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see hearts in failed idol’s eyes RAW novel - Chapter 170
170. 신뢰(6)
‘…뭔 생각을 저렇게 해?’
어차피 내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인데 놈이 생각 정리를 할 필요성이 뭐가 있나. 내 추론에 따른 결론을 전달해 주는 것뿐이니 그냥 수용하면 될 것을 놈은 제 나름대로 정리를 거치지 않으면 납득이 힘든 것만 같았다. 하긴 다양한 상황을 겪었음에도 본성격이 워낙 현실적인 놈이니 납득 과정이 필요할 수밖에 없겠지만.
‘그래도 듣는 놈이 진지하긴 해서 말한 보람은 있네.’
명확한 단어로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기묘해진 기분에 이불 끝자락만 열심히 사부작거렸다. 나는 사뭇 진지해진 놈을 바라보았다.
“음…….”
저렇게 진지한 표정의 놈을 보고 있자니 이 중요한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내가 조금 한심해졌다. 마치 퍼즐처럼 여러 단서가 없으면 깨닫기 어려운 사실임을 머리로는 알고 있다. 그렇지만.
‘왜 잊고 있었을까, 이걸?’
스멀스멀 몰려오는 자책감 또한 어쩔 수 없었다. 내 인생에서 제일 중요하고, 가장 커다란 실마리며 퍼즐 조각인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던 셈이니. 이 사실만 진작 떠올렸다면, 운과 반지의 출처가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명확히 알았다면, 할머니와 엄마를 조금 더 자주 생각했다면.
‘그럼 지금쯤 어땠을까? 칠월칠석 시절까지 다녀오지 않았어도 백무영이나 나에 대해 빨리 깨닫고 보다 현명한 대처를 했을까?’
수많은 ‘만약’이 머릿속을 채웠다. 얼마나 답답했으면 나를 이전 삶까지 보내셨겠는가?
“하…….”
자책감이 물밀듯 밀려왔다. 그 생각만 하면 내가 바보 같아 절로 한숨이 터져 나왔다. 뒤이어 끙끙 앓는 소리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으아아…….”
이미 지나간 일, 엎질러진 물을 후회해 봤자 남는 건 없음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 사부작거리던 이불자락을 꽉 쥐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나의 새된 소리가 동시에 적막을 깨뜨렸다. 동시에 현주인의 못마땅한 듯한 혀를 차는 소리와 함께.
“…뭐야?”
그런 놈의 반응을 뒤로하고 허리춤에 내려와 있던 이불을 확 머리끝까지 잡아당겨 뒤집어썼다. 이렇게라도 분리되어 있지 않으면 부끄러움에 아마 얼굴이 홍당무가 됐을 게 분명했다. 현주인에게 그런 쪽팔리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지.
“잠시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해…….”
푹 뒤집어쓴 이불 속에서 눈만 열심히 끔뻑였다. 현주인이 앉아 있던 덕에 내려앉아 있던 침대 끝 쪽에서 반동이 느껴졌다.
‘왜 일어나?’
놈이 몸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자각함과 동시에 한심함이 그득 묻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가주랴?”
“그건 아냐.”
그냥 가만히 기다려 주기만 하면 되는 건데, 역시 현주인에게 너무 많은 걸 바랐군.
‘이럴 때만 쓸데없이 눈치 빠르게 행동하지.’
평소에는 눈치가 빨라도 몸은 꿈쩍 않던 놈인데, 웬일로 엉덩이가 가벼워진 건지. 뭐가 됐든 대화가 끝난 것도 아닌 마당에 홀로 남겨지는 걸 원했던 것은 아니다. 이불 속에서 팔만 뻗어 밖으로 휘휘 내저었다.
“마음에도 없는 말은 왜 하냐?”
“그러게…….”
손끝에 놈의 옷자락이 잡혀 슬쩍 쥐었다 놓았다.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몸을 일으켰던 놈이 다시 근처로 온 모양이었다. 침대도 다시 내려앉은 것을 보니.
“그래도 그건 네가 전문가잖아.”
“진짜 간다.”
“아, 어디 가.”
“꼴깝을 떤다. 정신 차려. 귀찮게 굴지 말고.”
“그렇지만…….”
놈의 커다란 한숨 소리가 방 안을 메웠다. 일부러 더 들으라고 한숨을 쉬는 것처럼 쩌렁쩌렁하게.
‘좀 귀찮게 굴긴 했지.’
하지만 마음이 약해져 있으니 어리광 좀 부릴 수도 있는 거 아닌가. 무작정 버티는 것보다는 어느 정도 의지하는 게 좋다는 것도 배웠으니. 서로 의지하기로 하기도 했으니까. 물론 과하게 기대는 것은 금물이지만.
‘조금 서운하네…….’
몸도 대외적으로는 한번 쓰러진 상태여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그게 마음에까지 영향을 미친 듯했다. 왜, 몸이 아프면 마음도 약해진다고들 하지 않는가. 그 말의 증거나 다름없었다, 지금의 내 상태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일인데도 서운하다니. 그래서인지 목소리도 영 명쾌하게 나오지 못했다.
“너 무슨 생각 했어?”
“생각 정리.”
“그렇겠지…….”
일단 내 질문의 의도는 생각 정리를 하면서 무슨 의견을 도출했냐- 였는데. 틀린 답변도 아니긴 하니 더 얹을 말은 없다.
“깜짝이야……!”
“무슨 생각 했을 것 같은데?”
갑자기 눈 사이로 들어오는 빛에 반사적으로 눈을 찌푸렸다. 현주인이 이불을 확 걷어버렸다. 그것도 뜬금없이 훅 들어오는 질문과 함께. 예상치 못했던 상황이라 정신이 멍했다.
“…나 한심하다는 생각?”
“왜?”
“조금만 진지하게 생각해 봤으면 금방 유추할 수 있는 문제였을 수도 있는데 이제껏 질질 끌어왔으니까.”
“자기비관적이네.”
‘나 혹시 면접 보는 중인가?’
분명히 먼저 질문한 건 나인데 어째 추궁당하는 것도 나인 것 같지. 기껏 이 복잡한 심정을 쪽팔림을 감수하고 말로 풀이해 전달까지 했는데도 돌아오는 대답은 날카롭기 짝이 없었다.
‘자기비관적이라니… 현주인다우면서도 색다른 대답이네.’
놈이라면 당연히 그렇겠지, 라든가 웬일로 맞는 말을 하네, 라든가 그러게 진작에 생각을 해보지- 같은 대답을 내놓을 줄 알았다. 솔직히 자기비관적이라고 비난하는 어투도 충분히 현주인의 화법이긴 하지만 지금 내 말에 대한 대답이라곤 걸맞지 않는달까.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
“틀린 생각이야.”
“어?”
“너라고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지. 아이돌로 활동하는 건 회귀 덕에 2회차라고는 해도 회귀라는 상황 자체는 처음 겪는 거고.”
‘회귀…….’
고개가 끄덕여졌다. 직접 회귀라는 단어를 입 밖으로 내지 못해 대놓고 공감은 못 하지만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매번 2회차 인생이라는 생각에 더 잘해야 한다는 생각만 했지, 처음이라는 생각은 못 해봤네.’
물론 회귀를 하기 전엔 다시 살아볼 수 있을 거란 생각 자체를 해본 적이 없긴 했다. 그런 경험담은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었으니까. 실제로 겪은 후에도 판타지 세상 속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이 내게 일어났다고 여겼다.
“이게 일반적인 상황은 아니니 교본이 될 만한 것을 삼아 배울 수도 없는 거고. 모를 수밖에 없는 게 당연한 거니 그 비관적인 생각은 틀려먹었어.”
“어…….”
현주인이 그렇게 말을 끝마쳤다. 결론은 내 비관적인 생각이 틀렸다는 말이었지만 나는 그 말을 여러 번 곱씹었다.
모를 수밖에 없는 게 당연하니 비관적일 필요가 없다.
당연한 말이지만 전혀 당연하지 않았다. 전혀 따뜻한 말투가 아니었지만 지금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이었는지 상당한 위로가 되었다. 나도 같은 상황에서 저것보다 날카롭고 현실적인 위로를 건넬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아, 물론 말투는 틀려먹었지만.
“마냥 머리 꽃밭인 것처럼 2회차를 사는 게 아니라 주어진 미션들이 있잖아. 정신이 없을 법도 하지.”
“…….”
그래서 바보처럼 놈의 얼굴만 바라보며 눈만 끔뻑였다. 그래서 금붕어처럼 10초 정도 눈을 천천히 감았다가 떴다. 적절한 감사의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뭘 내뱉어도 저놈의 위로에 미치지는 못할 것만 같았다.
“고, 고맙다……?”
“이제라도 알아서 다행이네. 퍼즐을 맞춰서.”
간결한 인사마저 더듬었는데도, 이번엔 놈의 지적이 날아들지 않았다. 현주인은 헛숨을 한 번 들이켜더니 제 뒷머리를 살살 털어댔다. 그러고는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러면 수술을 할 때 운을 다 사용한 건가.”
“어.”
“조금만 모자랐어도 애초에 여기 없었겠군.”
아까 말했던 사실을 다시 한번 언급한다 싶더니 대답하기 민망한 소리를 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어쩐지 내가 대꾸하기도 어려운 말.
‘하긴 운이 다 소진된 걸 보면 0.5개만 모자랐어도 엄마랑 같이 있었을 수도 있겠지…….’
어린 몸에 워낙 큰 수술이었을 테니까. 의학이 잘 발달되어 있기는 해도 수술 상황에 따라 다른 거니 충분히 일어날 법한 일이다.
‘감사하다.’
왜 운을 다 써가면서까지 나를 살렸는가에 대한 의심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삶을 비관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내가 할 말이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 당시에도 ‘그냥 그때 죽게 내버려 두지, 운을 써가며 굳이 살렸다.’라든가 ‘애초에 꾸역꾸역 이어나간 삶.’ 같은 생각까진 안 한 걸 보면…….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고 싶어 하셨다는 것.
그 사실 하나만큼은 선연하게 내게 느껴진다. 그리고 나를 회귀시켜 주실 때에도 그런 마음이셨겠지. 나에게 두 번의 삶을 부여해 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현주인도…….’
그런 마음으로 나를 여기 보내셨을 텐데, 현주인도 아무 이유 없이 보냈을 리가 없겠다 싶었다. 아무리 백무영이 중요하다고 해도 나도 연관이 있을 터이니 놈도 꽤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이제는 진심으로 현주인까지 입을 열어주기를 바랐다.
“너…….”
‘안 피곤해?’
하고 운이라도 떼볼까 싶었는데, 현주인이 먼저 자세를 고쳐 잡았다. 끝 쪽에 어정쩡하게 걸터앉아 있던 놈은 한 발짝 가까이 내 쪽으로 엉덩이를 옮기며 나와 거리를 좁혔다. 그러고는 나를 지그시 내려다보다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문밖과 방 안은 고요했다.
“사람 없나?”
“감사하게도 1인실을 사용하게 해주셔서.”
“방음은?”
“그건 잘 모르겠는데. 왜?”
“백무영과의 이야기를 해줘야 될 것 같아서.”
마치 놈과 마음 공유라도 한 것 같았다. 나 지금 마인드 컨트롤이나 속마음 확인 같은 건 일절 사용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딱 생각하던 말을 내뱉었지?
“어?”
너무 뜻밖이었다. 현주인이 직접 입 밖으로 꺼낼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고 놈과 생각이 통할 줄은 더더욱 몰랐다. 퍼즐이 맞춰진 것뿐만 아니라 무언가 꼬여 있던 실타래들이 풀리기 시작하는 것만 같았다.
“마침 조용하긴 해.”
기재되어 있는 투약 시간이나 식사 시간, 그리고 시계를 바라봐도 다행히 의사나 간호사가 방문할 시간이 아니었다. 내가 병문안을 온 멤버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고 여길 테니 함부로 문을 열 일 또한 없을 것이다. 그것은 지금이 이 중요한 이야기를 듣기 딱 적절한 타이밍이라는 뜻.
‘아마 현주인도 이런 걸 다 고려했겠지?’
워낙 철저한 놈이니 이야기를 나누기 전부터 이런 걸 고려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나는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갔다.
“나도 비밀을 만들 수는 없잖아. 기브앤테이크, 몰라?”
그걸 아는 놈이 회귀 전에 그렇게 행동했나, 싶은 생각이 머리를 확 스쳐 갔다. 물론 지금의 현주인은 그런 놈이 아니지만 워낙 이전 삶의 성격이 강렬했기 때문에 대비될 수밖에. 그래도 이런 상황에서 ‘너는 테이크만 아는 줄 알았는데’라고 말할 순 없지.
“말해줬으면 좋겠어.”
현주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