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see hearts in failed idol’s eyes RAW novel - Chapter 34
34. 사고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4)
작곡가 오리온이 영감을 받았을 때의 표정은 평소와 달라 구분하기 쉬웠다.
온 세상 기쁨을 다 가진 듯한 미소. 지금 리온의 표정이 딱 그랬다.
“그때 정확히는…….”
은찬과 가을은 리온의 말에 집중했다. 리온이 눈을 천천히 깜빡이며 태블릿 빈 화면에 무언가를 그려 나가기 시작했다. 당시의 회상 장면인 것 같았다.
“…은찬 형이 연습실 사용 시간 초과해서 연습하는 것 보고 영감받아서 바로 비트부터 찍은 거거든요.”
‘그거 안 들킨 줄 알았는데 리온이가 보고 있었나 보네…….’
연습실은 사용 시간 제한이 있긴 했지만 연습을 더 하는 건 나쁜 게 아니었고, 나 말고 주혁이 역시 종종 그랬기에 그 모습을 봤다 해도 별 상관은 없었지만 괜히 민망해져 입술을 축였다.
리온은 곡에 대해서 설명해 줄 게 많은 듯,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조금 흥분했는지 말의 빠르기가 조금 빨라진 상태였다.
“꿈을 향해 달려 나가는 그런 느낌 어때요? 가사를 쓴다면 1절에는 ‘나아가지 못하는 결심’ 이런 거… 뭐, 지금 말고 나중에 다 완성되고 보여 드렸을 때나 와닿겠지만.”
“너무 좋아. 나는 어차피 리온이 네가 작곡한 곡은 전부 좋다고 생각했어.”
“…전부요?”
“응, 가끔 네가 흥얼거렸던 거나 나한테 들려줬던 것들!”
“…감사해요.”
칭찬이 부끄러운지 고개를 슬그머니 돌리는 막내의 모습을 은찬은 흐뭇하게 바라봤다. 리온이 감정 표현을 잘 안 하는 편이기는 해도 이렇게 티가 나긴 한다.
“아무튼 제가 무슨 말 하려는 건지 알겠죠? 밝고 희망적인 가사를 붙여서 꿈을 향해 나아가는 10대들의 모습을 표현하는 거예요. 사랑 노래 가사가 정석이긴 하지만 그건 데뷔할 때 하기도 했고, 솔직히 조금 진부하다고 생각해서.”
은찬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아이돌한테 사랑은 사치다. 사랑은 무대랑 해야지!
“괜찮네. 그럼 그동안 봤던 선배들 무대 중에서 참고할 만한 거 몇 개 추려볼까? 어, 은찬 형, 왜 그래?”
“…어? 왜?”
“얼굴 엄청 빨간데? 어디 아파?”
“아냐! 신경 안 써도 돼!”
어쩐지 얼굴에 열이 오른다 싶더니 빨개졌나 보다.
하지만 나를 모티브로 한 곡이라잖아, 그것도 희망적인 메시지가 가득 찬!
충분히 부끄러울 만하지 않나? 아무렇지 않은 게 더 이상하다.
“너무 쳐다보지 마…….”
“형은 부끄러운 것도 많네요.”
“저 형 놔두면 괜찮아져. 그럼 아까 하던 얘기 마저 할까?”
얼굴로 쏠리는 시선에 더더욱 달아오르는 뺨을 은찬이 손으로 지그시 눌렀다. 토마토 같아진 은찬의 모습에 가을은 살짝 웃었고, 리온은 고개를 살짝 내젓고선 태블릿에 무언가를 끄적이기 시작했다.
“뭐 좋은 생각 있어요?”
리온이 가녹음본을 다시 한번 재생하며 은찬과 가을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솔직히 저는 여러 컨셉들을 살펴보거나 공부하고 있지는 않으니까. 형들한테 의견을 묻고 싶어요.”
“…개인적인 의견인데 이거 애니메이션 오프닝곡 같은 느낌이야.”
‘무슨 소리지?’
은찬은 얼굴에 대고 있던 손을 천천히 내리곤 바지에 문질렀다. 가을이가 어떤 뜻으로 저렇게 말하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좋다는 건지, 나쁘다는 건지. 웃고 있는 가을의 표정을 보니 만족스러운 것 같긴 한데.
“그러니까 내 말은… 운동부 유니폼 같은 것도 괜찮지 않을까? 하이틴 컨셉이라고 무조건 교복을 입는 건 좀 편견 같기도 하고… 물론 팬분들이 좋아하실 테니까 무대에서는 몇 번 입는 걸로 하고 전체적인 컨셉은 운동부 어때? 직관적이기도 하고.”
“아, 무슨 소리인지 알겠어요.”
리온은 가을이의 아이디어가 마음에 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이더니 태블릿에 무언가를 적어 내려갔다. 본인만이 알아볼 수 있는 축약어라서 뭐라고 쓴 건지는 제대로 알아볼 수 없었지만.
‘굳이 교복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건 맞는 말이야. 게다가 운동부 유니폼이라면 팬분들도 좋아하시지 않을까?’
가을이의 감상 자체는 무슨 뜻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건 나중에 가을이한테 다시 물어보면 된다. 결과적으로 컨셉에 관한 건 나도 같은 의견이니까.
‘그나저나 운동부라면… 어떤 게 좋을까?’
은찬이 다녔던 학교에는 축구부와 야구부가 있긴 했지만 한국 학교의 동아리에 국한될 필요는 없다. 예시로 살펴보기에 좋을 만한 게…….
“아!”
“뭐 좋은 생각 났어?”
“응, 우선 소년미 선배님들 싱글 3집, 정규 2집, 그리고 재작년 5월호 V사 잡지 화보, 두 번째 디싱 뮤직비디오 메이킹영상들 한번 보자.”
“…형은 소년미 선배님들 참 좋아하네요.”
“당연하지. 박수 칠 때 떠나신 것까지 멋있지 않아? 완전 최고.”
물론 해체 당시에야 슬펐지만, 괜히 잡음 나오기 전에 마무리하신 선배님들의 큰 그림이라 생각하면 그리 나쁘지 않았다. 눈앞에 놓인 소년미의 청량 컨셉 자료들을 보면 여전히 아쉽긴 했지만.
‘True or False… 이거 컨셉 진짜 대박이었는데…….’
하이틴 컨셉은 몇 년 전부터 꾸준히 유행이기도 했고, 대중들에게 크게 호불호 갈리지 않는 메이저한 컨셉이다 보니 정석 아이돌 루트를 밟았던 소년미 선배님들도 하이틴 컨셉을 많이 시도하시고는 했다.
특히 블레이저부터 가쿠란까지, 온갖 종류의 교복 스타일을 선보이셨지. 그 때문인지 데뷔 3년 차까지는 ‘소년미 하면 하이틴, 하이틴 하면 교복’… 이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기도 했고.
나 또한 교복에 한정하여 생각하고 있었던지라 많은 아이디어를 떠올리지 못하고 있었는데, 가을이의 말을 듣고 나니 그제야 머리가 좀 굴러가는 느낌이었다. 운동부 컨셉, 확실히 좋은 것 같아.
한번 말꼬가 트이기 시작하니 진행은 일사천리였다.
은찬의 적극적인 기세에 둘은 조금 난색을 표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이보다 더 좋은 참고 자료는 없었으므로 다들 곧 소년미 화보와 무대 영상들을 살펴봤다.
그렇게 셋이 머리를 맞대서 추려진 컨셉이 총 세 개.
첫 번째가 럭비부고 두 번째가 야구부, 혹시 몰라서 세 번째로 무난하게 교복도 넣었다.
‘이 정도 추려놓고 대표님께 선택지를 드리면, 분명히 좋아하실 거야.’
그리고 그다음으로는 대표님이 좋아할 만한, 하지만 보편적으로는 최악인 컨셉.
‘이건 쉽지.’
오히려 최선의 컨셉안을 추리는 것보다 이게 훨씬 수월했다. 회귀 전후를 합쳐 그동안 대표님 곁에 얼마나 오래 붙어 있었는데 취향 하나 파악하지 못했을 리가.
어렵게 생각할 것 없이 그냥 칠월칠석 때 했던 컨셉들을 나열하면 됐다. 최 이사님이 전담으로 손대셨던 유토피아는 승승장구하고, 대표님이 전담했던 우리 칠월칠석은 심해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기도 했다.
1. 멤버 나이대에 어울리지 않는 무거움
2. 섹시를 빙자한 노티 나는 컨셉
3. 절제를 모르는 노출(적당하면 플러스 요소겠지만 뜨지도 않았을 때 벗었다가 ‘부담스럽다’, ‘노출증 같다’라며 오히려 마이너스 요소가 되었다.)
이를 취합하여 ‘노출이 있는 어른 섹시 컨셉’을 시도했던 타 그룹들의 컨셉 포토 이미지를 몇 개 추렸다. 이들의 공통점은 음원 및 음반차트 하위권 혹은 미진입이며, 약 10년 전쯤 유행했던 스타일을 떠올리게 한다는 것.
이 과정을 진행하는 내내 가을이와 리온이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은찬에겐 웃음을 참는 게 일이었지만.
“좋아. 완벽해.”
완벽하게 아이돌의 정석인 컨셉과, 아이돌과는 다소 멀어 보이는 컨셉들을 붙여놓으니 마음이 뿌듯해졌다. 분명 대표님은 섹시 컨셉들 중 하나를 선택하실 거다. 관능적이라는 둥, 아이돌은 이런 요소가 있어야 성공한다는 둥 혼자만의 생각을 주장하시면서.
그리고 저 두 컨셉에 투표를 붙이시겠지.
안목이 뛰어난 우리 팬들은 당연히 하이틴 컨셉으로 표를 몰아넣을 것이다. 그러면 팬들 간의 분란 없이 무난하게 리온이의 자작곡으로 컴백할 수 있다.
어플을 사용해 택시를 호출하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면 대표님 심기도 안 거스르고, 우리 팬들도 고생할 일 없을 거야.’
이제 대표님께 전달해 드리는 일만 남았다.
***
“다녀왔습니다… 어?”
“그래, 생각 좀 해봤어? 오, 리온이 왔구나.”
“안녕하십니까.”
세미나실에 다시 도착하고 나니, 대표님 근처에 의외의 인물이 자리해 있었다.
‘아직 학교에 있어야 할 놈이 왜 여기 있어?’
세상만사 귀찮다는 저 표정. 누가 봐도 현주인이었다.
“야, 너 학교는 어쩌고?”
“조퇴.”
“…너무 막 사는 거 아니야?”
이것 봐라. 어차피 아이돌 연습생들이야 4교시까지만 듣는 경우가 태반이긴 하지만, 데뷔 후에도 출석 꼬박꼬박하고 가끔은 7교시까지도 듣고 오는 주혁과 이선에 비해 엄청 비교된다.
물론 둘 다 성적은 별로였으나 학교는 성실하게 다녔다. 현주인과는 다르게.
“시험 성적만 잘 나오면 됐지.”
하지만 이래 봬도 현주인은 공부를 잘했다. 나름 전교 상위권에 웃도는 정도로. 하여간 잘나긴 잘나서 잔소리하기도 뭐하다. 여전히 얄미운 자식.
“그래, 좋겠다… 아무튼 대표님! 저희가 골라 온 거 마음에 쏙 드실걸요!”
어디 한번 보자는 듯 앉으라 채근하는 대표님의 손짓에 은찬이 곧장 옆자리로 뛰어가 앉았다. 은찬이 리온의 태블릿을 보여주며 3시간 동안 생각해 낸 컨셉들을 차근히 설명했다.
하이틴 컨셉 3개와 대표님 취향에 맞춘 2개로 이루어진 총 5개. 대표님은 은찬의 예상대로 중후한 섹시 컨셉에 좋은 반응을 보였다.
‘성공이다……!’
선택하는 느낌이 들도록 일부러 선택지도 많이 마련했단 말이지.
[ ♡ +10% ] [ system : 금일 호감도 열람 가능 횟수 (4/5) ]확신을 위해 대표님의 호감도까지 파악해 보니 변동 없이 플러스다. 계획대로 수월히 진행되고 있다.
하이틴 컨셉이야 멤버들 의견을 받아 최선인 쪽을 고르면 되니 당장 중요한 건 대표님의 선택이었다. ‘혹시나 대표님이 갑자기 정신을 차려 하이틴 컨셉을 고르면 어떻게 하나. 그러면 팬들끼리 의견 갈려서 싸우게 될 텐데’라는 걱정이 무색하게 대표님은 은찬의 예상대로 움직여 주셨다.
이 정도면 투표 결과는 무조건 하이틴이다. 대표님을 주의 깊게 지켜보던 리온과 가을도 안심한 듯 보였으니 모두가 만족스러운 결말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다들 미쳤나…….”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던 현주인 한 명을 제외하면. 현주인은 대표님과의 대화를 잠자코 듣는 듯하더니 이내 얼굴을 구긴 채 조용히 불만을 내뱉었다.
“그게 무슨 뜻이냐, 주인아?”
마치 일부러 들으라는 듯 크게 말했기에 대표님뿐만이 아니라 은찬마저도 살짝 당황했다.
‘너야말로 미친 거 아냐?’
지금 딱 좋은 분위기로 흘러가고 있었는데 왜 저러는 거야?
“너, 너무 좋아서 감탄사 내뱉은 거예요. 그렇지, 주인아?”
심기가 불편해진 대표님의 마음을 돌릴 수 있는 기회가 목전이었다. 이대로 현주인이 일을 그르치게 내버려 둬서는 안 됐다. 은찬은 현주인과 대표님의 얼굴을 곁눈질로 빠르게 스캔하곤 급히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아하하…….”
어색한 미소가 절로 흘러나왔다.
“오, 그래?”
다행히 대표님은 은찬의 변명 같지도 않은 변명에 대충 넘어가 주려는 반응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번엔 고개를 내젓기까지 하는 현주인.
“하.”
‘저 새끼는 왜 한숨까지 내뱉고 난리야?’
협력한다며! 방해하지 말라고! 한동안 좀 얌전한가 싶더니만, 역시는 역시잖아.
어째 과제가 하나 더 늘어난 느낌이었다. 가을과 리온마저 당황스러웠는지 현주인을 향해 무언의 신호를 보내고 있었지만 현주인은 그걸 전부 튕겨냈다.
“보니까 타이틀곡으로 투표 붙이려고 하시는 것 같은데… 제가 이해한 거 맞습니까?”
“어? 맞아. 은찬이 의견 좋지 않냐? 주인이는 별로야?”
“아니, 대표님… 이건 다른 컨셉이 어떻고 말고가 문제가 아니라요.”
그거 내가 이미 했어! 했다고!
그나마 찾아온 해결책이 이거였는데. 대표님 성격상 이거 아니면 대표님 취향대로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
투표 붙이는 게 걱정되는 마음은 십분 이해하지만 이번 한 번만 참아주면 안 될까?
“컨셉이 좋고 말고 그런 개인 호불호는 둘째 치더라도, 저는 좀 더 근본적으로 말씀드리고 싶은데요. 이거 투표 진행시키면 이번 활동 백 퍼센트 망합니다.”
그래, 현주인한테 참을성이라곤 없었지. 애초에 기대도 안 했다.
“그룹이 망한다고 과장까지 해서 말씀드리고 싶진 않지만, 이게 앨범 판매량까지 확인해 본 뒤에 알게 될 사실은 아닌 것 같은데요.”
현주인은 정확히 은찬이 걱정했던 부분을 짚어내고 있었다. 거기다 한술 더 떠 이번 활동이 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상세하게 레퍼토리를 설명했다.
“유입이 늘어날 수야 있겠죠. 하지만 그중 저희를 지지해 주는 ‘진짜’ 팬이 있을 가능성은 현저히 낮아요.”
게다가 앨범 판매량 추이까지 유추해서 설명하는 게 아닌가. 아니, 그 잠깐 사이에 저걸 다 생각해 냈다고?
현주인은 정확히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예견하고 있었다. 그것도 무척 확실한 어투로. 대표님도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할 정도로 일목요연한 설명이었다.
내 의견이 뒷전이 되어도 기분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나로서는 어차피 리온이 자작곡으로 진행만 하면 만사 오케이였으니까. 그런데 문제는,
‘저거 칠월칠석 팬층 떨어졌던 과정이랑 똑같은데?’
현주인의 이야기가 칠월칠석 팬덤 까치의 내부 분열 과정과 정확히 일치했다는 것.
꼭 칠월칠석 활동을 이미 해봤다는 듯한 태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