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see hearts in failed idol’s eyes RAW novel - Chapter 63
63. 선물과 신고식(1)
“혹시 제가 놀라게 했나요? 아니면 두 분의 즐거운 시간을…….”
“아니에요! 선배, 오해예요.”
“음?”
무영의 장난기 섞인 말에 화들짝 놀란 은찬이 양손을 거칠게 내저었다. 무영은 그런 은찬을 한번 보더니 세주 쪽을 살짝 흘겨보곤 다시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선배 자리를 제가 대신할 수 있을까, 하고… 그런 얘기 중이었어요.”
무영이 뭐라고 하지도 않았건만 은찬은 열심히 변명을 하는 중이었다. 꼭 뒷얘기 하다 들킨 후배 같기도 했고, 몰래 바람피우다 들킨 사람 같기도 했다.
당황으로 물든 은찬 대신 옆의 세주는 배우답게 웃는 낯을 유지하며 무영에게 말을 건넸다.
“오늘 미팅엔 오실 줄 몰랐네요. 미리 말씀해 주시지.”
“제가 언제 그런 거 일일이 말하고 다녔다고. 안 그래요?”
“…그렇긴 하죠~”
한 박자 늦은 세주의 대답에 무영이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었다. 그러고는 여전히 당황한 기색을 지우지 못한 은찬의 어깨를 그러쥐며 세주가 꺼낸 대화 주제를 회피해 버렸다.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은찬 씨가 계속 안 오길래 한번 찾아보러 왔어요. 그런데 오던 중이었네요.”
“긴장해서 휴게실에서 안정을 조금…….”
“하하! 여전히 재미있다니까, 은찬 씨는. 아, 맞다. 이거 은찬 씨 거예요.”
“아!”
무영이 손에 쥐고 있던 마이크를 은찬에게 건넸다.
‘전용 마이크라니… 기분 이상해.’
벌써부터 왠지 모를 책임감이 느껴졌다. 은찬은 자신의 이름이 붙은 마이크를 내려다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입술이 바짝 마르는 것 같아 혀를 빼내 한 번 축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립밤의 쌉싸름한 맛이 느껴졌다.
“아, 맞다. 이것도.”
마이크를 살피던 은찬에게 무영은 한 가지를 더 건넸다. 그리고 그것을 받아 든 은찬의 표정이 복잡미묘해졌다. ‘MUYOUNG’이라고 써진 이름표였다. 은찬의 이름표와 같은 재질이었는데, 얼마 전까지 마이크 위에 붙어 있던 이름표였을 거다.
“선배 이제 그만두시는 게 실감 나요.”
“은찬 씨는 이제 시작이잖아요? 좀 더 기뻐해도 될 텐데. 이건 좋아할 것 같아서요. 별로려나?”
“아니요! 책상 위에 전시할게요!”
좋다마다. 이건 굿즈로도 못 사는 하나뿐인 이름표인데. 당연히 엄청나게 기쁘다. 단지 선배의 아이돌 생활 종지부나 다름없는 물건을 내가 받아도 되나 하는 생각에 조금 씁쓸할 뿐이지.
“좋아하는 것 같은데?”
무영은 은찬의 감격 어린 표정을 보고 미소 지었다. 요 근래 봤던 선배의 얼굴 중에 가장 환한 웃음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라, 은찬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심장에 무리 오겠다.’
그간 의심스러웠던 선배가 아닌, 정말 좋아하던 무영 선배의 표정인데 싫을 리가. 좋아하던 연예인을 초근거리에서 보는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에 평정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기껏 팬 사인회에 와서 눈 못 마주치는 팬들의 심정이 백번 이해가 갔다.
휴게실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었기에 회의실로 향하는 건 얼마 걸리지 않았다. 무영과 은찬이 미니 팬 미팅을 하는 사이 세주는 제일 먼저 회의실의 문을 열고 활기차게 인사했다.
“오랜만입니다~”
“안녕하세요!”
한 번 봤다고 낯이 익은 감독님과 스태프들이 인사에 화답했다. 마련된 빈자리에 착석한 은찬은 주변에 인사를 건네며 미팅 시작을 기다렸다.
“이야, 오랜만이네.”
미팅은 감독님이 등장한 뒤부터 시작됐다. 감독님은 친근하게 인사를 건네왔다. 덕분에 미팅은 상당히 온화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우리 무영이가 그렇게 추천을 하더라고. 저번에 보니까 싹싹하고 진행도 상큼하게 잘하는 모습이 신인답기도 하고 내가 보기에도 괜찮아서.”
감독님의 설명을 듣다 보니 몸에 바짝 기합이 들어갔다. 기대에 부응해야 할 것 같은 의무감, 책임감 같은 것들이.
“능숙하던 무영이랑은 다른 분위기가 나긴 하겠지만, 세주랑 잘 맞기도 하고… 뭐, 신인이니까 상큼하기는 하겠지. 마스크도 좋고.”
여전히 저 마스크 좋다는 칭찬은 적응이 안 됐지만, 은찬은 머쓱한 듯 뒷목을 매만지며 웃음을 유지했다. 회귀 전에는 백방 노력해도 기회가 따라붙어 주지 않았다. 그러니 백무영 선배에게 빚을 지긴 졌지.
‘이걸 무슨 수로 갚지?’
빚을 청산하지 못하면 추후 선배에게 어떤 연유로도 추궁할 면목이 없다. 항상 이렇게 도움만 받는 것 같은데.
‘현주인에게 의논하기에는… 걔는 너무 선배를 일방적으로 싫어한다는 느낌이 강하단 말이지.’
단순히 회귀로 인한 변화가 아니다. 선배는 이유 없는 친절을 베푸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믿음도 금이 갔다. 이 친절에도 다 이유가 있을 터인데,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없으니 답답함만 쌓였다.
“저 막내 작가가 매니저 통해서 컨셉이랑 대본 전달할 테니 한번 읽어나 보고, 컨셉은… 코디한테 전달하든가?”
“넵.”
감독님의 마지막 말에 지금껏 했던 대답 중 제일 큰 소리로 답했다. 감독님은 충분히 만족스러우셨는지 고개를 대충 주억거리더니 시계를 보며 하품을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난 간다~”
참 간결하고 짧은 미팅이다. 자신이 새롭게 합류하기 전 명목상 모인 듯한 느낌. 이번에도 저번처럼 얼굴이나 보려고 연 미팅일까. 일어나 고개를 숙이기가 무섭게 문밖으로 사라진 감독님을 뒤로하고 다른 스태프분들은 정리를 하느라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앗, 저 드라마 리딩이 있어서 먼저 가봐야 할 것 같은데……! 죄송해요, 같이 정리 못 해드려서. 제가 다음에는 더 많이 할게요.”
“아니에요! 세주 님, 얼른 가보세요. 그거 매니저분 연락 아니에요?”
“맞아요~ 시간을 너무 빡빡하게 잡았네. 아무튼 이해해 주셔서 감사해요. 그럼 은찬이도 첫 방영일에 보자! 선배도 조심히 들어가세요.”
노트북을 두들기던 막내 작가에게 급히 인사를 건넨 세주는 은찬에게 환한 웃음을 건네곤 무영에게도 고개를 숙였다.
‘…누나가 저런 성격이었나?’
뭔가 마지못해 예의를 차리는 것처럼 보인다면 내가 예민한 걸까.
칠월칠석 당시 현주인과 연애할 때도 정작 우리 앞에서는 싫어하는 티를 덜 내려고 했던 사람인데. 최소한 누군가와 대면할 때는 예의를 지킬 줄 아는 똑 부러지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대선배, 게다가 선배가 배우로 전향한 이상 앞으로도 계속 마주칠 수밖에 없는 선배에게 저렇게 행동한다고? 이건 세주 누나답지 않았다.
“우리도 갈까요?”
퍼즐 게임 같은 끼워 맞추기 추리를 하며 책상 주변을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백무영 선배가 내 팔을 살짝 잡더니 나가자며 문 쪽을 가리켰다.
“앗, 이거 정리만 마치고 가요!”
“이럴 때 우리가 오래 남아 있으면 저분들이 더 불편해해요.”
“어……? 그래요?”
스태프분들이 사양하셔도 도와드리는 게 맞지 않나. 그래도 같이 일하는 건데.
잠시 갈등에 잠겼다. 선배의 말을 듣는 게 후배로서 맞는 행동인지, 그럼에도 스태프들을 전부 도와주고 빠져나가야 할지. 나는 세주 누나처럼 다음 스케줄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할 말도 있고. 은찬 씨, 오늘 혹시 혼자 왔어요?”
“아, 네. 오늘은 택시 타고 와서요.”
“그럼 제가 데려다줄게요. 마침 저도 오늘 차를 끌고 와서.”
“네… 네?”
무영의 말에 답을 하면서도 은찬의 몸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서류의 주인을 찾아주고, 프로젝터와 노트북의 선을 정리했다. 먼저 떠나야 할지도 모르니 무의식적으로 행동이 빨라졌다.
“혹시 싫어요?”
“아니에요, 선배! 그런 게 아니라, 어떻게 그런 신세를 또 져요! 저는 지금 매니저 형한테 연락드려도 돼요!”
“괜찮아요. 어차피 후배 챙길 겸 차 산 거니까.”
의자의 각을 맞추던 도중 깜짝 놀란 은찬이 눈을 크게 뜨고 무영을 마주했다. 목소리의 톤도 높아지고 말이 떨리는 게 마치 내가 지금 들은 게 제대로 들은 거 맞냐고 되묻는 듯한 반응이었다.
“거절하면 제가 민망해지는데.”
“…가, 갈게요.”
‘저런 섭섭한 듯한 표정을 지으면 나는……!’
대체 어떤 팬이 좋아하는 연예인 속상해하는 얼굴을 보고 싶겠냔 말이야!
입술을 몇 번 꾹꾹 누르던 은찬은 눈을 꼭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마지막 남은 줄의 의자를 안쪽으로 넣고 무영 곁으로 향했다.
아직 남아 있는 스태프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은찬은 무영을 따라 나섰다. 고작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주차장으로 향하는 것뿐인데 그 잠깐 사이도 공기가 불편했다.
‘어색해 미칠 것 같다…….’
지금까지 선배와 단둘이 있던 게 한두 번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오늘은 유독 모든 순간이 가시방석에 앉은 것만 같았다. 선배가 차 키를 꺼내 잠금 해제 버튼을 누르자 한 검은 차에 불빛이 들어오더니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시선이 향했다.
‘와, 차 대박이다.’
역시 톱 아이돌이라 그런지 차도 남달랐다. 이 외제 차에 앉으려면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뒤 신발을 털고 타야 할 것만 같았다.
은찬이 조심스럽게 차에 오르자 무영이 작게 웃었다.
‘팬들이 포토 카드 좋아하는 이유를 알겠네. 이런 모습 박제해서 들고 다니면 얼마나 좋겠어.’
숙소를 알려달라고 하긴 미안하니 미닛츠 엔터까지 데려다주겠다고 말한 선배는 내비게이션에 주소를 찍고 운전을 시작했다. 그 옆모습이 상당히 멋있어 자꾸만 시선을 감추지 못하고 흘긋거렸다.
“은찬 씨는 정말 제 팬이셨나 봐요. 얼굴만 봐도 좋아하시던데.”
“엇, 네. 선배 보고 가수의 꿈을 키운 것과 다름없어서… 선배 정말 본투비 아이돌이시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날 때부터 아이돌인 것처럼 태어나서 춤 노래를 안 해주시는 건 죄악이에요, 진짜…….”
“하하, 그거 어디 인터넷 댓글로 봤던 것 같은 말이네요.”
그리고 딱 들켰다. 너무 티 나게 쳐다봤나 싶어 얼굴이 화끈거렸다.
게다가 차가 워낙 좋다 보니 두 배로 불편한 듯한 느낌이라 평소보다 말이 몇 배는 많아졌다. 내뱉고 보니 횡설수설한 느낌이라 말을 주워 담을 수 없는 게 통탄스러웠다.
“그런데 은찬 씨.”
은찬이 민망함을 참지 못하고 창밖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사이 무영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은찬을 불렀다.
“전 이제 아이돌이 아니에요.”
그야말로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겸손함에서 나온 소리라기에는 선배의 목소리가 너무 진중했다. 게다가 선배는 자화자찬을 하면 했지, 이렇게 내뺄 사람이 아니고.
“……?”
차는 신호 대기 중이었다. 당황해서 미간을 좁힌 채 선배만 쳐다보고 있는데 선배가 갑자기 눈을 마주쳐 왔다. 아무 말도 않고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길래 민망해져 몸을 뒤로 내뺐다.
“뭐 묻었나요?”
눈만 반복해서 끔뻑거리다 겨우 질문을 내뱉었는데, 선배는 머리카락 위에서 뭔가를 떼어내듯 살짝 털어내곤 다시 전방을 주시했다. 신호가 초록불로 바뀌어 있었다.
“아, 네. 머리에 뭐가 붙어 있네요. 잘 안 보여서 가까이에서 봤어요.”
‘괜히 혼자 당황했네… 뭘 묻히고 다니는 거냐, 난?’
선배 눈에도 거슬릴 정도면 눈에 띄는 뭔가가 묻어 있었던 모양인데. 선배를 따라나선 후부터는 민망함의 연속이었다. 그나저나 무슨 할 말이 있다고 하시지 않았나?
“선배, 근데 할 말이라는 건……?”
“아… 은찬 씨, 거기 앞에 선물 있는데 나갈 때 가져가세요.”
‘뭐, 선물?!’
“선배, 자꾸 저한테 이렇게 뭔가 주시면 어떡해요!”
“앞으로 성공 가도만 달릴 텐데 벌써 이런 걸로 민망해하면 팬들 선물은 어떻게 받으려고 그래요?”
납득이 안 되는 말은 아닌데 그렇다고 수긍할 수 있는 말도 아니다. 선배의 말대로 좌석 앞 글로브 박스를 열자 잘 포장된 선물 상자가 들어 있었다. 그것도 아주, 아주 고급스러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