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see hearts in failed idol’s eyes RAW novel - Chapter 167
167. 신뢰(3)
“너 같은 애도 가족을 생각하는 마음이 크긴 하구나?”
“이 새끼는 말을 하려고 하면 꼭…….”
“아, 알겠어, 알겠어. 농담도 못 하냐?”
“…….”
분위기가 너무 무거워졌나 싶어 좀 가볍게 쇄신시켜 보고자 꺼낸 건데, 그런 내 속뜻을 몰라주다니.
‘조금 섭섭한걸.’
아무튼 웃음으로 적당히 넘겼다. 현주인은 언짢아진 표정으로 고개를 두어 번 내젓더니 다물었던 입을 찬찬히 열었다.
“그 속에 들어찬 놈도 나와 그 인간이 가족관계인지는 몰랐겠지.”
‘주어 좀 제대로 지칭해 주면 안되겠니’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얼핏 들으면 누군지 바로 못 알아듣겠잖아.
“야, 그야 당…….”
“대외적으로 말을 한 적이 없으니 아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거든. 하는 꼴 보니까 빙의했다고 본체의 기억까지 받지는 못한 모양이고.”
‘연하지.’
현주인이 말을 잇지 않았다면 아마 꺼냈을지도. 놈이 말을 이을 수 있도록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하긴 나도 전혀 몰랐으니까…….”
현주인의 말은 일리가 있다. 백무영 선배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던 나조차 시간이 지날수록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했으니까. 만약 빙의된 놈에게 진짜 백무영 선배의 기억이 승계되었다면 내가 그 작은 균열들을 눈치챌 수 없었을 것이다.
“연기력 하나는 기가 막힌 놈이잖아.”
하지만 연기력으로도 커버할 수 없는 것들도 많은 법이지. 눈치로 습득 가능한 범위는 한계적이니 말이다.
현주인도 내 말의 속뜻을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현주인이 백무영 선배 얘기만 나오면 예민하게 반응했던 이유가 있었네.’
하긴 타인에게 무관심한 놈이 그렇게 사사건건 예민한 반응을 보였던 모든 행동에 이유가 없을 리가 없지. 이제야 모든 퍼즐들이 들뜸 없이 딱딱 맞춰진다.
웬 양심 없는 인간이 자신의 가족 행세를 하고 있다. 거기서 그치는 게 아니라 동료인 나까지도 위협을 하고 있다.
‘더군다나 현주인의 입장에서는 제 형의 이미지를 갉아먹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을 테니 더더욱 마주칠 때마다 꼴 보기 싫었을 테지…….’
내가 백무영 선배에 대해 언급할 때마다 못 볼 것 보고, 못 들을 것 들은 것처럼 싫어하던 것도 납득이 된다. 마음 한구석에서는 작은 물음표가 떠올랐지만.
“근데 왜 나한텐 말 안 해줬냐?”
납득이 된다는 말은 당위성은 있지만 정당성까지 있다는 뜻은 아니다. 서운한 마음이 고개를 추켜드는 것은 어찌할 수 없었다.
‘그래도 같은 배를 탔다고까지 얘기하지 않았나…….’
이럴 때마다 나만 파트너로 신뢰하고 있었던 건 아닌가 싶다. 현자 타임이 온다고 해야 하나.
“이런 것까지 얘기해야 하나?”
“난 지금까지 너한테 숨긴 거 없는데…….”
게다가 놈이 한 말에 서운함은 더더욱 커졌다. 제일 친한 친구까지는 못 되어도 믿을 수 있는 파트너의 위치 정도는 된다고 생각했는데, 나만의 착각이었나 싶어질 정도로.
“하긴 가족관계는 말하기 꺼려졌을 수 있지. 이해해.”
이해한다는 말을 하긴 했지만 영 속이 개운치는 못했다. 그 감정이 표정에 드러난 건지 현주인은 슬쩍 내 눈치를 보더니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뒷목을 매만지는 것이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보였다.
“…미안.”
머뭇거리던 놈이 겨우 내뱉은 건 사과.
‘…오호?’
하긴 현주인의 사과와 인정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나긴 했다. 놈에게는 엄청난 발전이고 신뢰의 표현이었다. 절대 신뢰를 받을 수 없을 것 같던 사람에게 인정을 받게 된 기분은 역시 나쁘지 않았다.
‘감정 변화 한번 빠르구만.’
저놈 사과 한마디에 서운했던 마음이 씻은 듯이 사라지다니. 내가 생각해도 웃기긴 한지 웃음이 큭큭 삐져나왔다. 손등으로 입가를 막자 웃음소리가 막힌 듯이 울렸다.
“너 사과도 할 줄 아네?”
킥킥거리며 현주인 쪽을 쳐다보았다. 놈은 민망한 건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마른 입술을 축이는 것을 보아하니 대화 주제를 돌릴 심산인 것 같았다.
“…아무튼 그 인간은 어디에 간 건지 뒤진 건지 알 수가 없네.”
역시나. 내가 꺼냈던 말과는 전혀 연관 없는 대답이다. 어찌 됐든 본론으로 돌아간 게 맞긴 하니, 말 돌리는 것도 수준급이지.
그런데 ‘그 인간’이라니. 방금 전에 주어를 명확하게 해달라고 한 것 같은데, 역시 놈은 듣고 싶은 말만 골라 듣는다.
‘진짜 백무영 선배 얘기겠지.’
다시금 요점으로 돌아온 대화에 생각이 차분해졌다. 하긴 ‘진짜 백무영’의 행방은 현주인의 입장에서 가장 신경 쓰이는 주제일 터다.
“나 혼자 알아보려 하긴 했었는데 도움이 되진 않았어.”
그리고 그를 증명이라도 하듯 급격히 표정이 차분해졌다. 꿈틀거리던 눈썹이 일자로 고정된 모습을 몇 번 눈길로 훔쳐보다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현주인의 집념과 돈이면 사방팔방으로 알아보았을 텐데, 지금껏 단서 하나 찾지 못한 모양이니…….’
나도 회귀한 것이기에 빙의한 자의 본체가 어디로 갔는지는 전혀 알 수 없다. 아마 현주인이 말을 꺼내지 않았다면 평생 관심 없었거나 생각도 해보지 않았을 확률이 높다. 그렇게 백무영 선배의 팬임을 자처하고 다녔는데도.
‘나름대로 선배의 껍데기뿐만 아니라 진짜 모습 또한 많이 좋아하는 팬이라고 생각했건만.’
입가 한구석에서 씁쓸함이 느껴졌다. 나와 진짜 백무영 선배가 아님을 알아챘을 때부터 현주인은 이런 불편한 기분을 계속해서 느껴왔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놈의 착잡한 마음이 십분 이해되는 것 같기도 하네… 적극적으로 대화하거나 도움을 구하는 놈도 아니니 얼마나 답답했을지 짐작조차 안 돼.’
그렇다면 현주인은, 동료였던 나의 회귀와 가까운 가족이 다른 존재로 빙의된 두 가지 경우를 모두 겪은 것이지 않나.
“…….”
현주인은 어딘가 생각이 많아진 듯 보였다.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만 좋으라고 회귀시킨 게 아닌가 보네. 역시 현주인도 연루된 이유가 있었어.’
현주인이 나처럼 반지나 시스템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지는 않지만, 회귀자로서 내 곁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 초반에는 내가 자신과 같은 회귀자임을 알고 있었음에도 쌀쌀맞게 굴었던 이유. 시간이 지날수록 나에게 믿음을 드러낸 이유.
“우리 둘 다 그래도 예전과는 많이 달라진 것 같네.”
답은 신뢰다.
이번 삶에서는 다양한 부분에서의 신뢰를 쌓아가는 것이 목표이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이 호감도 시스템 또한 기본적으로 ‘신뢰’를 기반으로 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가. 사람에게 호감이 느껴진다는 것은 마음 한구석에 신뢰가 없다면 생길 수 없는 감정이기도 하다. 특히 그저 애정도만으로 나오는 수치라기에는 가끔 이해되지 않는 값들이 존재했던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인 듯했다.
‘간만에 현주인 호감도나 확인해 볼까?’
오늘은 병원에만 있을 것 같으니 호감도 확인 횟수 1회 정도는 지금 사용해도 될 것 같았다. 호감도 확인을 위해 속으로 살짝 되뇌자, 높은 숫자와 함께 호감도가 등장했다. 하마터면 입을 와- 하고 벌릴 정도로.
‘와…….’
[ ♡ + 60% ] [ system : 금일 호감도 열람 가능 횟수 (4/5) ]현주인에게서 떴다고는 믿을 수 없는 수치. 잠시 칠월칠석으로 있던 동안 확인했던 현주인의 호감도는 심지어 마이너스이지 않았나. 심히 감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쾅-
…감동에 잠기려던 찰나, 거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큰 목소리가 병실 내부를 쩌렁쩌렁하게 채웠다. 그리고 여러 명의 발소리가 이어졌다.
“은찬아, 잘 쉬었… 응? 주인이?”
“안녕하세요.”
“어디 갔나 했더니 여기 있었냐!”
매니저 형의 등장이었다. 성격답게 요란한 등장에 감성에 젖어 있던 기분이 와장창 깨져 버렸다. 매니저 형은 병실 안에 나만 있는 줄 알았는지 문을 열고는 나와 현주인을 번갈아 쳐다보고는 뒤늦게 반색했다.
“…….”
“요놈, 말을 하고 움직이란 말이야~ 아까 형이 얼마나 깜짝 놀랐는지 아냐? 연락 한 통 하면 다야?”
확실히 칠월칠석 시절을 겪고 와보니 이 모든 광경이 감회가 새롭다. 그때라면 이렇게 구는 매니저 형을 받아줄 성격의 현주인이 아니거니와, 애초에 매니저 형 존재 자체가 없었으니까. 게다가 발끈하지 않고 형을 한 번 흘겨볼 뿐인 현주인의 대처 또한 놀람을 금치 않을 수 없었다.
“…다음부터는 유의하겠습니다.”
이것 또한. 인정하고 사과할 줄 아는 현주인을 이번 생에 보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니까.
‘아, 회귀했으니 이번 생은 아닌가?’
별 실없는 생각이 다 드는 걸 보니 매니저 형의 등장으로 머리가 환기되고 있긴 한가 보다.
곧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여러 사람이 웅성거리는 소리 또한 들리는 것을 보니 매니저 형 혼자 온 게 아닌 모양이었다. 아까 들렸던 발소리의 정체인 듯싶었다.
“애들도 몇 명 데려왔지, 내가. 시간 안 맞는 이선이 빼고는 다 왔다, 은찬아.”
‘이선이?’
개인 스케줄이 겹친 건가. 어쩔 수 없지- 하며 입술을 한 번 축이곤 고개를 들어 문 쪽을 바라보았다. 매니저 형의 말대로 문 앞에 멤버들이 쭈뼛거리며 서 있었다. 가만히 서 있던 멤버들은 나와 눈이 마주치고 나서야 안쪽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빨리 퇴원해야 하니까 병문안 선물은 없어, 형!”
활짝 웃으며 양손을 흔드는 별이와,
“숙소 가면 형 먹고 싶은 음식 해줄게.”
근심 걱정 가득한 얼굴로 나를 빤히 쳐다보는 가을이,
“…하아.”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며 시선을 피하는 주혁이와,
“…걱정했잖아.”
내 상태를 확인했으니 됐다는 듯이 재빨리 발길을 돌리는 리온이까지. 나름 쓰러졌다고 마음까지 약해진 모양인지 속에서 무언가 울컥거렸다. 뭐라도 말을 해야 하는데, 지금은 제대로 된 말이 안 나올 것 같아 입술 안쪽 여린 살만 연거푸 깨물다 찬찬히 입을 열었다.
“걱정 끼쳐서 미안해.”
문 밖을 나선 리온이에게까지 들릴 정도로 제법 큰 목소리로 말했다. 발소리가 멈춘 것을 보니 다행히 들은 모양이었다.
“그러게 형이 밥 좀 잘 챙겨 먹으라고 했지? 너 그러다 피골이 상접한다, 은찬아. 네가 지금 젊어서 잘 모르는 것 같은데…….”
“그런 말씀 하시기엔 형도 젊은데~?”
“요 어린 게 까불어. 너 계속 그러면 곧 관절도 아프고 성한 곳이 없을 거야. 가을아, 얘 좀 멕여라, 엉?”
“그래야죠.”
가을이는 나를 살짝 흘겨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항상 밥 먹으라던 가을이의 말을 그냥 넘겼기에, 지금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이미 형 나이대를 살아봤다고 말할 수도 없고.’
뒤통수만 멋쩍게 긁적이고 있자 매니저 형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손을 털었다. 잠깐 멤버들을 데리고 얼굴도장만 찍으러 온 모양인 듯했다.
“우리는 이만 가볼게, 얼굴 봤으니 됐다. 요놈들도 다 네 얼굴 보러 온 거야. 잠깐 들른 거라고.”
“진짜?”
하긴 각자 스케줄이 다르니 시간을 맞추기도 힘들었을 거다. 바쁜 시간을 쪼개 얼굴을 보러 와준 멤버들을 향해 환히 웃었다. 몇몇 애들은 부끄러운지 고개를 숙이거나, 휙 돌려 내 시선을 피했다. 걱정스러운 표정을 들키기 싫어서인 듯 귓가는 이미 벌게져 있었다.
“주인이는 안 가?”
“전 차 끌고 와서 좀 이따 갈게요.”
“부럽… 아니, 이게 아니고. 알겠어. 나오면 연락해라.”
“네.”
현주인은 망부석처럼 자리 잡은 침대 끝자락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놈도 같이 갈 줄 알았는데, 아직 할 말이 남은 건가.
“너는 왜 안 가냐? 나 좀 쉬자.”
장난스럽게 말을 건네자 현주인은 못마땅한 듯 혀를 차며 나를 슥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