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see hearts in failed idol’s eyes RAW novel - Chapter 33
33. 사고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3)
‘아집’과 ‘무시’를 싫어하신다고 했으니 몰아붙이는 느낌을 받게 해서는 안 된다. 그러니 일단은.
‘대표님의 의견에 동조하는 게 우선이야.’
저 말도 안 되는 고집에 표면적으로라도 백번 동의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그 후에 팬들끼리 분란이 생기지 않게 하고 하이틴 컨셉으로 확정시킬 방법까지도.
“듣다 보니 대표님 말씀도 일리가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저랑 가을이가 3시간 안에 다른 컨셉 하나 추려 올게요!”
“응?”
“저희 그동안 선배님들 무대 모니터링하면서 해보고 싶은 컨셉 많이 생각해 뒀거든요.”
생전 처음 듣는 소리라는 듯 가을이 눈을 크게 떴다. 은찬은 대표님이 눈치채기 전에 그런 가을의 허벅지를 툭툭 건드렸다. 가만히 있어보라는 뜻으로.
“그럴래? 그럼 나가서 의견 좀 모아 와. 나도 볼일 있으니까.”
“네! 대표님, 감사합니다! 기가 막힌 거 하나 골라 오겠습니다!”
대표님의 동의가 떨어지자마자 은찬은 재빨리 가을의 손목을 붙잡고 세미나실을 나왔다. 그제야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우리가 어떤 걸 생각해 뒀는데? 형 맨날 소년미 무대만 돌려 봤잖아…….”
“당연히 지금부터 생각해 봐야지.”
“뭐?”
설마설마했던 최악의 경우가 목전이기는 해도 막을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함정 카드지.’
즉, 대표님 취향에 맞는 컨셉을 가져가면 된다. 그렇다면 어차피 투표를 붙인다 해도 팬들이 그걸 뽑을 리는 없을 테니까.
“가장 구리고 최악인 걸로!”
칠월칠석으로 활동하며 대표님의 취향은 뼛속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는 은찬이다. 오죽하면 ‘마이너스의 손’이라고 불렸던 대표님 특유의 마이너틱하고, 촌스러우며 10년 정도는 퇴보해 있는 것 같은 취향을 다 꿰고 있다 이거다.
“설명 좀 해줘. 무슨 말이야, 그게? 어차피 형 말 들을 거긴 하지만…….”
“가을아, 너도 투표는 좀 아니라고 생각하지?”
“어? 응.”
“나한테 다 방법이 있어. 일단 리온이부터 데리러 가자.”
가을은 단언하는 은찬에게 미묘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그 뒤를 착실히 따랐다. 꽉 잡힌 손목도 딱히 뿌리칠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로.
‘아마 그 하이틴 컨셉이라던 타이틀곡, 리온이 자작곡일 거야.’
회귀 전에는 대표님 픽에 밀려 수록곡에 머물렀던 그 곡.
우리 회사 A&R팀의 능력이 좋은 편은 아니었으니, 이 시기에 타이틀곡으로 선정될 만한 청량한 곡이라면 리온이 곡 말곤 딱히 없을 것이다. 그리고 컴백과 관련해서는 대표님이 입단속을 시키셨던 만큼, 다른 사람은 몰라도 리온이는 타이틀곡에 관련된 사항을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 리온이를 찾아가는 게 우선이었다. 당사자에게 물어보는 것만큼 정확한 방법은 없으니까.
그나저나 대표님부터가 고집이 장난 아니신데 싫어하는 게 아집이라니.
‘사람이야 모순적인 존재라고는 하지만 대표님은… 그 정도면 동족 혐오 아니신가?’
어찌 됐든 힌트는 얻었으니 다행이지만.
리온이가 있는 연습실 앞에 도착한 은찬은 예의상 두 번 정도 노크를 했다. 아니나 다를까 안쪽에선 답이 없었고. 하지만 3시간이라는 제한이 있는 상황이니만큼 안에서 문이 열릴 때까지 마냥 기다릴 순 없었다. 은찬은 들어간다는 말을 내뱉고선 그대로 조심스레 연습실 문을 열었다. 바로 보이는 리온의 뒷모습이 흠칫 떨렸다.
“리온아! 나가자!”
“…갑자기요? 저 바빠요.”
“젤리 이만큼 사줄게, 한 번만. 너 없으면 안 돼. 응?”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질색하는 리온에게 은찬이 양팔을 쭉 뻗어 보였다.
“…형은 무슨 제가 무슨 아직도 애인 줄… 하아, 알겠어요.”
리온은 그런 은찬의 행동에 잠시 생각을 하는 듯 말이 없다가, 작게 한숨을 내뱉고 헤드셋을 벗어 책상 위에 올렸다. 저건 작업 그만하고 나오겠다는 뜻이다. 그래도 몇 번 튕길 줄 알았는데 다행이었다.
리온은 곧장 안색이 확 밝아지는 은찬의 표정을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앓는 소리를 내며 스트레칭을 하는 리온은 표정에서부터 귀찮다는 티를 팍팍 내고 있었지만 그래도 싫단 소리는 안 했다.
“뭐 때문에 그래요?”
“우리 하이틴 컨셉으로 컴백한다는 거… 유출된 것 같던데 알고 있어?”
“뭐… 네, 모를 수가 없지 않나요.”
“이왕 상황이 이렇게 된 거 그걸 이용하자. 대표님은 지금 어그로라도 끌어서 화제성 가져올 작정으로 다른 컨셉 하나 추가하고 타이틀곡 투표 진행하실 생각이시거든? 근데 나는 하이틴 컨셉이 좋을 것 같아서. 그러니까 팬들 사이의 분란을 최소화할 수 있게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구린 곡을…….”
“잠깐만요. 타이틀곡 투표를 진행한다고 하셨다고요?”
잠자코 은찬의 말을 경청하던 리온의 표정이 종잇장처럼 일그러졌다. 그리고 굉장히 불쾌하다는 듯 언성을 높였다. 갑작스러운 리온의 반응에 은찬도 조금 당황해 입을 다물고 고개만 위아래로 끄덕였다.
“저번 회의에서 제 곡 쓰기로 결정 다 됐는데, 왜 그런 짓을 하시지?”
하긴 당장 어젯밤에 벌어진 일이니 이게 회사 내부에 잘 전달되었을 리가 없다. 진지하게 회의해서 나온 방안은 아닌 것 같은 데다 대표님도 이르면 어젯밤, 늦으면 오늘 아침에서야 정하신 것 같아 보였으니.
‘나도 경악스러운데 당사자 심정은 어떨지 짐작도 안 가네.’
더군다나 타이틀곡의 작곡가인 리온의 입장에서는 더더욱 기분 나쁠 수밖에. 갑자기 줬다 뺏는 거잖아. 충분히 화날 만하지. 백 번 천 번 이해 간다.
“아… 좀 짜증 나려고 하는데.”
은찬은 대답 대신 표정으로 리온의 심정에 공감했다. 그치, 리온아. 형도 듣고 어이가 없더라. 그러니까 같이 대표님 의견을 꺾어드리는 거야.
연신 긴 머리를 쓸어 넘기며 인상을 찌푸리던 리온이 은찬의 눈을 마주 보았다.
“협력할게요. 이건 저도 기분 나쁘니까.”
리온이 회사에 입사했던 중학생 시절부터 6년 내내 지켜보았지만. 얘가 이 정도로 감정을 드러낸 건 처음이다. 지금 리온의 눈에서는 어떤 기운이 발산되는 중이었다. 꼭 사람 하나 쓱싹할 것 같네…….
‘뭐, 오히려 다행인 건가.’
든든한 지원군이 생긴 격이 되었으니까. 우리가 대표님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면 대중들이 그 고집을 꺾게끔 만들면 된다.
그리고 객관적으로 봐도 리온의 곡은 너무 좋아서 도저히 버릴 수 없는 카드였다.
칠월칠석 때도 이상한 컨셉 탓에 그룹 자체로는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지만 리온의 곡은 달랐다. 소위 케이팝 고인물들 사이에서 ‘숨어 듣는 명곡’으로 불리기도 했으니까. 어느 순간부터 리온이는 작곡가로 더 잘되기도 했고.
“…….”
조용히 책상을 갈무리하던 리온이 서랍 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조그만 카드 키였다.
“근처에 제 개인 작업실 있으니까 거기 가서 얘기해요. 택시 타면 10분이면 될 거예요.”
“개인 작업실?”
“네, 부모님이 하나 마련하라고 하셔서.”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가을이와 시선이 마주쳤다. 부모님이 해외에 나가 있어 홀로 자취하다 숙소로 들어왔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는데, 과연 달라도 뭔가 달랐다.
‘그런데 전에도 리온이한테 개인 작업실이 있었나?’
내가 알기로 회귀 전에는 없었던 것 같은데. 어쩌면 리온이가 우리에게 말을 안 해준 채 들락거렸던 걸 수도 있고. 어찌 됐든 상황이 전과 다르다는 사실 하나만큼은 분명하다.
‘하긴 그땐 이런 투표도 없었지.’
대표님이 고른 곡이 타이틀곡이었고 리온이 곡은 수록곡에나 겨우 실렸으니까. 이게 좋은 쪽의 변화인지 나쁜 쪽의 변화인지는 내 손에 달렸겠지. 뭐가 어떻게 되든 우리 제네시스의 성공만큼은 포기할 수 없다.
***
“들어와요.”
“실례합니다.”
“실례하겠습니다…….”
리온의 개인 공간에 발을 들인다는 생각에 평소보다 더욱 어깨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방 안에는 작곡을 위한 여러 가지 기기가 깔끔하게 늘어져 있었다. 정리와 규칙을 좋아하는 리온이다웠다.
“좀 더러운데 일단 아무 데나 앉으세요. 시간 없으니까 빨리 하죠.”
오는 동안 주어진 시간이 3시간밖에 없다는 것과, 대강의 상황을 설명했다. 아까까지 잠자코 듣고만 있던 리온은 작업실 안에 들어오자마자 테이블을 분주하게 세팅하며 은찬과 가을을 앉혔다.
“형, 혹시 계획해 둔 건 있어요?”
“맞아. 설명해 준다며.”
“음, 그러니까…….”
은찬이 자신의 생각을 일목요연하게 나열하기 시작했다.
1. 투표를 붙이게 되면 리온의 자작곡이 타이틀곡이 될 가능성이 낮아질 뿐만 아니라 팬들 사이에 분란이 생길 수도 있다는 것
2. 하지만 대표님의 입장이 워낙 강경해서 고집을 꺾기 힘들어 보인다는 것
3. 괜히 비등비등한 곡 가져와서 의견 갈리면 있는 팬들조차 지쳐서 떨어져 나갈 수 있다는 것
4. 그럴 바에야 일단 컨셉 제안을 해보라는 기회를 잡고 답이 정해져 있는 투표 선택지를 만들어 관심이라는 이득만 취하자는 것
가을은 아까 보았던 세미나실 속 상황을 떠올리는 듯 고개를 끄덕여 가며 전적으로 동의한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래서요?”
다행히 리온도 상체를 앞쪽으로 기울인 채 은찬의 말을 주의 깊게 들었다.
“내 생각은 이래. 자랑은 아니지만 대표님 곁에 제일 오래 붙어 있었던 만큼 대표님의 마이너한 취향은 내가 잘 알아… 그러니까 대표님이 만족하실 만한 컨셉 중에서 대중적으로 최악의 컨셉을 추려보자는 거야.”
“형… 천재야?”
가을이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은찬은 물을 한 번 들이켠 뒤 말을 이어나갔다.
“일단은 상황 모르고 있는 멤버들도 바로 납득할 만하게 해야 돼. 하나는 적당히 대표님 취향 버무려서 가져가고, 리온이가 만든 하이틴 컨셉 자작곡은 가장 대중적이면서도 최고의 컨셉을 따서 보여 드리는 거지.”
“그럼 저는 뭘 하면 되는데요?”
“리온이는 곡 설명을 자세하게 해줬으면 좋겠어. 우리도 그에 맞춰서 설명하는 게 좋으니까.”
“네, 알겠어요.”
“그리고 설명드릴 때 예시를 들면 더 좋을 것 같아. 대표님은 눈에 딱 보이는 거에 약하시니까. 시상식 때 수상하셨던 선배님들 참고해서 컨셉 겹치는 부분 추리고 몇 개 보여 드리자.”
은찬이 말을 끝마치자마자 눈을 빛내며 리온을 빤히 쳐다봤다.
“…귀찮긴 하네요, 진짜.”
리온은 흐트러진 머리를 풀었다 다시 꽉 동여매고는 재킷 안쪽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녹음 파일 중 하나를 재생했다.
♪♬-
이번에 공개될 예정이었던 타이틀곡의 가이드였다. 가사는 아직 제대로 붙이기 전인지 리온이가 적당히 영어랑 한국어를 섞어서 불렀지만 트렌디하고 몽환적인 멜로디는 여전히 수식어가 필요 없을 정도로 완벽했다.
‘다시 들어도 최고야.’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명곡이었기에 저절로 미소가 걸렸다. 칠월칠석 첫 싱글앨범의 수록곡이 이젠 제네시스의 타이틀곡이 되겠지.
“제가 설명을 잘하진 않아서… 들어보고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봐요. 가사는 영감 잡으면 금방 쓰니까.”
은찬은 궁금한 게 없었다. 이미 이 곡에 대해 누구보다 자세히 파악하고 있었으니까.
칠월칠석 당시에도 이 곡에 어울리는 건 살짝 어른스러우면서 청량한 느낌 정도라고 생각했다. 제네시스의 데뷔 타이틀곡처럼 마냥 밝고 청량한 느낌은 아니지만, 트렌디하고 가벼운 멜로디가 교복 컨셉과 굉장히 잘 어울릴 것이다. 즉, 지금 하려는 ‘하이틴’ 컨셉에 딱이다.
‘그때는 대체 왜 이런 곡에 유혹 어쩌고 하는 가사를 붙이게 해서는…….’
대표님이 직접 작사에 참여하셨던 거라 뭐라고 말을 얹을 수도 없었다. 덕분에 되도 않는 무거운 섹시 컨셉으로 후속곡 활동을 했었고. 다시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되네.
그러니 곡이 숨어 듣는 명곡이 된 거다. 리온이의 곡은 완벽했는데.
“리온아, 이거 어떤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작곡한 거야?”
은찬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사이 가을이 물었다. 대답에 따라 가사의 내용과 세부적인 디테일까지 정하기 좋은 질문이다.
“음… 연습실에서 연습에 몰두해 있는 은찬 형 보고 영감받은 건데…….”
“나?”
“네, 정말 열심히 한다 싶어서요.”
순식간에 은찬의 입꼬리가 위로 치켜 올라갔다. 동생에게 영감을 줄 수 있다니, 기분이 묘했다. 부끄러우면서도 자신이 그런 인물이 될 수도 있다는 게 신기했다. 갑자기 더 열심히 해야 할 것 같은 열정까지 샘솟았다.
“…나 진짜 감동받았어. 더 열심히 할게!”
“…방에서 조용히만 해주면 완벽할 텐데요.”
은찬의 말에 조용히 불만을 덧붙이던 리온이 좋은 생각이 난 듯 눈을 빛내며 엄지와 검지를 맞부딪혔다. 딱- 소리가 나자 둘의 이목이 리온에게 집중됐다.
“이렇게 하는 건 어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