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see hearts in failed idol’s eyes RAW novel - Chapter 7
7. 데뷔 준비(1)
이전엔 그래도 예명 같은 건 없었다. 예명을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는 했어도 저딴 예명일 바에야, 본명으로 활동하는 게 백 번 천 번, 아니, 만 번 나았다!
“대, 대표님!!!”
은찬이 급하게 소리쳤다. 붉어진 얼굴로 갑자기 목소리를 높이는 은찬의 모습을 대표님은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저 그룹명으로 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흐음, 갑자기? 어떤 거?”
대표님이 손바닥을 턱에 괴고 말을 이었다. 무슨 말을 꺼내나 한번 들어보자는 듯한 말투.
‘…아, 젠장.’
위기감에 반사적으로 소리치긴 했으나 하고 싶었던 그룹명 같은 건 있지도 않았다. 단순히 영어 단어 가져다 붙이는 게 칠월칠석보다야 나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과거에 조롱당한 기억들 때문에 칠월칠석만 아니라면 다 괜찮을 정도였다.
‘어쩌지?’
은찬은 입 밖으로 뭐라도 내뱉어야 하니 급하게 눈을 좌우로 굴렸다. 지금 멤버 수부터 예상에서 어긋난 탓에 머리가 백지상태인데 무슨 그룹명을 생각해 내겠냐고.
그러다 마침 창문 밖 주차장에, 대표님 소유의 차 한 대가 들어오고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저거다! 나이스 타이밍!
“제네시스…요!”
대표님의 애마. 바로 H사의 그 차.
검은 세단이 깔쌈하게 잘빠진 그 차를 보자마자 은찬이 반사적으로 외쳤다.
은찬은 급하게 내뱉은 것치고 괜찮은 단어를 말한 것 같아 내심 안도했다. 뭐가 됐든 칠월칠석보다야 나을 테니 아무래도 좋았다. 은찬이 다시 한번 강조했다.
“제네시스요!”
“제네시스?”
“네, 어떠세요? 아이돌의 기원… 뭐, 그런…….”
아이돌의 기원은 무슨. 그냥 아무거나 갖다 붙인 거다.
그래도 H사 차 중에서 제일 고급 라인인 데다 잘나가니까, ‘우리도 잘나가는 아이돌이 되겠다’ 이런 맥락으로 이해해 주시면 안 되나? 솔직히 개소리에 무논리지만 원래 대표님 취향은 그런 쪽인데.
‘안 되겠지…….’
내가 생각해도 좀 구렸다. 이럴 때 호감도를 봐야 하는 건가? 아까 괜히 꺼지라고 했다.
“괜찮은데?”
“네?”
“응? 뭐가 네야?”
“아니에요!”
그때 들린 대표님의 대답에 은찬은 앞으로 모으고 있던 손을 풀고 급하게 내저었다. 아까 멤버 수를 말할 때와는 달리 마음에 든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대표님의 얼굴을 본 은찬도 화색을 띠었다. 솔직히 안 들어주실 줄 알았는데. 새삼 드는 생각이지만 취향 진짜 특이하시네.
그럼 이왕 이렇게까지 한 거, 하나만 더 건드려 볼까.
“그, 그리고 전 제 이름이 좋아요…….”
그런 특이한 예명이 있다면 초반에 어느 정도의 관심을 받을 수 있을 거라는 사실은 안다. 물론 백 퍼센트 안 좋은 쪽이겠지만.
게다가 그런 예명으로 팬들 앞에 나설 생각을 하니 눈이 절로 질끈 감겨왔다. 자기소개 할 때마다 수치심에 기절할 수도.
안녕하세요. 칠월칠석의 직녀입니다? 제네시스의 직녀입니다?
이건 현주인이 해도 욕먹고 조롱당할 예명이다. 견우와 직녀라니, 다시 생각해 봐도 끔찍했다.
“하긴 그룹명을 그렇게 갈 거라면 본명을 쓰는 게 낫지.”
긴장감에 슬쩍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고 눈을 크게 떴다. 은찬은 앞으로 모아 잡고 있던 손을 놓고는 곧장 대표님의 표정부터 살폈다. 고개를 끄덕이고 계신 모습을 보아하니 수긍하고 있는 듯한 얼굴이다.
‘도박해 보길 잘했나?’
지난 몇 년간의 경험으로 안다. 저건 필시, 싫어하는 얼굴은 아니다.
은찬의 마음속에서 기대감이 슬쩍 움텄다. 그러고는 대표님의 입이 움직이는 것만 기다렸다. 1초가 1시간 같았다.
“알았어. 일단 네 의견 묻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네.”
‘뭐야? 지금 이게 먹힌 거야?’
내가 만든 상황이지만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기쁘긴 기쁜데 묘하게 마음 한구석이 찝찝한 느낌. 생각보다 상황이 너무 잘 흘러가니 이상한 불안감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과거엔 왜 그렇게까지 사렸나 싶기도 하고.
이 정도면 성공적인 첫 단추였다. 입꼬리가 슬슬 올라가는 게 느껴질 정도로.
“곧 데뷔조 애들한테 전달 갈 테니까 이따 모여서 같이 얘기해 봐.”
“넵!”
은찬은 다시 떨어졌던 양손을 배꼽 앞에 모아 쥐며 크게 대답했다.
아직 멤버 수에 대한 건 확실하게 정해지지 않았으므로 마음을 완전히 놓을 수는 없지만, 은찬은 일단 칠월칠석의 이름으로 데뷔하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까놓고 말해서 트러블 메이커였던 현주인이 데뷔조에 없다고 하더라도 이전보다 잘될 거라는 확신은 없었다. 어쩌면 과거와 똑같은 루트를 반복하게 될 수도 있다.
‘…솔직히 더 나빠질 가능성이 90% 이상이지.’
냉정하게도 그게 현실이다.
“그런데 은찬아.”
“네?”
아직 가도 된다는 대표님의 말이 떨어지지 않아, 은찬은 멀뚱히 앉아 생각을 곱씹고 있는 중이었다. 자신을 부르는 대표님의 목소리에 은찬이 앞쪽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그런데 그 입에서 떨어진 것은, 예상했던 것과는 아예 다른 질문이었다.
“혹시 너 주인이랑 싸운 적 있어? 주인이가 뭐라고 했거나.”
“…네? 아뇨.”
은찬이 곧장 고개를 저었다.
기억을 되짚어봐도, 사이가 나쁘다고 여겨질 만한 일은 결코 없다. 오히려 이 당시의 나는 친하지도 않은 현주인을 챙겨주고 싶어서 나섰던 것 같은데. 꽤 활발하고 정의감도 있던 편이었으니까.
은찬은 다시금 고개를 저었다.
“싸운 적 없어요.”
“…그래?”
“네. 정말 없어요. 그렇게 친하지도 않고.”
“응? 친한 줄 알았는데… 뭐, 일단 알겠다.”
도대체 무슨 의도로 이런 질문을 하시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나름 구를 대로 구른 27살 성인인 데다 그간 먹은 눈칫밥이 있어서 말귀는 잘 알아듣는 편인데도, 이건 의도를 추측할 수조차 없었다. 내가 걔랑 싸운 거 같아 보이나? 아니면 현주인한테 무슨 얘기를 들으신 건가?
‘하지만 현주인은 자기 얘기를 남한테 하는 성격이 아니니까.’
그런 놈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대표님한테 나에 대한 얘기를 했을 리 없다. 나한테 직접 와서 말했으면 말했을 놈이다.
인연보단 악연에 가까웠지만 그간 봐온 세월이 있어 이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룹 리더는 네가 할 거지?”
“네!”
그때 중요한 질문 하나가 더 날아들어 왔다. 딴생각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었다.
리더. 귀찮지만 꼭 잡아야 하는 자리다. 맏형이라 그렇다거나, 멤버들을 아껴서 그렇다거나 하는 평범한 이유보다는,
‘컨셉 정할 때 목소리가 커야 해.’
다소 현실적인 이유였지만. 이번엔 리더도 두 번째로 하는 거니까 더 잘할 수 있을 터였다.
“요 근래 풀 죽어 있는 줄 알았더니 그대로인 것 같아 다행이네.”
은찬의 우렁찬 대답을 들은 대표가 광대를 끌어 올리며 씨익 웃었다.
‘……?’
대체 이때 내 성격이 어땠길래 가을이도 그렇고 대표님까지 이런 언급을 하시는 거지? 내 기억으로는 그냥 좀 더 어리고, 세상 물정 몰라 의욕만 넘쳤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럼 은찬아, 제네시스… 잘 부탁한다.”
은찬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진짜네…….’
이게 꿈이라면 깨지 않았으면 좋겠다. 꿈이라도 좋으니 열심히 해볼 테니까.
이번 생에는 꼭 제네시스 단독콘서트를……!
대표님은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다. 오늘 본 웃음 중 가장 속내 없어 보이는 웃음.
덩달아 찡해져 오는 마음에, 은찬은 별다른 대답도 못 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대표님이 무슨 동화 속에나 나오는 동아줄 같았다.
“뭘 긴장을 하고 그러냐. 은찬아, 손.”
“손이요?”
“응, 손바닥 펼쳐봐.”
대표님 말씀대로 양 손바닥을 모아 펼치니 그 위에 자그마한 물체 하나가 툭 떨어졌다.
그 물체를 흘긋 눈길로 확인하자마자 은찬의 얼굴이 해사하게 펴졌다.
은찬이 손에 떨어진 반짝이는 물체와 대표님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
열쇠였다.
“주로 도어락을 쓰긴 하겠지만, 그래도 열쇠는 갖고 있는 게 기분 좋지 않냐?”
“네?”
긴가민가했던 가정이, 단박에 확신으로 바뀌었다.
‘숙소 얘기구나.’
솔직히 열쇠를 받자마자 눈치채기는 했다. 그룹에 관련된 얘기를 마쳤으니 슬슬 숙소에 대해 말씀하실 타이밍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딱 맞아떨어질 줄이야.
이번에는 예상과 다름없이 진행된 것 같아 은찬은 내심 안도했다.
“왜?”
은찬은 입술을 꾹 맞물려 가며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것 같은 웃음을 참아냈다. 생각이 표정에서 다 드러나는 터라, 은찬은 앞머리에 가려져 표정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만 고개를 숙였다. 땅바닥을 바라보던 은찬이 말을 이었다.
“어디 열쇠예요?”
모르는 척 괜히 한 번 더 물었다. 바로 감사하다며 고개를 푹 숙이거나, 열쇠의 정체에 대해 아는 척을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숙소. 그 열쇠는 은찬이 네가 관리해.”
역시.
말씀이 없으시길래 실수라도 한 건가 싶었는데. 별 탈 없이 넘어가는 듯해 내심 안도했다.
확실히 대표님 말씀이 맞다. 도어락 비밀번호야 멤버 모두가 안다고 쳐도, 열쇠를 갖고 있다는 그 무게감이 있긴 하니까.
‘리더’라는 자리에 대한 책임감과 부채감이 동시에 들어찬 기분.
“위치랑 도어락 비밀번호는 메시지로 보내놓을게. 깨끗하게 써야 한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진짜 완전 깨끗하게 쓸게요!”
“룸메이트는 너희끼리 알아서 정하고.”
“네! 저희끼리 잘 조율하겠습니다!”
“청소는 대충 해놨으니까 은찬이 너 먼저 들어가 있어도 괜찮다.”
고시원에서 지내고 있는 은찬에게 넌지시 보여준 배려. 이게 대표님 나름의 애정이 담긴 말이라는 걸 안다. 은찬이 힘들게 알바해서 모은 돈을 고시원 월세에 보태는 걸 아시곤 본인 집 남는 방에 들어와 살아도 된다고 몇 번이나 제안하셨으니까.
은찬은 열쇠를 들고 있는 손을 꼭 주먹 쥐었다. 대표님의 곧은 눈빛에 담긴 신뢰를 읽은 은찬은 다시 한번 ‘네!’ 하고 대답한 뒤 상체를 접어 꾸벅 인사를 해 보였다. 감사 인사를 몇 번이나 해도 모자라지 않았다.
“이제 그만 들어가 봐라. 애들이랑도 얘기해야지.”
은찬은 자신을 향해 손을 휘휘 앞뒤로 내저으며 나가라는 듯한 제스처를 보고도 허리를 몇 번 더 숙인 후에야 대표실을 나섰다. 그때 등 뒤에서 대표님의 말이 하나 더 떨어졌다.
“큰 방 써라. 고생하는데.”
그 말을 들은 은찬은 솔직히 울컥했다. 내가 이 정도로 감수성이 풍부한 스타일이었나, 하고 순간적으로 자신을 되돌아볼 정도로.
솔직히 이런 말에 감동받지 않을 연습생 있으면 나와보라지.
‘우리 대표님 완전 아버지다, 아버지.’
대표실을 나온 은찬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저나 이놈의 시스템. 호감도로 상대방 행동에 변화를 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어디다 써먹으라고 이런 게 나한테 주어진 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좋아하는 사람도 없을뿐더러 써먹을 만한 곳도 딱히 생각나지 않았다.
게다가 하루에 겨우 다섯 번 열람하는 걸로 뭘 한담? 사람 머리 위에 이상한 게 뜨니 대화에 집중만 안 될 뿐이다.
‘회귀해서 연애 시뮬레이션이라도 찍으라는 거냐고.’
순정 만화냐, 이게?
내가 연애 같은 거 할까 보냐. 나는 팬들이랑 백년해로할 거다.
***
‘이제 이 지긋지긋한 곳과도 안녕이다!’
이때도 찾아보면 나름 사람 살 만한 원룸이 꽤 있었을 텐데, 나는 하필 이런 곳을 잡아서는. 하지만 뭣 모르는 18살짜리가 혼자 구한 곳이었으니 어찌 보면 이상할 것도 없었다.
후회 같은 잡스러운 감정은 들지 않았지만 과거의 자신을 타박하긴 했다. 그래도 조금은 깨끗한 곳으로 방을 잡지 그랬냐. 문을 열자마자 코에 스치는 꿉꿉한 냄새에 은찬이 인상을 슬쩍 찌푸렸다.
‘그래도 덕분에 더 열심히 살긴 했지.’
얼른 데뷔해서 이 고시원을 나가고 말겠다는 게 매일 아침 떠올리고는 했던 목표였으니까.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날이다.
감회가 새로웠다. 은찬은 곧장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이 고시원에 들어선 이래로 가장 가벼운 발걸음이었다.
똑같은 오늘, 똑같은 하루였지만 칠월칠석 시절엔 숙소에 들어간다는 긴장감이 커서 등이 무거웠으니.
“짐이랄 것도 없네…….”
숙소로 옮기기 위해 짐을 싸는데도 배낭 하나, 쇼핑백 하나면 충분하다니. 무슨 여행 온 사람도 아니고. 그래도 나 여기서 꽤 오래 살지 않았나?
‘알바도 했는데 뭐가 이렇게 없어?’
워낙 깔끔 떠는 성격이기는 하지만, 이렇게까지 뭐가 없었다니. 없는 처지긴 했지만 잘도 아껴가며 살았다 싶었다.
한편으로는 악착스레 과거를 버텨냈던 자신이 기특하기도 했고. 이 좁은 곳에서 아득바득 살았던 게 눈에 선해서인지, 괜히 가슴 한편이 뭉클했다.
마지막으로 책상 구석을 치우기 위해 손을 뻗자 의문의 노트가 눈에 들어왔다.
당시의 나는 공부를 잘하던 편은 아니었기에 참고서 같은 것은 절대 아니었고 기껏해야 비는 시간에 읽던 만화책이나 낙서장일 거라고 생각했다.
‘이때 나는 뭘 재밌게 읽었더라’ 하고 생각하며 손을 뻗어 적당한 크기의 책 한 권을 꺼내 들었다.
“…엇.”
손에 잡힌 건 어떤 무늬도 그려져 있지 않은 두툼한 노트. 만화책도 아니었고, 당시 존경했던 선배들의 앨범 같은 것도 아니었다.
“와, 이게… 헐.”
은찬이 꺼내 든 노트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연습 일기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