것에서부터 운이 받쳐주고 뽑기 시스템에서도 좋은 결과를 뽑아냈던 것. 결과적으로 반지와 내 운이 연관 있다는 것 정도는.
하지만 운으로 세상사의 모든 일을 해결할 순 없기에 그다지 핵심 가치로 놓지 않았던 것뿐이지.
하지만 선배가 이 반지의 존재에 대해 눈치채고 있다면 말이 달라진다. 지금껏 이상하게 느꼈던 묘한 기류들이 퍼즐처럼 맞춰지게 되니까. 선배는 지금 정확하게 ‘반지’와 ‘운’의 연결 고리를 언급했다.
“선배, 혹시 판타지소설 같은 거 자주 읽으세요?”
“음, 판타지요? 어떤?”
“영화나 소설 같은 거 많잖아요. 예를 들면 주인공이 과거로 돌아간다든가… 다른 사람같이 느껴진다든가?”
“과거로 돌아간다는 것 자체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요. 저에겐 너무 허무맹랑한 소리 같아요.”
‘회귀’라고 딱 말할 수 있다면 설명이 편할 텐데 단어를 입 밖에 낼 수 없으니 적당한 단어를 찾기가 고역이었다. 적당히 말을 돌리며 대화를 이어갔다.
“그냥 그런 비슷한 장르들이요.”
“제가 그런 쪽으로는 관심이 없어서 감이 잘 안 오는데, 어떤 뜻인지…….”
‘왜 자꾸 명확한 단어를 유도하는 것 같지?’
이럴 때 시스템이 작동한다면 좋을 텐데. 선배 앞에서만 무용지물이 되는 시스템이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오로지 내 머리와 감에 의존해야 하는 수밖에 없었다.
“과거로 돌아온 사람이 있다든가. 어떤 사람은 예전과 180도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다든가… 아무래도 그런 일들이 제 주변에 좀 일어나는 것 같거든요.”
“그것참 특이한 일이네요. 아, 뭐 좋아하세요? 식사 안 하셨을 것 같은데.”
잔에 와인을 반쯤 채워둔 선배는 안주가 필요하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찬장을 뒤지는 선배의 뒤에 대고 낮지만 똑바르게 말했다. 못 들을 일이 없도록.
“근데 선배도 그래요, 지금.”
순간 적막이 찾아왔다. 단 몇 초간의 정적일 뿐임에도 이 짧은 순간을 몇 배로 늘려놓기라도 한 듯이 길게 느껴졌다. 선배는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고, 그런 선배를 바라보던 나는 어색함에 목울대를 울렸다.
“은찬 씨~ 제 얘기 들어주려고 오신 줄 알았는데.”
“앗, 그냥 제가 요즘 그렇게 느껴서 해본 말이에요!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그 적막을 먼저 깬 건 선배 쪽이었다. 선배는 눈썹을 살짝 밑으로 내리며 곤란하다는 미소를 지었다. 그 목소리에도 자못 섭섭함이 묻어 있었다.
‘속지 말자. 지금의 선배는 언론에서도 극찬하는 연기 천재야.’
그러기에 나도 최대한 표정 관리를 하려고 애썼다. 손사래를 치며 섭섭해하는 선배를 향해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으음… 기류가 너무 어색해졌네.’
뭐라고 말을 얹어야 할 것 같은데, 마땅한 말이 없었다. 기껏 편승한 이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았고 말을 많이 하면 말릴 것만 같아서. 선배는 말을 잘했다. 이건 원래의 선배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적당히 답하자.’
작은 그릇 몇 개와 냉장고에 있던 치즈 몇 개를 꺼낸 선배가 자리에 앉았다. 재빨리 그 치즈를 받아 들고 그릇 위에 정리하며 경쾌하게 말했다.
“그냥 선배가 요즘 제가 알던 선배가 아닌 다른 사람같이 느껴져서요. 제 착각이겠죠?”
“은찬 씨가 단언하고 말하는데 제가 말을 얹을 사항은 아닌 것 같아요. 뭐라 할 말이 없네요… 조금 섭섭한 정도?”
“그렇게 느끼셨다면 죄송해요. 근데 정말 그럴 의도는 아니었어요.”
살짝 당황한 듯이 눈을 접고 입을 빼죽 내밀었다. 그러자 선배는 피식, 잔웃음을 흘리더니 의자를 조용히 빼내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잔을 들고 건배를 권했다. 나 역시 양손으로 잔을 잡아 들고 고개를 살짝 숙이며 잔을 부딪혔다.
“아하하, 와인을 무슨 소주 받듯이 받으시네요.”
몸을 살짝 옆으로 비틀어 한 모금 마셨다. 그 와중에도 뿌듯함에 광대가 위로 솟았다.
‘나도 이 정도면 표정연기 많이 는 듯? 뿌듯하다…….’
라고 생각하기 무섭게 와인을 한 모금 넘기자마자 얼굴이 와장창 찌푸려졌다.
‘써.’
정확히는 쓰다기보다는 떨떠름하다에 가까웠지만. 역시 자주 안 마셔본 주종이라 그런지 적응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레드와인 중에서도 도수가 높은 편이었는지 입안이 떨떠름해 자꾸만 입을 뻐끔거리며 애꿎은 입술만 만지작댔다.
“그렇게 써요?”
“제가 와인은 많이 안 마셔봐서… 근데 저, 금방 적응할 거예요. 술 딱히 안 가려서요.”
그제야 확인해 본 와인의 도수는 14도였다. 도수 자체는 소주랑 다를 게 없으니 이 맛에도 적응하기 위해 자기 세뇌를 걸었다. 이건 쓴 게 아니고 달짝지근한 술이다. 발효주면 막걸리랑 비슷한 거다, 하고.
“방송이 만들어진 이미지라는 건 은찬 씨도 잘 알고 있잖아요. 이미 옆에 그런 친구도 있고.”
옆에 그런 친구라.
‘누구? 현주인을 지칭하는 건가?’
현주인이 카메라 앞에서는 만들어진 이미지대로 행동하는 게 사실이긴 하지.
‘그래도 팬 아끼는 건 맞는데…….’
괜히 가시가 삐죽 솟아올랐다. 아무리 선배라도 같은 멤버에 대해 안 좋게 이야기하는 건 별로 듣고 싶지 않았다. 역시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말이 괜히 있는 건 아닌 거지.
“앗, 선배! 제가 따라 드릴게요!”
선배의 손이 와인병에 닿기 전에 급히 제지하며 와인병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양손으로 병을 받치고 선배의 잔을 천천히 채웠다.
’방송에서 이미지 관리 하는 거 중요하긴 하지. 그런데 그게 전부는 아니고 본인 성격을 드러내는 사람도 많잖아. 일단 나도 그렇고, 승채 선배도 그래. 내가 알던 무영 선배도 솔직한 성격 때문에 더 존경했던 건데.’
그러고는 내 잔도 마저 채우며 이어 생각했다.
‘확실히 선배 입에서 나올 말이 아니야.’
“승채가 무슨 말을 하던가요? 둘이 만났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네? 아니요! 선배에 대해서 좋은 얘기밖에 안 하죠, 승채 선배는. 워낙 긍정적이시고!”
“하긴 좋은 애죠. 아, 짠 할까요?”
고개를 끄덕이며 잔을 드는 무영의 잔에 은찬도 제 잔을 맞췄다. 유리끼리 맞부딪히는 소리가 청아하게 울렸다. 아직 와인 잔에 입술만 댄 은찬과 달리 이미 한 모금을 마신 무영이 잔을 내려놓으며 섭섭한 듯 먹먹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은찬 씨하고는 좋은 말만 하고 싶은데 그런 생각 하게 해서 미안해요.”
“네……?”
“저 존경한다고 말씀해 주셨는데 기대에 못 미쳤나 봐요.”
선배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기에 잔을 내리지도, 마시지도 못한 채 그대로 굳었다. 눈만 동그랗게 뜬 채로 선배를 올려다보았다. 눈빛이 얼핏 봐도 슬퍼 보여 괜히 침만 꼴딱 넘어갔다.
“제 고민거리도 그래서 생긴 거거든요. 그래서 오늘 은찬 씨 생각이 났던 거고.”
‘나, 너무 말을 심하게 했나?’
아무리 그래도 할 말은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선배의 저런 얼굴을 보니 마음이 약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연기할 때를 제외하면 기본적으로 웃는 낯의 선배라 가라앉은 얼굴은 거의 처음 보다시피 하는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달리 할 말이 없어 입술만 위아래로 꾹꾹 문댔다.
“아시다시피 이번에 오디션 프로그램 MC를 맡게 됐잖아요.”
“들었어요. 저 그거 꼭꼭 챙겨 보려고요……!”
“소문은 진짜 빠르구나. 아무튼 후배들은 은찬 씨처럼 제 좋은 모습을 보고 있을 것 같은데 은찬 씨 같은 생각을 할까 봐… 실망하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하고 요즘 고민이 많아서요. 털어놓을 사람이 은찬 씨뿐이라.”
순간적으로 가슴이 쿵 했다. 조심스럽게 말한다고 한 건데 저런 의미로 받아들이셨구나. 사실을 알고 싶은 것뿐이지 선배 가슴에 대못을 박을 생각은 없었다.
“네? 전 그런 의미는 절대, 정말, 진짜… 진짜로 아니었는데!”
당황해서 와인을 단숨에 들이켰다.
‘돌려 말할 수 있었는데… 저렇게 슬퍼 보이는 표정을 보려던 건 아니었는데! 아, 선배 고민부터 듣고 말할걸.’
선배가 다른 사람 같다는 의혹과는 다른 문제다. 사람 대 사람이라고는 해도 실수였다. 거기다 저 완전히 착잡한 듯한 얼굴이라니! 속이 달라도 저 얼굴로는 절대 저런 표정 보고 싶지 않다고! 좋아하던 얼굴인데 당연한 거 아니냐!
“앗, 그걸 한 번에 다 마시면…….”
맛을 느낄 새도 없이 목구멍으로 와인이 꼴딱꼴딱 넘어갔다. 술이 코로 들어가는지 목으로 들어가는지 모를 정도로 단숨에 삼켜 버렸다. 지켜보던 선배의 눈이 크게 뜨이더니 기어이 웃음을 크게 터뜨렸다.
“푸핫, 금방 취하실 수도 있는데 괜찮아요? 은찬 씨 술이 센가?”
괜찮을 리가. 마실 때는 별 느낌이 없었는데 다 비우고 나니 그 여파가 꽤 셌다. 순식간에 띵 울려오는 골에 나도 모르게 미간이 찌푸려졌다. 선배가 입가를 가리며 걱정스럽게 물어왔다.
“괜찮아요?”
“네… 당연하죠!”
“얼굴이 좀 빨간 것 같은데?”
“더워서 그런가? 아, 좀 더워져서 그런가 봐요. 이제 곧 봄도 오고 있고…….”
우와, 내가 생각해도 헛소리다. 말이 평소같이 뇌를 거치고 나오는 게 아니고 말부터 나온 뒤 뇌가 돌아간다.
‘으… 진짜 알딸딸한데?’
와인 원샷의 효력이 이렇게 클 줄이야. 최대한 정신을 붙잡으려고 입 안쪽 살을 지그시 깨물었다. 시스템아, 이럴 때 술 깨는 스킬은 없냐?
“제 팬이라고 앞에서 직접적으로 얘기해 준 게 은찬 씨뿐이라서요.”
“아……? 무영 선배 인기 엄청 많으시잖아요.”
“후배가 그렇게 나서준 건 처음이라. 제가 그 많은 아이돌 지망생들에게 멘토가 될 수 있을지도 고민이 많이 되고, 잘할 수 있을 거라고 힘 좀 받고 싶어서요. 은찬 씨가 대표 격이거든, 나한텐.”
잔은 비워지기가 무섭게 새로 채워졌다. 선배는 같은 속도로 맞춰주면서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는 중이었다. 일부러 눈가에 힘을 빡 주고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목에 걸린 반지를 다시금 확인했다. 왠지 모르게 선배 앞에서는 이 반지를 확인해야 마음이 편했다.
‘이쪽 본 건가?’
순간적으로 선배의 시선이 목 쪽으로 쏠린 것 같았는데.
“지금 배우 해서 많이 실망했죠? 무대 엄청 좋아하는 것 같던데.”
“아…….”
곧 대화가 이어졌다. 잘못 봤겠거니, 하고 적당히 넘기며 잔을 받아 들었다.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었다. 사실대로 대답하기에는 민망하고, 거짓말을 할 수도 없으니까.
“아이돌에 대한 열정은 진짜였거든요. 지금은 배우로 전향하긴 했지만.”
선배의 다음 말을 듣자마자 자동적으로 눈이 크게 뜨였다. 혹시 잘못 들은 건 아니겠지, 싶어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살짝 건드렸다.
’응?’
그동안 듣고 싶었던 말이다. 물론 선배에 대한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기 전에 그랬다는 소리지만.
‘승채 선배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물어볼 수 있을 것 같은데.’
내가 느끼기로 지금의 선배에게 아이돌에 대한 열정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게 단언해도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로 무대에 대한 대화는 전부 기피하셨으니까.
‘하지만…….’
본인이 이렇게 말한다는 건… 아직 아주 조금의, 일말의 열정이라도 남아 있어서 이렇게 말하는 거 아닐까. 그런 마음이 단 1g도 없는데 이렇게 말할 수는 없는 거잖아.
‘이게 진심이라면 좋을 텐데.’
원래의 선배라면 표정에서부터 진심이 느껴졌겠지만, 눈빛에서는 진심이 안 보인단 말이지. 찐팬이었으니까 알 수 있는 바이브가 있는 거라고.
“왜 이렇게 덥지…….”
짧은 사이 생각을 많이 해서 그런지 몸에 열이 훅 올라 티셔츠의 목 부근을 잡고 팔락였다. 전혀 도움 되지 않는 미미한 바람이 얼굴에 끼쳤다. 선배가 내 얼굴 앞에 손을 휘휘 흔들어 보였다.
“취한 것 같은데?”
“어, 발효주라 그런가… 제가 다 괜찮은데 막걸리엔 좀 약해서… 그래서 그런가 보네…….”
확실히 지금의 선배도 좋은 사람은 맞다.
‘뇌에 힘주자, 유은찬.’
혹시나 실수를 하거나, 헛소리를 하면 모든 게 말짱 도루묵이 되니 입단속을 철저하게 해야 했다. 오늘은 이 정도 떠본 걸로 충분했다. 지금 상황에서 말을 더 얹었다가는 되레 내 꼬리가 밟힐 수도 있었다. 이제 와 눈치 없이 구는 건 질색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