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see hearts in failed idol’s eyes RAW novel - Chapter 53
53. 현주인(3)
11월 10일 11:40 P.M
리온은 핸드폰 액정을 확인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아……!”
잊고 있었다는 듯 인상을 슬쩍 찌푸린 리온이 양 입술 새를 맞댔다. 그러고는 가방을 책상 위에 무심히 내려놓곤 고개를 홱 돌려 주인을 마주 보았다.
“형, 갖고 싶은 거 하나 사줄게요. 고르면 메신저로 링크 보내요.”
“애한테 무슨… 됐다.”
“푸흣.”
옆에서 듣고 있던 은찬이 어깨를 들썩였다.
‘현주인 본인도 지금 몸은 19살인 주제에…….’
속은 20대 중반, 혹은 그 이상일 수도 있지만, 지금은 겨우 두 살밖에 차이 안 나면서 17살한테 애 타령 하는 게 웃겼다. 참아보려고도 했지만 입에선 계속해서 피식대는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너… 형은 왜 웃어?”
“애가 애한테 애라고 하잖아.”
“하아, 이걸 진짜… 아무튼 리온아, 난 괜찮으니까 됐어. 생각해 줘서 고맙다.”
낄낄거리는 날 곁눈질로 째려본 현주인은 금세 표정 관리를 하며 리온이에게 웃음으로 화답했다. 그러고 보니 저 새끼가 맨날 나한테 야야거려서 그렇지, 내가 형은 형이다. 그것도 2살이나 많은.
19살 현주인이 17살 리온이를 애 취급 하는데, 21살인 내가 19살 현주인을 애처럼 대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이 형아는 맛있는 거 사줄게요, 주인아~”
“미쳤나… 징그러우니까 꺼져.”
“왜 이렇게 까칠하게 굴어? 모처럼 잘해주려는데.”
“돈 없는 놈 피 빠는 취미는 없거든.”
“이럴 땐 그냥 ‘감사합니다, 형~’ 하고 넘기는 거야! 아무튼 진심이니까 생각해 놔.”
물론 현주인의 말처럼 ‘돈 없는 놈’이 틀린 말은 아니긴 하다. 아직 정산받기 전이라 수입이 없으니까. 그래도 너 밥 한 번 사줄 돈은 있다고, 이 싸가지 없는 자식아.
“벼룩의 간을 빼 먹는 느낌이라 찝찝하긴 한데… 뭐, 알았어.”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강조하니 현주인은 두 번 거절하진 않았다. 아마 동생인 리온이보다는 연상인 나한테 얻어먹는 게 더 편한 거겠지.
핸드폰 액정 속 시계를 내려다보다 11시 59분에서 12시 00분이 되는 순간에 은찬이 활짝 웃었다.
“현주인! 생일 축하한다~”
“이게 뭐 별거라고…….”
“별거 맞지. 그리고 고마워. 열심히 해줘서. 덕분에 분위기 엄청 좋잖아. 그렇지?”
리온이를 쳐다보며 문장을 질문으로 마무리했다. 은근슬쩍 정해져 있는 대답을 유도해 버린 내 질문이 너무 강제적이진 않았나 하고 걱정했으나 괜한 기우였다. 리온은 수첩에 뭔가를 끄적이면서도 짧게 긍정의 대답을 하며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귀찮으면 아예 대답도 안 하는 리온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은찬은 마음 편히 미소를 띠었다.
“그러니까 앞으로도 잘 부탁해.”
태어나 줘서 고맙다는 말은 낯간지러워서 못 하겠지만. 그래도 이번에는 얘랑 정말 좋은 동료이자 친구로서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다.
“…속 편하긴. 됐으니까 빨리 자라.”
“어디 가냐?”
“물 마시러.”
앉아 있던 자리 그대로 곧장 누울 것 같던 현주인은 몸을 일으키며 자리를 떴다. 무표정이라 속내를 알 수 없는 놈은 그 큰 손으로 내 머리를 꾹 누르더니 곧장 방을 나갔다. 옆에 앉아 있던 리온이가 작게 웃은 것 같기도 했다.
***
[ 백무영 선배 : 은찬 씨, MC 자리 확정된 거 조만간 연락 갈 거예요. 제안 받아줘서 고마워요. 좋은 하루 보내요 🙂 ]비몽사몽 했던 정신이 메시지를 확인하자마자 단박에 돌아왔다. 이것보다 확실한 알람 효과는 없었다.
‘백무영 선배?’
오전부터 연락을 주시다니, 감격스럽… 이게 아니고.
정신을 차리고 메시지를 다시 꼼꼼하게 차근차근 읽었다.
MC 자리 확정, 조만간 연락, 고마워요, 좋은 하루.
선배의 다정한 말미가 묻어나는 듯한 메시지에 여전히 심장이 뛰었으나 몇 초 가지 않았다.
놀란 표정으로 상체를 벌떡 일으킨 은찬은 내용을 다시 읽으면서 점점 얼굴을 굳혀갔다.
‘그럼 선배의 하차도 확정이라는 건데…….’
내가 하겠다고 하긴 했지만, 막상 눈앞으로 선배의 하차가 다가왔다는 사실이 실감 나니 기분이 마냥 좋진 않았다. 엄청난 기회를 거머쥔 것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선배의 자리를 가져간다는 점에서 묘한 감정이 들었다.
매번 바뀌는 의상과 컨셉, 그리고 훌륭한 진행 능력까지. 선배만큼 그 자리에 찰떡같이 어울리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 자리를 맡아야 한다는 부담감보다도 아쉬움이 컸다. 이제 정말 배우 활동에 매진하시는 건가 싶어서.
‘선배… 이제 무대는 안 서시겠지…….’
아이돌인 백무영을 좋아했던 은찬의 입장에서는, 춤을 추거나 노래를 부르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배우보단 아이돌에 가까운 백무영의 음악방송 MC 활동을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자연스럽게 아쉬움도 컸고.
‘씻고 답장해 드리자. 말끔한 정신으로.’
몸을 일으켜 기지개를 켠 은찬이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존경하는 선배의 메시지니 답장도 멀쩡할 때 해야 했다. 의심스러운 상태긴 했지만 아직 롤 모델이었고 동경하는 마음도 그대로였으니 대충 답하고 싶진 않았다.
‘…대표님?’
샤워 후 백무영 선배의 메시지에 팔려 있던 정신이 제자리를 되찾자, 그제야 쌓여 있던 알람이 눈에 들어왔다. 그중 가장 튀는 건 단연 대표님으로부터의 연락.
[ 대표님 : 얘들아~ 오늘 아침 회의 잊지 말고^^ 이번 첫 기획은 나도 같이하니까 잘해보자~ ]확실히 오늘 오전에 제네시스의 자체 콘텐츠 구성 기획 회의가 있긴 하다. 그래서 은찬도 늦장 부리지 않고 일찍 일어난 거였고. 아직 제대로 된 구성안이 나오지 않아서 일단 참여만 하면 된다고 하길래 준비한 것도, 이후에 따로 전해 들은 것도 없었다.
‘그런데 대표님이 왜……?’
첫 기획을 같이하실 거라고? 대체 왜? 누가 그런 생각을 했는데? 또 이상한 의견 내서 칠월칠석 때처럼 망하게 될까 두려웠다. 대표님은 마이너스의 손이었으니까.
‘불길한데…….’
대표라는 직위도 직위고 은찬에겐 고마운 분이기도 해서 두 손 두 발 들고 완강히 거절할 수도 없다. 하지만 벌써부터 느낌이 불길하다. 일단 회의에 참석해서 직접 들어야 확실히 알겠지만.
***
그런 생각을 나만 한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세미나실에 들어오는 멤버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좋지 않았다. 현주인이나 리온이야 무표정인 날이 많으니 그렇다 쳐도, 항상 웃는 상인 이선이가 저렇게 굳어 있는 모습은 정말 오랜만에 본다.
‘주혁이랑 싸웠나?’
저 둘은 싸워도 주혁이만 티를 팍팍 내지, 이선이는 보통 티를 잘 안 내는데 웬일이람. 이선이와 함께 들어오는 주혁이의 표정이 심상치 않은 걸 보아 내 예상이 맞는 것 같다.
은찬은 그런 둘의 모습을 보면서 하하, 하고 작게 실소를 뱉었다.
‘애들은 싸우면서 크니까. 쟤네야 금방 화해할 거고.’
멤버 일곱 명이 모두 모이고 콘텐츠 촬영팀과 회사 직원분들을 기다리는데 의외의 인물이 들어왔다.
“좋은 아침.”
“헉,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상쾌한 웃음을 내비치며 단상에 선 건, 최미영 이사님이었다. 뜬금없는 인물의 등장에 은찬을 포함하여 멤버 전원이 살짝 놀란 듯한 얼굴을 했다. 대표님 말고도 이사님까지?
“자, 우선 PPT 좀 띄워놓고… 얘들아, 우리 자체 콘텐츠 잘 짜서 제네시스 한번 띄워보자. 알았지?”
최 이사님은 싱글거리시며 자신 있게 말했다. 직접 발표까지 하시는 걸로 보아 이번 콘텐츠 기획은 최 이사님의 의견이 강하게 들어간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최소한 쪽박은 아니다. 못해도 중박은 갈 거다.
‘한시름 놨네.’
은찬이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대표님이 갑자기 본인도 같이하신다고 하셔서 기획에 손대신 건가 했는데 그건 또 아닌가 보다.
‘최 이사님 안목이라면 믿을 만하니까.’
회귀 전에도 함정원의 유토피아를 잠깐의 성공이 아닌, 꾸준하게 인기 있는 아이돌로 키워낸 건 최 이사님의 능력 덕이라 칭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서바이벌 프로그램 출연자 출신들로 이뤄진 그룹은 보통 초반 화력이 커리어 하이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우리 소속사처럼 쥐뿔도 없는 경우라면 그게 더 심했고.
하지만 유토피아는 최 이사님의 전담 프로듀싱 덕에 팬들이 꾸준하게 유입됐고, 그 인기를 몇 년씩 이어갔다. 최 이사님이 워낙 시류를 잘 파악하기도 하셨고. 오죽하면 유토피아 이후엔 다른 소속사의 걸 그룹도 도맡아 프로듀싱을 하셨는데 그 그룹 또한 잘돼서 ‘디렉팅의 신’, ‘최미영 세계관’이라는 말도 만들어냈었다.
그만큼 독보적 센스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으니 우릴 맡아주시는 것부터가 감동일 수밖에 없었다. 회귀시켜 준 시스템에게 새삼 감사해야 할지도.
“케이팝 시장 자체가 까놓고 고여 있는 느낌이란 말이야… 이건 거의 파이 나눠 먹기나 다름없어. 거기다 자체 콘텐츠는 시청층이 더더욱 그래. 처음 보는 사람들도 ‘어? 얘네 뭐지?’ 하면서 흥미를 가질 수 있도록 해야 되거든. 듣고 있지?”
“네!”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어떻게 저리 산업을 정확히 관통한 말씀만 하시는지.
“초반이니까 관계성부터 잘 보여주자. 팬들은 결국 그런 걸 좋아하니까. 먼저 이렇게 고정층부터 만들고 나서 그 이후에 고퀄리티 콘텐츠를 내도 충분할 것 같아. 한 3번 정도 찍고 나서? 여기까지 이해 안 되는 사람 있니?”
은찬이 눈을 반짝이며 격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해가 너무 잘돼서 문제였다. 정말 틀린 말 하나 없으시다.
“얘들아, 너희가 얼마나 친한지 보여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괜히 카메라 의식하진 말고… 평소 하던 대로 해봐. 특히 이선, 주혁… 그래, 고3 세 명들. 아! 은찬이랑 주인이도. 알았지?”
은찬은 최 이사님의 웃는 얼굴 속에서 단호함을 읽었다. 무조건 새겨들으라는, 지시에 가까운 그런 느낌.
‘…최 이사님, 많이 찾아보셨나 보네.’
미지예고 3인방인 고쓰리 세 명이나, 룸메즈라고 불리는 조합까지 다 알고 계시는 걸 보아 나보다 더 SNS 반응을 많이 살펴보셨을 수도 있겠다.
최 이사님은 멤버들의 표정을 확인한 뒤 PPT 슬라이드를 다음 장으로 넘겼다. 간결하고 깔끔한 PPT는 최 이사님이 어떤 기획을 하셨는지 한눈에 딱 들어왔다.
“친해지길 바라……?”
“콘텐츠 이름이야. 쉽게 생각하면 마니또. 다들 초등학생 때 해봤지? 그거랑 비슷해.”
비밀 친구를 뽑아서 상대방이 누구인지 알 수 없도록 선물이나 편지를 챙겨주거나 몰래 도와주는 거 아닌가. 확실히 멤버들이 평소에 지내는 모습이나 서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에 대해 알기에는 좋을 것 같다.
‘칠월칠석 때에 비하면 엄청 발전했다…….’
당시에는 이런 회의가 이뤄지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냥 자체 콘텐츠 같은 게 없었다. 그나마 데뷔 초엔 활동기 비하인드 영상이라도 올라왔었는데, 그것도 2년 차쯤부턴 아예 사라져 버렸고. 그래서 은찬이 직접 브이로그를 찍어 어플로 편집하고 영상팀에 보내면 그룹 공식 계정에 올리는 정도였는데 이번에는 정말 제대로인 느낌이다.
“자… 뽑아, 얘들아.”
어느새 슬라이드를 다음 장으로 넘긴 최 이사님은 미리 준비해 두었던 건지 모니터 옆 한편에 있던 통을 꺼내 멤버들 앞으로 내밀었다.
‘뭐지?’
눈치상 마니또가 될 사람을 뽑으라고 하는 것 같은데. 다들 눈치만 보는 중이어서 움직임이 더뎠다. 은찬이 제일 먼저 일어나 손을 넣어 통 속을 뒤적거렸다.
“나머지도 보고만 있지 말고 빨리 뽑아.”
최 이사님이 생글거리며 통을 앞으로 내밀었다. 별이와 가을이, 이선이는 흥미로워하며 손을 뻗었고 현주인과 리온이는 약간 귀찮은 듯 보였다. 의외로 주혁이는 약간 긴장한 눈치였다.
모두 마니또를 뽑고 나서 아직 손에 쥔 쪽지를 만지작거리는 사이, 최 이사님의 충격적인 말이 이어졌다.
“사실은 아까부터 촬영 중이었어. 정말 후줄근하게 하고 올까 봐 살짝 걱정했는데 그런 친구들은 없어서 다행이다. 어차피 편집 잘할 거니까 걱정하진 말고.”
“네?”
당황한 은찬이 뒤집어쓴 후드티의 끈을 꽉 조였다. 모자 속으로라도 숨어 최대한 얼굴을 숨기고 싶었다. 촬영하는 줄 알았으면 최소한 머리 정리라도 했겠지, 이렇게 후드티 뒤집어쓰고 오지는 않았을 텐데!
‘그냥 회의인 줄 알았더니……!’
대표님이 기획에 참여하지 않아서 좋아했던 게 무색할 정도로 뒤통수가 아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