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see hearts in failed idol’s eyes RAW novel - Chapter 112
112. 벗겨진 가면(1)
‘아니, 연락은 하고 오셔야 할 거 아니야!’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면서도 전전긍긍했다. 안 하던 다리까지 떨어가며 손톱을 물어뜯은 게 그 증거다. 아까 전화를 좀 찝찝하게 끊었다 싶긴 했는데, 이렇게 다짜고짜 찾아오실 줄은 전혀 몰랐다.
‘마음의 준비도 전혀 못 했는데… 너무 갑작스럽잖아. 마치 지원서 넣은 당일 면접 오라고 하는 것 같은 긴장감이야.’
하긴 언제나 예상을 벗어나는 사람이긴 했다. 그 의미가 어떤 쪽으로든.
“선배……!”
숙소 1층 입구에는 익숙한 인영이 서 있었다. 어둠에 가려 흐릿했지만 다시 확인할 필요도 없이 명확한 백무영 선배였다. 선배는 미남의 조건 중 하나라는 그림자마저도 잘생겼으니까.
“아, 은찬 씨.”
“왜 여기까지 오셨어요. 누가 보면 어쩌려고…….”
“환영받지 못할 것 같긴 했는데, 너무 싫어하진 마세요.”
“그런 의미가 아니라……!”
뭐라 대꾸하려던 입을 일자로 꾹 다물었다. 선배가 내 눈앞에 작은 조각 케이크 상자를 흔들었기 때문이다.
“그럼 인적 드문 곳으로 갈까요?”
평소라면 냅다 동의했겠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어딘지 꿉꿉한 게 사실이다. 하지만 연예인이란 직업상 어쩔 수 없이 사람을 피해 가야 하는 것도 사실이고.
‘게다가 타인이 들으면 안 될 것 같은 말만 하실 것 같단 말이지.’
회귀나 본인 정체에 대한 내용 같은 것. 그러니 더더욱 컴컴한 곳으로 가긴 해야 하는데. 그렇다면 최소한 신변을 보호할 수 있는, 나에게 유리한 쪽으로 가야겠지.
‘선배가 위협이 되는 사람은 아니지만…….’
보험을 들어둬서 나쁠 건 없으니까.
“…숙소 뒤쪽에 공터 있어요. 저희 멤버들밖에 안 써요.”
“그럼 거기도 괜찮아요. 아, 은찬 씨 단 거 안 좋아했던 걸로 기억해서 적당히 샀는데. 좋아해요? 치즈 맛?”
“…….”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백무영 선배의 얼굴에는 밝은 미소가 감돌았다. 회귀한 이후 오랜만에 보는 것 같은 백무영 선배 특유의 그 잔잔하고 온화한 미소.
‘단 거 싫어하는 건 또 어떻게 아는 거야…….’
말한 적이 없잖아. 심지어 첫 만남 당시 바닐라라떼 얻어먹었을 때도 ‘전 아메리카노가 취향입니다’ 이런 소리 안 하고 감격스럽게 받아 마셨는데.
‘들킨 마당에 이제 연기할 생각 없다는 건가?’
입구에서 뒤쪽 공터까지의 거리가 얼마 되지 않는데도 그 잠시 동안의 공백이 어색해서 몸서리가 쳐졌다. 괜히 애꿎은 입술 안쪽 살만 연거푸 깨물었다.
‘오늘 하루가 왜 이렇게 긴 거냐고!’
잠은 이미 달아난 지 오래였다.
게다가 선배는 무슨 생각인진 모르겠지만 나를 찾아온 것에 어떠한 의도가 있는 듯했다. 그게 아니라면 저렇게 멀끔하게 차려입고, 향수까지 뿌린 채로 꾸미고 왔을 리가 없다. 내가 저 얼굴을 좋아한다는 건 저쪽에서도 너무 잘 알고 있을 테니까. 그리고 저쪽 의도대로 표정 관리가 어려웠다.
‘배우라 그런가 사람 심리 파악을 잘하신다니까.’
내가 알기 쉬운 사람이라 그런 것도 있겠지만.
“다시 인사드릴게요… 그런데 무슨 일로…….”
공터에 도착하자마자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확실히 전화로 내질렀을 때보다 얼굴을 마주 보고 있자니 냉랭하게 굴기가 힘들다. 시각적, 후각적 버프와 나긋한 목소리는 어떠한 마력이라도 있는 듯 느껴졌다. 백무영 선배를 아예 몰랐더라도 저 요소들만 가지고 호감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은찬 씨랑 그렇게 전화 끊은 게 좀 아쉬워서 그렇죠. 여기 앉아도 되나요?”
“아, 옷 더러워질 수도 있을 텐데. 제 셔츠라도 깔아드릴게요.”
“됐어요. 괜찮아요.”
백무영 선배는 비싸 보이는 옷을 걸치고 있는데도 공터의 턱에 망설임 없이 주저앉았다. 걸치고 있던 셔츠라도 벗어 깔아드리기 위해 깃을 잡고 있다가 멈칫했다. 씻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서걱거리는 뺨을 비볐다.
“그나저나 들키면 어쩌려고 이렇게 오셨어요… 아직 새벽도 아닌데.”
“어차피 제 몸도 아닌데 괜찮지 않나 싶네요. 그렇죠?”
이제 숨길 생각이 아예 없는 게 정답이었다. 그래도 적당히 돌려 말하실 줄 알았는데, 아주 직격탄이다. 비꼬기 위해 선물까지 사 들고 친히 강림하신 건 아닐 텐데.
“일은 하시잖아요. 워낙 유명하시고 배우로도 길 잘 트셨는데.”
“궁금한 게 있어서 왔어요.”
백무영 선배의 서론은 간결했다. 이제 인사말은 됐다는 듯 곧장 본론이 등장했다. 갈 곳을 방황하던 시선이 선배에게로 고정됐다. 선배는 재미있는 일이라도 발견한 듯, 눈을 휘어 접으며 방금보다도 한결 즐거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제가 누구일 것 같아요?”
“…그거 물어보러 여기까지 오셨어요?”
‘이렇게까지 직구로 질문이 날아올 줄은 몰랐는데…….’
당황스러움과 황당함, 그리고 경계심이 한데 뒤섞여 미묘한 표정을 만들어냈다. 그런 내 표정을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선배는 내 손을 붙잡고 지금껏 들고 있던 조각 케이크 상자를 내 손에 쥐여주었다. 그 광경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면서 어떤 답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러게. 누구냐고 내가 먼저 물었잖아.’
내가 던진 질문을 다시 되돌려받다니. 헛웃음이 튀어나올 것 같아 입술을 안쪽으로 말아 넣었다.
“누구신데요.”
내 동문서답에 선배는 답이 없었다. 절대로 먼저 말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리고 의외인 점은, 내가 정말 모르겠다는 듯 굴자 선배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는 점. 곧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왔지만 그 잠깐 사이의 모습은 꽤 상처를 받은 듯 보여 내 눈을 의심했다.
“……?”
여러 가능성을 추측해 보려고 했지만 도무지 그럴싸한 가정이 떠오르지 않았다.
’게다가 뮤직센터 MC 제안해 주셨을 때도 ‘하고 싶어 하지 않았냐’라고 했었지. 이건 회귀 후에 말한 적이 없어. 게다가 단 걸 안 좋아하는 것도 나를 평소에 알던 사람이나 알 수 있는 거고.’
팬들 앞에서는 굳이 이 부분에 대한 호불호를 밝힌 적이 없다. 아메리카노를 자주 먹는 모습 정도야 방송에 비쳤다지만 대놓고 ‘단 걸 싫어한다’라고 언급한 적은 없으니. 하지만 선배는 확신에 가까운 어투로 말씀하셨지. 이건 원래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나마 신빙성이 먼지만큼이라도 있는 가정을 하나 대보라면 편의점. 편의점만이 내가 유일하게 느꼈던 커넥터다.
‘편의점에서 내가 했던 행동을 정확히 알고 있긴 했는데.’
하지만 이도 애매하다. 그렇다면 선배가 죽었다는 뜻인가? 내가 회귀한 당일 날까지 멀쩡히 음악방송에 출연하던 선배가?
‘말도 안 돼.’
타이밍이 전혀 맞지 않는다. 게다가 그 편의점 알바생은 오디션을 보고 다녔다고 해도 끝내 데뷔하지 못했기에 백무영 선배와 일말의 연결 고리가 없다. 빙의를 하려면 어떤 조건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논리 중 맞지 않는 부분이 많기에 입 밖으로 낼 수가 없었다. 나조차도 납득이 안 되는 걸 남에게 설득을 시킬 순 없는 법이다.
일단은 의심 선상으로 올려두자.
“추워 보이는데, 제 셔츠라도 벗어드릴까요? 걸치면 덜 추울 텐데.”
“아니! 괜찮아요!”
눈앞으로 훅 다가온 선배의 얼굴에 화들짝 놀라 재빨리 상체를 옆으로 틀었다.
‘추운 게 아니라 스산한 겁니다.’
생각을 할수록 점점 미궁 속으로 빠진다. 게다가 내 옆의 존재가 누군지도 모른다. 여전히 따뜻하게 날 걱정하며 웃는 선배는 그동안 겪어왔던 선배가 맞는데, 이젠 계량이 불가할 정도의 거리감이 들었다.
‘MC 맡고 기뻐하는 내 모습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을지 궁금하네…….’
예상했던 전개라 즐거웠을까. 아니면 우스웠을까. 기분이 전혀 유쾌하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선배가 선물해 주셨던 고가의 목걸이가 떠올랐다.
“목걸이 선물은 무슨 의도로 주신 거예요?”
“그건 제 진심이었는데? 몰라주는 걸 보니 진심이 안 통했나 봐.”
선배의 얼굴이 확연하게 어두워졌다. 뒤이어 무거운 한숨 소리와 찌푸린 미간이 선배의 말을 뒷받침해 주었다. 내 묵주반지가 운과 관련 있는 걸 알고 있다면, 내 운을 고의적으로 떨어뜨리기 위해 그런 건가 싶었는데.
‘거기까진 모르는 건가?’
선배는 상체를 틀어 눈을 맞춰왔다. 도저히 저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마지못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 부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리저리 달싹거리던 발끝을 바라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아니지. 많은 액세서리 중 굳이 목걸이를 선물했을 이유가 없어. 우연의 일치라기엔…….’
너무 의심스러운 구석이 많잖아. 선배에겐 미안하지만 한번 쌓인 불신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더군다나 은찬은 사람을 대할 때 기본적으로 신뢰를 100으로 채워 바라보는 사람이었다. 거기서 차곡차곡 감점 요소를 쌓아 사람을 멀리하는 스타일이었고.
“흠흠.”
어깨를 으쓱하며 다시 한번 목을 가다듬었다.
“유감스럽네요. 은찬 씨를 아끼는 건 진심이에요.”
“아?”
“이렇게 되었으니 의심하는 것도 어쩔 수 없지만.”
선배는 온화했던 미소 대신 엷고 생각에 잠긴 미소로 표정을 대신했다. 그러고는 가볍게 자신의 두 손을 맞잡았다. 그 느리고 깊은 호흡이 여기까지 느껴지는 듯했다.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제 꿈을 지킬 수 있던 본보기는 선배였어요.”
“그거 감동이네.”
공기 속에 어색한 기류가 감돌았다. 선배가 어디까지 아는지는 모르겠다. 내가 회귀한 것도 아는지, 능력이 있는 것도 아는 건지.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접근한 거라면 아예 모르시진 않을 거다. 어쩌면 전부 알고 있을 수도 있고.
‘하…….’
입안이 씁쓸했다. 내 과거를 알고 있다면, 이제껏 나에게 그렇게 행동해서는 안 됐다. 그 세월을 버텨 나갈 수 있도록 한 지지대는 선배였으니까.
“놀라게 해서 미안해요. 이왕 들킨 거 더 가깝게 지내고 싶은데 친하게 굴어도 될까요?”
“엇…….”
선배가 눈을 천천히 깜빡이며 말했다. 그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곧장 답을 하지 못하고 바보같이 얼떨떨하게 얼버무렸다. 그때 숙소 입구 쪽에서 거친 발소리가 들리더니 점점 이쪽으로 가까워졌다. 동시에 현주인의 묵직한 목소리가 공터 내에 울렸다.
“유은찬!”
“뭐야… 안 잤어?”
와, 하마터면 분위기 타서 ‘당연하죠’ 하고 대답할 뻔했네. 하여튼 사람 홀리는 마법이라도 부리시는 건지, 또 홀랑 넘어갈 뻔했다. 현주인이 끊어주지 않았으면 말렸을지도 모르겠다.
“이번엔 또 무슨 일로 온 겁니까, 선배?”
“아, 맞다. 주인 씨는 단 거 좋아하지 않았나? 미안하네. 은찬 씨한테만 맞춰 사 와서. 나눠 먹을 수 있으려나?”
그 말에 현주인은 무어라 더 말을 하려는 듯 입을 반쯤 벌렸다 짜증스럽게 얼굴을 구기며 동시에 입을 팍 닫아버렸다. 손가락 마디에 핏기가 가실 정도로 꽉 움켜쥐는 현주인의 손을 내려다보던 선배가 물었다.
“왜, 제가 해라도 끼칠 것 같아요?”
현주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너무 날 세우는 것 같아요, 주인 씨. 꼭 은찬 씨 개새끼라도 되는 것같이 구네.”
“…이 미친 새끼가……!”
“뭐야? 야! 욕하지 마. 미쳤냐?”
격양된 어조의 현주인이 성큼 앞으로 다가서려고 할 때였다. 급히 몸을 던져 그 앞을 틀어막으며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러자 놈은 창백하게 쓴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