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see hearts in failed idol’s eyes RAW novel - Chapter 75
75. 아이돌 체육대회–예선(3)
“내가 그런 걸 어떻게 알아?”
“아, 모르면 말고.”
현주인의 눈이 가로로 가늘어졌다. 혹시나 싶어서 물었는데, 역시나 딱히 얻을 것 없는 답변이었다. 하긴 너무 개인적인 질문이었겠지. 어쨌든 현주인도 이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그렇게 중요한 사실은 아닌 건가.’
곧 달리기 예선을 시작한다는 안내 방송이 울렸다. 주혁이는 달리기 트랙 라인 맨 바깥쪽에 출발 자세를 잡고 서 있는 중이었다.
‘주혁이가 달리기를 잘하지 않았나?’
빵-
그사이 시작을 알리는 총성이 울렸다. 동시에 은찬의 눈도 점점 크게 뜨였다.
“야… 쟤 우사인 볼트야?”
보통 트랙 맨 바깥은 조금 불리하다는 속설이 있지 않나. 그런 말들이 무색하게 주혁이는 거의 독주하다시피 맨 앞에서 빠르게 달려 나가는 중이었다.
‘저 정도면 그냥 아이돌 말고 육상선수를 해도 되겠는데? 연습실이 아니라 선수촌에 가야 되는 거 아냐?’
저렇게 빠른데… 진로를 잘못 잡은 거 아니냐? 아니, 우리 팀에 꼭 필요한 춤 인재니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되지만.
“학교 체육대회에서도 육상 대표 놓친 적 없었어.”
“와…….”
어쩐지. 눈앞의 놀라운 광경에 도저히 한번 열린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아무리 달리기라지만 이게 이렇게 빨리 끝날 수 있는 경기였다니.
“서주혁 끝났네.”
주인의 상황 안내에 은찬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주혁은 조에서 1등으로 들어온 것도 모자라 물을 마시는 여유까지 보이며 다른 선수들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본선에서도 저 정도만 한다면 이번 체육대회에서 달리기하던 애 누구냐고 언급될 만한 정도였다.
‘승부차기도 남은 시점에서 너무 체력 소모하는 거 아닌가 걱정했는데, 괜한 걱정이었네.’
주혁은 완주를 하고도 힘든 기색이 전혀 없어 보였으니까.
“연가을은?”
“가을이도 형인데 너무 편하게 부르는 거 아니야?”
“하아… 그놈의 호칭, 그렇게 중요하냐? 굳이 따지면 형도 아닌데.”
요컨대 몸은 20살이라도 속은 25살이니 형이 아니라는 소리인데, 틀린 말도 아니긴 하다. 호칭을 정리하기 애매하긴 할 테지만 지금 상황에 적응하는 게 더 중요하지 싶어 은찬이 눈에 힘을 주었다.
“중요하지. 족보 박살 나면 피곤해져.”
“하나만 해라, 진짜. 짜증 나게 하지 말고.”
“…….”
“…형.”
주인의 핀잔에 은찬은 주변을 둘러보며 코웃음으로 화답했다.
다른 동생들이라면 그깟 나이가 뭐가 중요하냐고 하겠지만 현주인은 달랐다. 어차피 이렇게 말해도 안 들어 처먹을 놈이기 때문에. 그리고 이 정도도 안 하면 지는 기분이 들거든.
다음 팀의 예선이 끝나고 가을이 트랙 위에 올랐다. 트랙 중앙에 자리한 가을은 표정이 영 떨떠름했는데, 아직도 달리기를 해야 한다는 사실이 탐탁지 않은 모양이었다.
‘헬스나 연습 같은 건 열심히 하는데 말이지.’
아마 달리기 자체보다는 이런 분위기가 부담스러운 거겠지. 가을이라면 충분히 그럴 거다.
“연가을, 그냥 하기 싫어하는 것 같은데.”
“…내 생각에도 그래.”
게다가 내 눈에만 그런 것도 아닌 모양이다. 우리가 앉은 자리는 트랙을 보기 용이한 자리였기에 표정을 확인하는 것도 가능했는데, 누가 봐도 가을은 일부러 설설 달리는 중이었다. 꼭 이겨야겠다는 열정 같은 게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냥 시키니까 어쩔 수 없이 달리는 느낌. 요즘 매사에 열심이었던 가을인지라 저런 얼굴은 오랜만에 봤다. 그 모습을 본 현주인이 웃음을 터뜨렸다.
“웃기네, 저 형.”
은찬이 의외라는 얼굴로 주인의 옆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웬일로 웃어?’
그래도 현주인 이놈, 숙소를 나설 때까지만 해도 세상 귀찮다는 표정이더니 이제는 좀 재미를 붙인 것 같아 다행이었다. 온갖 곳에 전여친들이 깔려 있는데 우려했던 상황이 벌어지지도 않았고.
‘그래서 일부러 옆에 따라다닌 건가?’
이건 넘겨짚은 생각일 뿐이었지만. 하지만 개별 행동이 일상이던 놈이 웬일로 자리를 잘 지키고 있으니 좀 신기할 만도 하잖아.
“4등 했는데 지금까지 여기서 봤던 모습 중 제일 행복해 보이네.”
“…이제 안 뛰어도 되니까 좋은 거겠지.”
원체 승부욕이 강한 스타일은 아니니까. 게다가 여러 사람이 경쟁해야 하는 경기라면 더더욱 귀찮아하던 애다.
주인의 말대로 가을은 트랙을 완주한 후 표정이 개어 있었다. 달리기 전, 막막해하던 얼굴과는 확연히 달랐다.
“후련하다~”
자리로 돌아온 가을이 제일 먼저 내뱉은 말이었다. 옆에서 주혁이 흘긋거렸지만 딱히 신경 쓰고 있지 않은 듯했다.
“형, 이왕 뛰는 거 이기는 게 좋지 않아요?”
“아니, 나는 이제부터 쉴 수 있어서 좋아.”
은찬의 예상은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가을은 주혁의 물음에 산뜻하게 대답한 후 자리에 편하게 엉덩이를 붙였다.
그나저나 녹화가 오랫동안 진행된다고 듣긴 했는데, 이건 생각보다 더 길었다. 이 많은 인원으로 체육대회를 진행하는 것이니 당연하기야 하겠다만. 출연자인 나조차도 지칠 노릇인데 팬들은 어떨까 싶었다.
‘그래도 다른 잡생각이 안 난다는 점은 괜찮네.’
본드를 묻혔던 사람의 예상치 못한 등장으로 잠시 흔들리긴 했으나 이 정도면 머리를 비울 수 있는 정도였다. 평소에 항상 안고 있던 백무영 선배에 대한 일이나, 묵주반지에 대한 것, 그리고 회귀에 대한 것까지 전부 지금만큼은 생각하지 않을 수 있었다.
‘팔 안 아프신가?’
고개를 돌려 일반석이 위치한 곳을 바라보았다. 멀리 있는데도 눈에 띄는 그녀들은 여전히 카메라를 손에 들고 있는 상태였다. 팬석에 계셨다면 뭐라도 드릴 텐데, 일반석에 계시니 그마저도 불가능해 마음이 쓰였다. 손을 흔들며 일부러 현주인에게 다가가 어깨동무를 하자 열심히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생리적인 거부감에 곧장 놈에게서 떨어졌지만.
“주혁아, 승부차기 할 수 있겠어?”
“무리 없어요.”
“오…….”
주혁이가 새삼 다시 보였다. 곧 있을 승부차기에는 주혁이와 나, 현주인 셋이 출전한다. 골키퍼로는 키가 큰 현주인이, 공을 차는 건 나와 주혁이었다.
‘씨름은 못했으니까 이거로라도 무마해야 한다…….’
주혁과 주인이 못 믿음직스럽다는 눈빛을 보내왔지만 은찬은 결과로 보여줄 생각이었다. 그래도 고등학교를 다닐 때에는 축구부에서 활동했을 만큼 공을 자주 찼으니 어떻게든 비벼볼 수 있겠다 싶었다.
‘그래도 내가 완도의 공잡이였다고.’
물론 회귀까지 한 지금은 좀 까마득한 이야기였지만.
“형은 몸 좀 풀어야 하지 않을까요? 아까 씨름…하다가 다쳤을 수도 있고.”
“다쳤겠냐? 단번에 졌는데.”
“그것도 맞는 말이네.”
“야, 너희 뭐라는 거야?”
발끈한 은찬이 들으라는 듯 대놓고 놀리는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러고는 아랑곳하지 않고 안내 방송에 따라 앞으로 나가는 둘의 뒤를 쫓았다. 확실히 주혁과 주인은 학교에서 같이 붙어 다니던 짬바가 있어서 그런지 죽이 아주 잘 맞았다.
“형, 공 잘 차요. 다치지 말고.”
“너 은근 내 몸 많이 신경 써준다. 비타민 준 것도 그렇고.”
“…준비해요.”
주혁의 귓불이 붉어졌다. 부끄러울 때 귀부터 붉어지는 특징이 있는 주혁이라 이런 건 곧바로 티가 났다.
‘자식, 귀엽긴.’
하여튼 말을 툭툭 해서 그렇지, 멤버 중에서 세심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주혁이었다. 은찬은 주혁의 말대로 안내 방송이 나오는 동안 발목을 번갈아 시계 방향으로 돌렸다.
우리 중 키가 제일 큰 현주인이 골키퍼를 맡은 것과 달리 상대 팀의 골키퍼는 키가 작은 편이었다. 수월할 거라 생각해서 적당히 공을 찼는데, 그럴 때마다 공을 잡아내는 상대의 손놀림에 애를 먹었다.
‘쳇…….’
하긴 축구, 그것도 승부차기에서 키가 뭐가 중요하겠느냐마는 내가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다. 그제야 예전 기억을 떠올리며 진중하게 공을 대할 수 있었다.
‘확실히 혼자 하는 것보다 다 같이 하니까 더 열심히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드네. 승부욕도 생기고.’
씨름을 할 때 부족했던 열정을 반성하며 최선을 다했다. 주혁이야 운동이라면 워낙 다 잘했기 때문에 걱정 없었고, 현주인 또한 높은 성공률로 공을 막아냈다. 따지고 보면 선배를 상대하는 거지만 다들 선배라고 적당히 할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하긴 그럴 놈들이긴 했다. 나도 그렇기는 하지만.
‘심호흡하자…….’
공을 넣거나, 막힐 때마다 어느 쪽에서든 배경음악 같은 함성과 한탄이 터져 나왔다. 이기고 있는 상황임에도 경기에 몰입한 탓인지 그 소리들을 들을 여유는 없었다.
‘미친… 완전 정확한 슛!’
눈 깜짝할 순간이었다. 주혁이 정확한 슈팅을 날린 것은.
그렇게 다 같이 최선을 다한 덕분에 극적으로 승리할 수 있었고, 결국 우리는 4강전에 진출하게 됐다.
은찬은 주혁의 공이 골대에 들어가자마자 골대에서 경기장으로 천천히 걸어오는 주인을 확인하고는 그대로 주혁에게 달려가 목을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주혁과 몸을 바짝 붙인 채 주인을 바라보며 격양된 목소리로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마음 같아서는 머리라도 쓰다듬어 주고 싶었지만 오늘 아침 주혁이 머리에 스프레이를 뿌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참았다.
“봤지? 봤지? 주혁이 공 잘 차는 거 봤지?!”
“형… 더워요. 몸이 너무 뜨거워요.”
“덥대. 떨어져.”
긴장을 했는지 땀을 흘리는 주혁이 더운 듯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기쁨을 주체 못 한 은찬은 주혁과 주인의 만류에 주혁에게서 떨어진 대신 옆에 있던 주인을 끌어안았다. 주인이 한숨을 터뜨렸다.
“하아……”
“아, 미안!”
주혁도 그렇지만 주인도 떨떠름한 얼굴이었다. 주혁이 살짝 팔을 건드리자 그제야 떨어진 은찬은 여전히 웃는 낯으로 경쾌하게 사과했다. 남들이 듣기에는 반사적으로 나온 형식상의 사과로 들렸다.
자리로 돌아오면서도 은찬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기는 게 이렇게 재밌는 거였구나, 하고 깨달았을 정도였으니까. 자리에는 경기 전까지 팬석에 있던 이선까지 도착해 있었다.
“오늘 숙소 가서 야식 좀 먹자~ 다들 고생했는데.”
이선이 말했다.
“그거 좋은 생각이네. 근데 아직 본선 남았어.”
주혁이 대답했고 은찬도 고개를 끄덕였다. 제대로 된 밥도 못 먹고 몸을 쓰는 촬영을 하루 종일 한 만큼, 그 정도의 보상은 당연한 것이었다. 운동을 꾸준히 한 만큼 체력에는 무리가 없었으나, 정신적으로 지치기 시작했다. 그때 안내 방송이 울렸다.
-곧 30분간의 휴식 후, 본선이 시작됩니다.
볼링이나 이스포츠를 제외한 종목들은 새벽까지 촬영하기도 한다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다. 바깥을 보니 뉘엿뉘엿 해가 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본선을 진행한다는 안내 방송을 듣고는 은찬이 멤버들의 얼굴을 살폈다. 다행히 걱정할 만큼 지친 사람은 없어 보였다.
‘하긴 27살인 나나 25살인 현주인과는 달리 애들은 아직 팔팔할 테니까.’
은찬이 미소 지었다. 그러고는 본선까지 무사히 마치고 멤버들과 숙소에서 가질 야식 파티를 생각하며 기운을 끌어올렸다.